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715자)

골동품

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· 마효곤

인준묵은 소총을 받아 들자마자 개머리판부터 뒤집어 보았다⁠. 칠이 벗겨진 자리에 누군가 볼펜으로 「⁠94⁠」라고 써 놓았다⁠. 준묵이 태어난 해였다⁠. 총열 끝에는 녹이 버짐처럼 번져 있었고⁠, 멜빵 고리 하나는 철사로 칭칭 감겨 있었다⁠. 총기 수령대 너머의 현역 일병이 준묵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⁠.

“⁠형님⁠, 그거 형님이랑 동갑이네요⁠.⁠”

곽시훈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며 웃었다⁠. 나흘 동안 같은 분대 옆자리에 앉으면서 준묵이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⁠. 시훈은 전쟁 드라마를 거의 다 봤고⁠, 무슨 일이든 드라마 장면에 빗댔다⁠.

“⁠드라마에서 이런 총 받으면 무조건 고장 나요⁠. 결정적인 순간에 딸깍⁠.⁠”

“⁠결정적인 순간 올 일 없어⁠. 오늘 여섯 시 퇴소야⁠.⁠”

백로동원사단 훈련장 연병장은 밤새 얼었던 흙이 녹아 질척거렸다⁠. 걸음을 뗄 때마다 군화 밑창에 진흙이 한 겹씩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⁠. 아침에 들어와 저녁에 나가는 출퇴근 동원훈련의 나흘째⁠, 마지막 날이었다⁠. 준묵은 예비군 마지막 해였다⁠. 해외 출장을 핑계로 세 번 미룬 동원훈련이 마지막 해에 한꺼번에 돌아왔고⁠, 이제 저녁 여섯 시만 지나면 예비군도 끝이었다⁠.

시훈이 휴대전화를 들어 둘을 함께 찍었다⁠. 화면 속의 준묵은 헐렁한 예비군 모자 아래로 덥수룩한 검은 머리가 삐져나와 있었고⁠, 사흘 동안 못 깎은 수염이 턱을 거뭇하게 덮고 있었다⁠. 보통 키에 살짝 마른 몸이 얼룩무늬 전투복 안에서 헐거웠다⁠. 가슴께를 보니 단추 하나가 한 칸씩 밀려 어긋나 있었다⁠. 시훈은 사진을 분대 단톡방에 올렸다⁠.

「⁠영포티 형님 마지막 출근 ㅠㅠ 전역 축하드립니다⁠」

“⁠나 서른넷이야⁠.⁠”

“⁠형님⁠, 영포티는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에요⁠. 형님 러닝화 보세요⁠.⁠”

준묵은 대꾸 대신 단추를 내려다보았다⁠. 새벽 다섯 시 반⁠, 현관에서 아내 새란이 단추를 가리켰다⁠. 준묵은 차에서 고친다고 했고⁠, 새란은 차에서 안 고칠 거라고 했다⁠. 새란이 맞았다⁠. 준묵은 단추 대신 가슴 주머니를 만졌다⁠. 네 번 접은 도화지가 손끝에 바스락거렸다⁠. 어젯밤 여섯 살 솔빈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었다⁠. 초록 옷을 입은 아빠가 집 문 앞에 서 있고⁠, 지붕 위로 빨간 해가 지고⁠, 삐뚤빼뚤한 글씨가 위에 올라가 있었다⁠. 「⁠아빠 여섯 시에 와⁠」 세 살 근우는 귀퉁이에 파란 줄을 몇 개 긋고 제 작품이라고 우겼다⁠.

*

“⁠1소대⁠, 번호⁠.⁠”

반원배 소위가 연병장 앞에서 출석부를 펼쳤다⁠. 목소리가 또박또박했고⁠, 끝마다 「⁠입니다⁠」가 붙었다⁠. 임관한 지 넉 달 된 학사장교였다⁠. 예비군을 맡은 것은 이번 주가 처음이라고⁠, 첫날 스스로 말했다가 「⁠애기 소대장⁠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⁠.

“⁠예비군 여러분⁠, 오늘도 안전하게 훈련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소대장님⁠, 몇 년생이에요⁠?⁠”

뒷줄에서 누가 물었다⁠.

“⁠2003년생입니다⁠.⁠”

“⁠와⁠, 월드컵 다음 해⁠.⁠”

“⁠…그렇습니다⁠.⁠”

원배의 귀가 빨개졌다⁠. 대열이 낄낄거렸다⁠. 중대장 함석겸 대위가 연병장 가장자리에서 종이컵 커피를 들고 웃었다⁠. 함석겸은 동원사단에 붙박인 상근 간부였고⁠, 나흘 내내 예비군들에게 커피믹스를 나눠 주며 “⁠오늘만 버티면 집에 가요⁠.⁠” 하고 말했다⁠.

대열 맨 끝에서 탁홍구가 휴대전화에 대고 소리를 죽여 떠들고 있었다⁠.

“⁠형님⁠, 우리 가게 앞 지나가면 창문으로 가스 밸브 좀 봐 줘요⁠. 노란 손잡이가 누워 있으면 잠긴 거고⁠, 서 있으면 큰일 난 거고⁠.⁠”

홍구는 전곡에서 순댓국집을 했다⁠. 나흘 내내 가스 밸브⁠, 육수⁠, 배달 앱 이야기만 했다⁠. 통화를 끊자마자 화면에 알림이 떴다⁠.

「⁠사장님 예비군 잘 다녀오세요 국물 기다립니다 ★★★★★⁠」

홍구는 대열 속에서 엄지로 답글을 썼다⁠. 「⁠고객님 소중한 리뷰 감사합니다⁠. 사장은 지금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⁠.⁠」

준묵의 휴대전화도 떨렸다⁠. 회사 메신저였다⁠.

「⁠인 대리⁠,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학교 냉난방기 견적서 가능⁠?⁠」

팀장이었다⁠. 준묵은 「⁠네 팀장님⁠」이라고 쳤다가⁠, 지우고⁠, 다시 쳤다⁠.

*

열 시 사십 분⁠, 사격장으로 가는 길이었다⁠. 소리보다 울림이 먼저 왔다⁠. 군화 밑에서 땅이 한 번 둔하게 떨렸고⁠, 반 박자 뒤에 북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굴러왔다⁠. 대열이 멈췄다⁠. 다시 쿵⁠. 이번에는 더 길게 울렸다⁠.

“⁠포병 사격 훈련이죠⁠?⁠”

시훈이 물었다⁠. 원배가 무전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⁠.

“⁠오늘 포 사격 계획 없습니다⁠.⁠”

준묵은 북쪽 하늘을 보았다⁠. 3월 오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⁠. 훈련장 둔덕 너머로 임진강이 반짝였고⁠, 강 건너 능선 위로 흰 연기 기둥 하나가 곧게 올라가고 있었다⁠. 바람이 없어서 기둥은 흩어지지 않았다⁠. 누가 하늘에 분필로 줄을 그은 것 같은 연기였다⁠. 준묵은 저 연기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⁠. 다만 연기 밑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⁠.

대열 여기저기서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울었다⁠. 날카로운 경보음이 연병장을 덮었다⁠.

「⁠[연천군] 경기 북부 지역 포격 발생⁠. 주민은 가까운 대피소로 즉시 이동하십시오⁠.⁠」

곧이어 다른 화면이 떴다⁠. 「⁠[속보] 임진강 일대 포격⁠… 외신 “⁠휴전선 일대 교전 가능성⁠”⁠」

“⁠드라마에서는⁠…⁠” 시훈이 말을 꺼냈다⁠.

“⁠시훈아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드라마 얘기 하지 마⁠.⁠”

함석겸 중대장이 종이컵을 버리고 뛰어왔다⁠. 엎드리라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세 번째 쿵이 왔다⁠. 이번에는 강 건너가 아니었다⁠.

훈련장 정문 옆 주차장이 들렸다가 내려앉았다⁠. 준묵은 진흙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었다⁠. 귓속에서 쇠가 우는 소리가 났고⁠, 등 위로 흙과 자갈이 비처럼 떨어졌다⁠. 고개를 들자 주차장 한가운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⁠. 예비군들이 나흘 동안 아침마다 차를 대던 곳이었다⁠. 준묵의 회색 SUV가 앞 유리 없이 불타고 있었다⁠. 할부가 스물두 번 남은 차였다⁠.

“⁠내 탑차⁠!⁠”

홍구가 진흙에서 머리를 들었다⁠. 냉동 탑차의 문이 뜯겨 나가 있었다⁠.

“⁠순대 오십 줄 실려 있었는데⁠!⁠”

“⁠형님⁠, 순대가 문제가 아니에요⁠!⁠”

“⁠순대가 문제야⁠! 오늘 저녁 장사 거야⁠!⁠”

준묵은 웃음이 났다⁠. 웃음이 나는 자신이 이상했다⁠. 손바닥을 땅에 짚고 일어나려는데 팔꿈치가 말을 듣지 않고 떨었다⁠. 옆에서 누가 유리 조각에 손등을 베어 피를 흘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⁠. 원배가 무전기를 쥔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⁠. 소대장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⁠.

준묵은 손등을 벤 예비군에게 기어가 손수건을 감아 주고⁠, 원배의 손목을 잡아 흔들었다⁠. 원배의 손목이 차가웠다⁠. 소대장이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준묵을 보았다⁠.

“⁠소대장님⁠, 다친 사람부터 세세요⁠.⁠”

“⁠예⁠, 알겠습니다⁠.⁠”

원배는 대답부터 하고 나서 일어났다⁠. 일어나서도 한참 동안 무엇을 세야 하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⁠. 함석겸이 달려와 원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고⁠, 둘은 대열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름을 불렀다⁠.

준묵은 진흙 묻은 손가락으로 새란의 번호를 눌렀다⁠.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새란이 받았다⁠.

“⁠뉴스 봤어⁠. 당신 어디야⁠?⁠”

“⁠훈련장⁠. 괜찮아⁠. 다친 데 없어⁠.⁠”

“⁠괜찮은 사람 목소리가 아닌데⁠.⁠”

“⁠귀가 좀 멍해서 그래⁠.⁠”

“⁠당신은 꼭 이럴 때 괜찮다고 하더라⁠.⁠”

“⁠그럼 뭐라고 해⁠?⁠”

“⁠안 괜찮다고 해야 내가 덜 무섭지⁠.⁠”

수화기 너머로 근우가 “⁠아빠야⁠? 아빠 바꿔 줘⁠.⁠” 하고 보챘다⁠. 텔레비전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⁠. 새란이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고 말했다⁠.

“⁠애들 학원 안 보냈어⁠. 솔빈이 어린이집도 문 닫는대⁠. 여섯 시에 오는 거 맞지⁠?⁠”

준묵은 불타는 SUV를 보았다⁠. 타이어 하나가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⁠.

“⁠차는 못 가져가겠다⁠.⁠”

“⁠차 얘기 아니잖아⁠. 단추는⁠?⁠”

“⁠…아직⁠.⁠”

“⁠거봐⁠.⁠”

새란이 웃었다⁠. 웃음 끝이 떨렸다⁠. 준묵은 여섯 시라고 말하려다가 함석겸의 호루라기 소리에 전화를 끊었다⁠.

*

열한 시 이십 분⁠, 지프 한 대가 흙탕물을 튀기며 연병장으로 들어왔다⁠.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이 조수석의 지도 통을 겨드랑이에 끼었다⁠. 철모 끈을 턱에 바짝 맸고⁠, 바짓단이 무릎까지 젖어 있었다⁠. 함석겸이 달려가 경례했다⁠. 들은 사람이 거의 없는 짧은 보고가 오갔다⁠.

“⁠중대 집합⁠.⁠”

함석겸의 목소리에 예비군 백이십 명이 연병장으로 모였다⁠. 다들 줄이 삐뚤었고⁠, 몇은 방탄모를 거꾸로 썼다⁠. 방탄모 끈이 끊어진 자리는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⁠. 지프에서 내린 사람이 대열 앞으로 걸어왔다⁠. 계급장에 무궁화가 둘이었다⁠.

“⁠사단 작전참모 구치영 중령입니다⁠.⁠”

치영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⁠. 대신 한 마디씩 끊어서 연병장 끝까지 보냈다⁠.

“⁠지금부터 여러분은 가래여울다리로 갑니다⁠. 강 건너 마을 사람들과 철수하는 현역이 다리로 내려옵니다⁠. 그 사람들이 다 건널 때까지 다리 북쪽 진입로를 열어 두는 것이 여러분 임무입니다⁠. 남쪽에서 현역 기계화 대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⁠. 도착까지 여섯 시간입니다⁠.⁠”

대열이 웅성거렸다⁠. 누가 “⁠장난해⁠?⁠” 하고 중얼거렸다⁠. 준묵은 가슴 주머니를 눌렀다⁠. 도화지가 손바닥 밑에서 바스락거렸다⁠.

준묵은 대열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⁠. 원배가 놀라서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⁠.

“⁠작전참모님⁠.⁠”

“⁠말씀하십시오⁠.⁠”

“⁠우리는 하루짜리 훈련 온 사람들입니다⁠. 저녁 여섯 시에 퇴소하는 사람들입니다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⁠”

“⁠여기 있는 사람들 집이 다 의정부⁠, 양주⁠, 동두천입니다⁠. 집에 애들이 있습니다⁠. 지금 가서 애들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⁠”

치영은 준묵의 명찰을 보았다⁠. 이름을 한 번 읽고 얼굴로 눈을 옮겼다⁠.

“⁠인준묵 씨⁠. 퇴소 시각은 그대로입니다⁠. 여섯 시까지만 계시면 됩니다⁠. 장소만 바뀝니다⁠.⁠”

대열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다가 바로 멎었다⁠. 준묵은 웃지 않았다⁠.

“⁠그건 현역이 할 일입니다⁠.⁠”

“⁠현역은 여섯 시간 뒤에 옵니다⁠. 지금 이 근처에서 총을 든 사람은 여기 백이십 명이 전부입니다⁠.⁠”

“⁠이 총으로요⁠?⁠”

준묵은 소총을 들어 보였다⁠. 총열의 녹이 햇빛에 붉게 번들거렸다⁠. 「⁠94⁠」라는 볼펜 글씨가 치영 쪽으로 향했다⁠. 치영은 총을 보고⁠, 다시 준묵을 보았다⁠.

“⁠그 총으로 다리를 막으라는 게 아닙니다⁠. 다리를 열어 두라는 겁니다⁠. 사람이 건널 수 있게⁠.⁠”

“⁠여기서 걸어가도 집까지 사십 킬로입니다⁠. 지금 보내 주시면 해 지기 전에 닿습니다⁠.⁠”

치영이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⁠. 네 번째 쿵이 왔다⁠.

땅이 발밑에서 한 번 크게 미끄러졌다⁠. 준묵은 무릎을 꿇었고 치영은 그대로 서 있었다⁠. 훈련장 정문 밖⁠, 전곡으로 나가는 이 차로 도로 위에서 아스팔트가 솟구쳤다⁠. 정문 앞 작은 다리 난간이 엿가락처럼 휘어 개울로 떨어졌다⁠. 나가던 민간 트럭 한 대가 도로 가장자리에 처박혀 연기를 뿜었다⁠. 운전석 문이 열리고 사람이 기어 나와 논두렁으로 달렸다⁠. 준묵은 운전자가 살아서 달리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쉬었다⁠.

연병장이 조용해졌다⁠. 백이십 명이 정문을 보았다⁠. 아침마다 차를 몰고 들어왔고⁠, 저녁마다 몰고 나가던 길이었다⁠.

치영은 도로에서 눈을 떼고 준묵에게 몸을 돌렸다⁠. 목소리는 아까와 같았다⁠.

“⁠집으로 가는 길은 방금 끊겼습니다⁠. 다리로 가는 길은 아직 있습니다⁠.⁠”

연병장 끝에서 낡은 두 돈 반 트럭 세 대가 시동을 걸었다⁠. 배기관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⁠. 함석겸이 “⁠1소대부터 승차⁠!⁠” 하고 외쳤다⁠. 원배가 출석부를 가슴에 안고 트럭 꽁무니로 뛰어갔다⁠.

준묵은 무릎의 진흙을 털지 않고 일어났다⁠. 시훈이 진흙에 떨어진 준묵의 휴대전화를 주워 내밀었다⁠. 화면에 새란의 이름이 떠 있었고⁠, 진동이 시훈의 손바닥 위에서 계속 울렸다⁠.

준묵은 전화를 받아 들었다⁠. 받지 않고 화면을 엎었다⁠. 받으면 여섯 시라고 말해야 했다⁠. 트럭 꽁무니로 걸어가며 준묵은 어긋난 단추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⁠. 개머리판이 허벅지를 툭툭 쳤다⁠. 칠이 벗겨진 「⁠94⁠」가 걸음마다 햇빛을 받았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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