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0화(5,396자)

오백 미터

접근금지 백 미터 · 하윤슬

2028년 4월 16일 일요일 새벽 한 시 십일 분⁠, 배성진은 밝은마트 비산점 계산대 포스기 옆에 서서 유리문 너머 골목 위를 보고 있었다⁠. 접은 상자 세 장이 계산대 밑에 세워져 있었다⁠. 성진은 상자를 들지 않았다⁠. 나흘째였다⁠.

골목 위 2층 왼쪽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⁠. 블라인드가 끝까지 올라가 있었고⁠, 흰 레이스 커튼 너머로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⁠. 약사님은 창 앞에 앉아 있었다⁠. 성진이 나가지 않는 밤에도 약사님은 한 시 십일 분에 창 앞에 있었다⁠. 성진은 그것을 기다림이라고 읽었다⁠. 이번에는 약사님이 기다린다⁠. 이 년 반 동안 성진이 한 일을 이제 약사님이 하고 있었다⁠. 성진의 귀가 뜨거워졌다⁠.

밤 열한 시 교대 때 점주 이정호는 성진에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다⁠. 담배 재고 숫자만 포스트잇에 적어 계산대에 붙여 두고 패딩을 입었다⁠. 문을 나서기 전에 정호가 한마디 했다⁠.

“⁠너 요즘 박스 안 버리더라⁠. 수거함 넘치겠다⁠.⁠”

“⁠세 시에 퇴근할 때 버릴게요⁠.⁠”

“⁠그래⁠, 그렇게 해⁠. 세 시에⁠.⁠”

정호는 세 시라는 말을 두 번 했다⁠. 유리문이 닫히고 골목 아래로 정호의 슬리퍼 소리가 멀어졌다⁠. 성진은 포스트잇의 담배 숫자를 보았다⁠. 정호의 글씨가 출근 첫날보다 작았다⁠.

나가지 않는 동안 성진은 휴대전화 지도를 자주 열었다⁠. 손가락 두 개로 지도를 넓혔다 좁혔다 하면서 거리를 보았다⁠. 청우빌라에서 백 미터⁠, 평촌 새봄약국에서 백 미터⁠. 원 두 개 바깥으로는 아무 숫자도 없었다⁠. 관제센터에는 원 바깥의 점에 붙일 말이 없었다⁠. 성진은 그것을 신속수사팀 조사실에서 배웠다⁠. 판결엔 초가 없었고⁠, 백 미터 바깥에는 시간도 없었다⁠.

종이 딸랑 울렸다⁠. 손님이 아니었다⁠. 회색 재킷을 입은 윤미숙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와 문턱 안에서 걸음을 멈췄다⁠. 손에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⁠.

“⁠선생님⁠.⁠”

“⁠담당 아니에요⁠, 이제⁠. 그냥 아는 사람으로 왔어요⁠. 박하사탕 있죠⁠?⁠”

성진은 진열대에서 사탕 봉지 하나를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⁠. 미숙은 카드를 내밀고⁠, 사탕 봉지를 뜯지 않은 채 계산대에 서류 봉투를 올렸다⁠.

“⁠군포 물류센터 야간 분류예요⁠. 밤 열 시부터 아침 일곱 시⁠. 통근버스 있고 사대보험 되고⁠, 월급 이백삼십⁠. 센터장이 내가 예전에 맡았던 사람을 둘 받아 준 데예요⁠. 발찌 얘기 다 했어요⁠. 괜찮대요⁠.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오래요⁠.⁠”

성진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⁠. 미숙의 얼굴을 보았다⁠. 미숙은 연두색 카디건을 입지 않았고⁠, 눈 밑이 거뭇했다⁠.

“⁠저 여기서 일할래요⁠.⁠”

“⁠왜요⁠?⁠”

“⁠사장님이 처음 받아 줬어요⁠. 마흔한 번 떨어지고 처음이에요⁠.⁠”

“⁠나도 처음이었어요⁠. 성진 씨를 받아 준 사람이⁠. 출소하던 날 이력서 쓰는 법부터 가르쳤죠⁠.⁠”

미숙은 봉투를 성진 앞으로 한 뼘 밀었다⁠.

“⁠성진 씨⁠, 군포는 청우빌라에서 십이 킬로미터예요⁠. 거기서 일하면 성진 씨 어머님한테도 좋고⁠, 성진 씨한테도 좋고⁠, 피해자한테도 좋아요⁠. 셋 다 좋은 데는 흔하지 않아요⁠.⁠”

“⁠약사님이 그렇게 해 달래요⁠? 아니면 그 관제센터 사람이요⁠?⁠”

성진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나왔다⁠. 파란 줄을 목에 건 남자의 얼굴이 계산대 위 형광등 아래로 겹쳐 떠올랐다⁠. 수거함 옆에서 약사님이 종이를 내밀던 남자⁠. 성진이 이 년 반 동안 받지 못한 종이를 받은 남자⁠. 미숙이 사탕 봉지를 쥔 손을 내렸다⁠.

“⁠피해자는 성진 씨한테 뭘 해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⁠. 하지 말라고만 했어요⁠. 문자 하지 말라고⁠, 기다리지 말라고⁠, 오지 말라고⁠. 판결문에 그렇게 써 있어요⁠. 성진 씨는 피해자가 하지 말라는 말을 다 해 달라는 말로 들었어요⁠.⁠”

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계산대 위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었다⁠. 미숙이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⁠.

“⁠한 가지 더요⁠. 준수사항 변경 의견서⁠, 내가 써요⁠. 근무지 바꾸고⁠, 피해자 주거지랑 직장 접근금지 거리 늘려 달라고⁠. 새 담당이 신청하고 검사가 청구할 거예요⁠.⁠”

“⁠선생님이 왜요⁠? 제가 선생님 이름 댄 것 때문에요⁠?⁠”

“⁠이름 때문이 아니에요⁠. 3월 19일 때문이에요⁠. 어머님이 중환자실에 계시던 밤에 병원에서 여기까지 뛰어왔죠⁠. 나는 다섯 달 동안 성진 씨가 일 때문에 문 앞에 나간다고 믿었어요⁠. 3월 19일엔 일이 없었어요⁠.⁠”

미숙은 사탕 봉지를 재킷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⁠. 문턱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⁠.

“⁠월요일 아침 일곱 시까지 전화하면 군포 자리는 아직 있어요⁠.⁠”

종이 딸랑 울렸다⁠. 미숙은 골목을 내려가 큰길로 꺾었다⁠. 한 번도 골목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⁠. 성진은 서류 봉투를 계산대 서랍에 넣었다⁠. 서랍을 닫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서랍 안의 동전 통이 쏟아졌다⁠. 오백 원짜리가 바닥을 굴러 냉장고 밑으로 들어갔다⁠.

새벽 세 시 오 분⁠, 근무를 마친 성진은 박달동으로 가는 길에 큰길을 건너지 않고 건너편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⁠. 막차가 끊긴 정류장에는 광고판 불빛만 있었다⁠. 밝은마트에서 큰길을 건너 이십 미터⁠, 청우빌라에서 백이십 미터가 넘는 자리였다⁠.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자 골목이 곧게 올라가 2층 왼쪽 창에서 끝났다⁠. 창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⁠. 성진은 휴대전화 앱도⁠, 손목시계도 보지 않았다⁠. 볼 필요가 없었다⁠. 여기서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⁠. 노란 창도⁠, 빨간 창도⁠, 구 초도 없었다⁠. 성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오래 앉아 있었다⁠. 창의 불이 꺼진 것은 세 시 사십 분이었다⁠. 성진은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일어났다⁠. 발목의 장치는 내내 조용했다⁠. 조용한 장치가 성진에게는 허락처럼 느껴졌다⁠.

4월 17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⁠, 성진은 반지하 방 이불 위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⁠. 화면에 미숙의 번호가 떠 있었다⁠. 통화 단추를 누르면 군포 물류센터 자리가 남았다⁠. 열두 킬로미터⁠, 월급 이백삼십⁠, 통근버스⁠. 어머니 투석 날 택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숫자들이었다⁠. 한 시 십일 분이 없는 숫자들이기도 했다⁠. 여섯 시 오십구 분⁠, 부엌에서 어머니가 밥솥을 여는 소리가 났다⁠. 일곱 시가 되었다⁠. 일곱 시 일 분이 되었다⁠. 성진은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누웠다⁠. 천장의 곰팡이 얼룩이 창 모양으로 번져 있었다⁠.

*

4월 18일 화요일 오전 열 시⁠, 안양 보호관찰소 3층에서 새 담당 보호관찰관 권태준이 성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⁠. 태준은 서른 후반이었고⁠, 책상에 사탕 봉지가 없었다⁠. 볼펜을 쥐는 대신 손가락으로 종이의 한 줄을 짚었다⁠.

“⁠보호관찰소에서 준수사항 변경 신청했어요⁠. 검사 청구 들어갔고⁠, 법원이 결정해요⁠. 내용은 두 가지예요⁠. 밝은마트 비산점 근무 금지⁠, 그리고 피해자 주거지와 직장 접근금지 거리를 백 미터에서 오백 미터로⁠.⁠”

“⁠오백 미터요⁠?⁠”

“⁠결정 나면 바로 효력 있어요⁠. 따로 신속수사팀 위반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고요⁠. 다음 출석은 4월 25일 오전 열 시예요⁠. 늦으면 안 돼요⁠.⁠”

태준은 탁상 달력의 25일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달력을 성진 앞으로 돌려 보였다⁠.

“⁠저 일은요⁠? 밝은마트 못 나가면 저 뭐 해요⁠?⁠”

“⁠군포 자리 있다고 윤 계장님한테 들었어요⁠. 아직 늦지 않았으면 거기 가세요⁠.⁠”

태준의 말은 짧았고⁠, 말과 말 사이에 기다림이 없었다⁠. 성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낼 자리를 찾지 못했다⁠. 보호관찰소를 나와 정류장 의자에 앉자마자 성진은 휴대전화 지도를 열었다⁠. 청우빌라 정문에 손가락을 대고 오백 미터를 어림했다⁠. 원은 밝은마트를 삼키고⁠, 큰길 건너 정류장을 삼키고⁠, 계단길 백여덟 칸과 언덕 너머 버스 정류장까지 삼켰다⁠. 성진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편의점도 월급도 아니었다⁠. 오백 미터 밖에서는 창이 보이지 않았다⁠.

성진은 지도를 닫고 다시 열었다⁠. 원 밖에서 창이 보이는 자리가 있는지 찾았다⁠. 없었다⁠. 골목은 백 미터에서 큰길로 꺾였고⁠, 큰길 건너편 건물들이 창을 가렸다⁠. 성진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⁠. 정류장 광고판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었다⁠.

태준이 읽어 준 의견서의 마지막 줄이 정류장 의자까지 따라왔다⁠. 「⁠대상자는 피해자의 생활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맞추어 배치함⁠. 피해자는 출소 이후 도어락 번호를 다섯 차례 바꾸었고 귀갓길을 매일 이십오 분 우회함⁠. 대상자의 문 앞 행위를 생업 동선으로 보기 어려움⁠. 작성 윤미숙⁠.⁠」 성진은 다섯 차례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⁠. 이십오 분은 조사실에서 들었다⁠. 성진은 두 숫자를 머릿속에서 굴려 보다가⁠, 다섯 번이나 번호를 바꾸는 동안 약사님이 성진을 다섯 번 생각했다고 읽었다⁠. 읽고 나서 성진은 그렇게 읽는 자기를 한 번 의심했다⁠. 의심은 버스가 올 때까지 가지 않았다⁠. 버스가 오자 성진은 의심을 정류장 의자에 두고 올라탔다⁠.

*

4월 18일 오후 세 시⁠, 박달동 반지하 방은 커튼을 쳐서 어두웠다⁠.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퐁퐁 냄새가 났다⁠. 문 옆에 빨간 대야가 엎어져 있었고⁠, 대야 테두리에 노란 물때가 아직 둥글게 남아 있었다⁠. 성진이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어머니 한경자가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⁠. 앞에 서랍 하나가 통째로 빠져 나와 있었다⁠. 성진의 옷 서랍이었다⁠. 양말과 속옷 아래 깔아 둔 누런 서류 봉투가 꺼내져 있었고⁠, 봉투 안의 종이가 방바닥에 펼쳐져 있었다⁠. 판결문이었다⁠.

“⁠엄마⁠, 그거 왜 꺼냈어⁠.⁠”

“⁠빨래 넣다가⁠.⁠”

경자는 판결문을 덮지 않았다⁠. 돋보기를 코에 걸고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고 있었다⁠. 투석하는 팔에 붙은 반창고가 종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⁠. 성진은 짚은 줄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⁠. 법정에서 검사가 소리 내어 읽은 줄이었다⁠. 「⁠피고인은 2025⁠. 8⁠.경부터 매일 01⁠:11경 피해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하고⁠」⁠.

“⁠엄마⁠, 옛날 일이야⁠. 다 끝난 거야⁠.⁠”

“⁠끝났으면 왜 한 시 십일 분이야⁠?⁠”

경자는 반창고 붙은 팔로 판결문 모서리를 눌렀다⁠. 오래 접혀 있던 종이가 자꾸 말려 올라갔다⁠. 경자는 판결문을 한 장 넘겼다⁠. 손가락이 다른 줄을 짚었다⁠. 경자는 소리 내어 천천히 읽었다⁠. 글자를 하나씩 확인하듯이 읽었다⁠.

“⁠피해자는 퇴근길을 열네 차례 바꾸고⁠, 현관 도어락 번호를 일곱 차례 바꾸었으며⁠, 위치추적 장치가 부착되었던 차량을 처분하였다⁠.⁠”

경자가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너는 어릴 때 엄마 공장 끝나는 시간마다 버스 정류장에 나와 있었지⁠. 밤 열 시 반⁠. 비 와도 눈 와도⁠. 엄마는 그게 좋았어⁠. 동네 사람들이 효자라고 했어⁠. 엄마는 네가 기다리는 애라서 좋았어⁠.⁠”

경자의 손가락이 「⁠일곱 차례⁠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⁠.

“⁠그 아가씨는 네가 기다려서 번호를 일곱 번 바꿨대⁠.⁠”

성진은 신발장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⁠. 경자는 판결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⁠. 텔레비전이 꺼진 방에서 냉장고 소리만 났다⁠.

“⁠너 나와서 밤마다 나한테 전화했잖아⁠. 엄마 약 먹었냐고⁠. 한 시 십일 분에⁠. 엄마는 그게 고마워서 그 시간 되면 자다가도 깼어⁠. 전화 오면 받으려고⁠. 중환자실 있을 때는 전화기가 없어서 그거 못 받는 게 제일 걱정이었어⁠.⁠”

경자가 돋보기를 벗었다⁠. 눈이 젖어 있지 않았다⁠. 마른 눈으로 아들을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성진아⁠, 그 시간⁠… 그 아가씨한테 문자 보내던 시간이지⁠? 엄마한테 전화한 거⁠, 그 시간에 맞춘 거야⁠?⁠”

10화는 어땠나요?

댓글 0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
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