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375자)

잠옷 바람

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· 도결애

곰돌이 잠옷을 입고 오 킬로미터를 뛰었다⁠. 다른 방법이 없었다⁠. 출석을 마친 두억이 “⁠가자⁠” 하자 내 다리가 먼저 페메의 깃발 뒤로 붙었다⁠. 극세사 바지는 바람을 한 올도 막지 못했고⁠, 동작대교 반환점에서 마주 오던 자전거 탄 아저씨가 나를 두 번 돌아보았다⁠.

돌아오는 길에 치과의사가 옆으로 붙었다⁠.

“⁠저는 첫 주에 수술복 바지를 입고 왔습니다⁠. 입에 칫솔을 문 채로요⁠. 거품이 반포대교까지 날렸어요⁠.⁠”

“⁠위로하시는 거예요⁠?⁠”

“⁠통계를 드리는 겁니다⁠. 이 크루에서 잠옷으로 온 사람이 열하나 중에 일곱입니다⁠. 예서 씨가 여덟 번째고요⁠.⁠”

막내가 뒤에서 손을 들었다⁠. “⁠저는 사월에 슬리퍼 짝짝이로 왔어요⁠. 왼쪽은 제 거⁠, 오른쪽은 엄마 거⁠. 그날 영상 조회수 아직도 제 최고 기록이에요⁠.⁠”

웃음이 터졌다⁠. 나도 웃었다⁠. 웃다가 멈췄다⁠. 다들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⁠, 다들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⁠.

*

반포 둔치 편의점 앞에는 즉석 라면 기계가 김을 뿜고 있었다⁠. 은박 그릇에 면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기계가 물을 붓고 삼 분을 끓여 주었다⁠. 크루원들은 다리를 풀고 각자 계단으로 흩어졌고⁠, 두억은 기계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콩을 주머니에 쏟았다⁠.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⁠. 잠옷 무릎에 이슬이 젖어 있었다⁠.

“⁠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⁠?⁠”

“⁠어깨 두드렸다⁠.⁠”

“⁠어제도 그 말씀 하셨어요⁠. 저는 어젯밤 알람을 다 끄고⁠, 크루를 탈퇴하고⁠, 이불을 덮고 잤어요⁠. 눈을 떴더니 여기였어요⁠. 신발 끈까지 제 손으로 묶은 모양이었다고요⁠.⁠”

두억이 라면 기계의 단추를 눌렀다⁠. 기계가 꾸르륵 물을 부었다⁠.

“⁠피곤을 내가 들고 있으면⁠, 들려 준 사람은 새벽 다섯 시에 여기로 온다⁠. 발이 먼저 안다⁠.⁠”

“⁠왜요⁠?⁠”

“⁠내 것을 맡겼으니까 찾으러 오는 거다⁠.⁠”

“⁠제가 맡긴 적 없는데요⁠.⁠”

“⁠어깨가 맡겼다⁠.⁠”

라면이 다 끓었다⁠. 두억은 나무젓가락을 쪼개 내 앞에 그릇을 밀었다⁠. 나는 그릇을 밀어냈다⁠. 혈당 때문이 아니었다⁠.

“⁠크루장님 누구세요⁠?⁠”

두억이 파라솔 기둥에 기대 둔 내 휴대전화의 손전등을 켰다⁠. 빛이 두억의 뒤에서 앞으로 쏟아졌고⁠, 편의점 유리문에 그림자가 길게 비쳤다⁠. 헝클어진 머리 위로 뿔 하나가 솟아 있었다⁠. 손전등을 끄자 유리문에는 파라솔과 라면 기계와 사내 하나만 남았다⁠.

“⁠도깨비다⁠.⁠”

“⁠농담하지 마시고요⁠.⁠”

“⁠천 년쯤 됐다⁠. 자세히는 모른다⁠. 도깨비는 수를 길게 못 센다⁠.⁠”

나는 웃으려다가 웃지 못했다⁠. 손목의 그래프가 떠올랐다⁠. 자를 대고 그은 삼 분⁠. 다리를 올라가는 동안 한 번도 차지 않던 숨⁠.

“⁠사람 피곤을 가져가서 뭐 하시는데요⁠?⁠”

“⁠들고 뛴다⁠. 밤새 들고 뛰면 닳는다⁠.⁠”

“⁠감정도 가져가요⁠?⁠”

“⁠못 가져간다⁠. 슬픈 건 슬픈 대로⁠, 화난 건 화난 대로 네 거다⁠. 지금 너 화났지⁠. 그건 내가 손도 못 댄다⁠.⁠”

“⁠다행이네요⁠. 그럼 풀어 주세요⁠. 오늘부로요⁠.⁠”

“⁠안 된다⁠.⁠”

두억은 라면을 제 앞으로 당겨 한 젓가락에 반을 먹었다⁠. 국물에 비친 하늘이 조금 밝아졌다⁠.

“⁠밤길에서 남의 발을 홀려 밤새 뺑뺑이를 돌리는 것들이 있다⁠. 나는 그런 것들하고 다르다⁠. 나는 피곤만 받고⁠, 아침에는 집에 보낸다⁠.⁠”

“⁠그런데 왜 못 풀어 주세요⁠?⁠”

“⁠여기 아니면 갈 데 없는 사람들이다⁠.⁠”

“⁠저는 갈 데 있어요⁠.⁠”

“⁠어디⁠?⁠”

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⁠. 회사⁠, 라고 말하려다가 회사는 갈 데가 아니라 다니는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⁠. 친구들은 지난해부터 결혼식에서만 만났다⁠. 대전에는 엄마가 있었다⁠. 나는 대전⁠, 이라고 말했다⁠.

“⁠가 봐라⁠.⁠”

두억은 남은 국물을 다 마시고 일어났다⁠. 검은 후드가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⁠.

*

출근하자마자 팀장이 내 자리로 휴대전화를 들고 왔다⁠. 화면에는 곰돌이 잠옷이 동작대교 밑을 뛰고 있었다⁠. 막내가 페메의 손을 피해 결국 찍은 영상이었다⁠. 「⁠잠옷 러너 실존 · 새벽 다섯 시 반포⁠」

“⁠예서 씨 이거 예서 씨지⁠? 곰돌이 귀가 예서 씨 필통이랑 똑같아⁠.⁠”

“⁠아닌데요⁠.⁠”

“⁠조회수 사만이야⁠. 사만이면 우리 팝업 공식 계정 일 년 치야⁠.⁠” 팀장이 내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⁠. “⁠다음 달 팝업 주제 바꿀까⁠. 「⁠새벽 러너를 위한 저당 디저트⁠」 예서 씨가 잠옷 입고 시식하는 거지⁠.⁠”

“⁠저 잠옷은 이제 안 입어요⁠.⁠”

“⁠그럼 조끼⁠. 조끼도 잘 나와⁠.⁠”

팀장은 진지했다⁠. 팀장이 진지할 때 기획안은 사흘 안에 대표실로 올라갔다⁠. 나는 모니터를 켜고 검색창에 「⁠도깨비 피곤⁠」을 쳤다가⁠, 팀장이 어깨 너머로 보기 전에 지웠다⁠.

*

금요일 밤 아홉 시 기차로 대전에 내려갔다⁠. 엄마는 현관에서 나를 보자마자 내 손가락을 잡아당겼다⁠.

“⁠한번 재 보자⁠. 엄마 기계로⁠.⁠”

“⁠나 팔에 붙이고 다녀⁠. 이게 더 정확해⁠.⁠”

“⁠엄마 기계는 십오 년 썼어⁠. 엄마 기계가 너보다 엄마 피를 더 잘 알아⁠.⁠”

엄마가 채혈기로 내 검지를 톡 찔렀다⁠. 피 한 방울이 맺혔고⁠, 엄마 기계가 「⁠103⁠」을 띄웠다⁠. 팔의 패치는 손목시계로 「⁠109⁠」를 보냈다⁠. 엄마는 이겼다는 얼굴로 냉장고 문칸에서 홍시를 꺼냈다⁠. 밤 열한 시였다⁠.

“⁠엄마⁠, 그거 지금 먹으면 안 되잖아⁠.⁠”

“⁠제철이야⁠. 제철은 몸에 좋아⁠.⁠”

“⁠제철에 혈당이 어딨어⁠.⁠”

“⁠있지⁠. 그래서 반만 먹지⁠.⁠”

엄마는 홍시를 반 갈라 한쪽을 내 앞에 놓았다⁠. 서울 팀장과 대전 엄마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데 반 가르는 솜씨가 똑같았다⁠.

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웠다⁠. 고등학교 때 쓰던 이불에서 장롱 냄새가 났다⁠. 서울에서 백오십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방이었다⁠. 발이 여기서 반포까지 걸어갈 수는 없었다⁠. 나는 백오십 킬로미터를 믿고 눈을 감았다⁠.

잠이 오지 않았다⁠.

자정이 지나고⁠, 한 시가 지나고⁠, 세 시가 지났다⁠.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이 환했다⁠. 네 시 반이 되자 종아리가 근질거렸다⁠. 다섯 시 정각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⁠. 누워 있는데 오르막을 뛰는 심장이었다⁠. 쿵쿵거리는 소리가 베개를 타고 귀로 올라왔다⁠.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⁠. 손목 그래프 밑에 처음 보는 알림이 떠 있었다⁠. 「⁠지난밤 수면이 감지되지 않았습니다⁠」

해가 뜰 무렵 심장이 가라앉았다⁠. 아침 밥상에서 엄마가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⁠.

“⁠너 밤새 뭐 했어⁠?⁠”

“⁠누워 있었어⁠.⁠”

“⁠누워만 있는 얼굴이 아니다⁠. 엄마 인슐린 처음 맞던 해에 그 얼굴이었어⁠.⁠”

엄마는 내 밥그릇에서 밥을 한 숟가락 덜어 자기 그릇에 옮겼다⁠. 그리고 내 그릇에 나물을 한 젓가락 더 얹었다⁠. 나물부터 먹으라는 소리를 엄마는 말 대신 젓가락으로 했다⁠.

토요일 점심을 먹고 엄마를 따라 갑천에 나갔다⁠. 엄마는 밥을 먹으면 꼭 삼십 분을 걸었다⁠. 허리춤에 단 낡은 만보기가 걸음마다 딸깍거렸고⁠, 둑길 벤치마다 엄마 또래 아주머니들이 앉아 손을 흔들었다⁠. 엄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숫자를 외쳤다⁠. “⁠백십팔⁠!⁠” “⁠나는 백이십오⁠!⁠” “⁠어머⁠, 언니 이겼네⁠.⁠” 공복 혈당을 인사 대신 주고받는 사람들이었다⁠.

“⁠엄마 친구들 다 여기서 만났어⁠?⁠”

“⁠걷기 모임⁠. 당뇨 걸린 사람끼리⁠. 다 이 병 덕에 만났지⁠.⁠”

엄마는 웃었다⁠. 아빠가 떠나고 엄마 혼자 사는 집에 전화가 자주 울리는 까닭을 나는 처음 알았다⁠. 둑길 끝에서 엄마가 숨을 고를 때 내가 물었다⁠.

“⁠엄마⁠, 도깨비 얘기 알아⁠?⁠”

“⁠외할머니가 해 주던 거⁠? 도깨비는 메밀묵을 좋아해⁠. 그리고 내기를 못 참아⁠. 또 뭐였더라⁠. 아⁠, 빌린 돈 서 푼을 갚고도 갚은 걸 잊어서⁠, 날마다 또 갚으러 와⁠. 그래서 그 집이 부자가 됐대⁠.⁠”

“⁠그게 다야⁠?⁠”

“⁠도깨비한테 홀리면 밤새 산을 돈대⁠. 아침에 보면 제자리고⁠.⁠” 엄마는 만보기를 들여다보았다⁠. “⁠엄마는 홀린 적 없다⁠. 걸음이 다 남아 있어⁠.⁠”

토요일 밤에도 잠들지 못했다⁠. 일요일 밤 서울행 기차에서 나는 서서 졸다가 문에 이마를 박았다⁠. 발이 반포까지 걸어가지 못하는 곳에서는⁠, 몸이 잠을 내주지 않았다⁠.

기차가 천안을 지날 때 막내의 영상을 다시 열었다⁠. 주황 조끼 영상은 조회수가 만을 넘겼고⁠, 댓글이 백 개 가까이 붙어 있었다⁠. 「⁠저 크루 빠지면 다음 날 반포에서 눈뜬다는 소문 진짜예요⁠?⁠」 「⁠잠옷 러너 브이로그 2탄 언제⁠」 스크롤을 내리다가 손가락이 멈췄다⁠. 「⁠예전에 잠원동 아파트 경비 할아버지도 저 크루셨는데⁠. 요즘은 안 보이시네⁠」 답글은 하나도 없었다⁠. 나는 할아버지라는 낱말을 한참 보다가 화면을 껐다⁠. 창밖이 캄캄해서 내 얼굴만 비쳤다⁠.

*

월요일 새벽⁠, 나는 형광 주황 조끼를 입고 잤다⁠. 레깅스도 입었고 러닝화는 침대 발치에 가지런히 두었다⁠. 눈을 떴을 때 분수 앞이었고⁠,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⁠. 나는 출석 콩이 내 앞을 지나가자마자 뛰는 내내 세 사람 곁을 차례로 따라붙었다⁠.

페메에게 먼저 물었다⁠. “⁠페메 님⁠, 크루 말고 누구 만나세요⁠?⁠”

“⁠회사는 안 다녀요⁠. 일 년 쉬었어요⁠. 집에서 여기⁠, 여기서 집이요⁠.⁠”

치과의사에게 물었다⁠. “⁠원장님은요⁠?⁠”

“⁠환자요⁠. 하루에 스무 명쯤 입을 벌리고 저를 봅니다⁠. 대화는 안 됩니다⁠. 다들 입을 벌리고 있어서요⁠.⁠” 치과의사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⁠. “⁠딸이 멜버른에 있습니다⁠. 한 달에 한 번 사진을 보내 줘요⁠. 이번 달은 아직입니다⁠.⁠”

막내에게 물었다⁠. “⁠막내는 친구 많잖아⁠. 팔로워도 있고⁠.⁠”

“⁠천이백이요⁠. 근데 누나⁠, 팔로워는 제 영상을 보지 저를 안 봐요⁠. 과 동기 단톡방 있는데요⁠, 제가 말하면 숫자 일이 사라지기만 하고 답이 없어요⁠. 다 읽고 아무도 안 쳐요⁠.⁠” 막내는 웃는 얼굴로 휴대전화를 흔들었다⁠. “⁠그래서 여기 와요⁠. 여기는 제가 헛소리하면 원장님이 치실 줘요⁠.⁠”

동작대교 반환점에서 두억이 교각에 등을 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⁠. 내가 세 사람에게 묻고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⁠.

“⁠봤지⁠.⁠”

“⁠봤어요⁠. 그래서 더 안 돼요⁠.⁠”

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⁠.

“⁠사람을 묶어 두면 친구가 안 돼요⁠. 인질이 되지⁠.⁠”

“⁠인질은 밥을 굶긴다⁠. 나는 피곤을 덜어 준다⁠.⁠”

“⁠페메 님은 일 년 동안 집하고 여기만 오갔대요⁠. 원장님은 따님한테 사진 한 장 기다리는 게 전부래요⁠. 막내는 아직 스물이에요⁠. 크루장님이 묶어 두니까 다들 여기만 오잖아요⁠. 다른 데 갈 이유를 크루장님이 다 가져가는 거예요⁠.⁠”

“⁠다른 데 갈 이유가 있던 사람들이 아니다⁠.⁠”

“⁠그걸 크루장님이 어떻게 아세요⁠?⁠”

“⁠새벽마다 어깨를 두드렸다⁠. 어깨가 무거운 정도로 안다⁠.⁠”

두억은 교각에서 등을 떼고 강을 보았다⁠. 하늘 아래쪽이 물기를 머금은 분홍빛이었다⁠.

“⁠사흘 해 보고 그만두는 사람이라며⁠. 나는 천 년을 했다⁠.⁠”

사흘 이야기는 첫날 잔디밭에서 다리를 풀며 페메에게만 했다⁠. 필라테스 사흘⁠, 클라이밍 사흘⁠. 페메는 눈가를 접으며 들었고⁠, 크루장은 아직 다리 밑 어둠 속에서 나오기 전이었다⁠. 콩 한 알 옮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던 자리였다⁠. 크루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묻기도 전에 페메가 우리 사이로 들어왔다⁠.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⁠. 페메는 나를 보지 않고 두억도 보지 않고 강물을 보며 말했다⁠.

“⁠예서 씨⁠, 저 풀어 달라고 한 적 없어요⁠.⁠”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0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
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