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426자)

맨발

예순 살의 가출 · 윤은류

강릉역 앞 택시 승강장에서 기사가 트렁크를 열어 주며 물었다⁠.

“⁠어디로 모실까요⁠?⁠”

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⁠. 기차 안에서 검색창에 「⁠강릉⁠」이라고 쳤더니 커피 거리와 순두부 마을과 바다가 차례로 나왔고⁠, 마지막에 동영상 채널이 「⁠예순에 혼자 떠나는 여행 브이로그⁠」를 추천했다⁠. 알고리즘은 내가 가출한 걸 나보다 먼저 아는 눈치였다⁠.

“⁠사람 적은 바다요⁠.⁠”

“⁠그럼 사천이죠⁠. 요즘 혼자 오시는 사모님들 많아요⁠. 다들 사천 가서 물회 한 그릇 드시고 울고 가세요⁠.⁠”

“⁠우는 데까지 코스예요⁠?⁠”

“⁠물회가 맵거든요⁠.⁠”

기사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을 뻔했다⁠. 택시가 솔숲 사이 도로를 달리는 동안 창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⁠. 서울 바람과 냄새가 달랐다⁠. 미역 말리는 냄새에 기름 냄새가 조금 섞여 있었다⁠.

*

사천진 해변은 시월 평일 오전이라 텅 비어 있었다⁠. 모래사장 저쪽 끝에서 금발 청년 둘이 서핑 보드를 들고 물로 들어갔고⁠, 방파제 끝 빨간 등대 밑에서 낚시꾼 하나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⁠. 나는 모래가 시작되는 경계석 위에 멈췄다가⁠, 운동화를 한 짝씩 벗었다⁠.

아침마다 압정을 밟던 오른발 뒤꿈치가 모래에 묻혔다⁠. 모래는 밤새 식었다가 해에 조금 데워져 미지근했고⁠, 발을 디딜 때마다 내 무게만큼 꺼졌다가 받쳐 주었다⁠. 빌라 장판은 한 번도 나를 받쳐 준 적이 없었다⁠. 장판은 내가 버티는 바닥이었고 모래는 나를 버텨 주는 바닥이었다⁠. 열 걸음을 걸었는데 뒤꿈치가 아프지 않았다⁠.

신발을 왼손에 들고 가방을 오른손에 든 채 물가로 갔다⁠. 파도는 멀리서 하얗게 부서져 들어와 내 앞에서 얇은 거품이 되었다⁠. 거품 끝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큰 파도 하나가 예고도 없이 밀려 올라왔다⁠. 물이 발목을 덮고 코트 자락 끝을 적셨다⁠. 얼음물처럼 찼다⁠.

“⁠어머⁠, 어머⁠!⁠”

나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⁠. 물이 빠지면서 발밑 모래를 끌고 가는 바람에 발바닥이 간지러웠다⁠. 간지러워서 웃었다⁠. 웃고 나서 내 웃음소리에 놀랐다⁠. 소리 내어 웃는 목소리가 이렇게 생겼다는 걸 오랜만에 들었다⁠. 나는 바다를 등지고 돌아서서 마을을 보며 한 번 더 웃었다⁠. 이번에는 일부러 웃었다⁠. 웃음이 아까워서였다⁠.

모래 언덕 위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걷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들었다⁠. 나는 바다 사진을 찍는 줄 알았다⁠.

*

해변 뒤편 골목에는 이층짜리 민박집들이 어깨를 붙이고 늘어서 있었다⁠. 절반은 간판 불이 꺼져 있었고⁠, 골목 끝 세 집은 흰 가림막으로 둘러져 있었다⁠. 가림막에 「⁠해담개발 사천 오션뷰 호텔 부지 — 관계자 외 출입 금지⁠」라고 쓰여 있었다⁠. 가림막 옆 집이 「⁠물빛민박⁠」이었다⁠. 파란 함석지붕에 「⁠방 있음 · 장기 환영⁠」 종이가 붙어 있었다⁠.

마당에서 한 여자가 한 손으로 이불을 빨랫줄에 넘기려 애쓰고 있었다⁠. 일흔은 넘어 보였다⁠. 오른 손목에 깁스를 하고⁠, 왼손 하나로 젖은 솜이불을 들어 올리려다 이불에 끌려 반 바퀴 돌았다⁠.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이불 반대편 귀퉁이를 잡았다⁠.

“⁠하나⁠, 둘⁠.⁠”

이불이 빨랫줄을 넘어갔다⁠. 여자가 숨을 고르고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⁠.

“⁠어데서 오셨소⁠?⁠”

“⁠서울이요⁠.⁠”

“⁠서울서 오는 사람치고 이불 잘 너네⁠. 이불 넘길 때 줄 밑으로 들어가 어깨로 받는 거⁠, 그거 아무나 모르는 거래요⁠.⁠”

“⁠집에 누워 계신 분이 있어서요⁠. 이불 빨래가 하루걸러 나와요⁠.⁠”

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⁠. 더 묻지 않았다⁠. 여자의 이름은 곽말춘이었다⁠. 물빛민박을 서른 해 했고⁠, 지난주 미끄러운 마당에서 넘어져 손목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⁠.

“⁠방은 있소⁠. 마카 비었어요⁠.⁠”

내가 못 알아듣자 말춘이 덧붙였다⁠.

“⁠마카가 서울말로 다⁠, 모두래요⁠. 마카 비었다고⁠. 가을 평일엔 개미 새끼 하나 안 와요⁠. 근데 주말엔 서핑 하는 아들이 마카 몰려와서 혼자 이불을 못 대요⁠. 이 손으로는⁠.⁠”

말춘이 깁스한 손을 들어 보였다⁠. 나는 마당을 둘러보았다⁠. 빨랫줄에 이불이 일곱 채 걸려 있었고⁠, 수돗가에 아직 안 빤 베갯잇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⁠. 내 손이 저절로 소매를 걷었다⁠. 열다섯 해 동안 몸에 붙은 버릇이었다⁠.

“⁠제가 도와 드릴게요⁠.⁠”

“⁠그라믄 방 공짜로 줄게⁠.⁠”

“⁠아니요⁠.⁠”

말춘이 눈을 크게 떴다⁠.

“⁠공짜 싫은 사람 처음 보네⁠.⁠”

“⁠공짜로 받으면 또 맡아야 하잖아요⁠.⁠”

말이 먼저 나오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⁠. 집을 공짜로 받았다⁠. 그래서 어머니를 맡았다⁠. 받은 것에는 늘 끈이 달려 있었다⁠.

“⁠일당을 주세요⁠. 방값은 제가 따로 낼게요⁠. 그래야 제가 일하다가도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어요⁠.⁠”

말춘이 깁스한 손목으로 턱을 괴고 한참 나를 보았다⁠. 그러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계산기를 꺼냈다⁠. 손가락 하나로 숫자를 눌렀다 지웠다 했다⁠.

“⁠일당 칠만 원⁠. 아침 일곱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⁠. 방값은 하루 삼만 원인데 장기니까 이만 원⁠. 밥은 내가 하는 거 같이 먹고 밥값은 안 받소⁠. 밥값까지 받으면 내가 서운해⁠.⁠”

“⁠밥은 얻어먹을게요⁠.⁠”

“⁠그래요⁠. 밥까지 따지는 사람은 정 없어⁠.⁠”

내 생애 첫 일당은 급식실에서 받았고⁠, 두 번째 일당은 예순 살 생일 오후 강릉에서 정해졌다⁠. 말춘이 마루에 걸린 열쇠 하나를 떼어 주었다⁠. 이 층 맨 끝⁠,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⁠.

*

저녁에 말춘과 마루에 앉아 감자전을 먹었다⁠. 텔레비전에서 교양 프로그램이 나왔다⁠. 제목이 「⁠쉰 넘어 바닷가로⁠」였다⁠. 서울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온 남자가 귤 농사를 짓다가 망하고 다시 카페를 열어 또 망하는 이야기였다⁠. 말춘이 혀를 찼다⁠.

“⁠저 양반은 바다 보러 온 사람이 아니고 망하러 온 사람이네⁠.⁠”

“⁠다시 열었잖아요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또 망하지⁠.⁠”

말춘의 아들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닌다고 했다⁠. 해마다 추석이면 내려와서 민박을 팔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⁠. 골목 끝 세 집이 이미 호텔 회사에 팔렸고⁠, 물빛민박 땅도 호텔 회사가 원한다고 했다⁠.

“⁠아들이 그래요⁠. 엄마 혼자 이불 대다가 넘어지면 누가 치우냐고⁠. 맞는 말이래요⁠. 근데 서울 가면 내가 손주 등원시키고 하원시키고⁠, 그게 결국 이불이랑 뭐가 다르오⁠.⁠”

나는 대답 대신 감자전을 한 장 더 집었다⁠. 말춘은 내 사정을 묻지 않았고⁠, 나도 말춘의 사정을 더 묻지 않았다⁠.

방에 올라가 휴대전화를 켰다⁠. 기차에서 끈 뒤로 처음이었다⁠. 부재중 전화가 스물두 통 와 있었다⁠. 태루가 일곱⁠, 두배가 열넷⁠, 모르는 번호가 하나였다⁠. 친척 대화방은 이백 개 넘게 쌓여 있었다⁠. 맨 아래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었다⁠.

「⁠혹시 이분 아니에요⁠?⁠? 사천 해변에서 맨발로 웃고 계셨어요⁠. 개 산책하다 봤어요⁠」

주문진 사는 육촌 올케였다⁠. 사진 속에서 짧은 흰머리의 여자가 베이지 코트 자락을 날리며 한 손에 신발을⁠,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바다를 등진 채 웃고 있었다⁠.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⁠. 큰고모가 「⁠어머 숙경이 얼굴 폈네⁠」라고 썼고⁠, 두배가 바로 밑에 「⁠주소 아시는 분⁠」이라고 썼다⁠.

나는 사진을 내 휴대전화에 저장했다⁠. 지울까 하다가 그러지 않았다⁠.

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다⁠.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의 체위를 바꾸던 시각이었다⁠. 두 시간마다 몸을 돌려 눕혀야 등에 욕창이 생기지 않는다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처음에 가르쳐 주었고⁠, 내 몸은 시계보다 먼저 체위 바꾸는 시각을 외웠다⁠.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가⁠,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⁠. 창밖에서 파도 소리만 일정하게 밀려왔다 빠졌다⁠. 파도는 몇 초마다 왔고⁠,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⁠.

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태루였다⁠.

「⁠엄마 자⁠?⁠」

답을 하지 않았다⁠. 다음 글이 왔다⁠.

「⁠할머니 기저귀 테이프가 안 붙어⁠. 두 번 버렸어⁠. 할머니가 나보고 손이 곰 발바닥이래⁠」

나는 이불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답장을 썼다⁠. 기저귀를 펼쳐서 엉덩이 밑에 반만 깔고⁠, 할머니를 반대로 굴려 나머지 반을 빼내고⁠, 앞판을 올린 다음 테이프는 아래 것부터 위로 비스듬히 붙여야 다리 사이가 새지 않는다고⁠. 할머니 왼다리는 굳어서 무릎을 너무 벌리면 아파하신다고⁠. 쓰고 보니 화면 세 장이 넘었다⁠. 열다섯 해가 화면 세 장에 들어갔다⁠.

다 지우고 한 줄만 보냈다⁠.

「⁠아래 테이프부터⁠. 비스듬히⁠.⁠」

곧 답이 왔다⁠.

「⁠됐다⁠」

조금 있다가 한 줄이 더 왔다⁠.

「⁠할머니가 엄마보다 내가 낫대⁠. 엄마는 손이 차가워서⁠」

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누웠다⁠. 내 손이 차가운 줄은 처음 알았다⁠. 열다섯 해 동안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⁠.

*

이튿날 아침 일곱 시⁠, 마당 빨랫줄에서 베갯잇을 털고 있는데 골목 어귀로 회색 승합차가 들어왔다⁠. 차 문에 「⁠두배타일 — 욕실 · 주방 · 베란다⁠」라고 적혀 있었다⁠. 승합차가 멈추고 두배가 내렸다⁠. 밤새 운전한 얼굴이었다⁠.

말춘이 마루에서 대빗자루를 들고 내려왔다⁠.

“⁠빚쟁이요⁠?⁠”

“⁠동생이에요⁠.⁠”

“⁠동생이면 빚쟁이보다 더 무섭지⁠.⁠”

두배가 사과 상자 하나를 마당에 내려놓았다⁠. 명절마다 들고 오던 상자와 같은 상표였다⁠. 두배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숨을 골랐다⁠.

“⁠누나⁠, 엄마가 어제 저녁에 한 숟갈도 안 드셨대⁠.⁠”

빨랫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⁠. 두배는 내가 어디를 맞으면 아픈지 알았다⁠. 어머니의 숟가락이었다⁠.

“⁠태루가 그래⁠?⁠”

“⁠태루가 뭘 알아⁠. 내가 전화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어⁠. 입맛이 없다고⁠.⁠”

“⁠엄마는 입맛 없을 때 그렇게 말 안 해⁠. 입맛 없으면 반찬 타박을 해⁠.⁠”

두배가 말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⁠.

“⁠누나⁠, 이러지 말고 가자⁠. 내 차 타⁠. 점심 전에 화곡동 들어가면 아무 일도 없던 거야⁠. 큰집 대화방엔 내가 누나 바람 쐬러 갔다고 잘 써 줄게⁠.⁠”

“⁠아무 일도 없던 거면 내가 왜 여기 있어⁠?⁠”

“⁠누나⁠.⁠”

“⁠두배야⁠, 집 줄게⁠.⁠”

두배가 나를 보았다⁠.

“⁠그 집 너 줄게⁠. 니 명의로 해⁠. 대신 니가 엄마 맡아⁠.⁠”

두배의 얼굴이 한 번에 여러 가지로 바뀌었다⁠. 놀랐다가⁠, 계산했다가⁠, 계산이 끝나자 뒷걸음질 쳤다⁠.

“⁠무슨 소리야⁠. 그 집 지금 내 명의로 받으면 증여세가 얼만데⁠.⁠”

말춘이 대빗자루에 턱을 괴고 피식 웃었다⁠. 두배가 말춘을 흘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⁠.

“⁠그리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⁠. 엄마가 누나를 골랐어⁠. 내가 고른 게 아니라고⁠.⁠”

두배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⁠. 누런 편지지에 볼펜 글씨가 꾹꾹 눌려 있었다⁠. 어머니 글씨였다⁠. 왼손이 굳기 전 오른손으로 쓴 마지막 해의 글씨였다⁠.

「⁠화곡동 집은 숙경이에게 준다⁠. 숙경이는 나를 맡아라⁠. 2012년 3월 마봉실⁠」

“⁠엄마가 집 넘기던 날 법무사 사무실에서 쓴 거야⁠. 나한테 맡겼어⁠. 누나⁠, 이거 요즘 말로 효도 계약이야⁠. 부모 모신다고 집 받았다가 안 모시면 집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도 있어⁠.⁠”

나는 사진을 오래 보았다⁠. 열다섯 해 동안 나는 어머니가 입으로 한 말만 알았다⁠. 어머니가 손으로 쓴 종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⁠. 종이는 내 손이 아니라 두배 손에 있었다⁠.

사진 아래 끝에서 편지지가 잘려 있었다⁠. 볼펜 자국 하나가 잘린 선 너머로 비스듬히 내려가다 끊겨 있었다⁠. 마당 수돗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⁠. 나는 맨발로 슬리퍼를 꿰신은 채 두배의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 두 개로 벌렸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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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좌시훈2026.11.01· 2화

    알고리즘이 가출한 줄 모르고 브이로그를 추천했다는 문장에서 웃다가 울었어요.

    • 윤은류작가2026.11.01

      예순에 처음 혼자 탄 기차였어요. 휴대전화만 그걸 여행이라고 불러 줬습니다.

맨발 · 예순 살의 가출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