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360자)

여섯 시간

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· 마효곤

구치영은 젖은 군화 속에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⁠. 개울을 건너 훈련장으로 들어올 때 지프 바퀴가 빠져 내려서 밀었고⁠, 신발에 들어간 개울물이 아직 양말에서 질척거렸다⁠. 조수석에서 손목시계를 보았다⁠.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⁠. 뒤로 두 돈 반 트럭 세 대가 지프 꽁무니를 따라 둑길을 기어 올라왔다⁠.

치영은 무릎 위에 지도를 펴고 연필 끝으로 길을 다시 짚었다⁠. 남쪽 집결지에서 기계화 대대가 출발했다는 보고는 열한 시에 받았다⁠. 평소라면 세 시간 거리였다⁠. 3번 국도는 지금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란 차량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동원 차량이 한 줄로 엉켜 있었다⁠. 길이 막힌 데다 다리 둘이 끊겨 돌아와야 했다⁠. 치영은 막힌 길과 돌아갈 길을 더하고 빼서 여섯 시간을 얻었다⁠. 저녁 여섯 시였다⁠.

“⁠참모님⁠, 컵라면 드실래요⁠? 물은 없는데⁠.⁠”

운전병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컵라면을 내밀었다⁠. 스물한 살 상병이었다⁠.

“⁠물 없는 컵라면을 왜 줘⁠.⁠”

“⁠씹어 드시라고요⁠. 과자처럼⁠.⁠”

“⁠운전이나 해⁠.⁠”

운전병은 컵라면을 도로 무릎 사이에 끼웠다⁠. 바스락 소리가 났다⁠. 치영은 웃지 않았지만 지도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⁠.

휴대전화가 떨렸다⁠. 아내였다⁠.

「⁠애 학교에서 데려왔어⁠. 3번 국도 타고 내려가는 중인데 차가 안 움직여⁠. 당신 어디야⁠?⁠」

치영은 「⁠남쪽으로 계속 가⁠」라고 쳤다⁠. 어디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⁠. 고등학교 1학년 딸이 뒷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치영은 알았다⁠.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보고 있을 것이다⁠. 아빠가 군인이라 이런 날도 연락이 안 된다고⁠, 열 번쯤 말한 표정으로⁠.

무전기가 지직거렸다⁠. 사단장이었다⁠.

“⁠작전참모⁠. 예비군⁠, 쓸 수 있겠나⁠?⁠”

“⁠쓸 수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총은⁠?⁠”

“⁠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총 말고⁠.⁠”

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⁠. 첫 트럭 짐칸에서 예비군 하나가 방탄모를 벗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⁠. 옆 사람이 방탄모를 빼앗아 거꾸로 씌웠다⁠. 둘이 낄낄거렸다⁠. 짐칸 맨 앞에 아까 연병장에서 한 걸음 나왔던 예비군이 앉아 있었다⁠. 인준묵이었다⁠. 소총을 무릎 사이에 세우고 앞만 보고 있었다⁠.

“⁠있습니다⁠.⁠”

치영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⁠.

*

열두 시 이십 분⁠, 가래여울다리 남단 둑에 닿았다⁠. 둑 위에 사단 전방 지휘소 컨테이너가 놓여 있었다⁠. 문에는 「⁠흡연 금지⁠」 종이가 붙어 있었고⁠, 안에서는 고장 난 커피 기계가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 혼자 윙윙거렸다⁠. 둑 아래 참호에서 공병 상사 도진곤이 전선 묶음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⁠. 마흔여덟⁠, 사단에서 다리를 제일 많이 끊어 본 사람이었다⁠. 물론 훈련에서였다⁠.

“⁠참모님 오셨어유⁠.⁠”

진곤이 일어나며 엉덩이의 흙을 털었다⁠.

“⁠폭약은⁠?⁠”

“⁠교각 둘에 다 달았어유⁠. 선도 여기까지 끌어왔고⁠. 손잡이만 돌리면 돼유⁠.⁠”

진곤은 발치에 놓인 녹색 상자를 툭 건드렸다⁠. 다리 밑 폭약에 불을 보내는 격발기였다⁠. 손잡이 달린 상자가 생각보다 작았다⁠.

“⁠글쎄유⁠, 근데 시각은 언제로 잡을까유⁠? 북단에서 철수 보고를 받고⁠…⁠”

“⁠시각은 내가 정해⁠. 도 상사는 선만 봐⁠.⁠”

“⁠예⁠.⁠”

진곤은 더 묻지 않았다⁠. 대신 상자를 무릎 앞으로 조금 끌어당겼다⁠.

치영은 컨테이너에 들어가 군단 작전처를 불렀다⁠. 무전기 너머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⁠. 아침부터 같은 질문을 백 번은 들은 목소리였다⁠.

“⁠기계화 대대 선두⁠, 아직 동두천 못 지났습니다⁠. 국도에 피란 차량이 삼 킬로 넘게 서 있어요⁠. 도착은 저녁 여섯 시로 보는데⁠, 늦으면 일곱 시입니다⁠.⁠”

“⁠여섯 시입니다⁠.⁠”

“⁠예⁠?⁠”

“⁠여섯 시로 맞추라고 전하십시오⁠. 일곱 시면 늦습니다⁠.⁠”

“⁠참모님⁠, 길이 막혀서⁠…⁠”

“⁠길이 막힌 건 저쪽도 압니다⁠.⁠”

치영은 무전기를 내려놓으려다 한마디를 더 들었다⁠. 오후 두 시에 대통령 담화가 있고⁠, 수도권 동원령이 검토되고 있다는 말이었다⁠. 치영은 수첩을 펴 「⁠14⁠:00 담화⁠」라고 쓰고 무전기를 걸었다⁠. 동원령이 떨어지면 길 위의 예비군은 전부 가까운 부대로 돌아와야 했다⁠. 피란 차량 사이에 동원 차량이 하나 더 끼게 될 것이었다⁠. 3번 국도 어딘가에 아내의 차가 있었다⁠.

치영은 둑 위로 올라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⁠. 콘크리트 다리가 강을 가로질러 북쪽 둑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⁠. 삼백 미터 남짓⁠, 왕복 이 차로였다⁠. 이음새마다 깔린 철판이 햇빛에 번쩍였다⁠. 강물은 3월 해빙기라 탁했고⁠, 다리 기둥에 부딪혀 흰 거품을 일으켰다⁠. 다리 건너 북단에는 둑길과 마을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있었다⁠. 마을길은 북쪽으로 굽어 들어가 느릅골로 이어졌다⁠. 느릅골 뒤 능선 너머가 북쪽이었다⁠.

함석겸 대위가 뛰어와 경례했다⁠.

“⁠중대 하차 완료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북단 삼거리로 데려가⁠. 둑길과 마을길이 만나는 데⁠. 내려오는 피란 차량하고 철수 병력은 무조건 통과시키고⁠, 다리 진입로를 막는 건 다 치워⁠.⁠”

함석겸의 얼굴이 굳었다⁠.

“⁠북단이요⁠? 강 건너편 말씀이십니까⁠?⁠”

“⁠그래⁠.⁠”

“⁠예비군들한테는 다리를 지킨다고만⁠…⁠”

“⁠다리를 지키는 거야⁠. 다리 입구가 거기 있으니까⁠.⁠”

함석겸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⁠.

“⁠참모님⁠. 제가 나흘 동안 저 사람들한테 커피믹스 타 주면서⁠, 오늘만 버티면 집에 간다고 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오늘만 버티면 집에 가⁠.⁠”

“⁠다리 건너서도요⁠?⁠”

“⁠함 대위⁠.⁠”

치영은 대위의 계급장을 보았다⁠. 상근 간부로 동원사단에 붙박여 예비군만 열 해 가까이 맡은 사람이었다⁠. 예비군을 다루는 법은 치영보다 함석겸이 잘 알았다⁠.

“⁠저 사람들이 함 대위 말은 들어⁠. 내 말은 안 들어도⁠.⁠”

함석겸은 경례했다⁠. 뒤돌아 뛰어가는 대위의 등에 커피믹스 봉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⁠.

*

예비군들은 줄을 지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⁠. 걷는다기보다 흘러갔다⁠. 백이십 명이 한 덩어리로⁠, 서두르지 않고⁠, 다리 한가운데를 차지하며 느릿느릿 움직였다⁠. 치영은 둑에서 소리쳤다⁠.

“⁠뛰십시오⁠!⁠”

덩어리 한가운데에서 누가 대답했다⁠.

“⁠예비군은 안 뜁니다⁠!⁠”

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⁠. 함석겸이 “⁠뛰어⁠!⁠” 하고 외치자 맨 앞 열 명쯤이 뛰는 시늉을 하다가 도로 걸었다⁠. 치영은 이를 깨물었다가⁠, 저 사람들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⁠. 포탄이 떨어진 지 한 시간 만에 웃는 사람들이었다⁠. 이런 사람들은 무너질 때도 한꺼번에 무너졌다⁠.

치영은 다리 위로 내려갔다⁠. 북단 진지 자리를 함석겸에게 직접 짚어 줄 생각이었다⁠. 다리 한가운데쯤에서 예비군 하나가 덩어리에서 빠져나와 치영 앞을 막았다⁠. 인준묵이었다⁠.

“⁠작전참모님⁠.⁠”

“⁠말씀하십시오⁠.⁠”

발밑에서 철판 이음새가 덜컹 울렸다⁠. 뒤에서 군용 트럭 한 대가 북쪽으로 건너가는 중이었다⁠. 다리 전체가 낮게 떨렸다⁠. 준묵은 떨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⁠.

“⁠강 건너라고는 안 하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리를 지키라고 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다리를 지키는 거하고 강을 건너는 거하고는 다릅니다⁠.⁠”

“⁠말했으면 트럭에 타셨겠습니까⁠?⁠”

준묵의 턱 근육이 움직였다⁠. 수염 밑에서 근육이 두 번 꿈틀거렸다⁠.

“⁠안 탔겠죠⁠.⁠”

“⁠그래서 안 했습니다⁠.⁠”

치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⁠.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⁠. 준묵도 그것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⁠. 준묵은 다리 북쪽을 보았다가⁠, 남쪽 둑을 보았다가⁠, 다시 치영을 보았다⁠.

“⁠여섯 시간 뒤에 현역이 오면⁠, 우리는 이 다리로 다시 건너오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현역이 오면 여러분은 집에 갑니다⁠.⁠”

“⁠이 다리로요⁠?⁠”

“⁠여섯 시간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⁠.⁠”

준묵이 웃었다⁠. 소리 없이⁠, 입꼬리만 한쪽으로 올라갔다⁠.

“⁠작전참모님⁠, 저 영업합니다⁠. 냉난방기 팝니다⁠. 고객이 견적서 보고 ‘⁠나중에 말씀드릴게요⁠’ 하면⁠, 그거 안 산다는 말입니다⁠.⁠”

“⁠저는 아무것도 팔지 않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더 무섭습니다⁠.⁠”

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준묵의 가슴 주머니가 불룩했다⁠. 단추 하나가 어긋나 주머니 덮개가 들려 있었고⁠, 접힌 도화지 끝이 비죽 나와 있었다⁠. 크레파스의 빨간색이 조금 보였다⁠. 치영은 눈을 돌렸다⁠.

“⁠인준묵 씨⁠, 북단으로 가십시오⁠. 다리 입구가 막히면 강 건너 사람들이 못 건너옵니다⁠. 그 사람들도 집에 가야 합니다⁠.⁠”

준묵은 경례하지 않았다⁠. 소총 멜빵을 고쳐 메고 덩어리 쪽으로 돌아가며 한마디를 남겼다⁠.

“⁠고르게 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무엇을요⁠?⁠”

“⁠남을 사람하고 갈 사람⁠.⁠”

치영은 준묵의 말을 알아들었다⁠. 막으려고 한 걸음 뗐을 때 준묵은 이미 덩어리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⁠.

*

열두 시 사십 분⁠, 치영은 지휘소 컨테이너 앞에서 쌍안경을 들었다⁠. 컨테이너 안 작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돌았다⁠. 외신을 받은 화면이었다⁠. 「⁠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⁠」「⁠국제 유가 급등⁠」 화면 아래로 서울 지하철 일부 구간 운행 중단 자막이 흘렀다⁠. 치영은 소리를 껐다⁠.

쌍안경 속에서 북단 삼거리가 가까워졌다⁠. 예비군들이 마을길 가장자리 논두렁에 엎드려 흙을 파고 있었다⁠. 삽이 모자라 철모로 흙을 퍼내는 사람도 있었다⁠. 함석겸이 삼거리 한가운데에서 팔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보냈다⁠. 반원배가 무전기를 등에 메고 뒤를 따랐다⁠. 무전기 배터리 상자가 청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는 것까지 보였다⁠.

마을길로 경운기 한 대가 내려왔다⁠. 짐칸에 노인 셋과 이불 보따리가 실려 있었다⁠. 함석겸이 손을 흔들어 경운기를 다리로 보냈다⁠. 경운기는 탈탈거리며 다리 위로 올라왔다⁠. 노인 하나가 짐칸에서 고개를 돌려 강 건너⁠, 제 마을을 보았다⁠.

치영은 수첩을 꺼냈다⁠. 첫 장에 연필로 쓴 숫자가 있었다⁠. 「⁠18⁠:00⁠」 아무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숫자였다⁠. 치영은 숫자 밑에 줄을 한 번 더 그었다⁠.

“⁠참모님⁠.⁠”

진곤이 둑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북단에 우리 애들 다 들어갔어유⁠?⁠”

“⁠예비군이야⁠.⁠”

“⁠글쎄유⁠, 예비군도 우리 애들이쥬⁠. 저기 둘째 줄 하나는 우리 큰애랑 동갑이겠던데⁠.⁠”

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다리 북단에서 원배가 무전기를 시험하는 소리가 지직거리며 들어왔다⁠. 치영은 무전기를 들었다⁠.

“⁠반 소위⁠.⁠”

“⁠예⁠, 알겠습니다⁠!⁠”

“⁠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⁠.⁠”

“⁠…예⁠, 듣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북단에서 무전 끊기지 마⁠. 배터리 아끼고⁠. 그리고 사람 세⁠.⁠”

“⁠예⁠, 알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뭘 알았는데⁠?⁠”

무전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⁠. 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예비군 누군가가 “⁠애기 소대장 혼난다⁠.⁠” 하고 킥킥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⁠.

“⁠…몇 명 남는지 세서 보고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래⁠.⁠”

치영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쌍안경을 다시 들었다⁠.

소리는 쌍안경보다 늦게 왔다⁠. 렌즈 안에서 삼거리 한가운데 흙이 솟구쳤다⁠. 흙기둥이 무너지는 사이 경운기가 다리 위에서 멈췄다⁠. 예비군들이 논두렁 아래로 엎드렸다⁠. 한 박자 뒤에 쿵 소리가 강을 건너왔고⁠, 컨테이너 창문이 덜덜 떨었다⁠.

연기가 걷혔다⁠. 삼거리 한가운데에 함석겸이 쓰러져 있었다⁠. 대위는 팔 하나를 다리 쪽으로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⁠. 원배가 무전기를 멘 채 대위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⁠.

치영은 쌍안경을 내리지 않았다⁠. 손목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각을 알았다⁠. 열두 시 오십 분⁠. 여섯 시까지 다섯 시간 십 분이 남아 있었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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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강묵현2026.11.01· 2화

    젖은 군화 속에서 발가락 오므리는 첫 장면, 예비군 다녀온 사람은 다 발이 축축해져요.

    • 마효곤작가2026.11.01

      개울 건너 들어가는 훈련장은 늘 그렇죠. 치영 씨는 그 발로 여섯 시간을 버텨야 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