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412자)

코랄색 줄

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여시결

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표소정은 왼쪽 머리를 귀 뒤로 한 번 더 넘겼다⁠. 턱선에서 자른 검은 단발은 일 년 만의 출근을 눈치챘는지 자꾸 앞으로 쏟아졌다⁠. 베이지 트렌치코트 안의 흰 셔츠에는 어젯밤 라윤이 다림질을 돕겠다고 나선 흔적이 소매에 반달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⁠. 품에는 두꺼운 노트 파일을 안았다⁠. 휴직한 일 년 동안 라윤이 잠든 밤마다 채운 파일이라⁠, 등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⁠.

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라윤네 1학년 3반 학부모 단톡방이었다⁠.

「⁠방학 줄넘기 인증 아직 안 올리신 분 세 분 계십니다^^⁠」

웃음 표시 뒤로 줄넘기를 하는 곰 이모티콘이 따라왔다⁠. 세 분 가운데 한 분이 자기라는 것을 소정은 알았다⁠. 라윤의 줄넘기는 지금 마포 외할머니 집 현관에 엉킨 채 놓여 있었다⁠.

28층에서 문이 열리자 토너 냄새와 원두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⁠. 소정은 오른쪽으로 열한 걸음을 걸었다⁠. 몸이 먼저 기억하는 걸음이었고⁠, 열한 걸음 끝에는 「⁠소비재팀⁠」 명패를 붙인 낮은 파티션이 있어야 했다⁠.

명패 대신 유리벽이 있었다⁠. 천장까지 닿은 유리 안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둘⁠, 화이트보드 하나가 놓였고⁠, 유리문에는 흰 글씨로 「⁠전략리서치본부장 진승겸⁠」이 붙어 있었다⁠. 옛 팀원들이 앉던 책상은 유리방 밖으로 밀려나 한 줄로 붙어 있었다⁠. 아는 얼굴도 모르는 얼굴도 다들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⁠.

“⁠표 수석님⁠, 오셨어요⁠?⁠”

인사팀 대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새 사원증을 내밀었다⁠. 줄이 코랄색이었다⁠.

“⁠본부 소속은 이 색이에요⁠. 이번 봄 신상 색이래요⁠.⁠”

“⁠팀장 줄은요⁠?⁠”

“⁠팀장님들은 그대로 남색이세요⁠.⁠”

대리는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지 소정의 목에 걸린 남색 줄을 보았다⁠. 소정은 남색 줄을 벗어 대리 손바닥에 올렸다⁠. 일 년 동안 서랍에서 꺼내지 않은 줄인데도 목덜미에 남은 자리가 서늘했다⁠.

“⁠자리는 저기세요⁠.⁠”

대리가 가리킨 곳은 복합기 옆 기둥 앞이었다⁠. 책상 위에 모니터 하나와 「⁠표소정⁠」 이름표 하나⁠, 바닥에는 소정의 옛 서랍에서 옮겨 온 상자 둘이 놓여 있었다⁠. 복합기가 마침 서른 장짜리 출력을 뱉으며 더운 바람을 내뿜었다⁠.

“⁠여기 등이 따뜻해요⁠. 다들 온열 좌석이라고 불러요⁠.⁠”

대리가 위로라고 한 말에 소정은 웃었다⁠. 웃으면서 상자 하나를 발로 밀어 책상 밑에 넣었다⁠.

*

일곱 시 이십 분⁠, 창가 회의실에서 아침 회의가 열렸다⁠. 리서치센터장 마해옥은 왼팔 소매를 걷어 붙여 둔 혈당 측정기에 휴대전화를 갖다 댔다⁠.

“⁠백십이⁠. 오늘은 기분 괜찮다⁠. 소정이 왔네⁠. 복귀 축하하고⁠, 박수는 생략⁠. 박수 치면 혈당 오른다⁠.⁠”

막내 연구원 둘이 키득거렸다⁠. 소정이 자리에 앉는데 등 뒤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⁠. “⁠영포티 선배 오셨다⁠.⁠” “⁠트렌치 봐⁠, 진짜 영포티야⁠.⁠” 소정은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⁠. 영포티든 올드포티든⁠, 일곱 시 이십 분에 회의실에 앉아 있는 마흔한 살은 자기 하나가 아니었다⁠.

“⁠진 본부장⁠, 시작해⁠.⁠”

창가 쪽 의자에서 남자 하나가 일어났다⁠. 뒤로 넘긴 검은 머리에 짙은 남색 정장⁠, 가는 검은 테 안경⁠. 진승겸은 리모컨을 들고 화면 앞에 가서 서지 않고⁠, 화면 옆에 비켜 사람들 얼굴을 먼저 보았다⁠. 일 년 전 소정이 면접에서 처음 본 얼굴과 같았다⁠. 안경알만 조금 얇아졌다⁠.

“⁠모아린화장품입니다⁠. 2027년 소비재 최선호 종목으로 유지합니다⁠. 근거는 셋입니다⁠. 대리점 출고가 넉 달째 늘었고⁠, 해외 매출 비중이 올라가고 있고⁠, 재고가 안정적입니다⁠.⁠”

화면이 넘어갔다⁠. 대리점 출고와 매장 판매를 겹쳐 그린 선 그래프였다⁠. 두 선이 벌어지는 자리에 빨간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었다⁠. 소정은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⁠.

자기 그래프였다⁠. 휴직 전 마지막 주⁠, 인수인계 노트에 붙여 두고 간 그래프였다⁠. 두 선이 벌어지는 자리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은 소정의 버릇이었고⁠, 동그라미 아래 작은 글씨로 「⁠재고자산회전률⁠」이라고 써 둔 것도 소정이었다⁠. ‘⁠율⁠’을 ‘⁠률⁠’로 쓰는 오타를 열세 해 동안 고치지 못했다⁠. 해옥이 몇 번이나 빨간 펜으로 그어 주었는데도 소정은 다음 보고서에서 또 틀렸다⁠.

화면 속 오타는 고쳐져 있지 않았다⁠.

“⁠질문 있습니까⁠?⁠”

승겸이 회의실을 둘러보았다⁠. 소정이 손을 들었다⁠.

“⁠빨간 동그라미 친 자리요⁠. 대리점 출고가 매장 판매보다 빨리 느는 구간인데⁠, 재고가 안정적이라고 보셨어요⁠?⁠”

“⁠해외 대리점 쪽 출고가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⁠. 국내 재고만 보면 평탄합니다⁠.⁠”

“⁠해외 대리점 재고는 누가 세는데요⁠?⁠”

회의실이 조용해졌다⁠. 해옥이 측정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⁠. 승겸은 소정을 잠깐 보더니⁠, 리모컨으로 다음 화면을 띄웠다⁠.

“⁠그 부분은 회의 끝나고 따로 말씀 나누시죠⁠, 표 수석님⁠.⁠”

*

유리방 안은 생각보다 추웠다⁠. 승겸의 책상에는 서류 세 묶음이 모서리를 맞춰 쌓여 있었고⁠, 펜 다섯 자루가 길이 순서대로 누워 있었다⁠. 맨 위 서류 묶음 표지에 소정의 글씨가 보였다⁠. 「⁠소비재팀 인수인계 — 표소정⁠」 포스트잇이 고슴도치처럼 꽂혀 있었다⁠.

“⁠앉으시죠⁠.⁠”

“⁠서서 할게요⁠. 이 방 의자⁠, 원래 제 팀 회의 탁자 의자죠⁠?⁠”

승겸은 대답 대신 안경을 고쳐 썼다⁠.

“⁠그래프는 제 겁니다⁠. 오타까지요⁠.⁠”

“⁠출처는 밝혔습니다⁠. 마지막 쪽 각주 세 번째⁠, 「⁠소비재팀 내부 자료⁠」⁠”

“⁠그 팀이 지금 어디 있는데요⁠?⁠”

“⁠제 본부에 있습니다⁠. 사람도⁠, 자료도⁠.⁠”

승겸의 목소리는 끝까지 정중했다⁠. 정중해서 더 얄미웠다⁠.

“⁠본부 실적이 일 년 만에 두 배가 됐습니다⁠. 운용사들이 우리 보고서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⁠, 법인 영업에서 리서치 몫으로 잡히는 수수료도 그만큼 늘었습니다⁠. 표 수석님 노트가 큰 힘이 됐다는 건 인정합니다⁠. 그런데 회사는 일 년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⁠. 비운 자리에 사람을 앉히지 않으면 고객이 다른 회사로 갑니다⁠.⁠”

“⁠그래서 제 자리에 앉으셨어요⁠?⁠”

“⁠표 수석님 자리는 저기 있습니다⁠.⁠”

승겸이 유리벽 너머 기둥을 턱으로 가리키지 않고⁠, 펜 끝으로 가리켰다⁠. 끝까지 깍듯한 펜 끝이 소정의 목 뒤를 뜨겁게 했다⁠. 소정은 노트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고 표지를 펼쳤다⁠. 휴직한 일 년의 밤들이 종이 냄새로 올라왔다⁠. 매장 사진⁠, 대리점에서 받은 명함⁠, 공시 각주를 오려 붙인 자리마다 형광펜 줄이 겹겹이었다⁠.

“⁠모아린⁠, 저는 반대로 봐요⁠. 대리점에 물건이 쌓이고 있어요⁠. 매장은 그만큼 못 팔고요⁠.⁠”

“⁠근거는요⁠?⁠”

“⁠일주일 주세요⁠.⁠”

승겸의 눈이 노트 파일에서 소정의 얼굴로 올라왔다⁠. 안경알에 창밖 하늘이 하얗게 비쳤다⁠.

“⁠다음 주 월요일 아홉 시에 석계환 운용역과 콜이 있습니다⁠. 모아린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분이죠⁠. 두 사람 다 들어가서 말하고⁠, 석 운용역이 고르게 하죠⁠.⁠”

“⁠제가 지면요⁠?⁠”

“⁠지점 리서치 지원으로 가시죠⁠. 거기도 사람이 필요합니다⁠.⁠”

소정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숫자를 하나씩 끊었다⁠.

“⁠제가 이기면⁠, 소비재팀 돌려주세요⁠. 팀원 넷까지⁠.⁠”

승겸은 대답하기 전에 책상 위 펜 하나를 집어 길이 순서에 맞게 다시 놓았다⁠.

“⁠이기시면 팀장 직함을 드리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약속하신 거예요⁠.⁠”

“⁠약속했습니다⁠. 그리고 표 수석님⁠.⁠”

소정이 돌아섰을 때 승겸이 자기 목을 가리켰다⁠.

“⁠줄이 꼬였습니다⁠.⁠”

코랄색 줄이 셔츠 깃 안에서 한 번 뒤집혀 있었다⁠. 소정은 줄을 바로 펴지 않았다⁠.

“⁠꼬인 게 줄만은 아니죠⁠.⁠”

유리문을 밀고 나와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소정은 걸음을 멈췄다⁠. 노트 파일을 가슴에 안고 유리방을 똑바로 보았다⁠. 책상에서 일어나던 승겸이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춰 소정을 보았다⁠. 둘 사이로 아침 햇빛이 하얗게 쏟아졌고⁠, 복합기가 다시 더운 바람을 뿜었다⁠.

*

탕비실 정수기 앞에서 해옥이 소정을 기다리고 있었다⁠. 해옥은 견과류 봉지를 반쯤 뜯어 놓고 아몬드만 골라 먹는 중이었다⁠. 호두는 혈당에 좋다면서도 맛이 없다고 늘 소정의 책상에 버리고 가던 사람이었다⁠.

“⁠들었다⁠. 내기 걸었다며⁠. 유리방 소리 다 샌다⁠, 그거 방음 아니야⁠.⁠”

“⁠센터장님은 아셨어요⁠? 제 팀 없어지는 거⁠.⁠”

해옥은 아몬드 하나를 오래 씹었다⁠. 왼팔의 측정기를 들여다보더니 휴대전화 화면을 소정 앞에 돌려 보였다⁠. 「⁠140 ↑⁠」

“⁠너 때문에 방금 올랐다⁠. 알았지⁠. 작년 3월에 위에서 내려왔어⁠. 본부 하나 세워서 숫자 내 보라고⁠. 승겸이가 숫자를 냈고⁠.⁠”

“⁠위가 어디까지예요⁠?⁠”

“⁠35층⁠.⁠”

해옥은 아몬드 봉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⁠. 호두 두 알이 소정의 손바닥에 떨어졌다⁠.

“⁠요즘 35층에서 리서치 얘기가 자주 나와⁠. 좋은 얘기는 아니고⁠. 그러니까 이겨도 조용히 이겨⁠. 시끄럽게 이기면 위에서 쳐다본다⁠.⁠”

“⁠조용히 이기는 법은 센터장님한테 안 배웠는데요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지금 가르치잖아⁠.⁠”

해옥이 웃었고⁠, 웃다가 측정기를 다시 보더니 웃음을 거두었다⁠.

*

오후는 길었다⁠. 사내 메신저 상태 표시가 소정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「⁠자리 비움⁠」으로 바뀌었고⁠, 바뀔 때마다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⁠. 휴직 전 소정이 신입 때부터 가르친 구솔미는 승겸의 유리방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⁠. 솔미의 목에도 코랄색 줄이 있었다⁠. 솔미는 복합기에 출력물을 찾으러 올 때마다 소정의 책상 모서리만 보고 지나갔다⁠.

“⁠솔미야⁠.⁠”

“⁠아⁠, 선배⁠. 복귀 축하드려요⁠. 진짜로요⁠. 아무튼요⁠, 제가 지금 마감이 있어서⁠.⁠”

솔미는 출력물을 가슴에 끌어안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⁠. 출력물 맨 위에 「⁠모아린화장품 — 2027 최선호⁠」가 보였다⁠. 소정은 따라가지 않았다⁠. 대신 복합기에서 흘러나온 열기에 손바닥을 대고 있다가⁠, 라운지 텔레비전에 뜬 자막을 읽었다⁠. 「⁠증권가 리서치센터 감원 바람⁠… 인공지능 리포트 도입 잇따라⁠」 자막 아래로 미국 증시 지수가 초록과 빨강으로 번갈아 깜박였다⁠. 사내 게시판 첫 줄에는 경영지원부문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⁠. 「⁠3월 조직 개편 예고 — 세부안은 이사회 뒤 공개⁠」

다섯 시 정각에 소정은 코트를 입었다⁠. 방학 돌봄교실은 여섯 시까지였다⁠. 막내들의 눈길이 등에 붙는 것을 느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⁠. 메신저 상태가 「⁠퇴근⁠」으로 바뀌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⁠. 소정의 귀에만 딸깍⁠, 하고 났다⁠.

학교 앞에서 라윤은 운동장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소정을 보고 뛰어왔다⁠. 패딩 모자에 모래가 한 줌 들어 있었다⁠.

“⁠엄마⁠, 회사에서 뭐 했어⁠?⁠”

“⁠자리 찾았어⁠.⁠”

“⁠찾았어⁠? 잃어버렸었어⁠?⁠”

“⁠응⁠. 기둥 옆에 있더라⁠.⁠”

라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⁠.

“⁠기둥 옆 좋아⁠. 숨바꼭질할 때 거기가 제일 안 들켜⁠.⁠”

밤 열 시⁠, 라윤이 잠들자 소정은 식탁에 노트 파일을 펼쳤다⁠. 모아린 대리점 쪽 숫자를 모아 둔 장이 형광펜 때문에 노랗게 뻣뻣했다⁠. 휴대전화에 사내 메신저가 떴다⁠.

「⁠진승겸⁠: 모아린 관련 본부 공유 폴더 권한 드렸습니다⁠. 자료는 같은 걸로 보시죠⁠. 공정하게⁠.⁠」

소정은 답을 쳤다가 지우고 다시 쳤다⁠.

「⁠표소정⁠: 공정하게요⁠. 월요일 아홉 시에 뵙겠습니다⁠. 제 초안도 그 폴더에 올리죠⁠.⁠」

전송을 누르고 나서 소정은 빨간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뽑았다⁠. 대리점 외상값이 불어난 각주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크게 쳤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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