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43자)

만든 사람

접근금지 백 미터 · 하윤슬

2028년 4월 13일 목요일 오후 세 시⁠, 하동욱은 과천 정부청사역 2번 출구 앞 빵집 창가에 앉아 있었다⁠. 다섯 시간을 자고 나왔는데도 눈꺼풀이 무거웠다⁠. 맞은편 의자에 윤미숙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⁠. 봉지 안에서 귤이 굴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⁠.

“⁠야간조 드세요⁠. 밤에 일하는 사람은 비타민이 모자라요⁠.⁠”

미숙은 연두색 카디건 대신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⁠. 주머니가 불룩하지 않았다⁠. 미숙은 커피를 시키지 않고 물 한 잔만 받아 왔다⁠.

“⁠나 배성진 담당에서 빠졌어요⁠. 어제 오후에요⁠. 다음 주부터 감사도 받아요⁠.⁠”

“⁠들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배성진이 신속수사팀 조사에서 내 이름을 댔어요⁠. 출소하던 날 내가 십 초를 말해 줬다고⁠. 맞아요⁠. 내가 말했어요⁠.⁠”

미숙은 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⁠. 상담실에서 종이컵을 감싸던 손과 같았다⁠.

“⁠주임님⁠, 발찌 찬 사람이 처음 나와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요⁠? 경보예요⁠. 아파트 사이에서 점 한 번 튀어서 경보 울리고 경찰 오면⁠, 그날로 가게에서 잘려요⁠. 나는 그런 사람을 스무 해 동안 봤어요⁠. 일 잃고 석 달 안에 다시 들어오는 사람을요⁠. 그래서 출소하는 날마다 말해 줬어요⁠. 점이 튀어도 십 초 안 되면 경보 안 울린다고⁠. 문 앞에 잠깐 나가는 건 괜찮다고⁠. 겁먹지 말고 일하라고⁠.⁠”

“⁠관제센터 안에서만 쓰는 숫자입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관제센터 협의회 때 문태식 센터장님이 자랑하셨어요⁠. 하 주임 덕분에 경보가 반의반으로 줄었다고⁠. 십 초⁠, 주임님이 만든 거죠⁠?⁠”

동욱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빵집 계산대에서 오븐 타이머가 울렸다⁠. 미숙은 창밖 횡단보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⁠.

“⁠그날 배성진이 하나를 물었어요⁠. 다른 사람들은 안 묻는 거였어요⁠. 십 초면 몇 걸음이냐고⁠.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어요⁠. 천천히 걸으면 열 걸음⁠, 뛰면 스무 걸음쯤⁠.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탕을 받아 갔어요⁠.⁠”

미숙의 손가락이 물잔 테두리를 한 바퀴 돌았다⁠.

“⁠스물한 명 가운데 그 말을 그렇게 쓴 사람은 배성진 하나예요⁠. 그 하나 때문에 내가 스무 해 동안 한 말이 다 거짓말이 됐어요⁠. 그 사람 피해자 창 밑에서 구 초가 될 줄은 몰랐어요⁠. 몰랐다고 해도 되는 건 아니고요⁠.⁠”

미숙은 귤 봉지를 동욱 앞으로 밀었다⁠. 봉지 매듭이 두 번 묶여 있었다⁠.

“⁠배성진 일은 아직 못 뺏어요⁠. 위반은 신속수사팀이 보고⁠, 처분은 법원이 해요⁠. 나는 이제 담당도 아니에요⁠. 그런데 주임님⁠, 그 사람 요즘 밤에 문 앞에 안 나오죠⁠?⁠”

“⁠오늘 새벽에 처음 안 나왔습니다⁠. 한 시 십일 분에도 계산대에서 안 움직였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게 제일 나쁜 신호예요⁠. 숫자를 들킨 사람은 숫자 없는 데로 가요⁠.⁠”

미숙은 일어나며 재킷 단추를 잠갔다⁠.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⁠.

“⁠새 담당이 법원에 준수사항 변경을 신청할 거예요⁠. 근무지를 바꾸고 거리를 늘려 달라고요⁠. 보호관찰소가 신청하면 검사가 청구하고 법원이 정해요⁠. 의견서는 내가 써요⁠. 담당에서는 빠졌어도 그 사람을 다섯 달 본 사람은 나니까⁠.⁠”

“⁠계장님이 쓰시면 성진 씨가 압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야죠⁠. 이번엔 숫자 말고 이름이 남아야 해요⁠.⁠”

미숙이 나간 뒤 동욱은 귤 봉지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한참 앉아 있었다⁠. 창밖 횡단보도 신호가 세 번 바뀌었다⁠. 미숙은 세 번째 초록불에 길을 건넜다⁠. 걸음이 상담실에서보다 느렸다⁠.

*

밤 열 시 반⁠, 과천 관제실 탕비실 탁자 위에 귤 열두 개가 줄지어 놓였다⁠. 조장 박영수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으며 셌다⁠.

“⁠열두 개⁠. 네 명이 세 개씩⁠. 두 시에 먹는다⁠.⁠”

“⁠조장님⁠, 귤은 컵라면 아니에요⁠. 아무 때나 먹어도 돼요⁠.⁠”

강민지가 귤 하나를 집으려다 영수의 볼펜 끝에 손등을 맞았다⁠. 김정우가 헤드셋을 반쯤 걸친 채 중계했다⁠.

“⁠현재 탕비실⁠, 귤 열두 개 대기 중입니다⁠. 출발 예정 시각 두 시⁠. 지연 없습니다⁠.⁠”

동욱은 웃지 않으려다 웃었다⁠. 열흘 만이었다⁠.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⁠. 강원 구역 자리로 돌아가 앉자 왼쪽 눈 끝으로 민지의 모니터가 보였다⁠. 비산동 골목 아래 끝⁠, 계산대 자리에 초록 점이 붙어 있었다⁠. 「⁠101m⁠」⁠. 한 시 십일 분이 와도 숫자는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⁠. 어젯밤에 그랬다⁠. 민지가 의자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⁠.

“⁠문턱 아저씨 오늘도 안 나오겠죠⁠. 점이 계산대에 딱 붙어서 안 떨어져요⁠. 조장님⁠, 이건 분류가 뭐예요⁠?⁠”

“⁠정상⁠.⁠”

“⁠정상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빠요⁠?⁠”

영수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

자정 십육 분⁠, 동욱 자리 오른쪽 모니터에 빨간 창이 떴다⁠. 경보음이 짧게 세 번 울렸다⁠.

「⁠춘천 후평 · 피해자 직장 접근금지 구역 진입 · 31초 · 경보⁠」

동욱은 경보음이 끝나기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⁠. 왼쪽 화면에 대상자 이름과 준수사항이 떴다⁠. 피해자가 일하는 찜질방에서 칠십 미터⁠, 대상자는 찜질방 건너편 해장국집 앞에 있었다⁠. 두 번째 신호에 남자가 받았다⁠. 동욱은 관제센터라고 밝히고 구역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⁠. 남자는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⁠. 동욱은 춘천 신속수사팀에 출동을 넣고 피해자 번호를 눌렀다⁠. 피해자는 야간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⁠. 문을 잠그고 카운터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자 피해자가 말했다⁠. “⁠지금 창밖에 그 사람 차 있어요⁠.⁠” 경보에서 신속수사팀 출동 요청까지 이 분 사십 초였다⁠.

“⁠강원도 고요하다며⁠.⁠”

민지가 의자 너머로 말했다⁠. 동욱은 이관 창에 시각과 진입 삼십일 초를 옮겨 적었다⁠. 오늘 밤 동욱 자리의 경보는 이것 하나뿐이었다⁠. 하나뿐이라서 이 분 사십 초에 끝났다⁠. 세 해 전 동대문에서 이백열네 번 울리던 밤이었다면 춘천의 빨간 창은 다른 창들 사이에 몇 분쯤 묻혔을 것이었다⁠. 동욱은 십 초가 지킨 이 분 사십 초를 알았다⁠. 십 초가 비산동 골목에 내준 구 초도 알았다⁠. 두 숫자는 같은 문장에서 나왔다⁠.

동욱은 강원 지도를 보았다⁠. 정선 북평의 점은 오늘도 네 시에 우사로 갈 것이었다⁠.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로 가는 점은 관제실에서 가장 편한 점이었다⁠. 비산동의 점이 같은 시각을 버리자⁠, 같은 시각이 있던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⁠. 미숙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⁠. 숫자를 들킨 사람은 숫자 없는 데로 간다⁠.

새벽 두 시 정각⁠, 영수가 귤 열두 개를 세 개씩 나눠 자리마다 놓았다⁠. 영수는 자기 몫 하나를 까다가 손을 멈췄다⁠.

“⁠동욱아⁠. 2025년 1월에 앞에 뜬 것부터 처리하라고 한 거⁠, 나다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⁠”

“⁠네가 십 초 쓴 건 그 말 때문이고⁠.⁠”

“⁠조장님 말씀 때문이 아닙니다⁠. 경보가 이백열네 번 울려서입니다⁠.⁠”

영수는 귤껍질을 한 장으로 벗겨 탁자에 놓았다⁠. 껍질이 꽃 모양으로 펼쳐졌다⁠. 영수는 껍질을 오래 보다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⁠.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⁠. 정우만 작게 중계했다⁠. 현재 탕비실⁠, 귤 출발했습니다⁠.

*

4월 14일 금요일 밤 열한 시 칠 분⁠, 관제실 내선이 울렸다⁠. 영수가 받았다가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고 동욱을 보았다⁠.

“⁠정문 경비실이다⁠. 여자가 하나 와 있단다⁠. 피해자라고⁠. 배성진 사건⁠.⁠”

민지가 의자째 돌아앉았다⁠. 정우가 헤드셋을 벗었다⁠. 동욱은 일어나려다 영수의 손바닥에 막혔다⁠.

“⁠앉아 있어⁠. 너 강원이다⁠. 내가 간다⁠.⁠”

영수는 볼펜을 귀에 꽂고 엘리베이터로 갔다⁠. 동욱은 삼 분을 앉아 있었다⁠. 강원 지도 위의 점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⁠. 사 분째에 동욱은 일어났다⁠. 정우가 강원 자리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⁠. 다녀와⁠. 강원은 내가 고요하게 지킬게⁠.

바깥 공기가 생각보다 찼다⁠. 낮에는 반팔 차림이 보였는데 밤이 되자 입김이 희미하게 보였다⁠. 정문 차단기 앞에 가로등 하나가 서 있었다⁠. 노란 불빛 아래 소영이 검은 배낭을 멘 채 서 있었고⁠, 차단기 안쪽에 영수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⁠. 동욱은 경비실 옆문으로 나가 영수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⁠. 소영의 패딩 지퍼는 턱까지 올라가 있었다⁠. 배낭끈을 쥔 두 손의 관절이 하얬다⁠.

“⁠여기는 피해자분이 오시는 데가 아닙니다⁠. 위치 기록은 수사기관이 요청해야 나갑니다⁠. 국선변호사 선임되셨으면 그쪽으로⁠—⁠”

“⁠변호사님이 요청서 넣는대요⁠. 몇 주 걸린대요⁠. 그럼 몇 주 동안 여기 있을게요⁠.⁠”

“⁠밤새 서 계실 겁니까⁠?⁠”

“⁠배낭에 속옷 세 벌 있어요⁠.⁠”

영수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⁠. 동욱은 영수의 볼펜이 귀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⁠.

“⁠피해자분⁠. 여기 사람들 하룻밤에 경보 수천 건 받습니다⁠. 몇 해 전까지는 한 사람 자리에 하룻밤 이백 건이 울렸어요⁠. 다 받으면 진짜를 놓칩니다⁠. 그래서 짧게 들어왔다 나간 건 오차로 보자는 기준이 생겼고⁠, 그 뒤로 진짜 경보를 늦게 받은 밤이 없었습니다⁠. 그 기준 하나로 다른 피해자들이 살았어요⁠.⁠”

“⁠그 기준 하나로 저는 밤마다 구 초를 세요⁠. 잠정조치는 기각됐어요⁠. 업무 중 행위래요⁠. 오늘 오후엔 그 사람 어머니가 처방전이랑 돈 봉투를 들고 우리 약국에 왔어요⁠. 처벌불원서에 서명해 달라고요⁠. 약국장님은 저더러 한 달 쉬래요⁠. 저는 여기 오는 막차를 타려고 대전 가는 버스를 보냈어요⁠.⁠”

소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⁠. 경비실 창 안의 경비원이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⁠.

“⁠다른 피해자들 살린 거 알아요⁠. 저도 약국에서 약 세는 사람이에요⁠. 하나 틀리면 사람 죽는 거 알아요⁠. 그런데 그 사람은 그 기준을 알아요⁠. 밤마다 그 기준 안에서 우리 집 창을 봐요⁠. 아저씨들 숫자가 그 사람한테 구 초를 줬어요⁠.⁠”

영수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⁠. 소영의 눈이 영수 어깨 너머 동욱에게로 옮겨 왔다⁠.

“⁠기록 있어요⁠? 문자 답 안 하셨잖아요⁠.⁠”

“⁠있습니다⁠. 3월 19일 밤⁠, 성진 씨 어머님이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에서 편의점까지 뛰어가서 구 초 들어왔다 나간 기록입니다⁠. 신속수사팀에 넘어갔습니다⁠. 수사기관 손에 있습니다⁠. 소영 씨한테는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⁠.⁠”

“⁠병원에서요⁠?⁠”

“⁠사흘 밤 다요⁠.⁠”

소영의 손이 배낭끈에서 미끄러졌다가 다시 쥐었다⁠. 동욱은 소영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⁠. 사흘⁠. 소영은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하나만 물을게요⁠. 십 초는 누가 정했어요⁠?⁠”

영수가 고개를 돌려 동욱을 보았다⁠. 2025년 1월 동대문에서 앞에 뜬 것부터 처리하라고 말한 조장의 눈이었다⁠. 동욱은 차단기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⁠. 가로등 불빛이 뿔테 안경알에 하얗게 맺혔다⁠.

“⁠제가 정했습니다⁠. 2025년 5월에 건의서를 썼습니다⁠. 그해 겨울에 한 피해자가 계단에서 밀려 팔이 부러졌습니다⁠. 오차 경보를 처리하느라 진짜 경보를 십이 분 늦게 열었습니다⁠. 다시는 늦지 않으려고 십 초를 썼습니다⁠. 성진 씨가 서는 구 초는 제가 만든 구 초입니다⁠.⁠”

소영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⁠. 경비실 텔레비전 소리가 다시 조금 커졌다⁠. 가로등 아래로 나방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가 나갔다⁠. 동욱은 소영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⁠. 소영의 얼굴은 화를 내지 않았다⁠. 화를 다 지나온 얼굴이었다⁠. 소영은 배낭을 고쳐 메고 차단기 막대에 손을 얹었다⁠.

“⁠그럼 고쳐요⁠. 만든 사람이⁠.⁠”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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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느린독자2026.11.02· 9화

    그 기준을 2025년 5월에 자기가 썼다고요? 동욱이 제일 숨기고 싶었을 말을 소영 앞에서 해 버렸네요.

    • 하윤슬작가2026.11.02

      십 초가 살린 밤도 있었다는 조장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. 동욱은 두 쪽을 다 아는 사람이라 더 괴롭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