3화(5,399자)

내기

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· 도결애

페메는 깃발을 등에서 뽑아 손에 쥐었다⁠. 깃대 끝으로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⁠.

“⁠여기 오기 전에 저는 방에서 일 년을 안 나왔어요⁠. 배달 음식 봉지를 현관에 쌓아 두고⁠, 커튼을 테이프로 붙여 두고요⁠. 어느 날 새벽 다섯 시에 발이 저를 여기로 데려왔어요⁠. 그날부터 이 크루가 제 밖이에요⁠.⁠”

“⁠밖이 하나뿐이면 그건 밖이 아니에요⁠. 방이 조금 넓어진 거지⁠.⁠”

말이 먼저 나갔다⁠. 페메의 눈가가 접히지 않았다⁠. 페메는 깃발을 다시 등에 꽂고⁠, 나를 지나 앞 무리로 뛰어갔다⁠. 두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⁠. 나는 돌아오는 이 킬로미터 반 동안 페메의 깃발만 보고 뛰었다⁠. 깃발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⁠.

*

점심시간에 사무실 구석에서 「⁠도깨비 약점⁠」을 검색했다⁠. 위키 문서⁠, 전래 동화 요약⁠, 민속 학회 논문 초록⁠, 그리고 「⁠도깨비 방망이 키링 최저가⁠」 메밀묵을 좋아한다⁠. 씨름을 좋아한다⁠. 사람에게 잘 속는다⁠. 빌린 것을 잊고 날마다 갚는다⁠. 엄마가 갑천 둑길에서 한 말과 거의 같았다⁠.

“⁠예서 씨⁠, 도깨비 약점은 왜⁠?⁠”

팀장이 등 뒤에서 내 모니터를 읽고 있었다⁠.

“⁠팝업 기획이요⁠. 가을 한정으로 전래 동화 콘셉트⁠.⁠”

“⁠오⁠, 괜찮다⁠. 「⁠도깨비 방망이 마들렌⁠」 혹 부분에 밤 크림⁠.⁠” 팀장은 엄지를 들었다가 내렸다⁠. “⁠근데 혹이 많으면 당이 많아⁠. 예서 씨 혈당 생각해서 혹은 세 개만⁠.⁠”

팀장이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화면을 오래 내리지 못했다⁠. 전부 옛날 산길과 고개와 주막 이야기였다⁠. 둔치와 즉석 라면 기계와 콩으로 출석을 부르는 도깨비는 어디에도 없었다⁠.

*

퇴근길에 잠원동 치과에 들렀다⁠. 진료가 끝난 대기실에 불이 반만 켜져 있었고⁠, 치과의사는 접수대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다⁠. 깎은 사과를 한 조각 먹을 때마다 치실을 한 번 썼다⁠.

“⁠원장님⁠, 사과 한 조각에 치실 한 번이에요⁠?⁠”

“⁠예서 씨 앞이라 시범입니다⁠. 혼자 있을 때는 두 조각에 한 번입니다⁠.⁠”

대기실 책꽂이 맨 아래 칸에 표지가 바랜 그림책이 한 줄로 꽂혀 있었다⁠. 치과의사가 그중 하나를 뽑아 왔다⁠. 『⁠도깨비와 씨름한 나무꾼⁠』⁠. 모서리마다 아이 이로 깨문 자국이 남아 있었다⁠.

“⁠딸이 다섯 살 때 제일 좋아하던 책입니다⁠. 하도 깨물어서 제가 치과의사가 된 줄 알았대요⁠.⁠” 치과의사는 책장을 넘겼다⁠. “⁠여기요⁠. 도깨비는 내기를 걸면 못 물러섭니다⁠. 제 땅에서⁠, 해 뜨기 전에 건 내기라면 더더욱⁠. 그리고 여기⁠, 내기에 진 도깨비는 진 땅을 떠납니다⁠. 우리 딸은 이 장에서 늘 울었어요⁠. 도깨비가 불쌍하다고⁠.⁠”

“⁠원장님은요⁠?⁠”

“⁠저는 나무꾼 편이었습니다⁠. 그때는요⁠.⁠”

치과의사가 책을 덮었다⁠. 접수대 위에 하늘색 봉투 하나가 반쯤 열린 채 놓여 있었다⁠. 영어로 된 카드 끝에 한글이 한 줄 덧붙어 있었다⁠. 「⁠아빠⁠, 꼭 와⁠. 십이월 첫 토요일 멜버른⁠.⁠」 치과의사는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⁠. 서랍이 반쯤만 닫혔다⁠.

“⁠답장 안 하셨어요⁠?⁠”

“⁠비행기를 타면 열한 시간입니다⁠. 열한 시간 동안 새벽 다섯 시가 한 번은 옵니다⁠.⁠” 치과의사는 사과 껍질을 휴지에 쌌다⁠. “⁠예서 씨가 내기를 건다면⁠, 저는 이번에도 나무꾼 편입니다⁠. 다만 크루장님 앞에서는 모르는 척하겠습니다⁠. 크루장님 콩 주머니에 제 콩도 있으니까요⁠.⁠”

*

이튿날 새벽 다섯 시⁠, 출석 콩이 내 앞에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두억 앞으로 걸어갔다⁠. 크루원들이 다리를 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크루장님⁠, 내기해요⁠.⁠”

두억의 눈이 반짝였다⁠. 다리 밑 조명이 눈동자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지만⁠, 조명은 뒤에 있었다⁠. 두억은 콩 한 줌을 쥔 채 한참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⁠.

“⁠씨름⁠.⁠”

“⁠제 몸무게가 오십 킬로그램대예요⁠. 크루장님은 백 킬로그램쯤 되시죠⁠. 체급이 안 맞아요⁠.⁠”

“⁠메밀묵 많이 먹기⁠.⁠”

“⁠혈당이요⁠.⁠”

“⁠그럼 뭘로⁠.⁠”

“⁠달리기요⁠. 여기 러닝크루잖아요⁠.⁠”

두억이 웃었다⁠.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⁠. 입꼬리가 귀 밑까지 올라갔다가 사람 얼굴로 돌아왔다⁠.

“⁠한강 다리 열두 개⁠. 해 뜨기 전에 먼저 도는 사람이 이긴다⁠.⁠”

“⁠왜 열두 개예요⁠?⁠”

“⁠내 크루가 열둘이다⁠. 너까지⁠. 다리 하나에 한 사람⁠.⁠”

“⁠어디서 어디까지요⁠?⁠”

“⁠암사에서 반포까지⁠. 다리를 하나 건널 때마다 강을 건너 남북을 바꾼다⁠. 마지막 다리를 건너 이 분수 앞에 먼저 서는 사람이 이긴다⁠.⁠”

머릿속에서 지도가 펼쳐졌다⁠. 암사에서 반포까지 강을 따라가는 길만 해도 이십 킬로미터 가까웠다⁠. 다리 하나 건널 때마다 강폭만큼이 붙었다⁠. 나는 어제 오 킬로미터를 뛰고 깃발을 잡아당겼다⁠.

“⁠언제요⁠?⁠”

“⁠입동 새벽⁠. 도깨비 내기는 절기에 한다⁠.⁠”

여섯 주가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⁠.

“⁠제가 이기면 끈을 다 풀어 주세요⁠. 열둘 다요⁠.⁠”

“⁠내가 이기면⁠?⁠”

“⁠제가 평생 크루 할게요⁠.⁠”

“⁠그건 지금도 그렇다⁠.⁠” 두억이 콩을 굴렸다⁠. “⁠내가 이기면⁠, 너는 다시는 내기를 못 건다⁠. 그리고 해마다 입동에 메밀묵을 쑤어 와라⁠. 네 손으로⁠.⁠”

“⁠메밀묵 쑬 줄 몰라요⁠.⁠”

“⁠배워라⁠. 여섯 주 있다⁠.⁠”

“⁠그건 제가 해야 하는 거잖아요⁠. 제가 질 때요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배워 둬라⁠.⁠”

두억이 콩을 쥔 손을 내렸다⁠. 웃음기가 빠진 목소리였다⁠.

“⁠하나 묻자⁠. 네 끈 하나 풀어 달라고 하면 될 일을⁠, 왜 남의 끈까지 들고 오냐⁠.⁠”

“⁠제 거 하나만 풀어 달라면 풀어 주실 거예요⁠?⁠”

“⁠안 풀어 준다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요⁠. 하나를 안 풀어 주실 거면 열둘을 걸어야죠⁠. 어차피 지는 내기면 크게 지는 게 낫잖아요⁠.⁠”

“⁠도깨비 같은 소리를 한다⁠.⁠” 두억이 처음으로 콩을 바닥에 한 알 떨어뜨렸다⁠. “⁠도깨비 내기에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⁠. 증인은 내가 부른다⁠. 그날 오는 것들이 좀 시끄러울 거다⁠.⁠”

“⁠누가 오는데요⁠?⁠”

“⁠밤길에 사는 것들⁠.⁠”

막내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가 너무 웃어서 화면이 흔들렸다⁠. 페메는 웃지 않았다⁠. 두억은 콩 한 알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다⁠. 내기가 성사되었다는 표시인지⁠, 그냥 출석을 이어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⁠.

*

달리기가 끝나고 어깨를 두드릴 차례가 되자⁠, 두억은 방망이를 손목에 걸어 둔 채 크루원들을 둥글게 세웠다⁠.

“⁠들어라⁠. 예서랑 내기를 했다⁠. 입동 새벽에 다리 열두 개⁠.⁠”

“⁠크루장님이 이기죠⁠, 당연히⁠.⁠” 막내가 말했다⁠. “⁠크루장님 잠수교 왕복 십 분 컷이잖아요⁠.⁠”

“⁠내가 지면 끈을 다 푼다⁠.⁠” 두억이 잠깐 말을 끊었다⁠. “⁠그리고 나는 반포를 뜬다⁠. 내기에 진 땅에서 도깨비는 못 산다⁠.⁠”

잔디밭이 조용해졌다⁠. 다리 위를 지나는 버스 소리만 내려왔다⁠. 도깨비⁠, 라는 말을 크루장이 제 입으로 크루 앞에서 한 것은 처음이었다⁠.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⁠.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 콩을 받아 왔던 얼굴이었다⁠. 놀란 것은 반포를 뜬다는 말이었다⁠.

“⁠뜨면 어디로 가세요⁠?⁠” 치과의사가 물었다⁠. 모르는 척하겠다던 사람의 목소리가 떨렸다⁠.

“⁠모른다⁠. 천 년 동안 딴 데 가 본 적이 없다⁠.⁠”

막내가 휴대전화를 내렸다⁠. 렌즈가 땅을 향했다⁠.

“⁠그럼 누나가 이기면 우리 크루 끝이에요⁠?⁠”

“⁠끈이 풀린다⁠. 그다음은 너희가 정한다⁠.⁠”

두억은 말을 마치고 어깨를 하나씩 두드렸다⁠. 내 차례가 오자 방망이가 잠깐 멈췄다⁠. 나는 어깨를 내밀지 않았다⁠. 두억은 방망이를 거두고 다음 사람에게 갔다⁠.

*

즉석 라면 기계 앞에서 페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⁠. 은박 그릇 두 개에 면을 넣고 단추를 누르는 중이었다⁠.

“⁠예서 씨 거예요⁠. 국물은 안 마셔도 돼요⁠.⁠”

“⁠고맙습니다⁠.⁠”

“⁠예서 씨가 이기면 크루장님은 떠나야 해요⁠.⁠” 페메는 기계가 물을 붓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⁠. “⁠크루장님이 떠나면 열하나가 흩어져요⁠. 원장님은 진료실로⁠, 막내는 단톡방으로⁠, 저는 방으로요⁠. 예서 씨는 회사로 가겠죠⁠. 예서 씨는 갈 데가 있으니까⁠.⁠”

“⁠페메 님도 갈 데가 생길 거예요⁠. 끈이 없으면요⁠.⁠”

“⁠일 년 동안 안 생겼어요⁠. 끈이 생기고 나서 여기가 생겼어요⁠.⁠”

“⁠그럼 끈이 풀려도 여기는 남아요⁠. 분수도 그대로고 라면 기계도 그대로예요⁠.⁠”

“⁠분수는 사람을 안 불러요⁠.⁠” 페메가 기계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⁠. “⁠라면 기계도요⁠. 삼 분 끓이고 끝이에요⁠.⁠”

라면이 다 끓었다⁠. 페메는 그릇 하나를 내 앞에 놓고⁠, 자기 그릇은 들지도 않고 일어났다⁠.

“⁠저는 크루장님 편이에요⁠. 입동에 크루장님 옆에서 뛸게요⁠.⁠”

페메의 깃발이 계단을 올라갔다⁠. 나는 면을 몇 가닥 건져 먹었다⁠. 뜨거워서 맛을 몰랐다⁠. 손목의 시계가 떨렸다⁠. 「⁠혈당 상승⁠」 국물은 한 숟가락도 안 마셨는데⁠.

*

내기를 건 날 밤⁠, 막내의 새 영상이 올라왔다⁠. 「⁠우리 크루 해체 위기 실화냐 · 크루장 vs 신입 · 입동 새벽 다리 열두 개⁠」 잔디밭에서 내가 두억 앞에 선 장면이 세로 화면 가득 찍혀 있었고⁠, 자막이 내 대사를 따라 흔들렸다⁠. 자정 무렵 조회수가 십만을 넘겼고 새벽 한 시에 삼십만이 되었다⁠. 댓글은 막내가 다는 속도보다 빨리 붙었다⁠. 「⁠입동에 반포 간다⁠」 「⁠신입 혈당 패치 보임 ㅋㅋ 공복 유산소 각⁠」 「⁠크루장 후드 안에 뭐 있는 듯⁠」 「⁠도깨비 썰 진짜면 나도 피곤 좀 덜어 줘⁠」

나는 노트북을 열고 표를 만들었다⁠. 여섯 주를 날짜별로 한 줄씩 놓고⁠, 줄마다 뛸 거리와 잴 것을 적었다⁠. 공복 혈당⁠, 식후 두 시간 혈당⁠, 수면 시간⁠, 심박⁠. 표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⁠. 사흘째에 그만두는 사람도 첫날 표는 끝내주게 만든다⁠. 표를 다 만들자 새벽 두 시였고⁠, 다섯 시까지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⁠.

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엄마였다⁠.

“⁠너 도깨비랑 내기했다며⁠? 걷기 모임 언니가 영상 보내 줬어⁠.⁠”

“⁠엄마⁠, 그거 연출이야⁠.⁠”

“⁠연출이면 왜 네 얼굴이 엄마 인슐린 처음 맞던 날 얼굴이야⁠.⁠” 엄마는 잠깐 말이 없었다⁠. “⁠이길 거면 나물부터 먹어⁠. 지면 메밀묵 쑤는 거는 엄마가 가르쳐 줄게⁠.⁠”

*

이튿날 새벽⁠, 크루가 다 흩어진 여섯 시 십 분에 나는 혼자 분수 앞에 남아 동작대교까지 다시 뛰었다⁠. 칠 킬로미터를 넘기자 종아리가 돌처럼 굳었고⁠, 팔 킬로미터에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⁠. 서른 킬로미터 가까운 길에서 팔이었다⁠. 다리 하나에 한 사람이라면⁠, 나는 아직 한 사람도 건너지 못했다⁠.

걸으면서 시계를 봤다⁠. 심박은 백오십을 넘나들었고⁠, 팔의 패치가 보낸 혈당은 98이었다⁠. 표에 적을 숫자가 둘 생겼다⁠. 표는 거리를 줄여 주지 않았다⁠. 다리 밑을 지나는 자전거들이 걷는 주황 조끼를 피해 갔다⁠. 강변 가로등이 하나씩 꺼졌다⁠. 오늘은 동작대교까지⁠, 내일은 동작대교에서 한 뼘 더⁠. 길을 그렇게 조금씩 늘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⁠.

반포대교 밑으로 돌아왔을 때 교각 그늘에 작은 노인이 서 있었다⁠. 검은 롱패딩을 발목까지 내려 입었고⁠, 새하얀 운동화를 신었고⁠, 비 소식도 없는데 접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⁠. 노인은 강물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⁠.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⁠.

“⁠두억이가 내기를 받았다고⁠?⁠”

노인 뒤로 아침 해가 강 끝 위로 한 뼘 올라와 있었다⁠. 해가 노인의 등 뒤에서 비쳤고⁠, 콘크리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⁠. 그림자의 머리에 뿔이 세 개 있었다⁠.

노인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⁠.

“⁠아가씨⁠. 잘 뛰어 봐⁠. 우리가 다 보고 있어⁠.⁠”

3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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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밤산책2026.10.31· 3화

    도깨비는 내기를 거절 못 한다는 옛이야기를 치과의사가 알려 준다는 게 웃겨요. 뿔 셋 그림자는 누구예요?

    • 도결애작가2026.10.31

      치과의사님은 크루에서 제일 아는 게 많은 분이에요. 뿔 셋은 다리 밑에 오래 산 손님입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