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345자)

커플 할인

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여시결

화요일 아침 열 시⁠, 성수동 모아린화장품 매장은 아직 문을 연 지 십 분밖에 안 돼 바닥 왁스 냄새가 진했다⁠. 소정은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손님처럼 진열대 사이를 걸었다⁠. 연구원들은 이 일을 채널 체크라고 불렀다⁠. 회사가 발표하는 숫자 말고⁠, 매장에서 물건이 실제로 팔리는지 눈으로 확인하러 다니는 일이었다⁠.

선크림 진열대가 이상하게 높았다⁠. 1월에 선크림을 천장 가까이 쌓는 매장은 드물었다⁠. 소정은 맨 아래 상자를 살짝 기울여 바닥 면을 보았다⁠. 제조일자가 작년 4월이었다⁠. 진열대 앞의 할인 스티커는 「⁠30%⁠」였는데⁠, 손톱으로 모서리를 들추자 밑에서 「⁠20%⁠」가⁠, 다시 맨 밑에서 「⁠1+1⁠」이 나왔다⁠. 세 겹이었다⁠.

“⁠고객님⁠, 스티커 떼시면 안 돼요⁠.⁠”

직원이 다가오다 멈췄다⁠. 소정 뒤를 보고 있었다⁠. 소정이 돌아보니 진열대 끝에 진승겸이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⁠. 장바구니 안에 립스틱이 열두 개⁠, 색깔별로 줄을 맞춰 누워 있었다⁠.

“⁠표 수석님도 채널 체크 오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본부장님은 립스틱 쇼핑 오셨어요⁠?⁠”

“⁠제조번호를 보려고 샀습니다⁠. 회사에 경비 청구할 겁니다⁠.⁠”

직원의 얼굴이 환해졌다⁠.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⁠, 장바구니 두 개를 번갈아 보고⁠, 결론을 내렸다⁠.

“⁠커플이시면 두 번째 립은 반값이에요⁠. 오늘까지만요⁠.⁠”

소정이 아니라고 하기 전에 승겸이 먼저 말했다⁠.

“⁠커플은 아니고⁠, 직장 상사입니다⁠.⁠”

“⁠아⁠, 사내 커플⁠!⁠”

직원은 손뼉을 치더니 계산대로 가서 커플 할인 버튼을 눌렀다⁠. 승겸이 안경을 고쳐 쓰는 것을 소정은 처음 보았다⁠. 귀 끝이 빨갰다⁠.

계산대 앞에 둘이 나란히 붙었다⁠. 직원이 립스틱을 하나씩 찍는 동안 소정이 낮게 말했다⁠.

“⁠선크림 제조일이 작년 4월이에요⁠. 여름에 못 판 걸 지금 밀고 있어요⁠. 할인 스티커는 세 겹이고요⁠.⁠”

“⁠1월은 원래 할인 철입니다⁠. 연말 재고를 털어야 봄 신상을 받으니까요⁠.⁠”

“⁠원래 할인이면 스티커가 한 겹이죠⁠. 세 겹은 석 달 동안 안 팔렸다는 말이에요⁠.⁠”

승겸은 대답 대신 계산된 립스틱 하나를 집어 바닥의 제조번호를 읽었다⁠. 읽고 나서 하나 더 집어 읽었다⁠. 세 번째를 읽을 때는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⁠. 소정은 눈썹 끝을 놓치지 않았다⁠. 숫자를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썹이었다⁠.

“⁠이것도 작년 봄 제조네요⁠.⁠”

“⁠그렇네요⁠.⁠”

“⁠반박 자료로 쓰겠습니다⁠. 할인은 재고 소진이 끝나 간다는 신호로도 읽힙니다⁠. 털 만큼 털고 나면 봄부터는 새 물건만 남으니까요⁠.⁠”

“⁠같은 스티커를 보고 반대로 읽으시네요⁠.⁠”

“⁠같은 걸 보고 반대로 읽어야 내기가 되죠⁠.⁠”

직원이 영수증 두 장을 내밀었다⁠. 「⁠커플 할인 적용⁠」이라는 글씨가 두 장에 똑같이 찍혀 있었다⁠. 승겸은 영수증을 반으로 접어 지갑 안에 모서리를 맞춰 넣었다⁠. 소정은 영수증을 구겨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가⁠, 경비 청구가 생각나 도로 폈다⁠.

*

오후에는 경기도 화성으로 갔다⁠. 모아린 제품을 동네 약국과 화장품 가게에 대 주는 대리점이었다⁠. 창고 앞에서 대리점 사장은 소정을 보자 목장갑을 벗고 두 손으로 악수를 했다⁠. 소정이 신입이던 해부터 십 년 넘게 명절마다 귤 한 상자씩 주고받은 사이였다⁠.

“⁠표 팀장⁠, 애기 낳았다며⁠. 얼굴이 폈네⁠.⁠”

“⁠애기는 여덟 살이에요⁠, 사장님⁠. 휴직은 학교 들어가서 했어요⁠.⁠”

“⁠벌써⁠? 내가 늙었네⁠.⁠”

창고 안은 차가웠고⁠, 모아린 상자가 지게차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⁠. 상자 옆면에 매직으로 적은 입고 날짜가 9월⁠, 12월⁠, 12월⁠, 12월이었다⁠. 소정은 맨 아래 상자부터 위로 날짜를 읽어 올라갔다⁠. 12월 날짜만 유난히 많았다⁠.

“⁠사장님⁠, 12월에 많이 받으셨네요⁠.⁠”

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⁠. 종이컵 두 개가 덜컹 떨어졌다⁠. 한 잔을 소정에게 건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⁠.

“⁠분기 말마다 본사 영업부장이 와⁠. 이번 분기 숫자 맞춰야 한다고 물건을 내려놔⁠. 돈은 나중에 팔리면 달라고⁠. 외상으로 달아 주는 거지⁠. 안 받으면 다음 신상 물량을 안 줘⁠.⁠”

본사가 대리점에 물건을 떠넘겨 매출을 앞당겨 잡는 일⁠, 업계에서는 밀어내기라고 불렀다⁠. 회사의 분기 매출은 늘고⁠, 대리점 창고는 차고⁠, 매장에는 스티커가 세 겹으로 붙는다⁠.

“⁠제가 들은 거⁠, 보고서에 써도 돼요⁠?⁠”

“⁠내 이름만 빼⁠. 내 이름 들어가면 나 다음 달에 문 닫아⁠.⁠”

“⁠사장님 이름은 안 넣어요⁠.⁠”

“⁠표 팀장은 이름 안 넣는 거 알아⁠. 그래서 말한 거야⁠.⁠”

사장은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고 목장갑을 다시 꼈다⁠. 장갑 손가락 끝마다 구멍이 나 있었다⁠.

*

목요일 저녁⁠, 소정은 마포 엄마 집 주차장에서 휴대전화를 가로로 들었다⁠. 라윤이 줄넘기 손잡이를 양손에 쥐었다⁠.

“⁠엄마⁠, 몇 개 해⁠?⁠”

“⁠단톡방에 다른 애들은 백 개씩 올렸더라⁠.⁠”

“⁠백 개⁠? 나 서른 개밖에 못 하는데⁠.⁠”

“⁠서른 개를 세 번 해⁠. 엄마가 이어 붙일게⁠.⁠”

“⁠그거 거짓말이잖아⁠.⁠”

라윤이 줄넘기를 내리고 소정을 빤히 보았다⁠. 소정은 휴대전화를 내렸다⁠. 여덟 살의 눈은 분기 매출을 맞추는 영업부장보다 정직했다⁠.

“⁠그럼 서른 개만 올리자⁠.⁠”

라윤은 스물일곱 개에서 걸렸고⁠, 다시 해서 서른하나를 했다⁠. 소정은 서른하나짜리 영상을 단톡방에 올렸다⁠. 곧바로 곰 이모티콘이 박수를 쳤다⁠.

엄마는 베란다 창을 열고 내려다보며 소리쳤다⁠.

“⁠그 본부장 몇 살이라고⁠? 서른넷⁠?⁠”

“⁠엄마⁠, 동네 사람들 다 들어⁠.⁠”

“⁠장가는 갔대⁠?⁠”

“⁠안경 썼어⁠.⁠”

“⁠안경 쓴 거랑 장가랑 무슨 상관이야⁠.⁠”

엄마는 웃으며 창을 닫더니 다시 열었다⁠.

“⁠밥 먹고 가⁠. 무릎 아파서 국은 못 끓였다⁠.⁠”

소정은 엄마의 무릎을 생각했다⁠. 라윤을 하교시키고 저녁까지 봐 주는 일 년 동안 엄마는 계단을 세 번 쉬고 올랐다⁠. 복직은 소정이 했지만⁠, 엄마의 무릎도 다시 출근한 것과 같았다⁠.

*

수요일 아침 회의가 끝나자 사내 메신저에 막내들의 단체방 하나가 조용히 생겼다⁠. 누가 실수로 소정까지 초대했다가 삼 초 만에 내보냈지만⁠, 소정은 삼 초면 충분했다⁠. 단체방 이름은 「⁠월요일 아홉 시 커피 내기⁠」였고⁠, 공지에는 이렇게 떠 있었다⁠.

「⁠본부장님 11명 / 영포티 선배 2명 / 기권 1명(⁠센터장님⁠, 혈당 때문에⁠)⁠」

소정은 두 명이 누구인지 궁금했다⁠. 복합기에 출력물을 찾으러 가는 척 사무실을 한 바퀴 돌자⁠, 막내 하나가 모니터 뒤에서 엄지를 들었다가 얼른 내렸다⁠. 다른 하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⁠.

목요일 밤 열 시⁠, 사무실에는 소정과 유리방의 불만 남았다⁠. 소정은 기둥 앞에서 대리점 입고 날짜를 표로 옮기고 있었다⁠. 복합기가 꺼지자 등이 금방 식었다⁠. 유리문이 열리고 승겸이 캔커피 두 개를 들고 나왔다⁠. 하나를 소정의 책상 모서리에 놓았다⁠. 모서리와 캔 바닥의 선이 정확히 맞았다⁠.

“⁠뇌물이에요⁠?⁠”

“⁠경비 청구할 겁니다⁠. 립스틱이랑 같이⁠.⁠”

승겸은 돌아가지 않고 기둥에 등을 댔다⁠. 소정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장을 보는 것이 티가 났다⁠.

“⁠일 년 동안 표 수석님 노트를 매일 읽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포스트잇이 고슴도치던데요⁠.⁠”

“⁠글씨가 급하면 오른쪽으로 눕더군요⁠. 확신이 있는 대목일수록 더 눕고요⁠. 모아린 장은 거의 누워 있었습니다⁠.⁠”

소정은 손을 멈췄다⁠. 자기 글씨가 어느 쪽으로 눕는지 소정 자신도 몰랐다⁠. 일 년 동안 남의 글씨를 그렇게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눈을⁠, 소정은 그제야 정면으로 보았다⁠. 안경 너머 눈동자가 피곤해서 조금 붉었다⁠.

“⁠그럼 이번엔 제 글씨가 어느 쪽으로 누울지도 아시겠네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 무섭습니다⁠.⁠”

승겸은 캔커피를 따지 않고 들고 유리방으로 돌아갔다⁠. 소정은 자기 캔을 땄다⁠. 너무 달았다⁠. 달아서 끝까지 마셨다⁠.

*

금요일 밤 열한 시가 넘어 소정은 초안을 끝냈다⁠. 제목은 「⁠모아린화장품 — 대리점 창고가 먼저 말한다⁠」였다⁠. 세 겹 스티커⁠, 작년 봄 제조일자⁠, 12월에 몰린 입고 날짜⁠, 그리고 분기 보고서 각주에서 찾은 대리점 외상값의 증가⁠. 대리점 사장의 이름은 넣지 않았다⁠.

약속대로 승겸이 열어 준 공유 폴더에 파일을 올렸다⁠. 올리면서 잠깐 망설였다⁠. 공정하게⁠, 라고 쓴 사람은 승겸이었고⁠, 공정하게⁠, 라고 답한 사람은 소정이었다⁠. 받은 말은 지키는 것이 소정이 열세 해 동안 일한 방식이었다⁠.

토요일은 라윤의 수영 강습과 엄마의 정형외과 진료로 지나갔다⁠. 대기실 텔레비전에서 경제 뉴스가 흘렀다⁠. 「⁠대형 증권사 세 곳⁠, 리서치 인력 두 자릿수 감축⁠」 엄마는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트로트로 돌렸다⁠.

“⁠너네 회사도 저래⁠?⁠”

“⁠우리 회사는 아직 안 그래⁠.⁠”

“⁠아직이면 곧이네⁠.⁠”

엄마는 무릎에 얹은 손가방을 두 손으로 눌렀다⁠. 진료 순서를 알리는 화면에 엄마 이름이 세 번째로 떠 있었다⁠.

“⁠소정아⁠, 팀장 그거 꼭 다시 해야 돼⁠? 월급은 그대로라며⁠. 일찍 퇴근하고 라윤이 숙제 봐 주고⁠. 그것도 사는 거야⁠.⁠”

“⁠엄마⁠, 월급은 그대로인데 팀장 수당이 빠졌어⁠. 그리고 내가 팀장 안 하면⁠, 내 팀 애들이 남이 쓴 결론에 이름만 올려⁠.⁠”

“⁠너 그거 아빠 닮았다⁠. 남 걱정하다 제 무릎 나가는 거⁠.⁠”

엄마는 웃었고⁠, 화면에서 엄마 이름이 두 번째로 올라갔다⁠. 라윤이 수영 가방에서 젖은 수경을 꺼내 엄마 무릎에 대 주며 말했다⁠.

“⁠할머니⁠, 차가운 거 대면 덜 아파⁠.⁠”

“⁠아이고⁠, 우리 강아지가 의사네⁠.⁠”

진료실 문이 열리고 엄마가 일어났다⁠. 일어나는 데 두 번 힘을 주어야 했다⁠. 소정은 엄마의 팔꿈치를 받쳤다⁠. 받친 손바닥에 엄마의 무게가 한꺼번에 실렸다가⁠, 문턱을 넘으며 천천히 빠져나갔다⁠.

일요일 밤⁠, 라윤을 재우고 공유 폴더를 열었다⁠. 승겸의 모아린 보고서가 새 판으로 올라와 있었다⁠. 고친 시각은 토요일 새벽 두 시⁠. 소정은 새로 붙은 한 장을 열었다⁠.

「⁠재고 우려에 대하여 — 매장 할인 스티커의 겹침과 대리점 외상값 증가는 해외 대리점 확장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판단⁠」

소정의 초안 순서 그대로였다⁠. 스티커⁠, 외상값⁠, 그리고 반박⁠. 초안이 올라간 지 하루 만에 승겸은 소정이 할 말을 전부 듣고⁠, 대답까지 마쳐 두었다⁠.

화면 오른쪽에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⁠. 승겸의 메모가 아니었다⁠.

「⁠선배는 제일 센 근거를 각주에 둡니다⁠. 콜에서도 마지막에 각주로 칩니다⁠. 각주부터 막으셔야 해요⁠.⁠」

말투를 소정은 알았다⁠. 소정이 가르친 말투였다⁠. 소정은 폴더의 열람 기록 단추를 눌렀다⁠. 이름과 시각이 줄지어 떴다⁠.

「⁠구솔미 — 표소정_모아린_초안 — 1월 8일 23⁠:41 열람 · 23⁠:58 다운로드⁠」

소정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엎어 놓았다⁠. 엎어 놓은 휴대전화 위로 냉장고 소리가 웅웅 지나갔다⁠. 한참 뒤 휴대전화를 다시 뒤집었다⁠. 솔미에게 메시지를 쓰다가 지우고⁠, 승겸에게 쓰다가 지웠다⁠. 마지막으로 노트 파일을 끌어다 맨 뒤 장을 펼쳤다⁠. 초안에 넣지 않은 각주가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⁠. 모아린의 해외 매출 절반을 받아 가는 대리점의 주인이 누구인지 적힌 각주였다⁠.

소정은 빨간 펜 뚜껑을 이로 물었다⁠. 이번에는 공유 폴더에 올리지 않을 생각이었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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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소담율2026.11.01· 2화

    매장 돌면서 실제로 팔리는지 확인하는 채널 체크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. 일하는 장면이 진짜 같아요.

    • 여시결작가2026.11.01

      소정 씨는 숫자보다 매장 바닥을 믿는 사람이에요. 그래서 복직 첫 주에 장바구니부터 듭니다.

커플 할인 ·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