4화(5,418자)

피곤 자급자족

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· 도결애

달리기가 끝나고 두억이 원을 돌기 시작했을 때⁠, 나는 원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⁠. 방망이가 페메의 어깨를 치고⁠, 치과의사의 어깨를 치고⁠, 막내의 어깨를 치고⁠, 내 앞에서 멈췄다⁠.

“⁠어깨⁠.⁠”

“⁠오늘부터 안 받을게요⁠.⁠”

“⁠왜⁠?⁠”

“⁠내기하는 사람한테 피곤을 덜어 주시면 그건 반칙이에요⁠. 크루장님이 제 다리를 가볍게 해 주시고⁠, 제가 그 다리로 크루장님을 이기면 그게 이긴 거예요⁠?⁠”

“⁠이기는 데 무슨 다리가 따로 있냐⁠.⁠”

“⁠있어요⁠. 제 다리요⁠.⁠”

두억은 방망이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⁠.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손톱만 한 것이 다리 밑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⁠.

“⁠그러다 쓰러진다⁠.⁠”

“⁠쓰러지면 그것도 제 거예요⁠.⁠”

방망이가 손목으로 돌아갔다⁠. 두억은 다음 사람에게 가지 않고 내 앞에 잠깐 서 있다가⁠, 원을 거꾸로 돌아 콩 주머니를 챙겼다⁠. 막내가 휴대전화를 켜고 속삭였다⁠. “⁠오늘의 명대사⁠. 누나 지금 피곤 자급자족 선언했어요⁠.⁠” 치과의사가 막내의 휴대전화에 손바닥을 덮었다⁠.

*

자급자족은 사흘을 못 갔다⁠. 정확히는 사흘째 오후 세 시 사십 분에 끝났다⁠.

팝업 매장 최종 회의였다⁠. 회의실 탁자 가운데 무화과 타르트 세 종류가 놓여 있었고⁠, 팀장이 화면에 매장 동선을 띄워 놓고 설명하고 있었다⁠. 첫날 밤에는 다리가 쑤셔서 못 잤고⁠, 둘째 날 밤에는 코스 지도를 외우느라 못 잤고⁠, 셋째 날 밤에는 다섯 시 알람이 무서워서 못 잤다⁠. 끈은 알람이 없어도 나를 다섯 시에 반포로 데려갔다⁠. 나는 그저 깨어 있는 채로 끌려가기를 골랐을 뿐이었다⁠. 팀장이 「⁠입구에서 시식대까지 일곱 걸음⁠」이라고 말하는 순간 눈꺼풀이 내려왔다⁠.

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⁠. 생크림이었다⁠.

“⁠예서 씨⁠.⁠”

나는 고개를 들었다⁠. 이마에서 무화과 반쪽이 떨어져 탁자로 굴러갔다⁠. 회의실 사람 여덟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⁠. 아무도 웃지 않았다⁠. 팀장 혼자 웃음을 참느라 볼이 떨렸다⁠.

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나를 탕비실로 불렀다⁠.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주며 말했다⁠.

“⁠팝업 개막이 입동 다음 주 월요일이야⁠. 예서 씨가 맡은 신메뉴가 제일 앞에 놓여⁠. 요즘 왜 이래⁠?⁠”

“⁠새벽에 운동을 해서요⁠.⁠”

“⁠운동을 하면 사람이 건강해져야지 타르트에 박혀야 돼⁠?⁠” 팀장은 물티슈 한 장을 더 뽑았다⁠. “⁠그리고 그 영상⁠. 조회수 오십만 넘었어⁠. 대표님이 봤어⁠. 대표님이 「⁠새벽 러너를 위한 저당 디저트⁠」 하재⁠. 크루장님 섭외해서 팝업 첫날 시식 이벤트⁠. 예서 씨가 다리 놔 줘⁠.⁠”

“⁠크루는 안 돼요⁠.⁠”

“⁠왜⁠?⁠”

“⁠그 사람들은 팝업에 나오려고 새벽에 뛰는 게 아니에요⁠.⁠”

“⁠그럼 왜 뛰는데⁠?⁠”

대답할 수 없었다⁠. 묶여서요⁠,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⁠. 팀장은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물티슈 통을 닫았다⁠.

“⁠다음 주까지 기획안 다시 가져와⁠. 크루 넣어서든 빼서든⁠. 빼면 그만큼 좋은 걸로⁠.⁠”

팀장은 탕비실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았다⁠. “⁠그리고 예서 씨⁠, 눈썹에 아직 크림⁠.⁠” 나는 물티슈로 눈썹을 한 번 더 문질렀다⁠. 탕비실 유리문에 비친 눈 밑이 무화과 껍질 색이었다⁠. 사흘 동안 내 손으로 들고 다닌 피곤이 얼굴로 다 올라와 있었다⁠.

*

이튿날 새벽⁠, 치과의사가 동작대교 반환점에서 내 옆으로 붙었다⁠. 내 손목 화면을 슬쩍 보더니 혀를 찼다⁠.

“⁠어제 점심 몇 시에 드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두 시요⁠. 김밥 한 줄이랑 라테요⁠.⁠”

“⁠그래프가 여기서 산을 탔네요⁠. 백칠십⁠.⁠” 치과의사가 내 손목을 잡고 화면을 확대했다⁠. “⁠예서 씨⁠, 순서만 바꿔도 산이 언덕이 됩니다⁠. 채소 먼저⁠, 단백질 다음⁠, 밥은 맨 끝⁠. 그리고 먹고 나서 십 분 걸으세요⁠. 앉지 말고요⁠.⁠”

“⁠그거 다 아는 얘기예요⁠.⁠”

“⁠아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⁠. 제 환자들도 치실 쓰는 법은 다 압니다⁠.⁠”

점심에 나는 김밥을 풀었다⁠. 시금치와 단무지와 우엉을 먼저 골라 먹고⁠, 계란을 먹고⁠, 밥은 마지막에 반만 먹었다⁠. 팀장이 건너편에서 해체된 김밥을 보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⁠. “⁠예서 씨⁠, 김밥한테 무슨 원한 있어⁠?⁠” 밥을 먹고 회사 건물 계단을 아래위로 십 분 걸었다⁠. 그래프는 백이십 언저리에서 고개를 숙였다⁠. 처음이었다⁠. 숫자가 내 편을 드는 것을 처음 봤다⁠. 오후 내내 나는 생크림에 이마를 박지 않았다⁠.

새벽 달리기는 하루에 조금씩 늘었다⁠. 다섯 시 크루 달리기가 끝나면 혼자 남아 동작대교를 지나 한강대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⁠. 다음 날은 노들섬 끝까지 갔다⁠. 다리 하나를 더 볼 때마다 종아리가 하루씩 늦게 풀렸다⁠. 두억은 내가 혼자 남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⁠. 페메는 내가 따라붙으면 속도를 올렸다⁠. 깃발을 잡아당기려고 손을 뻗으면 깃발이 손끝에서 한 뼘씩 멀어졌다⁠.

닷새째 되는 날⁠, 나는 노들섬 앞에서 이를 악물고 깃발을 따라잡았다⁠. 숨이 목까지 찼지만 말은 해야 했다⁠.

“⁠페메 님은 페이스메이커잖아요⁠. 사람 속도 맞춰 주는 사람⁠.⁠”

“⁠크루 페이스메이커예요⁠.⁠” 페메는 앞만 보고 뛰었다⁠. “⁠크루를 깨려는 사람 속도는 안 맞춰요⁠.⁠”

“⁠제가 크루를 깨려는 게 아니라요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입동에 이기면 깨져요⁠. 예서 씨가 이길 수 있게 제가 속도를 맞춰 주면⁠, 제 손으로 깨는 거예요⁠.⁠” 페메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⁠. 눈가가 접히지 않은 얼굴이 낯설었다⁠. “⁠그러니까 혼자 맞추세요⁠. 예서 씨는 표 잘 만들잖아요⁠.⁠”

페메는 속도를 올려 노들섬 다리 밑으로 사라졌다⁠. 저녁에 들어와 보니 회사 책상 위에 바나나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⁠. 쪽지는 없었다⁠. 경비실 아저씨는 단발머리 여자가 맡기고 갔다고 했다⁠. 바나나는 혈당을 천천히 올리는 과일이었다⁠. 페메는 내 속도를 맞춰 주지 않으면서⁠, 내 혈당은 맞춰 주고 있었다⁠.

*

새벽 두 시⁠, 반포 둔치 대여소에서 공공 자전거를 빌렸다⁠. 내기 코스는 암사에서 반포까지였다⁠. 다리 열두 개를 한 번은 미리 봐 두어야 했고⁠, 여섯 주 안에 서른 킬로미터를 두 발로 미리 다 뛰어 볼 수는 없었다⁠. 그래서 바퀴로 거꾸로 가 보기로 했다⁠. 반포에서 동쪽으로⁠, 잠실을 지나 암사까지⁠.

밤의 한강은 낮과 다른 강이었다⁠.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의 불빛이 물 위에 두 줄로 누웠고⁠, 다리마다 조명 색이 달랐다⁠. 한남대교 밑에서 넥타이를 푼 회사원 하나가 교각 둘레를 돌고 있었다⁠. 내가 지나갈 때도 돌았고⁠, 자전거를 세우고 돌아볼 때도 돌았다⁠. 손에 든 휴대전화 화면에 지도가 떠 있었다⁠. 「⁠신사역까지 도보 18분⁠」 회사원은 교각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⁠.

“⁠저기요⁠, 괜찮으세요⁠?⁠”

“⁠거의 다 왔어요⁠. 십팔 분이래요⁠.⁠”

회사원은 또 한 바퀴를 돌았다⁠. 교각 그늘 안쪽에 오토바이 헬멧을 쓴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 있다가⁠, 내가 쳐다보자 헬멧을 까딱했다⁠. 헬멧 유리에 가로등 불빛이 비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⁠. 나는 페달을 밟았다⁠. 등 뒤에서 회사원이 혼잣말을 했다⁠. “⁠이상하다⁠. 아까도 십팔 분이었는데⁠.⁠”

영동대교 밑 편의점에서는 야간 알바가 계산대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⁠. 성수대교 밑 벤치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서 있었고⁠, 헬멧을 벗은 라이더가 벤치에 누워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⁠. 휴대전화는 라이더의 가슴 위에서 계속 울렸다⁠. 「⁠새 주문 · 수락 대기⁠」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을 열었다⁠. 페메의 바나나 두 개가 들어 있었다⁠. 하나를 꺼내 라이더의 헬멧 옆에 놓았다⁠. 라이더는 팔을 눈에서 떼지 않은 채 손만 더듬어 바나나를 쥐었다⁠. “⁠감사합니다⁠, 사장님⁠.⁠” 나를 가게 사장으로 아는 모양이었다⁠. 휴대전화가 또 울렸고⁠, 라이더는 바나나를 쥔 채 일어나지 않았다⁠.

강을 따라 지친 사람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⁠. 낮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⁠.

*

잠실대교에 닿았을 때 강 위에 푸른 불이 떨어졌다⁠.

처음에는 다리 조명이 물에 비친 줄 알았다⁠. 불은 다리 북단에서 남단으로 건너가며 하나씩 떨어졌고⁠, 떨어진 자리에서 꺼지지 않고 물 위에 떠서 천천히 타올랐다⁠. 불을 따라 고개를 들자 다리 보도 위로 키 큰 그림자가 건너가고 있었다⁠. 검은 후드를 머리까지 덮어썼고⁠, 어깨에 쌀자루만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⁠. 자루 밑이 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르스름한 것이 한 움큼씩 새어 나왔다⁠. 새어 나온 것은 난간을 넘어 강으로 떨어졌고⁠, 물에 닿는 순간 불이 되었다⁠.

나는 자전거를 끌고 다리 밑 계단으로 올라갔다⁠. 두억이 남단에서 돌아서다 나를 보았다⁠.

“⁠남의 연습 길을 훔쳐보냐⁠.⁠”

“⁠크루장님 연습 길이에요⁠?⁠”

“⁠내 길이다⁠. 매일 밤 돈다⁠. 암사부터 반포까지 열두 개⁠.⁠” 두억이 자루를 고쳐 멨다⁠. “⁠내기 걸 때 네가 고른 줄 알았냐⁠. 내가 제일 잘 아는 길을 내가 골랐다⁠.⁠”

나는 숨을 삼켰다⁠. 공정하게 이기려고 피곤까지 내 손으로 들고 다녔는데⁠, 처음부터 상대의 집 마당에서 하는 내기였다⁠.

“⁠그 자루는 뭐예요⁠?⁠”

“⁠너희 피곤⁠.⁠”

“⁠그걸 왜 강에 버려요⁠?⁠”

“⁠버리는 게 아니다⁠. 태우는 거다⁠. 들고 뛰면 닳고⁠, 닳은 건 물에 떨어져 타고⁠, 다 타면 없어진다⁠.⁠” 두억은 자루를 내려 내게 보여 주었다⁠. 해진 자루 안에서 푸른 것이 숨을 쉬듯 부풀었다 가라앉았다⁠. “⁠이건 막내 거고⁠, 이건 원장 거고⁠, 이건 페메 거다⁠. 냄새가 다르다⁠.⁠”

“⁠제 건 없죠⁠. 사흘 동안 안 드렸으니까⁠.⁠”

“⁠네 건 네가 들고 있다⁠. 지금 얼굴에 다 쓰여 있다⁠.⁠”

“⁠얼굴은 피곤해도 숫자는 좋아요⁠.⁠” 나는 손목을 내밀었다⁠. 그래프는 오늘 하루 언덕 셋을 넘었고⁠, 산은 하나도 없었다⁠. “⁠먹는 순서 바꾸고 밥 먹고 걸었어요⁠. 숫자가 처음으로 제 편을 들었어요⁠.⁠”

두억이 손목 화면을 들여다보았다⁠. 오래 보았다⁠. 화면 불빛이 얼굴 밑에서 올라와 뿔 그림자가 이마에 드리웠다⁠.

“⁠숫자가 편을 드냐⁠.⁠”

“⁠제가 잘하면요⁠.⁠”

“⁠나는 콩으로 세서 그런 건 모른다⁠. 콩은 아무 편도 안 든다⁠.⁠” 두억이 손을 뗐다⁠. “⁠그래도 너 오늘 덜 무거워 보인다⁠. 그건 콩으로도 안다⁠.⁠”

자루 안에는 크루 것만 있지 않았다⁠. 처음 보는 푸른 덩어리들이 밑에 잔뜩 깔려 있었다⁠. 두억이 자루 아가리를 묶으며 말했다⁠.

“⁠한남대교 밑에서 길 잃은 회사원 봤지⁠. 영동대교 편의점 알바⁠, 성수대교 벤치 라이더⁠. 다리 밑에서 밤새우는 것들 피곤도 내가 든다⁠. 다리마다 조금씩⁠.⁠”

“⁠크루만 하시는 줄 알았어요⁠.⁠”

“⁠크루는 새벽마다 오니까 어깨를 두드리기 쉬울 뿐이다⁠. 강은 길다⁠.⁠” 두억은 자루를 다시 메고 북단을 보았다⁠. “⁠천 년 전엔 나루 하나였다⁠. 다리가 생길 때마다 길이 하나씩 늘었다⁠. 이제 열두 개다⁠.⁠”

“⁠밤마다 이걸 다 도세요⁠? 혼자⁠?⁠”

“⁠도깨비가 혼자 아니면 누구랑 도냐⁠.⁠”

다리 위로 첫 트럭이 지나갔다⁠. 바람이 후드를 들추었고⁠, 헝클어진 머리 위의 작은 뿔이 가로등 아래 또렷이 드러났다⁠. 두억은 후드를 다시 끌어 쓰며 말했다⁠.

“⁠네가 이기면 나는 반포를 뜬다⁠. 그럼 이 다리들 밑의 피곤은 누가 드냐⁠.⁠”

강 위에서 푸른 불이 하나씩 꺼져 갔다⁠.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전거 손잡이만 꽉 쥐었다⁠. 두억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다리로 뛰어갔다⁠. 자루에서 새어 나온 불이 다리 위에 점점이 떨어지며 길을 그렸다⁠. 암사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⁠. 나는 불빛이 다 꺼질 때까지 다리 위에 서 있었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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