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438자)

깨어 있는 토요일

주말마다 빌리는 몸 · 여오령

수요일 저녁⁠, 목동 아파트 식탁에 오랜만에 세 사람이 같이 앉았다⁠. 서휴가 끓인 된장찌개가 가운데 놓였다⁠. 서휴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냉장고 문에 붙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⁠. 「⁠팔천사백⁠」 굵은 매직 글씨였다⁠.

“⁠밥 먹을 때마다 보라고 붙였어⁠.⁠”

“⁠밥맛 떨어지라고⁠?⁠”

“⁠밥맛 떨어지라고⁠.⁠” 서휴가 대답했다⁠. “⁠숫자는 매일 봐야 줄어⁠. 우리 회원들 체중도 그래⁠.⁠”

이솜이 밥을 뜨다가 물었다⁠. “⁠아빠⁠, 스물다섯 살 몸이면 아이돌 춤도 돼⁠?⁠”

“⁠춤은 머리가 배우는 거야⁠. 몸은 따라가고⁠.⁠”

“⁠그럼 아빠 머리로는 안 되겠네⁠.⁠”

서휴가 찌개를 뜨다 웃었다⁠. 일주일 만에 이 집에서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⁠. 병곤도 따라 웃었는데⁠, 웃다가 허리를 짚었다⁠. 이솜이 아빠 허리를 흘끗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근데 그 형은 어때⁠? 아빠가 빌린 몸 주인⁠.⁠”

“⁠찬율 씨⁠.⁠”

“⁠응⁠. 그 형은 일 년 동안 주말이 없었던 거잖아⁠. 금요일에 자서 일요일에 일어나면⁠.⁠” 이솜은 손가락을 접어 셌다⁠. “⁠나라면 미쳤을 거 같아⁠. 나 토요일 없으면 죽어⁠.⁠”

병곤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열일곱 살이 손가락 두 개로 센 것을 병곤은 일 년 동안 한 번도 세어 보지 않았다⁠.

텔레비전에서 저녁 뉴스가 흘렀다⁠. 다음 주 화요일 국회 신체대여법 공청회⁠, 소위원장 위도범⁠. 화면 속 위도범이 기자들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⁠. 서휴가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껐다⁠. 소리가 꺼진 화면에서 위도범은 계속 입을 움직였다⁠.

“⁠저 사람 골반은 어때⁠?⁠” 병곤이 물었다⁠.

서휴는 화면을 잠깐 봤다⁠. “⁠뒤로 빠졌어⁠. 꼬리뼈로 앉는 사람이야⁠.⁠”

*

목요일 오후⁠, 병곤은 찬율의 대학 공학관에 갔다⁠. 4층 실험실 문을 열자 흰 가운을 입은 대학원생 셋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⁠. 셋 다 병곤의 얼굴을 알아봤다⁠. 숏폼 덕분이었다⁠.

“⁠찬율이 형 찾아오셨어요⁠?⁠” 안경 쓴 학생이 물었다⁠. 목소리가 떨렸다⁠. “⁠혹시 서핑 강사님이세요⁠?⁠”

“⁠아닙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찬율이 형 양양 애인 아버님이세요⁠?⁠”

“⁠아닙니다⁠.⁠”

학생들은 서로 눈을 맞췄다⁠. 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어 편의점 아재 숏폼을 띄우고⁠, 화면과 병곤을 번갈아 봤다⁠. 다른 한 사람이 조용히 실험실 안쪽 문을 가리켰다⁠.

“⁠형 옥상에 있어요⁠. 오늘 하루 종일 옥상에 있어요⁠.⁠”

안경 쓴 학생이 따라 나오며 목소리를 낮췄다⁠. “⁠형이 요즘 좀 이상해요⁠. 일 년 내내 긴소매만 입더니 이번 주엔 반소매 입고 와요⁠. 어제는 수영복 샀대요⁠. 수영 못 하는 사람이⁠. 저희는 형이 드디어 양양 애인이랑 헤어진 줄 알았어요⁠.⁠”

“⁠헤어진 건 맞습니다⁠.⁠” 병곤이 말했다⁠. 학생은 무슨 뜻인지 묻지 못하고 실험실로 도로 들어갔다⁠. 문틈으로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보였다⁠.

옥상은 뜨거웠다⁠. 찬율은 환기구 그늘에 앉아 서류 한 장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⁠. 오늘은 반소매를 입고 있었다⁠. 그을린 팔을 더는 가리지 않았다⁠.

“⁠대표님이 월요일에 주신 거예요⁠.⁠” 찬율이 서류를 내밀었다⁠.

「⁠진술서⁠. 본인 옥찬율은 7월 11일과 7월 16일⁠, 길병곤의 강요로 보관실과 지하 2층에 출입하였다⁠. 지하 2층은 투자자 시연용 전시 공간이며⁠, 단말기 화면은 시연용 가상 자료이다⁠. 본인은 길병곤이 화면을 찍는 것을 보았다⁠.⁠」

맨 아래 서명 칸이 비어 있었다⁠. 서류 아래에 한 장이 더 있었다⁠. 「⁠장학 증서 · 석사 남은 학기와 박사 과정 등록금 전액 · 「⁠여벌⁠」 신체공학연구소 연구원 채용(⁠정규직⁠)⁠」

“⁠다시는 몸 안 빌려줘도 된대요⁠.⁠” 찬율이 말했다⁠. “⁠연구소에서 밴드 만드는 일 하래요⁠. 토요일마다 쉬고요⁠.⁠”

*

옥상 철문이 열렸다⁠. 금세창이 들어왔다⁠. 이번에는 리넨 셔츠였다⁠. 손에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었다⁠.

“⁠찬율 씨⁠,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어요⁠. 실험실에 아이스크림 넣어 두고 왔습니다⁠.⁠” 세창은 병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⁠. “⁠부장님도 계셨군요⁠. 실험실 학생들이 부장님 오셨다고 단톡방에 올렸더라고요⁠. 요즘 학생들 빨라요⁠.⁠”

“⁠찬율 씨한테 무슨 진술서를 받으시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사실을 받는 겁니다⁠.⁠” 세창은 아이스박스를 내려놓았다⁠. “⁠지하 2층이 무엇이었든⁠, 찬율 씨가 혼자서 거기 내려갔을 리는 없죠⁠. 부장님이 데려가셨어요⁠. 그건 사실입니다⁠.⁠”

“⁠화면이 시연용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죠⁠.⁠”

“⁠판사님이 정하실 일이고요⁠.⁠” 세창은 찬율 옆에 쪼그려 앉았다⁠. 같은 눈높이였다⁠. 병곤을 대할 때와 목소리가 달랐다⁠. “⁠찬율 씨⁠, 저도 학교 다닐 때 몸 빌려줬어요⁠. 「⁠여벌⁠」 만들기 전에요⁠. 그때는 회사도 없었고⁠, 아는 형이 주말마다 제 몸을 빌려 갔어요⁠. 돈은 현금으로 받았고요⁠. 월요일에 깨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어요⁠. 형이 제 몸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끝까지 안 물었어요⁠. 물으면 그 돈을 못 받을 것 같아서⁠.⁠” 세창은 제 손바닥을 펴 보였다⁠. 굳은살은 없었다⁠. 오래전에 사라진 자리였다⁠. “⁠그래서 회사를 만들었어요⁠. 적어도 계약서는 있게⁠. 적어도 손님 번호는 있게⁠. 이천 명이요⁠. 찬율 씨 같은 사람 이천 명이 우리 회사에 몸을 맡기고 월세를 내요⁠. 부장님이 이기시면 그 이천 명이 다음 달부터 월세를 못 내요⁠. 찬율 씨는 그중 한 명이고요⁠.⁠”

찬율이 서류를 내려다봤다⁠. 세창은 일어나 병곤을 봤다⁠.

“⁠부장님은 주말마다 찬율 씨한테 이백을 내셨죠⁠. 찬율 씨는 육십을 받았고요⁠. 저는 백사십을 받았습니다⁠. 저도 나쁜 놈이에요⁠. 인정합니다⁠. 근데 부장님은요⁠? 부장님은 일 년 동안 찬율 씨 몸으로 바다에 가시면서 찬율 씨 얼굴을 한 번이라도 궁금해하셨습니까⁠?⁠”

병곤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이솜이 손가락 두 개로 센 것이 다시 떠올랐다⁠.

*

“⁠아저씨⁠.⁠” 찬율이 처음으로 병곤을 손님이 아니라 아저씨라고 불렀다⁠. “⁠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⁠?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일 년 동안 아저씨가 주말마다 제 몸으로 바다에 갈 때⁠, 저는 잤어요⁠. 금요일 밤에 누우면 일요일 밤이었어요⁠. 그사이에 제 몸은 파도를 탔고⁠, 라면을 먹었고⁠, 사장님한테 병곤이라고 불렸고⁠, 모래밭에서 웃었어요⁠. 저는 하나도 몰라요⁠.⁠” 찬율의 목소리는 끝까지 공손했다⁠. 공손할수록 병곤의 귀가 따가웠다⁠. “⁠그런데 이제 와서 저한테 일어나라고요⁠? 아저씨 몸을 누가 썼는지 밝히려고⁠, 제가 깨어 있어야 해요⁠? 아저씨는 일 년 동안 제 몸을 쓰면서 한 번도 저를 깨운 적 없잖아요⁠.⁠”

“⁠깨울 수가 없었어요⁠. 규칙이⁠…⁠…⁠”

“⁠알아요⁠. 규칙이죠⁠.⁠” 찬율이 고개를 끄덕였다⁠. “⁠그러니까 저도 이번엔 규칙대로 할게요⁠. 계약서에 기록 넘기지 말라고 적혀 있어요⁠. 진술서 쓰라고 하면 써요⁠. 그러면 장학금이 나와요⁠. 아저씨는 일 년 동안 규칙대로 저를 재웠고⁠, 저는 이번에 규칙대로 아저씨를 재울게요⁠.⁠”

세창이 볼펜을 내밀었다⁠. 찬율은 볼펜을 받았다⁠. 서명 칸 위에서 펜 끝이 한 번 멈췄다⁠. 찬율이 병곤을 봤다⁠. 막아 달라는 눈인지⁠, 막지 말라는 눈인지 병곤은 읽을 수 없었다⁠. 스무 해 동안 사람의 눈을 읽어 온 병곤이 처음으로 한 사람의 눈 앞에서 글자를 놓쳤다⁠.

병곤은 막지 않았다⁠. 막을 자격을 찾아봤는데⁠, 일 년 동안 주말마다 이백만 원을 내고 산 것들 가운데 그런 것은 없었다⁠.

찬율이 서명했다⁠. 펜 소리가 옥상의 열기 속에서 크게 들렸다⁠.

“⁠감사합니다⁠, 찬율 씨⁠.⁠” 세창은 진술서를 서류철에 넣었다⁠. 왼손 검지가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⁠. 이번에는 일이 끝났다는 손짓이었다⁠. “⁠연구소 출근은 다음 달 첫 월요일입니다⁠. 토요일은 쉬세요⁠. 진심으로요⁠.⁠”

세창이 철문으로 걸어가다 병곤을 돌아봤다⁠.

“⁠부장님⁠, 다음 주 공청회 오시죠⁠? 방청석 남겨 두라고 의원님 사무실에 말해 둘게요⁠. 의원님이 부장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세요⁠. 거울 보는 기분이 드실 거라고⁠.⁠”

철문이 닫혔다⁠. 옥상에는 두 사람이 남았다⁠. 찬율은 볼펜을 쥔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⁠.

“⁠미안해요⁠.⁠” 찬율이 말했다⁠.

“⁠제가 할 말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둘 다 하지 말아요⁠.⁠” 찬율은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털었다⁠. “⁠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게요⁠. 실험실 사람들이 다 먹기 전에⁠.⁠”

*

금요일 오후⁠, 반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⁠.

“⁠옥찬율 씨 진술서가 검찰에 들어갔어요⁠. 「⁠여벌⁠」 변호사님이 직접 갖다 줬대요⁠. 지하 2층은 시연 공간⁠, 화면은 가짜⁠, 선생님이 데리고 내려갔다⁠. 사진은 조작 의혹으로 분류됐어요⁠.⁠” 필구는 한 박자 쉬었다⁠. 이번에는 김밥 씹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⁠. “⁠그리고 선생님한테 주거침입이 하나 더 붙었어요⁠. 「⁠여벌⁠」이 고소했어요⁠.⁠”

“⁠계약서는요⁠? 특약 7조⁠.⁠”

“⁠그건 초안이라서요⁠. 아직 아무도 도장을 안 찍었어요⁠. 도장 없는 계약서는 회사들끼리 하는 낙서래요⁠. 검사님 말씀이에요⁠.⁠”

병곤은 전화를 끊고 냉장고 문을 봤다⁠. 「⁠팔천사백⁠」 밑에 서휴의 글씨로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⁠. 「⁠주거침입 · 변호사비 ?⁠」 물음표까지 매직이었다⁠.

밤 열두 시⁠, 불 끈 안방에서 서휴가 천장을 보며 물었다⁠.

“⁠스물다섯 살은 어땠어⁠?⁠”

병곤은 대답을 미뤘다⁠. 서휴가 기다렸다⁠. 에어컨 바람이 커튼 끝을 들썩였다⁠.

“⁠파도 위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⁠.⁠” 병곤이 말했다⁠. “⁠허리가 하나도 안 아팠어⁠. 무릎도 안 아프고⁠. 몸이 내가 시키기도 전에 먼저 일어났어⁠. 그게 다야⁠. 다른 건 없어⁠. 허리 안 아픈 거 하나 사려고 팔천을 썼어⁠.⁠”

서휴는 한참 말이 없었다⁠. 병곤은 서휴가 잠든 줄 알았다⁠.

“⁠바보⁠.⁠” 서휴가 말했다⁠. “⁠허리는 내가 십오 년 동안 공짜로 펴 줬잖아⁠.⁠”

“⁠당신이 누르면 아파⁠.⁠”

“⁠아파야 펴지지⁠. 안 아프게 펴지는 허리가 어딨어⁠.⁠” 서휴가 돌아누우며 병곤의 허리에 손바닥을 댔다⁠. 누르지 않고 그냥 댔다⁠. “⁠내일 아침에 학원 와⁠. 첫 타임⁠. 회원들 앞에서 뉴스 아저씨 허리 펴 줄게⁠. 회원들이 좋아할 거야⁠. 텔레비전 나온 사람이라고⁠.⁠”

“⁠그거 놀리는 거잖아⁠.⁠”

“⁠놀리는 거야⁠.⁠” 서휴의 손바닥이 따뜻했다⁠. “⁠근데 공청회 가지 마⁠. 그 사람들⁠, 당신 얼굴 보려고 부른 거 아니야⁠. 당신 얼굴을 사람들한테 보여 주려고 부른 거야⁠.⁠”

병곤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서휴의 손바닥 아래에서 허리가 조금씩 풀렸다⁠. 일 년 동안 병곤은 서휴의 손바닥 대신 남의 허리를 빌렸다⁠.

*

토요일 아침⁠, 찬율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다⁠. 동네 수영장 접수대 위에 회원 카드가 놓여 있었다⁠. 「⁠토요일 자유 수영 · 오전 아홉 시⁠」 사진 밑에 글이 붙어 있었다⁠.

「⁠두 번째 깨어 있는 토요일이에요⁠. 물에 얼굴 담그는 거 오 초 했어요⁠. 강사님이 제 어깨 보고 선수 출신이냐고 물었어요⁠. 아니라고 했어요⁠.⁠」

사진을 넘기니 한 장이 더 있었다⁠. 수영장 탈의실 거울 앞에서 찍은 찬율의 얼굴이었다⁠. 물안경 자국이 눈가에 빨갛게 남아 있었고⁠, 입꼬리가 왼쪽부터 올라가 있었다⁠. 일 년 동안 병곤이 거울에서 보던 웃음이었는데⁠, 이번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이 주인이었다⁠.

병곤은 답장을 쓰다가 손을 멈췄다⁠. 화면 위쪽에 새 알림이 떠 있었다⁠. 국회 홈페이지였다⁠. 「⁠신체대여법 공청회 방청 승인 · 길병곤 · 7월 26일 14시 · 소위원장실 요청⁠」

병곤은 거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봤다⁠. 반백의 머리⁠, 금테 안경⁠, 둥근 얼굴⁠. 거울 보는 기분이 드실 거라고⁠. 병곤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⁠.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  • 채온유2026.11.01· 9화

    냉장고에 「팔천사백」 붙여 놓고 밥맛 떨어지라고 하는 아내 대사가 너무 현실이라 웃프네요.

    • 여오령작가2026.11.01

      서휴 씨는 화내는 대신 숫자를 붙이는 사람이에요. 병곤 씨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허리가 먼저 아파 옵니다.

깨어 있는 토요일 · 주말마다 빌리는 몸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