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405자)

계산

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· 마효곤

구치영은 발밑의 콘크리트가 따뜻하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⁠. 오후 내내 볕을 받은 다리 바닥이 젖은 군화 밑창으로 온기를 올려 보냈다⁠. 아침부터 젖어 있던 양말이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⁠. 이상한 때에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⁠. 치영은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고 앞에 선 사람을 보았다⁠.

인준묵은 대답을 들은 뒤에도 물러서지 않았다⁠. 덥수룩한 머리에 흙먼지가 허옇게 앉아 있었고⁠, 사흘 수염 밑으로 턱 근육이 움직였다⁠. 가슴 주머니 덮개는 여전히 들려 있었다⁠.

“⁠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⁠?⁠”

“⁠들으십시오⁠.⁠”

치영은 몸을 돌려 북쪽을 보았다⁠. 느릅골 뒤 능선 위로 먼지가 낮게 깔려 있었다⁠.

“⁠저 먼지 밑에 북쪽 선두가 있습니다⁠. 정찰 차량이 앞에 서고 장갑차가 따라옵니다⁠. 저 행렬이 이 다리를 건너면 전곡까지 이십 분⁠, 동두천까지 한 시간⁠, 의정부까지 두 시간입니다⁠. 3번 국도는 지금 피란 차량으로 꽉 막혀 있습니다⁠. 장갑차가 막힌 국도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말씀 안 드려도 아실 겁니다⁠.⁠”

준묵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치영은 남쪽을 보았다⁠.

“⁠동원령이 두 시에 떨어졌습니다⁠. 지금 수도권 부대마다 예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⁠. 군복을 받고⁠, 총을 받고⁠, 트럭을 타고 의정부 북쪽에 진지를 잡는 데까지 밤 여덟 시입니다⁠. 그 진지가 서기 전에 저 행렬이 내려가면 막을 데가 없습니다⁠. 이 다리가 여섯 시에 끊기면⁠, 저 행렬은 강 앞에서 하룻밤을 씁니다⁠. 여섯 시 반에 끊기면 반나절이 줄어듭니다⁠.⁠”

“⁠여섯 시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⁠?⁠”

“⁠기계화 대대가 남단 둑에 닿는 시각과⁠, 저 먼지가 다리 북단에 닿는 시각 사이입니다⁠. 그 사이가 이십 분쯤 됩니다⁠. 그 이십 분 안에 끊어야 합니다⁠. 더 일찍 끊으면 강 건너 사람들을 덜 받고⁠, 더 늦게 끊으면 다리를 내줍니다⁠.⁠”

치영은 숫자를 늘어놓으면서 준묵의 얼굴을 보았다⁠. 준묵은 숫자를 듣는 얼굴이 아니었다⁠. 숫자 사이의 빈자리를 듣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그럼 「⁠확인 불요⁠」는요⁠?⁠”

“⁠확인을 기다리는 다리는⁠, 확인할 사람이 죽으면 영영 안 끊깁니다⁠.⁠”

바람이 다리 위를 쓸고 지나갔다⁠. 치영은 말을 이었다⁠.

“⁠북단 장교가 철수 완료를 보고해야 끊는다고 쓰면⁠, 반 소위가 죽거나 무전기가 고장 나는 순간 이 다리는 끊을 수 없는 다리가 됩니다⁠. 함 대위가 열두 시 오십 분에 죽었습니다⁠. 반 소위도 죽을 수 있습니다⁠. 당신도 죽을 수 있습니다⁠. 누가 죽어도 이 다리는 여섯 시에 끊겨야 합니다⁠. 그래서 그렇게 썼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지금 건너오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⁠?⁠”

“⁠지금 건너오십시오⁠.⁠”

준묵의 입이 반쯤 열렸다가 닫혔다⁠. 치영은 준묵의 얼굴을 보며 계속했다⁠.

“⁠버스와 트럭은 지금 보내십시오⁠. 노인들 먼저⁠. 북단 인원은 다섯 시 반까지 진입로를 지키다가 철수합니다⁠. 휴전선 감시초소 하나가 아직 철수 중입니다⁠. 현역 열두 명이 둑길로 내려오고 있습니다⁠. 다섯 시 반까지는 열어 두어야 합니다⁠. 다섯 시 반에 건너오면 여섯 시까지 삼십 분이 남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에 그 현역들이 안 오면요⁠?⁠”

“⁠그 사람들은 강 건너에 남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오십 분에 둑길 끝에 보이면요⁠?⁠”

“⁠남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오십구 분에 다리 입구에 닿으면요⁠?⁠”

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준묵이 한 걸음 다가왔다⁠. 둘의 거리가 팔 하나였다⁠.

“⁠작전참모님⁠. 아침에 연병장에서 여섯 시간이라고 하셨을 때⁠, 저는 그게 버티는 시간인 줄 알았습니다⁠. 버티면 끝나는 시간이요⁠. 근데 작전참모님한테는 끊는 시각이었네요⁠.⁠”

“⁠버티는 시간이 맞습니다⁠. 다리가 버티는 시간입니다⁠.⁠”

“⁠사람은요⁠?⁠”

“⁠사람은 다리를 건너면 됩니다⁠.⁠”

“⁠건너오려는 사람이 다리 끝에 닿기 전에 다리가 없어지면요⁠?⁠”

치영은 손목시계를 보지 않았다⁠. 대신 바지 주머니 속의 시계를 손가락으로 쥐었다⁠. 유리가 깨진 함석겸의 시계였다⁠. 깨진 유리 모서리가 손가락 끝을 찔렀다⁠.

“⁠인준묵 씨⁠. 저도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압니다⁠. 3번 국도에 제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⁠. 차가 한 시간 반째 서 있다고 합니다⁠. 이 다리가 여섯 시 반에 끊기면⁠, 장갑차가 제 딸이 탄 차 뒤에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⁠. 저는 그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⁠. 당신은 지금 일흔일곱 명의 계산을 하고⁠, 저는 국도 위의 몇십만 명 계산을 합니다⁠. 둘 다 계산입니다⁠.⁠”

“⁠둘 다 맞으면요⁠?⁠”

“⁠그러면 둘 중 하나는 집에 못 갑니다⁠.⁠”

준묵이 웃었다⁠. 웃음 끝이 비틀어졌다⁠. 준묵은 다리 북단을 돌아보았다⁠. 초록색 군내버스와 트럭⁠, 구덩이마다 솟은 철모⁠, 출석부를 든 원배⁠.

“⁠버스 보내겠습니다⁠. 노인들 먼저⁠.⁠”

“⁠고맙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은 약속 못 합니다⁠.⁠”

준묵은 돌아서서 북단으로 걸어갔다⁠. 치영은 준묵의 뒷모습을 보았다⁠. 걸음이 아침보다 무거웠다⁠. 어긋난 단추 탓에 한쪽으로 처진 전투복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⁠.

*

치영이 남단으로 반쯤 돌아왔을 때 강물이 솟았다⁠. 다리에서 오십 미터 떨어진 상류였다⁠. 누런 물기둥이 다리 난간 높이까지 치솟았다가 무너졌고⁠, 물보라가 바람을 타고 다리 위로 쏟아졌다⁠. 치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⁠. 얼굴에 강물이 튀었다⁠. 차갑고 흙냄새가 났다⁠. 손등으로 닦지도 않았다⁠. 둑 위에서 지켜보던 예비군 몇이 머리를 감쌌다⁠.

남단 둑 위 구덩이에서 예비군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⁠. 동원령에 붙잡혀 돌아온 쉰둘 가운데⁠, 시훈을 따라 북단으로 건너가지 않고 남단 둑에 남은 서른아홉 중 하나였다⁠. 안경알 하나에 금이 가 있었고⁠, 철모 대신 회사 로고가 박힌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⁠. 모자 챙에 「⁠창립 20주년 체육대회⁠」라고 수놓여 있었다⁠.

“⁠참모님⁠! 저쪽 형님들 언제 와요⁠?⁠”

“⁠다섯 시 반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이요⁠? 진짜죠⁠?⁠”

“⁠진짜입니다⁠.⁠”

“⁠참모님⁠, 아까 교통비도 진짜라고 하셨어요⁠.⁠”

“⁠교통비도 진짜입니다⁠.⁠”

예비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⁠. 옆 구덩이에서도 웃음이 터졌다⁠. 치영은 둑을 올라가며⁠, 아침부터 예비군들이 자신의 말에 웃는 것이 이번이 몇 번째인지 헤아려 보았다⁠. 세 번이었다⁠. 치영은 한 번도 웃기려고 한 적이 없었다⁠.

*

치영은 남단 둑으로 돌아왔다⁠. 둑 아래 참호에서 도진곤이 격발기 상자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⁠. 치영이 내려가자 진곤은 일어나지 않았다⁠.

“⁠봉투 열었지⁠?⁠”

“⁠혼자 열렸어유⁠.⁠”

“⁠도 상사⁠.⁠”

“⁠지 손이 혼자 열었어유⁠. 그리고 북단 분대장한테 보여 줬어유⁠. 지가 그랬어유⁠.⁠”

진곤은 고개를 들었다⁠. 쉰을 바라보는 상사의 눈에 핏발이 올라 있었다⁠. 치영은 진곤을 내려다보았다⁠. 명령서를 미리 열고 민간인과 다름없는 예비군에게 보인 상사였다⁠. 군법으로 따지면 할 말이 많았다⁠.

“⁠왜 보여 줬어⁠?⁠”

“⁠손 흔들 사람을 만들려고유⁠.⁠”

“⁠손 흔드는 사람 기다리다가⁠, 손 흔들 사람이 죽으면⁠? 그다음엔 누굴 기다려⁠?⁠”

진곤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입술을 우물거리다가⁠,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⁠.

“⁠글쎄유⁠. 그건 모르겄는디유⁠. 근데 참모님⁠. 지가 스무 해 다리를 끊으면서 한 번도 사람 있는 다리를 끊어 본 적이 없어유⁠. 훈련이니께⁠. 오늘 처음이면⁠, 지는 처음을 손 흔드는 사람 보고 하고 싶어유⁠. 그게 다예유⁠.⁠”

치영은 진곤 옆에 쪼그려 앉았다⁠. 둘의 무릎이 격발기 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⁠. 상자 손잡이에 녹이 조금 슬어 있었다⁠. 진곤이 아침에 사포로 문질러 놓은 자국이 보였다⁠.

“⁠여섯 시에 손 흔드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⁠.⁠”

“⁠없으면유⁠?⁠”

“⁠여섯 시야⁠.⁠”

진곤은 고개를 끄덕였다⁠. 끄덕이는 고개가 무거웠다⁠.

*

컨테이너로 들어가자 무전기가 울렸다⁠. 군단 작전처였다⁠.

“⁠기계화 대대 강변 농로로 뺐습니다⁠. 논두렁 몇 개 무너뜨렸고요⁠. 선두 도착 예상 다섯 시 오십오 분⁠.⁠”

“⁠다섯 시 오십오 분⁠.⁠”

치영은 수첩에 받아 적었다⁠. 「⁠17⁠:55⁠」 첫 장의 「⁠18⁠:00⁠」과 오 분 차이였다⁠. 숫자가 맞았다⁠. 치영은 숫자가 맞는 것이 이번에는 기쁘지 않았다⁠. 아침 연병장에서 여섯 시간이라고 말할 때는 숫자가 맞기를 바랐다⁠. 이제 숫자는 맞았고⁠, 맞은 숫자 끝에 일흔일곱이 서 있었다⁠.

사단장이 무전에 들어왔다⁠.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⁠.

“⁠작전참모⁠. 여섯 시 그대로인가⁠?⁠”

“⁠그대로입니다⁠.⁠”

“⁠북단에 사람이 아직 많다던데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에 철수합니다⁠.⁠”

“⁠안 하면⁠?⁠”

“⁠여섯 시입니다⁠.⁠”

사단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⁠. 무전기 너머에서 누군가 지도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⁠.

“⁠자네 집사람하고 딸⁠, 3번 국도에 있다며⁠. 참모부에서 들었네⁠.⁠”

“⁠예⁠.⁠”

“⁠…알았네⁠. 자네가 정해⁠.⁠”

무전이 끊겼다⁠. 치영은 송수화기를 걸며⁠, 사단장이 방금 무엇을 넘겨주었는지 알았다⁠. 여섯 시의 이름이었다⁠. 이제 다리를 끊는 사람의 이름도⁠, 끊지 않는 사람의 이름도 구치영이었다⁠.

휴대전화가 떨렸다⁠. 아내였다⁠.

「⁠드디어 움직여⁠. 의정부 벗어났어⁠. 애가 아빠 다리 사진 찾았대⁠. 연천 가래여울다리 맞아⁠? 사진 보니까 엄청 길다⁠」

치영은 「⁠맞아⁠」라고 쳤다⁠. 이어서 「⁠남쪽으로 계속⁠」이라고 쳤다⁠. 그러고는 한 줄을 더 쳤다가 지웠다⁠. 지운 줄이 무엇이었는지 치영 자신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⁠.

텔레비전 화면 아래로 자막이 흘렀다⁠. 「⁠수도권 동원 예비군 입소 시작⁠… 일부 부대 군복 부족⁠」 화면 속에서 정장 바지에 군복 윗도리를 입은 남자가 줄을 서서 총을 받고 있었다⁠. 남자는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했다가⁠, 오후에 동원령을 듣고⁠, 저녁에 총을 받고 있었다⁠. 치영은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아침 연병장의 백이십 명을 떠올렸다⁠. 그들도 아침에는 회사원이었다⁠.

*

다섯 시 십오 분⁠. 치영은 컨테이너 앞에서 쌍안경을 들었다⁠. 북단 삼거리에서 노인들이 버스에 다시 오르고 있었다⁠. 원배가 버스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⁠, 홍구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⁠. 둑길 끝⁠, 능선 아래로 흙먼지가 낮게 퍼지고 있었다⁠. 먼지가 아까보다 가까웠다⁠. 둑길 위로 철수하는 현역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⁠.

치영은 송수화기를 들었다⁠.

“⁠북단⁠, 남단이다⁠. 반 소위⁠.⁠”

“⁠예⁠, 반원배입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까지 중대 데리고 건너와⁠. 버스와 트럭 먼저⁠. 북단 인원 전원⁠, 다섯 시 반에 다리 건너기 시작한다⁠. 철수 현역이 안 보이면 기다리지 마⁠.⁠”

무전기 너머가 비었다⁠.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⁠. 치영은 기다렸다⁠. 반원배는 무전기가 울리면 언제나 대답부터 하는 소위였다⁠. 오늘 열두 시에도⁠, 한 시에도⁠, 두 시에도 그랬다⁠.

대답이 없었다⁠.

“⁠반 소위⁠. 들었나⁠?⁠”

“⁠…들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섯 시 반에 안 건너오면⁠, 반 소위 네가 책임진다⁠. 알았나⁠?⁠”

다시 무전기 너머가 비었다⁠. 이번에는 길었다⁠. 치영은 쌍안경을 들어 북단을 보았다⁠. 버스 앞에 선 원배가 송수화기를 귀에 댄 채 준묵을 보고 있었다⁠. 준묵은 원배를 보지 않고 둑길 끝을 보고 있었다⁠. 둑길 끝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⁠. 먼지만 낮게 깔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⁠.

“⁠…예⁠. 알⁠, 알겠습니다⁠.⁠”

원배의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⁠. 치영은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⁠. 주머니 속에서 함석겸의 시계를 다시 쥐었다⁠. 시계는 여전히 열두 시 오십 분이었다⁠. 멈춘 바늘은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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