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05자)

한강 편의점

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여시결

다음 날 아침 여섯 시 오십 분⁠, 소정은 28층 유리문 앞에서 사원증을 찾느라 가방을 두 번 뒤집었다⁠. 사원증은 어젯밤 남색 줄째로 승겸의 책상에 두고 왔다⁠. 출근 기록기 앞에 서서 소정은 소리 내 웃었다⁠. 상자를 거절한 사람이 문을 못 열었다⁠.

경비실에서 임시 출입증을 받아 들어온 소정에게 승겸의 비서 역할을 하는 막내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⁠. 봉투 안에 사원증 카드만 들어 있었다⁠. 남색 줄은 없었다⁠. 소정은 기둥 앞 서랍을 열었다⁠. 1월 4일 아침에 받은 코랄색 줄이 비닐도 안 뜯긴 채 서랍 구석에 있었다⁠. 소정은 카드를 코랄색 줄에 끼워 목에 걸었다⁠. 출입문은 줄 색을 보지 않았다⁠. 카드만 보았다⁠.

두찬이 출근하다 소정의 목을 보고 멈췄다⁠.

“⁠팀장님⁠, 강등당하셨어요⁠?⁠”

“⁠제가 했어요⁠.⁠”

“⁠스스로요⁠?⁠”

“⁠네⁠. 이제 표 수석이에요⁠.⁠”

두찬은 한참 생각하더니 자기 목의 코랄색 줄을 만졌다⁠.

“⁠그럼 저랑 같은 색이네요⁠. 저 그거 좋아요⁠. 쌍둥이도 옷 같은 색 입히면 덜 싸워요⁠.⁠”

*

오전 열 시⁠, 1층 로비 안내 데스크에서 두찬에게 전화가 왔다⁠. 두찬은 전화를 받고 얼굴이 하얘졌다⁠. 의자에서 일어나 소정의 등을 두 번 토닥이고⁠, 토닥인 것도 모르고 말했다⁠.

“⁠장인어른이 오셨대요⁠. 로비에⁠. 회사 구경 오셨대요⁠. 재택근무 하는 사위 회사⁠.⁠”

“⁠두찬 씨⁠, 지금 사무실에 있잖아요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요⁠. 재택이면 사무실에 없어야 하잖아요⁠. 아니⁠, 사무실에 있으면 재택이 아니잖아요⁠. 아니⁠, 저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⁠?⁠”

소정은 두찬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고 같이 1층으로 내려갔다⁠. 로비 소파에 일흔 남짓한 남자가 홍삼 상자를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⁠. 등산 점퍼에 중절모를 쓴 남자였다⁠. 두찬을 보더니 모자를 벗었다⁠.

“⁠자네 회사는 재택근무를 회사에 와서 하는가⁠?⁠”

두찬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⁠. 소정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⁠.

“⁠안녕하세요⁠, 아버님⁠. 곽두찬 선임 팀장 표소정입니다⁠. 곽 선임은 저희 특별분석팀 핵심 인력이세요⁠. 오늘은 중요한 분석 때문에 출근했고요⁠.⁠”

장인은 소정의 코랄색 줄을 보고⁠, 두찬의 코랄색 줄을 보았다⁠.

“⁠팀장이라는데 줄이 같은 색이네⁠.⁠”

“⁠저희 팀은 평등해서요⁠.⁠”

“⁠자리는 어딘가⁠? 올라가 보세⁠.⁠”

28층 기둥 앞에서 장인은 의자 두 개와 복합기와 떡뻥 봉지를 차례로 보았다⁠. 복합기가 마침 더운 바람을 뿜었다⁠. 장인이 손바닥을 내밀어 바람을 쬐었다⁠.

“⁠여기가 핵심 자리인가⁠?⁠”

“⁠등이 따뜻합니다⁠, 아버님⁠.⁠”

두찬이 고개를 숙였다⁠. 한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⁠. 장인이 홍삼 상자를 두찬의 책상에 내려놓고 등을 폈다⁠.

“⁠딸이 다 말했어⁠. 자네가 애 본다고 일 년 쉰 거⁠. 나는 그거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⁠.⁠”

“⁠죄송합니다⁠, 아버님⁠.⁠”

“⁠뭐가 죄송해⁠. 나는 애를 못 봐서 부끄러웠지⁠. 자네 처 어릴 때 기저귀 한 번 못 갈아 봤어⁠. 그래서 부끄러웠어⁠. 자네는 할 줄 알잖아⁠.⁠”

장인은 중절모를 다시 썼다⁠.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가 돌아보았다⁠.

“⁠근데 자리가 이게 뭔가⁠. 일 년 애 봤다고 기둥 옆에 앉히는 회사가 어디 있어⁠.⁠”

장인을 배웅하고 돌아온 두찬은 한참 의자를 흔들었다⁠. 쌍둥이를 재우는 박자보다 빨랐다⁠. 그러다 의자를 멈추고 모니터에 어제 내렸던 기사를 다시 띄웠다⁠.

“⁠팀장님⁠, 진정 넣어요⁠. 노동청에⁠.⁠”

진정은 회사가 법을 어겼다고 고용노동부 지방 관서에 알리고 조사를 청하는 일이었다⁠. 육아휴직을 마친 사람은 쉬기 전과 같은 일이나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로 돌려보내야 한다⁠. 회사는 월급을 그대로 두고 팀을 없앴다⁠. 법의 틈이었고⁠, 틈을 따지는 곳이 노동청이었다⁠.

“⁠두찬 씨⁠, 싸우면 찍힌다면서요⁠.⁠”

“⁠이미 찍혔어요⁠. 기둥 옆에요⁠. 장인어른이 그러셨잖아요⁠.⁠”

두찬의 목소리가 유리방까지 들렸다⁠. 유리방은 방음이 안 되는 방이었다⁠. 승겸이 고개를 들었다⁠.

*

저녁 일곱 시⁠, 승겸이 메신저를 보냈다⁠. 「⁠잠깐 걸으시죠⁠. 한강공원 편의점 앞⁠. 회사 안에서는 못 할 말입니다⁠.⁠」

여의도 한강공원은 2월 저녁인데도 바람이 칼 같았다⁠. 편의점 앞 플라스틱 탁자에 승겸이 컵라면 두 개를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⁠. 짙은 남색 코트를 입었는데 목도리가 없었다⁠. 김이 바람에 옆으로 누웠다⁠.

“⁠어제 일은 사과드리지 않겠습니다⁠. 사과하면 서명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되니까요⁠.⁠”

“⁠그럼 무슨 말 하려고 불렀어요⁠?⁠”

“⁠곽 선임님 진정을 막아 주십시오⁠.⁠”

소정은 젓가락을 쪼개다 멈췄다⁠. 한쪽이 길게⁠, 한쪽이 짧게 쪼개졌다⁠.

“⁠진정이 들어가면 노동청이 조사를 나옵니다⁠. 이사회가 2주 앞입니다⁠. 부사장님은 그걸 들고 이사회에 들어갈 겁니다⁠. 문제 많은 조직은 반으로 줄일 게 아니라 통째로 브레인포지에 넘기는 게 낫다고요⁠. 스물이 아니라 마흔하나가 됩니다⁠.⁠”

“⁠그건 본부장님 계산이죠⁠.⁠”

“⁠제가 본 일입니다⁠.⁠”

승겸이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⁠. 면이 덜 익었는데도 젓가락을 넣었다⁠. 바람이 안경알에 김을 씌웠다가 걷어 갔다⁠.

“⁠전 직장이 외국계였습니다⁠. 하버라인증권 서울 지점⁠. 2024년 11월 어느 화요일 아침 일곱 시에 메일이 왔습니다⁠. 「⁠서울 리서치팀 운영 종료⁠」 일곱 시 반에 출근한 사람들 사원증이 출입문에서 안 열렸습니다⁠. 서른 명이요⁠. 로비에서 상자를 받았습니다⁠. 상자 안에 각자 책상에 있던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⁠. 누가 밤사이에 담아 둔 거였습니다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은요⁠?⁠”

“⁠제 사원증은 열렸습니다⁠. 홍콩 데스크로 옮긴다고 했습니다⁠. 실적이 제일 좋았거든요⁠. 저는 19층 유리문 안에서⁠, 서른 명이 로비에서 상자 들고 나가는 걸 봤습니다⁠. 한 선배는 상자에서 딸이 그린 그림을 꺼내 들고 한참 서 있었습니다⁠. 그림 속 아빠가 넥타이를 매고 있었어요⁠.⁠”

승겸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⁠. 손가락이 바람에 하얗게 굳어 있었다⁠.

“⁠그날 알았습니다⁠. 숫자가 없으면 아무도 못 지킨다는 거⁠. 숫자가 있는 사람 하나만 남는다는 거⁠. 그래서 홍콩 안 가고 여기로 왔습니다⁠. 여기서는 숫자로 사람을 지켜 보려고요⁠. 표 팀장님 면접에서⁠, 의심을 묻는 질문을 받고 여기다 싶었습니다⁠.⁠”

소정은 목도리를 풀었다⁠. 회색 목도리였다⁠. 풀어서 승겸의 목에 둘러 주었다⁠. 승겸이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소정은 목도리 끝을 한 번 더 감았다⁠.

“⁠본부장님 손 떨려서 라면 국물 다 쏟겠어요⁠.⁠”

“⁠표 팀장님 목은요⁠?⁠”

“⁠저는 영포티라 목이 두꺼워요⁠.⁠”

승겸이 웃지 못하고 목도리에 턱을 묻었다⁠. 소정은 덜 익은 라면을 한 젓가락 먹었다⁠. 면이 딱딱했다⁠.

“⁠본부장님 말이 다 맞아요⁠. 숫자 없으면 못 지켜요⁠. 그런데요⁠, 넷을 먼저 빼는 계산은 한 번으로 안 끝나요⁠. 다음 해엔 다섯이 되고⁠, 그다음 해엔 휴직하려는 사람이 먼저 빠져요⁠. 솔미 같은 애들이요⁠. 그러면 아무도 애를 안 낳거나⁠, 낳고 나서 회사를 안 와요⁠. 그럼 센터는 사람이 남아도 사람이 없어요⁠.⁠”

“⁠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⁠?⁠”

“⁠진정은 아직 안 넣어요⁠. 두찬 씨한테는 제가 말할게요⁠.⁠”

승겸의 눈이 커졌다⁠.

“⁠대신 저는 본부장님 숫자를 다시 계산할 거예요⁠. 두 배가 어디서 왔는지⁠. 그게 제 진정이에요⁠. 노동청 말고 이사회에 낼 거예요⁠.⁠”

“⁠이사회에 내시려면 숫자가 필요합니다⁠. 운용사별 수수료 자료는 본부장만 봅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⁠”

“⁠드릴 수 없습니다⁠. 아직은⁠.⁠”

“⁠또 아직이네요⁠. 본부장님 말에는 아직이 너무 많아요⁠.⁠”

“⁠아직이 끝나는 날을 저도 세고 있습니다⁠.⁠”

바람이 컵라면 뚜껑을 날려 보냈다⁠. 뚜껑은 강변 산책로를 굴러가다 자전거 바퀴에 밟혀 멈췄다⁠. 승겸이 일어나 뚜껑을 주워 왔다⁠. 주워 와서 쓰레기통에 넣기 전에 뚜껑에 묻은 흙을 손수건으로 닦았다⁠. 소정은 손수건 버릇을 보고 웃음이 났다⁠. 웃음이 나서 화가 덜 났다⁠.

*

밤 아홉 시⁠, 소정은 두찬에게 전화했다⁠. 두찬은 쌍둥이를 목욕시키는 중이라 스피커로 받았다⁠. 물 튀기는 소리와 아기 웃음소리가 번갈아 들렸다⁠.

“⁠두찬 씨⁠, 진정은 조금만 기다려요⁠. 이사회 전까지⁠.⁠”

“⁠왜요⁠? 장인어른도 넣으래요⁠. 아까 문자 왔어요⁠. 「⁠자리 바꿔 달라고 해라⁠. 안 되면 내가 다시 간다⁠.⁠」⁠”

“⁠아버님 다시 오시면 본부장님 기절해요⁠.⁠”

두찬이 웃다가 쌍둥이 하나에게 물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⁠. 비명 끝에 목소리가 가라앉았다⁠.

“⁠팀장님⁠, 저 처음으로 싸우려고 했어요⁠. 서른여덟 해 만에요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그래서 기다려 달라는 거예요⁠. 진정서는 이사회에서 질 때 넣어요⁠. 그때는 저도 이름 같이 넣을게요⁠.⁠”

전화 너머에서 한참 물소리만 났다⁠. 쌍둥이 하나가 「⁠아빠⁠」 비슷한 소리를 냈다⁠.

“⁠그럼 써 놓기만 할게요⁠. 서랍에⁠. 떡뻥 옆에요⁠.⁠”

“⁠떡뻥 옆이면 안전하네요⁠.⁠”

“⁠제일 안전해요⁠. 거긴 아무도 안 열어요⁠. 맛이 없어서요⁠.⁠”

밤 열 시⁠, 엄마의 전화가 왔다⁠. 라윤은 마포 집에서 자기로 했다⁠.

“⁠소정아⁠, 너 팀장 그거 돌려줬다며⁠? 라윤이가 그러더라⁠. 엄마 목에 줄 색깔이 바뀌었다고⁠.⁠”

“⁠애는 그런 걸 다 봐⁠.⁠”

“⁠그냥 받아라⁠. 팀장⁠. 주는 거 받고⁠, 라윤이 학교 다니는 거 보고⁠. 엄마 무릎도 이제 계단 두 번은 못 쉬어⁠.⁠”

엄마는 무릎 이야기를 하고 나서 미안했는지 목소리를 바꿨다⁠.

“⁠그 안경 총각은⁠? 아직 네 자리에 앉아 있니⁠?⁠”

“⁠목도리 하고 있어⁠. 내 거⁠.⁠”

“⁠아이고⁠.⁠”

엄마는 웃었는데⁠, 웃음 끝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⁠. 소정은 전화를 끊고 식탁에 노트 파일을 펼쳤다⁠. 첫 장에 승겸 본부의 운용사 여섯 곳을 옮겼다⁠. 회사마다 옆에 물음표를 하나씩 달았다⁠.

*

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십 분⁠, 28층 여자 화장실 맨 끝 칸에서 누군가 속이 불편해하는 소리가 들렸다⁠. 소정은 손을 씻다 멈췄다⁠. 소리가 그치고 물 내리는 소리가 났다⁠. 문이 열리고 솔미가 나왔다⁠. 얼굴이 종이처럼 하얬다⁠. 소정을 보고 솔미가 도로 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⁠.

“⁠솔미야⁠.⁠”

“⁠아니에요⁠. 어제 회식 고기가 좀⁠.⁠”

“⁠어제 회식 없었어⁠.⁠”

솔미가 세면대 앞으로 왔다⁠. 거울 속에서 솔미의 남색 줄이 한 번 흔들렸다⁠. 소정은 핸드타월을 두 장 뽑아 솔미에게 건넸다⁠. 솔미는 받지 않고 세면대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⁠. 손톱 끝이 하얗게 눌렸다⁠.

“⁠선배⁠.⁠”

“⁠응⁠.⁠”

“⁠저 임신했어요⁠. 팔 주요⁠.⁠”

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⁠. 솔미는 거울 속 소정을 보지 않고 자기 남색 줄을 보았다⁠.

“⁠병원은⁠?⁠”

“⁠지난 토요일에요⁠. 심장 소리 들었어요⁠. 생각보다 빨라요⁠. 말 달리는 소리 같았어요⁠.⁠”

솔미가 처음으로 웃으려다 말았다⁠.

“⁠회사엔 말 못 해요⁠. 팀장 단 지 두 달 됐어요⁠. 개편안 봤죠⁠? 3월 다음엔 제 차례예요⁠. 선배 자리 재검토⁠, 그다음이 저예요⁠.⁠”

소정은 핸드타월을 솔미의 손에 쥐여 주었다⁠. 솔미의 손이 찼다⁠. 일 년 전⁠, 소정이 휴직서를 내던 날 아침 솔미가 소정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⁠. 「⁠선배 자리⁠,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⁠.⁠」 일 년 동안 약속을 지킨 사람의 손이었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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