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17자)

회식

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여시결

2월 22일 월요일 오후 두 시⁠, 구솔미는 35층 유리문 앞에서 사원증을 대기 전에 숨을 한 번 골랐다⁠.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⁠. 아침에 먹은 비스킷 두 조각이 목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⁠. 문은 솔미의 사원증에 열렸다⁠. 비서가 미리 열어 둔 권한이었다⁠.

부사장실 창가에는 분재가 다섯 개 있었다⁠. 편인곤은 가장 큰 분재의 굵은 가지에 철사를 감고 있었다⁠. 철사를 감는 손이 느렸다⁠.

“⁠구 팀장⁠. 앉아⁠. 차 줄까⁠, 커피 줄까⁠?⁠”

“⁠물 주세요⁠.⁠”

인곤이 직접 물을 따라 주었다⁠. 컵에 레몬 한 조각이 떠 있었다⁠. 솔미는 레몬 냄새를 맡자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⁠.

“⁠표 팀장이 노트를 안 준대⁠. 표 팀장은 고집이 세⁠. 그 고집이 표 팀장을 여기까지 키웠으니 뭐라고는 못 하지⁠.⁠”

인곤은 철사를 다 감고 나서야 솔미 맞은편에 앉았다⁠. 서류 한 장을 솔미 앞에 밀었다⁠. 「⁠보직 보장 확인서 — 소비재팀장 구솔미⁠. 3월 조직 개편 이후 2년간 보직을 유지한다⁠. 휴직·출산 등 개인 사유로 인한 보직 변경 없음⁠」 맨 아래 인곤의 서명 자리는 아직 하얬다⁠.

솔미는 「⁠출산⁠」이라는 낱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⁠. 인곤은 솔미의 눈이 어디서 멈췄는지 보았는지⁠, 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차를 마셨다⁠.

“⁠구 팀장은 젊어⁠. 젊은 사람은 앞으로 쉴 일이 많아⁠. 결혼하고⁠, 애 낳고⁠. 그때마다 자리가 흔들리면 일을 못 하지⁠. 그래서 미리 박아 주는 거야⁠. 2년⁠.⁠”

“⁠조건이 뭔데요⁠?⁠”

“⁠표 팀장 노트⁠. 휴직 중에 쓴 파일 말이야⁠. 원본이든 사본이든⁠. 그게 브레인포지에 들어가면⁠, 구 팀장 팀은 인공지능을 제일 잘 다루는 팀이 돼⁠. 3월 뒤에도 살아남는 팀이⁠.⁠”

솔미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⁠. 물이 미지근했다⁠. 선배의 노트가 어디 있는지 솔미는 알았다⁠. 일 년 동안 승겸의 책상 위 인수인계 노트를 매일 펼친 사람이 솔미였고⁠, 지난 한 달 동안 기둥 앞 책상 위의 두꺼운 파일을 매일 곁눈질한 사람도 솔미였다⁠.

“⁠생각해 볼게요⁠.⁠”

“⁠금요일까지⁠. 이사회 자료가 그날 묶여⁠.⁠”

솔미가 일어났다⁠. 문 앞에서 인곤이 덧붙였다⁠.

“⁠구 팀장⁠, 몸 조심해⁠. 얼굴이 하얘⁠.⁠”

솔미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⁠. 닫힌 문에 등을 대자 속이 다시 뒤집혔다⁠. 솔미는 35층 화장실로 뛰었다⁠.

*

화요일 저녁⁠, 소비재팀이 여의도 뒷골목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다⁠. 솔미가 팀장이 되고 처음 여는 회식이었다⁠. 막내가 단체방에 「⁠특별분석팀 두 분도 오세요⁠!⁠」라고 올렸고⁠, 승겸도 왔다⁠. 소정은 가지 않으려다 두찬이 「⁠고기는 공짜예요⁠」라고 보내는 바람에 갔다⁠. 두찬은 쌍둥이 재울 시간이라며 고기 두 점을 먹고 일어났다⁠.

불판 위에서 삼겹살 기름이 튀었다⁠. 막내 둘이 휴대전화를 세워 놓고 숏폼을 찍었다⁠. 요즘 유행하는 춤이라고 했다⁠. 손을 귀 옆에서 두 번 돌리고 엉덩이를 한 번 튕기는 춤이었다⁠.

“⁠선배님도 같이 해요⁠! 「⁠영포티 챌린지⁠」예요⁠!⁠”

“⁠그게 뭔데⁠?⁠”

“⁠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척하는 춤이요⁠. 진짜 영포티가 하면 조회수 터져요⁠.⁠”

“⁠그거 놀리는 거잖아⁠.⁠”

“⁠놀리는 거 맞아요⁠. 근데 귀엽게 놀리는 거예요⁠.⁠”

소정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⁠. 승겸이 소주잔을 내려놓더니 일어났다⁠. 모두가 숨을 멈췄다⁠. 승겸은 막내의 휴대전화 앞에 가서 손을 귀 옆에서 두 번 돌렸다⁠. 엉덩이는 튕기지 않았다⁠. 튕길 줄 몰랐다⁠. 막내들이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⁠.

“⁠본부장님⁠, 엉덩이요⁠, 엉덩이⁠!⁠”

“⁠그건 경비 청구가 안 됩니다⁠.⁠”

소정은 웃다가 배를 잡았다⁠. 웃는 소정을 승겸이 보았다⁠. 안경알에 불판의 붉은빛이 어른거렸다⁠.

막내 하나가 솔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⁠. 솔미가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⁠. 막내가 다시 권했다⁠.

“⁠팀장님⁠, 첫 회식인데 한 잔은 하셔야죠⁠!⁠”

솔미의 손이 잔으로 갔다⁠. 손가락이 떨렸다⁠. 소정이 손을 뻗어 솔미의 잔을 가져왔다⁠.

“⁠구 팀장 잔은 내가 받아⁠. 내가 키운 애야⁠. 키운 사람이 받는 거야⁠.⁠”

소정은 잔을 비웠다⁠. 막내가 다시 솔미의 잔을 채우자 소정이 또 가져다 비웠다⁠. 세 번째 잔에서 승겸이 소정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⁠.

“⁠표 팀장님⁠.⁠”

“⁠표 수석이요⁠.⁠”

“⁠표 수석님⁠, 그만 드세요⁠.⁠”

“⁠구 팀장 잔이에요⁠.⁠”

솔미가 불판 너머에서 소정을 보았다⁠. 무슨 말을 하려다 입술을 다물었다⁠. 소정은 네 번째 잔을 비웠다⁠. 소주가 목을 뜨겁게 긁고 내려갔다⁠.

*

고깃집 뒤 골목은 환풍기가 뿜는 기름 냄새로 미끈거렸다⁠. 솔미가 먼저 나와 있었다⁠. 소정이 따라 나오자 솔미가 담배 대신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⁠. 석계환이 먹는 박하사탕과 같은 것이었다⁠.

“⁠선배⁠, 왜 대신 마셨어요⁠?⁠”

“⁠네가 못 마시잖아⁠.⁠”

“⁠제가 마실 수 있었으면요⁠?⁠”

“⁠그래도 마셨지⁠.⁠”

솔미가 사탕을 깨물었다⁠. 깨지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⁠.

“⁠부사장님이 각서 써 준대요⁠. 개편 뒤에도 2년 동안 팀장⁠. 휴직하든 출산하든⁠.⁠”

“⁠조건은⁠?⁠”

“⁠선배 노트요⁠.⁠”

소정은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⁠. 술기운에 벽이 조금 기울어 보였다⁠.

“⁠그래서 줄 거야⁠?⁠”

“⁠선배가 주면요⁠?⁠”

“⁠안 줘⁠.⁠”

“⁠그럼 제가 가져가야겠네요⁠.⁠”

솔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컸다⁠. 골목 끝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갔다⁠. 솔미는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⁠. 이번에는 낮았다⁠.

“⁠선배처럼 되기 싫어요⁠. 휴직하고 돌아와서 기둥 옆에 앉는 거⁠. 줄 색깔 바뀌는 거⁠. 막내들이 뒤에서 영포티라고 하는 거⁠. 선배 열세 해가 기둥 하나였잖아요⁠.⁠”

“⁠각서가 지켜질 것 같아⁠?⁠”

“⁠선배는 각서도 없었잖아요⁠.⁠”

소정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솔미의 말이 맞았다⁠. 맞아서 아팠다⁠. 소정은 벽에서 등을 떼고 솔미 앞으로 갔다⁠. 솔미의 남색 줄이 바람에 날렸다⁠. 소정은 줄을 잡아 바로 해 주려다⁠, 손을 거두었다⁠.

“⁠솔미야⁠. 노트 가져가려면 나한테 직접 달라고 해⁠. 몰래 가져가지 말고⁠.⁠”

“⁠달라고 하면 안 주시잖아요⁠.⁠”

“⁠안 주지⁠. 그래도 달라고 해⁠. 그래야 나중에 네가 나를 볼 수 있어⁠.⁠”

솔미가 고개를 돌렸다⁠. 사탕 조각이 입안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⁠. 솔미는 끝내 달라고 하지 않았다⁠. 골목 입구에서 택시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기다렸다⁠. 택시 옆에 승겸이 소정의 코트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⁠.

*

택시 뒷자리에서 소정은 창에 이마를 댔다⁠. 마포대교 불빛이 하나씩 지나갔다⁠. 승겸은 반대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⁠. 둘 사이에 소정의 가방과 노트 파일이 놓였다⁠. 승겸이 노트 파일을 가방 쪽으로 밀어 모서리를 맞췄다⁠.

“⁠본부장님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목도리 돌려줘요⁠. 아직 하고 있잖아요⁠.⁠”

승겸은 목에 감긴 회색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⁠. 일주일째였다⁠. 승겸이 목도리를 풀어 소정의 목에 감아 주었다⁠. 끝을 한 번 더 감는 손이 한강 편의점에서 소정이 한 것과 똑같았다⁠. 목도리에서 승겸의 냄새가 났다⁠. 비누와 식은 커피와 종이 냄새였다⁠.

소정은 이마를 창에서 떼고 승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⁠. 승겸이 숨을 멈췄다⁠. 택시가 교차로에서 서는 동안 승겸은 움직이지 않았다⁠. 다시 출발하자 승겸의 손이 소정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⁠.

“⁠계산 틀린다면서요⁠.⁠”

“⁠취해서 계산 안 해요⁠. 오늘은⁠.⁠”

“⁠그럼 내일은요⁠?⁠”

“⁠내일 다시 해요⁠.⁠”

*

수요일 오후 두 시⁠, 소정은 라윤의 학교 강당 의자에 앉아 있었다⁠. 2학년 돌봄교실 추첨이었다⁠. 맞벌이와 한부모 가정이 먼저 뽑힌다고 했는데⁠, 신청한 집이 자리보다 열둘이 많았다⁠. 강당에 앉은 부모들 대부분이 회사에서 반차를 내고 온 얼굴이었다⁠. 몇은 노트북을 무릎에 펴 놓고 있었다⁠.

교감 선생님이 투명한 상자에서 공을 하나씩 꺼냈다⁠. 번호가 불릴 때마다 누군가 작게 주먹을 쥐었다⁠. 소정 옆자리 아빠는 번호가 불리자 「⁠됐다⁠!⁠」 하고 일어났다가 사람들 눈길에 도로 앉았다⁠. 소정의 번호는 열여섯 번째 공에서 나왔다⁠. 소정은 주먹을 쥐지 않고 숨을 내쉬었다⁠. 내쉬는 숨이 길었다⁠.

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두찬이었다⁠.

「⁠팀장님⁠, 복합기 스캔 기록 좀 보세요⁠. 지금요⁠.⁠」

소정은 강당을 나와 복도에서 사내 망에 접속했다⁠. 기둥 옆 복합기의 사용 기록이 떴다⁠.

「⁠스캔 완료 — 214장 — 사용자 구솔미 — 2월 24일 13⁠:12⁠」

소정은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⁠. 두찬의 목소리가 떨렸다⁠.

“⁠점심시간에 팀장님 책상에서 파일을 들고 가서⁠, 복합기에 넣었어요⁠. 한 장씩 넘기면서요⁠. 저는 쌍둥이 어린이집 전화 받느라 늦게 봤어요⁠. 다 끝나고 파일은 제자리에 돌려놨어요⁠. 모서리까지 맞춰서요⁠.⁠”

소정은 복도 창밖을 보았다⁠. 운동장에서 2학년이 될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⁠. 하나가 줄에 걸려 넘어졌다가 일어났다⁠.

*

목요일 밤⁠, 라윤이 잠든 뒤 소정은 식탁에 노트 파일을 펼쳤다⁠. 겉보기에는 그대로였다⁠. 모서리도⁠, 포스트잇도⁠, 형광펜 줄도⁠. 소정은 맨 앞 종이부터 한 장씩 넘기며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읽었다⁠. 스캐너를 지나간 종이는 미세하게 따뜻했다가 식으면서 아주 조금 휘었다⁠. 대부분의 장이 그렇게 휘어 있었다⁠.

맨 뒤의 두 장만 휘지 않았다⁠. 반듯했다⁠. 모아린의 해외 대리점 주인이 누구인지 적힌 각주와⁠, 반품에 대비한 돈을 줄인 각주를 오려 붙인 두 장이었다⁠. 아홉 시 콜에서 소정을 이기게 한 두 장이었다⁠.

소정은 숫자를 다시 세었다⁠. 노트는 이백십육 장이었다⁠. 스캔 기록은 이백십사 장이었다⁠. 솔미는 두 장을 넘기지 않았다⁠. 넘기다 멈춘 것인지⁠, 처음부터 넘기지 않으려 한 것인지⁠, 반듯한 종이는 말하지 않았다⁠.

소정은 두 장을 손바닥으로 쓸었다⁠. 종이가 차가웠다⁠. 소정은 두 장을 파일에서 조심스럽게 빼내 라윤의 받아쓰기 공책 사이에 끼웠다⁠. 인공지능도⁠, 부사장도⁠, 솔미도 열어 볼 일이 없는 공책이었다⁠. 꼬불꼬불한 ‘⁠ㄹ⁠’들 사이에서 처남의 창고가 잠들었다⁠.

금요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⁠, 두찬이 소정보다 먼저 와 있었다⁠. 모니터에 고객용 리포트 화면이 떠 있었다⁠. 새마루투자증권 이름이 맨 위에 박혀 있었고⁠, 회사 이름 아래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⁠. 「⁠브레인포지 인공지능 분석 — 시범 발행⁠」

「⁠모아린화장품 — 재고의 시간⁠」

“⁠밤 열두 시에 고객사 서른 곳에 나갔어요⁠. 시범이라고는 하는데⁠, 우리 회사 이름으로요⁠.⁠”

소정은 화면을 내렸다⁠. 문장이 매끄러웠다⁠. 매끄러운 문장 사이사이에 소정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⁠. 대리점 창고가 먼저 말한다⁠. 스티커는 세 겹이다⁠. 1월에 선크림을 천장까지 쌓는 매장은 드물다⁠. 소정이 일 년 동안 밤마다 쓴 문장들이 쉼표 하나 바뀌지 않고 들어 있었다⁠.

여섯 번째 장 표 아래에서 소정의 눈이 멈췄다⁠.

「⁠재고자산회전률⁠」

열세 해 동안 고치지 못한 오타였다⁠. 해옥이 빨간 펜으로 그어 주던 오타였다⁠. 승겸이 보고서에 옮겨 놓고 고치지 않았던 오타였다⁠. 인공지능은 오타까지 배웠다⁠. 배워서⁠, 고객사 서른 곳에 보냈다⁠.

유리방 앞자리에서 솔미가 출근했다⁠. 솔미는 가방을 내려놓다가 소정의 모니터를 보았다⁠. 소정이 고개를 들었다⁠. 둘의 눈이 처음으로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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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일곱줄2026.11.01· 9화

    부사장실 분재 다섯 개 앞에서 숨 고르는 솔미 씨 너무 긴장됐어요.

    • 여시결작가2026.11.01

      솔미 씨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게 있어요. 그 방에서 들은 말이 회식 자리까지 따라옵니다.

회식 ·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