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75자)

다섯 시 반

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· 마효곤

반원배는 무전기 멜빵이 어깨를 파고드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⁠. 아침부터 메고 있던 무전기였다⁠. 청테이프로 감은 배터리 상자가 등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멜빵이 같은 자리를 쓸었다⁠. 쓸린 자리가 화끈거렸다⁠. 원배는 화끈거림이 싫지 않았다⁠. 무언가 확실하게 아픈 데가 있으면 머리가 덜 엉켰다⁠.

다섯 시 반까지 중대 데리고 건너와⁠. 작전참모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⁠. 안 건너오면 반 소위 네가 책임진다⁠. 원배는 “⁠알⁠, 알겠습니다⁠”라고 대답했다⁠. 말이 갈라진 자리가 아직 목구멍을 긁었다⁠.

트럭이 먼저 떠났다⁠. 짐칸에 휠체어 넷과 노인 일곱이 실렸다⁠. 운전은 동두천에서 학원 셔틀버스를 몬다는 예비군이 맡았다⁠. 셔틀버스 기사는 운전석에 오르며 “⁠애들 태우는 거보다 쉽네요⁠, 안 떠들고⁠” 하고 중얼거렸다⁠. 트럭이 정지선을 넘어 다리 위로 올라갔다⁠. 이음새 철판을 밟을 때마다 짐칸의 휠체어가 덜컹 들렸다가 내려앉았다⁠. 휠체어의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⁠. 원배에게 몇 살이냐고 묻던 할아버지였다⁠. 원배도 손을 흔들었다⁠. 트럭은 삼 분 만에 남단에 닿았다⁠. 원배는 출석부에서 열한 줄을 지웠다⁠. 볼펜 줄이 반듯했다⁠.

“⁠버스 갑니다⁠!⁠”

홍구가 운전석 창으로 외쳤다⁠. 버스 안에는 노인 여덟과 원장⁠, 홍구의 어머니가 타고 있었다⁠. 노인 넷은 좌석을 눕혀 누워 있었다⁠. 요양원에서 들고 온 휴대용 산소통 둘이 누운 노인들의 코에 가는 관으로 이어져 있었다⁠. 홍구의 어머니가 들통을 발치에 두고 산소통 하나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⁠.

버스가 삼거리를 지나 다리 입구로 향했다⁠. 진입로는 둑 높이까지 비스듬히 올라가는 비탈이었다⁠. 버스가 비탈 중간쯤에서 콜록거렸다⁠. 엔진이 두 번 기침을 하고 멈췄다⁠. 버스가 뒤로 한 뼘 밀렸다⁠. 홍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⁠. 버스는 정지선 바로 앞⁠, 비탈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하늘로 쳐든 채 멈췄다⁠.

*

홍구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려 엔진 덮개를 열었다⁠. 매캐한 경유 냄새가 확 퍼졌다⁠. 원배도 따라가 들여다보았다⁠. 엔진 옆구리로 이어진 가는 관 하나에 구멍이 나 있었다⁠. 구멍에서 경유가 방울방울 새어 바닥에 떨어졌다⁠. 홍구가 관을 손가락으로 훑었다⁠. 손가락 끝에 작은 쇳조각이 걸려 나왔다⁠.

“⁠아까 느릅골 나올 때 일곱 번째 커브⁠. 뭐가 튀었나 봐요⁠.⁠”

“⁠고칠 수 있습니까⁠?⁠”

“⁠연료관에 구멍 났어요⁠. 테이프로 막고 공기 빼면 돼요⁠. 십 분⁠.⁠”

“⁠십 분⁠.⁠”

원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⁠. 다섯 시 이십이 분이었다⁠. 준묵이 버스 옆에 와 있었다⁠. 하사도 왔다⁠. 하사는 버스를 보지 않고 둑길 끝을 보았다⁠.

“⁠청테이프 있는 사람⁠!⁠”

원배가 외쳤다⁠. 구덩이 몇 군데서 대답이 왔다⁠. 원배는 무전기 배터리 상자를 내려다보았다⁠. 상자를 감은 청테이프가 제일 가까웠다⁠. 원배는 상자에서 테이프 끝을 찾아 한 바퀴를 풀었다⁠. 배터리 상자가 덜렁거렸다⁠. 홍구에게 테이프를 건넸다⁠.

“⁠소대장님⁠, 그거 무전기 테이프잖아요⁠.⁠”

“⁠한 바퀴면 됩니다⁠. 아직 일곱 바퀴 남았습니다⁠.⁠”

홍구가 웃으며 테이프를 받아 연료관을 감기 시작했다⁠. 손가락이 경유에 미끄러졌다⁠. 준묵이 손전등으로 엔진 안을 비췄다⁠. 해는 아직 있었지만 엔진 속은 어두웠다⁠. 테이프를 다 감은 홍구가 엔진 옆의 손바닥만 한 고무 펌프를 엄지로 눌렀다⁠. 꾹⁠, 꾹⁠. 펌프가 처음에는 물렁하다가 누를수록 단단해졌다⁠. 홍구는 펌프가 단단해질 때마다 “⁠착하다⁠, 착하다⁠” 하고 중얼거렸다⁠. 버스에게 하는 말이었다⁠.

*

다섯 시 이십팔 분⁠. 원배는 버스 문 앞으로 갔다⁠. 삼거리의 구덩이에서 예비군들이 원배를 보고 있었다⁠. 쉰여섯 가운데 트럭을 몰고 간 셔틀버스 기사를 뺀 쉰다섯⁠, 하사와 일병까지⁠. 다들 작전참모의 무전을 들었다⁠. 무전기 소리는 컸고⁠, 삼거리는 좁았다⁠.

원배는 사격장을 떠올렸다⁠. 사로에서 총구가 옆으로 돌아가던 순간⁠, 입은 벌어졌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던 순간⁠. 옆에서 함석겸이 대신 외쳤다⁠. 사격 중지⁠. 다음엔 네가 외쳐⁠. 이번에는 대신 외쳐 줄 사람이 없었다⁠. 함석겸은 문짝에 실려 다리를 건너갔다⁠.

원배는 준묵을 보았다⁠. 준묵이 손전등을 내리고 원배를 마주 보았다⁠.

“⁠분대장님⁠. 어떻게 해야 합니까⁠?⁠”

“⁠소대장님이 정하세요⁠.⁠”

“⁠분대장님이 고르라고 하셨잖습니까⁠. 정오에⁠. 이번에도 고르게 하시면⁠…⁠”

“⁠정오에는 지휘관이 없었습니다⁠. 지금은 있습니다⁠.⁠”

준묵의 목소리가 낮았다⁠. 원배는 준묵이 무엇을 내밀고 있는지 알았다⁠. 짐이었다⁠. 아침부터 준묵이 지고 있던 짐이었다⁠. 준묵은 원배에게 짐을 넘기면서⁠, 넘기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⁠.

“⁠버스 두고 노인분들 업고 건너가면 안 됩니까⁠?⁠”

원배가 물었다⁠. 홍구가 엔진 덮개 밑에서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누운 분 넷이 산소 달고 있어요⁠. 업으면 관 빠져요⁠. 다리 위에서 관 빠지면⁠, 저는 몰라요⁠. 십 분만 주세요⁠. 그럼 버스로 건너요⁠.⁠”

“⁠십 분이면 다섯 시 사십 분입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사십 분이면 여섯 시 전이잖아요⁠.⁠”

원배는 버스에 올랐다⁠. 비탈에 멈춘 버스 안은 바닥이 뒤로 기울어 있었다⁠.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몸이 뒤로 쏠렸다⁠. 누운 노인들의 좌석 밑에 원장이 담요를 말아 괴어 놓았다⁠. 산소통의 바늘이 가늘게 떨렸다⁠. 쉭⁠, 쉭⁠, 관을 타고 산소가 나가는 소리가 버스 안에서 제일 큰 소리였다⁠.

홍구의 어머니가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라 원배에게 내밀었다⁠.

“⁠소위님⁠, 마셔⁠.⁠”

“⁠괜찮습니다⁠.⁠”

“⁠괜찮은 사람 얼굴이 아니야⁠. 마셔⁠.⁠”

원배는 컵을 받았다⁠. 보리차가 아직 미지근했다⁠. 구수한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⁠. 한 모금 마시자 아침부터 비어 있던 배 속으로 따뜻한 것이 내려갔다⁠. 원배는 자기가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그제야 알았다⁠. 남은 보리차를 한 번에 다 마셨다⁠.

“⁠우리 홍구⁠, 말 잘 들어요⁠?⁠”

“⁠…말씀을 많이 하십니다⁠.⁠”

어머니가 웃었다⁠. 홍구와 똑같이 웃었다⁠.

“⁠걔는 겁나면 떠들어⁠. 어릴 때부터⁠. 오늘 많이 떠들었지⁠?⁠”

“⁠아침부터 쉬지 않으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많이 무서웠던 거야⁠.⁠”

어머니는 빈 컵을 받아 들통 옆에 엎어 놓았다⁠. 그러고는 앞 유리 너머⁠, 엔진 덮개 밑에서 경유에 미끄러지는 아들의 손을 보았다⁠. 오래 보았다⁠. 원배는 버스에서 내리며⁠, 어머니의 무릎 위 산소통 바늘이 아까보다 조금 내려가 있는 것을 보았다⁠.

원배는 출석부를 폈다⁠. 페이지마다 이름이 빼곡했다⁠. 여백에 그어 붙인 줄까지 이름이 넘쳤다⁠. 원배는 출석부를 덮고 삼거리로 몸을 돌렸다⁠.

“⁠다들 들으십시오⁠.⁠”

원배의 목소리가 삼거리에 퍼졌다⁠. 끝마다 「⁠입니다⁠」가 붙는 목소리였다⁠. 끝이 떨리지 않았다⁠.

“⁠작전참모님 명령은 다섯 시 반 철수입니다⁠. 지금 건너가실 분은 건너가십시오⁠. 일병이 인솔합니다⁠. 남는 분은 버스를 고칠 때까지 진입로를 지킵니다⁠. 다 같이 버스와 건너갑니다⁠.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⁠. 이번에 고르는 건 제가 고르라고 하는 겁니다⁠. 책임은 제가 집니다⁠.⁠”

삼거리가 조용했다⁠. 구덩이에서 하나둘 사람이 일어났다⁠. 일어난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⁠. 한 사람이 원배 앞을 지나며 고개를 숙였다⁠. 「⁠애가 열이 나서요⁠」 다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⁠. 원배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확인했다⁠. 정오에 준묵이 그랬듯이⁠, 가세요⁠, 하고 말했다⁠. 일병이 하사를 보았다⁠. 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⁠. 일병이 열일곱 명을 데리고 정지선을 넘었다⁠.

시훈은 일어나지 않았다⁠. 구덩이에서 보리차 종이컵을 쥐고 원배를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소대장님⁠, 방금 ‘⁠책임은 제가 집니다⁠’ 하셨죠⁠?⁠”

“⁠예⁠.⁠”

“⁠그거 드라마에서 완전 플래그예요⁠. 그 말 한 사람이 꼭⁠…⁠”

“⁠시훈 씨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드라마 얘기 하지 마십시오⁠. 분대장님 말씀입니다⁠.⁠”

시훈이 입을 다물었다가 킥킥거렸다⁠. 옆 구덩이의 예비군이 시훈의 철모를 툭 쳤다⁠.

“⁠시훈 씨는요⁠?⁠”

“⁠저 아까 건너갔다가 다시 왔잖아요⁠. 또 가면 왕복 두 번이에요⁠. 교통비 두 번 받아야 돼요⁠.⁠”

“⁠교통비는 안 나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안 가요⁠.⁠”

구덩이 몇 군데서 웃음이 났다⁠. 원배는 시훈의 이름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쳤다⁠.

열일곱 명이 다리를 건너갔다⁠. 걸음이 빨랐다⁠. 아무도 뛰지 않았지만 아무도 늦지 않았다⁠. 다리 위 열일곱의 뒷모습이 남단 둑에 닿을 때까지 원배는 눈을 떼지 않았다⁠. 그러고 나서 출석부에서 열일곱 줄을 지웠다⁠. 남은 이름을 셌다⁠. 서른아홉이었다⁠. 하사를 넣어서⁠. 버스 안에 열이 더 있었다⁠.

*

원배는 송수화기를 들었다⁠. 손가락이 송신 단추 위에 얹혔다⁠. 이번에는 미끄러지지 않았다⁠. 떨리지도 않았다⁠. 원배는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⁠.

“⁠남단⁠, 북단입니다⁠. 다섯 시 반 철수 명령⁠, 예비군 열일곱 명 철수시켰습니다⁠. 북단 잔류 서른아홉⁠. 버스 연료관 고장⁠, 버스에 민간인 열⁠. 노인 넷 산소통 착용으로 도보 이송 불가⁠. 버스 수리 후 전원 버스와 함께 철수하겠습니다⁠. 저는 북단에 남겠습니다⁠.⁠”

무전기 너머가 비었다⁠. 원배는 기다렸다⁠. 작전참모가 대답하기 전에 무엇을 할지 원배는 알았다⁠. 쌍안경을 들어 북단을 볼 것이다⁠. 버스를 보고⁠, 구덩이를 보고⁠, 원배를 볼 것이다⁠. 무전기 너머에서 바람 소리만 지직거렸다⁠. 원배는 송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았다⁠.

“⁠반 소위⁠.⁠”

“⁠예⁠.⁠”

“⁠여섯 시는 그대로다⁠.⁠”

“⁠알고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네가 고른 거다⁠.⁠”

“⁠예⁠. 제가 골랐습니다⁠.⁠”

무전이 끊겼다⁠. 원배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⁠. 무전기 배터리 상자가 등에서 덜렁거렸다⁠. 청테이프가 한 바퀴 모자랐다⁠. 덜렁거리는 상자를 손바닥으로 받쳐 들자⁠, 아침부터 등을 누르던 상자가 생각보다 가벼웠다⁠.

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렸다⁠. 어머니였다⁠. 「⁠엄마 주차장에서 나왔어⁠. 김밥 할머니가 너 사진 보재서 보여 줬다⁠. 잘생겼대⁠. 원배야 저녁은 꼭 먹어⁠」 원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⁠. 화면 위에 속보가 겹쳐 떠 있었다⁠. 「⁠유엔 안보리 긴급회의⁠, 결론 없이 정회⁠」 원배는 휴대전화를 가슴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⁠.

*

“⁠소위님⁠!⁠”

하사가 둑길 끝을 가리켰다⁠. 원배는 하사의 손끝을 따라 보았다⁠.

둑길 위로 사람들이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⁠. 군복이었다⁠. 열 명 남짓⁠, 서로를 부축하며⁠, 둘은 들것 하나를 맞잡고 있었다⁠. 휴전선 감시초소에서 철수한다던 현역들이었다⁠. 맨 앞 사람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⁠.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는데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은 말보다 소리에 가까웠다⁠. 들것 위의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⁠. 들것을 든 둘 가운데 하나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가⁠, 옆 사람이 팔을 잡아 일으키자 다시 뛰었다⁠. 하사가 구덩이에서 뛰어나가려는 것을 원배가 팔을 잡아 막았다⁠. 하사의 팔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⁠.

현역들 뒤로⁠, 둑길이 능선 밑으로 꺾어 들어가는 모퉁이에서 흙먼지가 솟았다⁠. 먼지 속에서 차량 한 대가 머리를 내밀었다⁠. 바퀴가 여럿 달린 회색 차량이었다⁠. 차량 지붕 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돌아갔다⁠. 총구였다⁠.

원배는 숨을 들이쉬었다⁠. 이번에는 소리가 나왔다⁠.

“⁠전원 진지⁠! 버스 뒤로⁠!⁠”

원배의 목소리가 삼거리를 때렸다⁠. 원배는 방금 외친 목소리가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았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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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나경훈2026.11.01· 9화

    무전기 멜빵이 쓸린 자리가 아파서 오히려 머리가 덜 엉킨다는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아요.

    • 마효곤작가2026.11.01

      원배 씨는 아픈 데를 붙잡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. 다섯 시 반까지 그게 필요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