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378자)

아홉 시 콜

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· 여시결

월요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⁠, 28층과 29층 사이 비상계단은 바깥보다 추웠다⁠. 소정은 계단참 난간에 노트 파일을 올려놓고 기다렸다⁠. 솔미는 신입 때부터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⁠.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윗사람을 만나면 하루가 길어진다고⁠, 소정이 가르친 버릇이었다⁠.

일곱 시 이 분 전⁠, 아래에서 운동화 소리가 올라왔다⁠. 솔미는 계단참에 선 소정을 보고 한 칸 아래에서 멈췄다⁠. 숨이 차서 어깨가 오르내렸다⁠.

“⁠선배⁠, 여기서 뭐 하세요⁠?⁠”

“⁠메모 잘 봤어⁠. 각주부터 막으라고⁠.⁠”

솔미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금방 빨개졌다⁠. 계단의 형광등 하나가 지지직 떨었다⁠.

“⁠본부장님이 물어보셨어요⁠. 선배는 어떻게 싸우는 사람이냐고⁠. 저는 아는 대로 말했어요⁠.⁠”

“⁠밤 열한 시 사십일 분에⁠?⁠”

“⁠아무튼요⁠.⁠”

솔미는 한 칸 올라와 소정과 같은 높이에서 멈췄다⁠. 키가 소정보다 반 뼘 컸다⁠. 신입 때는 소정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몰랐던 키였다⁠.

“⁠선배 없는 일 년 동안 제가 버텼어요⁠. 선배 노트 들고 본부장님 앞에 앉아서 한 장씩 설명한 거 저예요⁠. 본부장님이 처음엔 우리 팀 보고서 다 엎으려고 했어요⁠. 제가 막았어요⁠. 선배 노트 가지고요⁠.⁠”

“⁠알아⁠. 고마워⁠.⁠”

“⁠고마우면요⁠, 선배⁠.⁠”

솔미가 숨을 한 번 삼켰다⁠.

“⁠본부장님이 이기면 저 소비재팀 팀장 달아 주신대요⁠. 서른셋에 처음이에요⁠. 선배가 돌아와서 이기면⁠, 저는 다시 선배 뒤에 서요⁠. 또 뒤에요⁠.⁠”

위층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계단을 내려왔다⁠.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⁠. 29층 채권팀의 남자 연구원이 커피를 들고 지나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⁠. 계단은 소리를 키우는 곳이었다⁠. 남자 연구원이 아래층 문을 닫고 나서야 소정이 말했다⁠.

“⁠솔미야⁠, 내가 지면 지점으로 가⁠. 그건 알지⁠?⁠”

“⁠알아요⁠.⁠”

“⁠그래도 메모를 붙였어⁠?⁠”

솔미는 대답하지 않고 소정을 지나쳐 28층 문을 열었다⁠. 문틈으로 복합기 예열하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⁠. 솔미는 문을 잡은 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⁠.

“⁠선배가 가르쳤잖아요⁠. 숫자 앞에서는 사람 안 본다고⁠.⁠”

*

아홉 시⁠, 창가 회의실 화면에 석계환 운용역의 얼굴이 떴다⁠. 쉰 살⁠, 자산운용사에서 소비재 종목을 굴리는 사람이었다⁠. 월요일마다 빨간 넥타이를 맸고⁠, 큰 결정 앞에서는 박하사탕을 세 개 먹었다⁠. 소정은 열 해 동안 석계환의 사탕 개수로 콜의 승패를 점쳐 왔다⁠. 화면 속 석계환의 책상 위에 사탕 봉지가 뜯겨 있었다⁠.

“⁠진 본부장⁠, 표 수석⁠. 둘이 반대로 본다며⁠. 재밌네⁠. 진 본부장 먼저⁠.⁠”

승겸은 화면 옆에 비켜 앉아 말했다⁠. 대리점 출고⁠, 해외 매출⁠, 그리고 성수 매장에서 산 립스틱 열두 개의 제조번호⁠. 작년 봄 물건이 매장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⁠, 1월 할인으로 털고 나면 봄부터는 새 물건만 돈다⁠. 대리점 외상값이 는 것도 해외 대리점이 새로 생겨 처음 물건을 채우느라 그렇다⁠. 소정의 초안에 있던 말들이 순서대로⁠, 대답이 먼저 달린 채 지나갔다⁠. 승겸은 소정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⁠. 대신 마지막에 한 문장을 붙였다⁠.

“⁠표 수석님은 각주를 보실 겁니다⁠. 저도 봤습니다⁠. 각주의 외상값은 해외 확장으로 설명됩니다⁠.⁠”

석계환이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⁠.

“⁠표 수석⁠.⁠”

소정은 노트 파일을 펼치지 않았다⁠. 열세 해 동안 소정은 콜의 마지막에 각주를 꺼냈다⁠. 오늘은 처음에 꺼냈다⁠.

“⁠모아린 분기 보고서 마흔한 번째 쪽⁠, 특수관계자 거래 각주입니다⁠. 특수관계자는 회사 대주주나 대표와 가까운 사람⁠, 가까운 회사를 말하죠⁠. 작년에 싱가포르에 세운 해외 대리점 하나가 모아린 해외 매출의 절반을 받아 갔습니다⁠. 대리점 주인은 모아린 대표의 처남입니다⁠.⁠”

회의실이 조용해졌다⁠. 화면 속 석계환이 사탕을 깨물지 않고 혀 밑에 넣는 것이 보였다⁠.

“⁠해외 매출이 는 게 아니라⁠, 대표 처남 창고로 물건이 옮겨 간 겁니다⁠. 같은 분기에 반품에 대비해 쌓아 두는 돈은 오히려 줄였고요⁠. 물건이 돌아올 일이 없다고 본 거죠⁠. 처남 창고에서는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요⁠.⁠”

석계환이 두 번째 사탕을 넣었다⁠. 소정은 승겸을 보지 않았다⁠. 대신 회의실 유리에 비친 승겸의 안경을 보았다⁠. 안경알에 화면이 하얗게 떠 있었고⁠, 승겸은 자기 노트북에서 같은 각주를 열고 있었다⁠.

“⁠진 본부장⁠, 이 각주 봤어⁠?⁠”

승겸은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⁠.

“⁠못 봤습니다⁠. 외상값만 봤습니다⁠.⁠”

“⁠솔직하네⁠.⁠”

“⁠표 수석님 말이 맞으면⁠, 제 의견은 틀린 겁니다⁠.⁠”

석계환이 세 번째 사탕을 입에 넣었다⁠. 소정은 숨을 참았다⁠.

“⁠나는 표 수석 의견으로 가겠어⁠. 모아린은 우리 펀드에서 비중을 줄일 거고⁠. 진 본부장⁠, 섭섭해하지 마⁠. 본부장 보고서는 계속 볼 거니까⁠. 대신 각주는 다음부터 표 수석한테 먼저 보여 줘⁠.⁠”

화면이 꺼졌다⁠. 승겸은 노트북을 덮고 나서 펜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⁠. 길이 순서가 흐트러진 채였다⁠.

점심시간⁠,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둘만 탔다⁠. 문이 닫히자 거울 벽에 두 사람이 나란히 비쳤다⁠. 코랄색 줄 둘이 같은 높이에서 흔들렸다⁠. 승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⁠.

“⁠처남 각주는 언제 찾으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일요일 밤이요⁠. 열한 시 사십일 분 열람 기록을 본 다음이요⁠.⁠”

승겸은 무슨 기록인지 알아들었다⁠. 거울 속 승겸의 턱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⁠.

“⁠구솔미 씨 메모는 제가 부탁한 겁니다⁠. 표 수석님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려 달라고요⁠. 탓하시려면 저를 탓하십시오⁠.⁠”

“⁠탓하려고 했는데⁠, 본부장님이 제 편에 거셨다면서요⁠. 커피 내기⁠.⁠”

“⁠공정하게 하자고 한 사람이 저라서요⁠. 제 반대편에 하나쯤은 걸어야 공정하죠⁠.⁠”

“⁠그래서 지셨네요⁠.⁠”

“⁠처음 졌습니다⁠. 여기 와서는⁠.⁠”

엘리베이터가 15층을 지났다⁠. 승겸은 거울 속 소정을 보지 않고 층수 숫자를 보았다⁠. 숫자가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안경알에 붉은 빛이 깜박였다⁠.

“⁠지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⁠. 각주 하나에⁠.⁠”

“⁠각주 하나로 지는 사람은 각주를 읽는 사람뿐이에요⁠. 안 읽는 사람은 졌는지도 몰라요⁠.⁠”

승겸이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⁠. 짧고 낮은 웃음이었다⁠. 문이 열리고 로비의 소음이 밀려들자 승겸은 웃음을 거두고 먼저 내렸다⁠. 소정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막으며 따라 내렸다⁠. 문짝이 손바닥을 한 번 세게 물었다가 놓았다⁠.

*

수요일 오후 네 시⁠, 모아린화장품이 공시를 냈다⁠. 「⁠해외 대리점 거래 관련 매출 인식 기준 재검토⁠」 오 분 뒤 라운지 텔레비전 자막에 같은 말이 흘렀다⁠. 소정은 기둥 앞에서 화면을 보지 않았다⁠. 대신 막내들이 하나씩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⁠.

첫 번째 막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소정의 책상에 놓았다⁠.

“⁠선배⁠, 커피 내기 진 사람이요⁠.⁠”

두 번째가 라테를 놓았고⁠, 세 번째가 녹차 라테를 놓았다⁠. 열한 번째가 디카페인을 놓았을 때 책상 위에 빈자리가 없었다⁠. 복합기 위까지 컵이 올라갔다⁠. 해옥이 지나가다 컵들을 세더니 왼팔을 들여다보았다⁠.

“⁠백육십⁠. 너 때문이야⁠. 아니다⁠, 저 시럽 때문이다⁠.⁠”

엄지를 들었던 막내가 컵 대신 초콜릿 하나를 놓고 속삭였다⁠.

“⁠저 선배한테 걸었어요⁠. 두 명 중에 저 하나랑⁠, 나머지 하나는 본부장님이에요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이⁠?⁠”

“⁠네⁠. 본인 반대편에 거셨어요⁠. 공정하게 하신다고⁠.⁠”

소정은 유리방을 보았다⁠. 승겸은 전화를 받고 있었고⁠, 받는 내내 등을 돌리고 있었다⁠.

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라윤이었다⁠. 돌봄교실 선생님 휴대전화로 걸었다고 했다⁠.

“⁠엄마⁠, 이겼어⁠?⁠”

“⁠어떻게 알았어⁠?⁠”

“⁠할머니가 텔레비전 보고 엄마 회사 나왔대⁠.⁠”

“⁠엄마 회사 아니고⁠, 엄마가 본 회사⁠.⁠”

“⁠아무튼 이겼어⁠?⁠”

“⁠이겼어⁠.⁠”

“⁠그럼 기둥 옆에서 나와⁠?⁠”

소정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컵 열한 개의 얼음이 녹으며 서로 부딪쳤다⁠.

*

목요일 아침 인사 공지가 사내 게시판에 떴다⁠. 소정은 기둥 앞에서 두 줄을 읽었다⁠.

「⁠표소정 수석연구원 — 전략리서치본부 특별분석팀 팀장⁠」 「⁠구솔미 연구원 — 전략리서치본부 소비재팀 팀장⁠」

특별분석팀 아래에는 팀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⁠. 인사팀 대리가 남색 줄을 들고 왔다⁠. 일주일 전에 소정이 대리 손바닥에 올려 준 줄이 아니라 포장 비닐도 안 뜯은 새 줄이었다⁠. 대리는 남색 줄을 하나 더 들고 있었다⁠. 하나를 소정에게 건네고⁠, 하나를 들고 유리방 앞 솔미의 책상으로 갔다⁠. 솔미가 일어나 줄을 받았다⁠. 막내들이 박수를 쳤다⁠. 솔미는 박수를 받으며 소정을 보지 않았다⁠.

소정은 남색 줄을 손에 감은 채 유리방 문을 열었다⁠.

“⁠팀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⁠.⁠”

“⁠팀장 직함을 드린다고 했습니다⁠.⁠”

승겸은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⁠. 책상 위 펜들은 다시 길이 순서로 누워 있었다⁠.

“⁠소비재팀은 본부 매출의 절반입니다⁠. 일 년 비운 분께 절반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⁠. 각주 하나로 이기신 건 인정합니다⁠. 그래서 각주를 찾는 팀을 새로 만들었습니다⁠. 표 수석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⁠.⁠”

“⁠팀원이 없는 팀이요⁠?⁠”

“⁠뽑으시면 됩니다⁠. 예산은 3월에 나옵니다⁠.⁠”

“⁠3월에요⁠.⁠”

“⁠3월에요⁠.⁠”

유리문이 열리고 솔미가 들어왔다⁠. 솔미의 목에서 남색 줄이 흔들렸다⁠. 솔미는 승겸에게 결재 서류를 내밀다가 소정을 보고 멈췄다⁠.

“⁠선배⁠.⁠”

“⁠축하해⁠, 구 팀장⁠.⁠”

“⁠선배가 이긴 거 알아요⁠. 근데 소비재팀은 이제 제 팀이에요⁠. 선배가 키운 거 알지만⁠, 제 팀이에요⁠.⁠”

소정은 솔미의 남색 줄을 보았다⁠. 줄이 꼬여 있지 않았다⁠. 솔미는 신입 때부터 줄을 바르게 거는 사람이었다⁠. 소정은 손에 감고 있던 남색 줄을 풀어 목에 걸었다⁠.

“⁠구 팀장⁠, 팀장 회의는 일곱 시 십 분이야⁠. 늦으면 센터장님 혈당 오른다⁠.⁠”

솔미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“⁠알아요⁠.⁠” 하고 서류를 승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⁠. 돌아 나가는 솔미의 운동화 밑창이 바닥에서 끽⁠, 하고 울었다⁠.

*

저녁 다섯 시 오 분 전⁠, 소정은 특별분석팀 소개 자료를 출력했다⁠. 한 장짜리였다⁠. 팀장 표소정⁠, 팀원 없음⁠. 복합기가 예열하는 동안 대기 줄에 걸린 앞의 출력물이 먼저 나왔다⁠. 소정의 것이 아니었다⁠. 맨 위 머리글에 「⁠경영지원부문 — 대외비⁠」가 찍혀 있었다⁠.

「⁠3월 조직 개편 — 리서치센터 휴직 복귀자 보직 재검토 대상 4명⁠」

표소정(⁠소비재⁠)⁠, 곽두찬(⁠반도체⁠)⁠, 채권팀 차장⁠, 퀀트팀 연구원⁠. 소정의 이름이 첫 줄이었다⁠. 아래 비고란에 한 줄이 더 있었다⁠.

「⁠특별분석팀 — 1인 팀⁠. 3월 개편 시 정리 검토⁠」

종이는 아직 따뜻했다⁠. 소정은 따뜻한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다시 읽었다⁠. 이긴 사람에게 새로 만들어 준 팀이⁠, 석 달 뒤 버릴 상자였다⁠. 예산은 3월에 나온다는 말이 귀에서 다시 울렸다⁠.

유리문이 급하게 열렸다⁠. 승겸이 걸어오지 않고 거의 뛰어왔다⁠. 출력 대기 화면에 자기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뒤늦게 본 얼굴이었다⁠. 승겸이 종이 끝을 잡았다⁠. 소정은 놓지 않았다⁠.

“⁠그거 제 출력물입니다⁠.⁠”

“⁠제 이름이 첫 줄인데요⁠.⁠”

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손이 팽팽했다⁠. 복합기가 소정의 한 장짜리 소개 자료를 마저 뱉어 냈다⁠. 「⁠특별분석팀 팀장 표소정⁠」 승겸의 안경알에 검은 글씨가 거꾸로 비쳤다⁠.

3화는 어땠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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