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473자)

마흔두 칸

예순 살의 가출 · 윤은류

화곡동 빌라 입구 전봇대의 현수막이 바뀌어 있었다⁠. 「⁠재개발 주민 동의율 육십 퍼센트 돌파 — 조금만 더 힘을 모읍시다⁠」 스무하루 만이었다⁠. 동네는 스무하루 동안 한 걸음 더 재개발 쪽으로 가 있었다⁠. 나는 아침 기차에서 내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왔다⁠. 강릉에서 서울로 오는 길은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보다 짧았다⁠. 시계로는 같은데 몸으로는 그랬다⁠.

계단 마흔두 칸을 올랐다⁠. 열다섯 해 동안 발로 외운 계단이었는데 오늘은 허리로 올랐다⁠. 한 칸마다 왼다리 뒤로 전기가 내려갔다⁠. 열 칸 오르고 쉬고⁠, 다시 열 칸 오르고 쉬었다⁠. 이 층 계단참에서 쉬고 있는데 홍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⁠. 재활용 봉지를 들고 있었다⁠.

“⁠숙경이 왔네⁠!⁠”

“⁠안녕하셨어요⁠.⁠”

“⁠얼굴 폈다⁠. 큰집 사진보다 더 폈어⁠. 그 사진 우리 동네 대화방에도 돌았어⁠. 화곡동 효녀 가출하다⁠.⁠”

“⁠효녀는 빼 주세요⁠.⁠”

“⁠빼면 그냥 가출이잖아⁠. 가출이 더 멋있긴 하다⁠.⁠”

홍 할머니가 재활용 봉지를 내려놓고 내 허리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⁠. 나는 비명을 삼켰다⁠.

“⁠어머⁠, 허리가 왜 그래⁠.⁠”

“⁠엄마 드느라고요⁠.⁠”

“⁠그럼 이제 안 들면 되겠네⁠.⁠”

홍 할머니는 간단하게 말했다⁠. 동네 사람들은 늘 간단하게 말했다⁠. 간단한 말을 지키는 데 열다섯 해가 걸린다는 건 집 안에 사는 사람만 알았다⁠.

삼 층 현관문 앞까지 올라갔다⁠. 열쇠는 코트 주머니에 있었다⁠. 열쇠를 꺼냈다가 도로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⁠. 내 집에 초인종을 누르는 건 처음이었다⁠.

*

태루가 문을 열었다⁠. 아침부터 집 안을 치웠는지 거실 바닥이 반들거렸다⁠. 어머니 침대는 창가로 옮겨져 있었다⁠. 내가 열다섯 해 동안 벽에 붙여 두었던 침대를 태루가 창을 향해 돌려놓았다⁠.

“⁠할머니가 밖이 보고 싶대서⁠. 강릉 다녀오시고 나서⁠.⁠”

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앞 빌라의 벽과 전깃줄과 하늘 한 조각이었다⁠. 바다는 아니었다⁠. 어머니는 침대 위에서 돋보기를 쓰고 하늘 한 조각을 보고 있었다⁠.

“⁠엄마⁠.⁠”

“⁠왔냐⁠? 니 집에 초인종 누르고 들어오는 꼴 처음 본다⁠.⁠”

“⁠들었어⁠?⁠”

“⁠아까 울렸잖여⁠. 우리 집 초인종 누를 사람이 상담원 아니면 너밖에 없어⁠. 상담원은 열 시라 그랬고⁠.⁠”

침대 옆 협탁에 태루의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⁠. 페이지 귀퉁이마다 어머니의 죽이 말라붙어 있었다⁠. 문제집 위에 은색 탁상 종이 얹혀 있었다⁠. 태루는 종을 문제집 위에 올려 두고 공부를 했다⁠. 종이 울리면 문제집을 덮지 않고 종만 들어 올렸다⁠.

*

열 시 정각에 상담원이 왔다⁠. 마흔 중반쯤 된 여자였다⁠. 서류 가방 하나와 혈압계 하나를 들고 있었다⁠. 상담원이 신발을 벗을 때 두배도 계단을 올라왔다⁠. 두배는 작업복 대신 셔츠를 입고 있었다⁠.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웠다⁠.

“⁠가족분이시죠⁠?⁠”

“⁠아들입니다⁠.⁠”

상담원이 두배와 나와 태루를 차례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⁠. 상담원은 먼저 어머니 방에 들어가 등과 엉덩이와 발뒤꿈치를 살폈다⁠. 욕창이 생기는 자리였다⁠. 이불을 걷고 살을 들여다보는 동안 상담원은 어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⁠. 어머니는 상담원에게 아흔 해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이 피란길도 공출도 아니고 둘째 놈 운전이라고 했다⁠. 상담원이 웃었다⁠. 거실에서 듣던 두배의 귀가 빨개졌다⁠.

“⁠욕창 없으시네요⁠. 피부 깨끗하시고요⁠. 손자분이 체위 변경을 잘하셨어요⁠.⁠”

태루가 고개를 숙였다⁠. 상담원은 이어서 가족들을 다 거실로 내보내고 어머니와 둘이 남았다⁠. 문이 닫혔다⁠. 거실 소파에 두배와 나와 태루가 나란히 앉았다⁠. 소파가 좁아서 셋의 어깨가 붙었다⁠. 셋이 이렇게 붙어 앉은 건 남편 장례식 이후 처음이었다⁠.

방 안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⁠.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높낮이만 들렸다⁠. 높아졌다가 낮아지고⁠, 한 번은 웃음소리가 났다⁠. 이십 분 뒤 문이 열렸다⁠.

“⁠따님⁠, 잠깐 들어오시겠어요⁠?⁠”

나는 방에 들어갔다⁠. 상담원이 어머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⁠. 상담원이 내게도 의자를 권했다⁠.

“⁠어르신께서 따님 허리를 걱정하세요⁠. 진단을 받으셨다고요⁠.⁠”

나는 가방에서 진단서를 꺼내 건넸다⁠. 상담원이 맨 아래 줄을 오래 보았다⁠. 「⁠중량물 취급 및 장시간 돌봄 노동 금함⁠.⁠」

“⁠따님은 열다섯 해 동안 혼자 주 보호자셨네요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한 번도 쉬신 적 없으세요⁠? 단기 보호 같은 거요⁠. 며칠씩 어르신을 시설에 맡기고 쉬는 제도가 있어요⁠.⁠”

“⁠엄마가 남의 손을 싫어하셔서요⁠.⁠”

침대에서 어머니가 끼어들었다⁠.

“⁠지금은 남의 손이 선생 손이잖여⁠. 선생 손은 따뜻허네⁠.⁠”

상담원이 웃으며 어머니 손을 한 번 잡았다⁠. 그러고는 서류에 무언가를 적고 나를 보았다⁠.

*

상담원은 거실 식탁에 가족들을 앉혔다⁠. 서류를 펼쳐 놓고 차분하게 말했다⁠.

“⁠방임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⁠. 손자분이 어르신을 잘 돌보고 계세요⁠. 식사⁠, 위생⁠, 체위 변경⁠, 다 잘되고 있어요⁠. 밤에 큰 소리가 난다는 부분은 어르신께서 직접 설명해 주셨어요⁠. 사극 볼 때 소리를 크게 트신다고요⁠.⁠”

태루가 고개를 들었다⁠. 두배는 식탁 모서리를 보고 있었다⁠.

“⁠다만 제가 보기에 이 댁은 돌보는 분들이 무너지고 있어요⁠. 따님은 허리가 나가셨고⁠, 손자분은 석 주째 하루 네 시간을 못 주무셨어요⁠. 어르신 장기요양 등급을 다시 받아 보시길 권해요⁠. 등급이 바뀌면 요양보호사가 오는 시간이 늘어나요⁠. 낮에 어르신을 모셔 가는 주간 보호도 있고요⁠. 길게 보시면 시설도 같이 알아보셔야 합니다⁠.⁠”

시설이라는 말에 어머니 방에서 효자손 소리가 땅 하고 났다⁠. 상담원이 서류를 넘겼다⁠.

“⁠그리고 신고 내용 중에 지난주 장거리 이동 부분이 있었는데요⁠. 어르신께 여쭤보니 어르신이 직접 가시겠다고 하셨다고요⁠. 바다를 보러 가셨다고⁠. 그건 어르신의 선택이라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⁠. 신고하신 분이 이동을 많이 걱정하셨던데⁠, 가족분이 걱정하실 만한 일이긴 했어요⁠.⁠”

상담원은 「⁠가족분⁠」이라고 말하고 나서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⁠.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 가운데 어머니가 강릉에 갔다는 것을 아는 가족은 셋이었다⁠. 나와 태루는 신고하지 않았다⁠. 나는 두배를 보았다⁠. 두배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⁠.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목 위로 귀만 빨갰다⁠.

*

상담원을 배웅하고 나서 두배가 계단참으로 나갔다⁠. 나는 따라 나갔다⁠. 계단참 창문으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⁠. 열다섯 해 동안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돌던 모퉁이였다⁠.

“⁠니가 했어⁠?⁠”

“⁠그래⁠, 내가 했어⁠.⁠”

두배는 숨기지 않았다⁠.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면 두배는 빨리 인정했다⁠. 어려서부터 그랬다⁠.

“⁠왜⁠?⁠”

“⁠누나가 오게 하려고⁠. 내가 오라고 하면 안 오잖아⁠. 엄마가 오라고 해도 안 오잖아⁠. 나라에서 오라고 하면 올 것 같았어⁠. 그리고 봐⁠, 왔잖아⁠.⁠”

“⁠엄마를 신고했어⁠. 태루를 신고했어⁠. 태루가 석 주 동안 잠을 네 시간도 못 자면서 엄마 욕창 하나 안 나게 했는데⁠, 니가 태루를 방임했다고 신고했어⁠.⁠”

“⁠태루를 신고한 게 아니야⁠. 이 집을 신고한 거야⁠. 이 집이 지금 엉망이잖아⁠. 누나는 강릉에 있고⁠, 태루는 시험 망치고 있고⁠, 엄마는 아흔에 기차를 타⁠. 누가 이걸 정리해⁠. 나라도 해야지⁠. 기관이 시설 가야 한다고 하면 다들 따를 거잖아⁠.⁠”

“⁠그래서 시설 가면⁠, 시설비는⁠.⁠”

두배가 입을 다물었다⁠.

“⁠집 팔아서⁠. 그렇지⁠?⁠”

“⁠누나⁠, 그건⁠.⁠”

“⁠두배야⁠, 너는 엄마를 지키려고 신고한 게 아니야⁠. 엄마를 옮기려고 신고했어⁠. 엄마를 옮기면 집이 비고⁠, 집이 비면 팔 수 있으니까⁠.⁠”

두배가 계단참 창틀을 손바닥으로 쳤다⁠. 창유리가 떨렸다⁠.

“⁠그래⁠! 나 돈 필요해⁠! 가게 넘어가게 생겼어⁠. 우리 애들 등록금도 못 냈어⁠. 수옥이는 장모님 간병비 오른다고 밤마다 울어⁠. 근데 누나는 그 집에서 열다섯 해 살았고⁠, 엄마 시설비는 어차피 누가 내야 돼⁠. 내가 틀렸어⁠? 엄마가 시설 간다고 쓴 거⁠, 엄마 손으로 쓴 거잖아⁠. 나는 엄마가 쓴 대로 하자는 거야⁠.⁠”

두배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⁠. 틀리지 않은 말들을 이어 붙였는데 이상하게 틀린 데로 갔다⁠. 나는 두배가 낸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계단 손잡이를 꽉 쥐었다⁠.

“⁠엄마가 쓴 대로 하자면서⁠, 엄마가 쓴 걸 다섯 해 지갑에 넣어 둔 건 너야⁠.⁠”

두배가 대답하지 못했다⁠. 계단 아래에서 홍 할머니 집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⁠.

*

나는 목요일 밤 집에서 자지 않았다⁠. 돌아갈 기차는 여덟 시였는데⁠, 태루가 내일 아침에 할 말이 있다고 해서 표를 금요일로 바꿨다⁠. 바꾸고 나서 빌라 앞 큰길 건너 찜질방으로 갔다⁠. 내 방이 있는 집 앞에서 찜질방에 돈을 내고 들어가는 것이 이상했지만⁠, 이상한 것이 맞았다⁠. 내 방에서 자면 새벽 세 시에 어머니 종소리를 들을 것이고⁠, 종소리를 들으면 나는 일어날 것이다⁠. 일어나면 허리가 다시 나갈 것이다⁠.

찜질방에서 주황색 반팔 반바지를 받아 입었다⁠.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고 식혜를 한 잔 사서 황토방 앞 평상에 앉았다⁠. 옆자리 아주머니 셋이 황혼 이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⁠. 한 사람이 남편을 두고 동해에 한 달 살러 간 친구 이야기를 하자 다른 사람이 손뼉을 쳤다⁠. 셋 중 하나가 나를 보았다⁠.

“⁠언니도 혼자 왔어⁠? 남편 두고 나왔어⁠?⁠”

“⁠엄마 두고 나왔어요⁠.⁠”

평상이 조용해졌다⁠. 셋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⁠. 한참 만에 맨 끝 아주머니가 자기 식혜를 들어 내 식혜에 부딪쳤다⁠.

“⁠그게 더 어렵지⁠.⁠”

*

밤 열한 시에 태루가 찜질방으로 왔다⁠. 주황색 반팔 반바지를 입고⁠, 수건을 목에 걸고 있었다⁠. 우리 모자는 똑같은 옷을 입고 황토방 앞에서 마주 앉았다⁠. 태루가 식혜 두 잔을 사 왔다⁠.

“⁠할머니는⁠?⁠”

“⁠주무셔⁠. 삼촌이 오늘은 거실 소파에서 잔대⁠. 할머니가 시켰어⁠. 니가 신고했으니께 니가 잘 봐라⁠, 하고⁠.⁠”

나는 웃음이 났다⁠. 태루는 웃지 않았다⁠. 식혜 잔을 두 손으로 쥐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⁠.

“⁠엄마⁠, 나 다음 주 화요일에 최종 면접이야⁠.⁠”

“⁠어디⁠?⁠”

“⁠국토물길공사⁠. 세종에서⁠. 서류랑 필기 붙었어⁠. 할머니 옆에서 문제집 푼 거로 붙었어⁠.⁠”

“⁠태루야⁠.⁠”

“⁠세 번째 최종이야⁠. 이번엔 붙을 것 같아⁠. 할머니가 면접관 앞에서 할 말도 가르쳐 줬어⁠. 화요일 하루만⁠. 아침 여섯 시에 나가서 밤 아홉 시에 들어와⁠.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오후 세 시간만 오셔⁠. 삼촌은 그날 현장 있대⁠. 숙모는 학원 차 타고⁠.⁠”

태루가 식혜 잔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엄마⁠, 그날 하루만 할머니 곁에 있어 줘⁠. 안 들어도 돼⁠. 기저귀도 선생님 오실 때 갈면 돼⁠. 엄마는 옆에만 있어⁠.⁠”

옆에만⁠.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가 하던 말을 아들의 입으로 들었다⁠. 황토방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뜨거운 바람이 우리 발밑을 훑고 지나갔다⁠. 나는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⁠.

“⁠태루야⁠, 엄마는 옆에만 있는 게 제일 무거워⁠.⁠”

태루가 나를 보았다⁠. 강릉 새벽 마루에서 내가 할머니에게 한 말을 태루는 수돗가에서 들었다⁠. 들었으니까 일부러 옆에만⁠, 이라고 했을 것이다⁠.

“⁠그럼 나 면접 안 가⁠.⁠”

태루가 식혜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⁠. 잔 바닥에 밥알이 몇 개 남았다⁠. 태루는 일어나 남자 수면실 쪽으로 걸어갔다⁠. 주황색 반바지 아래로 맨 종아리가 하얬다⁠. 걸어가는 뒷모습이 서른두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이었다⁠. 태루가 할머니 집에 처음 들어가던 해의 나이였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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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연필깎이2026.11.01· 9화

    스무하루 만에 동네가 재개발 쪽으로 한 걸음 더 가 있었다는 말이 무섭네요.

    • 윤은류작가2026.11.01

      집을 비운 사이에도 동네는 움직여요. 현수막 숫자가 다음 다툼의 시작입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