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56자)

신체 귀속

주말마다 빌리는 몸 · 여오령

세창이 내민 손은 오래 허공에 떠 있었다⁠. 병곤이 잡지 않자 세창은 손을 거두어 위도범의 침대 난간에 올려놓았다⁠. 은발의 남자가 누운 침대를 짚고 서니 세창이 병원 회진을 도는 의사처럼 보였다⁠.

“⁠같이 일하자는 말⁠, 농담 아닙니다⁠.⁠” 세창이 말했다⁠. “⁠저희 회사에 사고 담당 이사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⁠. 빈방 손님이 사고를 내면 누가 수습하는지 아세요⁠? 제가 합니다⁠. 새벽 세 시에 운동복 입고요⁠. 부장님은 스무 해 동안 남의 사고를 수습하셨죠⁠. 연봉은 지금의 두 배⁠, 마이너스 통장 팔천은 입사 축하금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⁠. 피해자분께 삼억⁠, 부장님 재판은 기기 오류로 집행유예⁠. 옥찬율 씨는 오늘 밤 일을 잊어 드리고요⁠.⁠”

찬율이 통로 끝에서 숨을 죽였다⁠. 세창은 찬율을 돌아보지 않았다⁠.

“⁠그리고 의원님 법이 통과됩니다⁠. 신체 귀속 원칙⁠. 몸이 한 일은 몸 주인이 책임진다⁠. 들으면 끔찍하시죠⁠? 끝까지 들어 보세요⁠. 몸 주인이 책임을 지면 보험사는 몸 주인에게 책임보험을 팝니다⁠. 몸 빌려주는 사람 이천 명이 전부 보험에 들어요⁠. 사고가 나면 보험금이 나갑니다⁠. 다친 사람은 돈을 받아요⁠. 지금은 아무도 못 받습니다⁠. 법이 없으니까요⁠. 나양례 씨 같은 분이 다음에 또 생겨도⁠, 법이 생기면 그분은 재판 삼 년 대신 보험금 석 달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 보험료는 누가 냅니까⁠?⁠”

“⁠몸 주인이요⁠. 대여료에서 조금씩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사람 친 손님은 아무것도 안 내고⁠, 자고 있던 사람이 보험료를 낸다는 말이네요⁠.⁠”

“⁠손님은 대여료를 냅니다⁠. 비싸게⁠.⁠” 세창은 병곤을 똑바로 봤다⁠. “⁠부장님⁠, 이건 시장입니다⁠. 법이 없는 시장에서는 아무도 안 다치게 할 방법이 없어요⁠. 다쳤을 때 돈이 나가게 할 방법만 있죠⁠. 그게 보험이고⁠, 부장님 회사가 그걸로 먹고삽니다⁠.⁠”

병곤은 대답하기 전에 커튼 안을 봤다⁠. 위도범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내렸다⁠. 지금 이 순간에도 B1-05라는 남의 얼굴로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⁠.

“⁠나양례 씨가 그 얼굴을 보고 싶어 합니다⁠.⁠”

“⁠의원님 얼굴이요⁠?⁠” 세창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⁠. “⁠의원님 얼굴은 그날 밤 여기 누워 있었습니다⁠. 지금처럼요⁠. 피해자분이 가로등 밑에서 보신 얼굴은 부장님 얼굴이고요⁠. 부장님이 의원님을 피해자분 앞에 데려가시면⁠, 피해자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⁠. 이 사람 아닌데요⁠.⁠”

병곤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세창은 친절하게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⁠.

“⁠가셔도 됩니다⁠. 휴대전화 뺏지 않아요⁠. 부장님 같은 분한테서 휴대전화를 뺏으면 그게 증거가 되니까요⁠.⁠”

*

일요일 오전 열한 시⁠, 성동경찰서 당직실⁠. 반필구는 일요일에도 김밥을 먹고 있었다⁠. 병곤이 내민 휴대전화 사진을 한 장씩 넘기는 동안 김밥이 두 알 줄었다⁠.

“⁠B1-14⁠, 서른한 번⁠. VIP-03⁠. 위도범⁠. 대외협력 법인 카드⁠.⁠” 필구는 사진을 넘기다 침대에 누운 위도범의 사진에서 멈췄다⁠. 오래 봤다⁠. “⁠파란 불이네요⁠.⁠”

“⁠비어 있는 몸입니다⁠. 지금도 남의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⁠.⁠”

“⁠선생님⁠.⁠” 필구가 김밥을 내려놓았다⁠. “⁠이 사진으로는 영장 안 나와요⁠. 남의 회사 지하에 청소 조끼 입고 들어가서 찍은 거잖아요⁠. 판사가 이 사진을 보면 국회의원 얼굴보다 청소 조끼를 먼저 봐요⁠. 게다가 상대가 국회의원이에요⁠. 소위원장이고⁠. 우리 과장님은 오늘 아침에 송치 서류 다 꾸며 놨어요⁠. 화요일에 넘기래요⁠. 기소 의견으로⁠.⁠”

“⁠경위님은요⁠?⁠”

필구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⁠. 창밖에서 순찰차 한 대가 들어왔다⁠.

“⁠저 정년이 일 년 남았어요⁠.⁠” 필구가 말했다⁠. “⁠일 년 동안 아무 일 없으면 연금 받고 집사람이랑 마라톤 대회 구경 다니려고요⁠. 집사람은 이번엔 자기 몸으로 뛴대요⁠. 오 킬로⁠.⁠” 필구는 휴대전화를 병곤에게 돌려주며 덧붙였다⁠. “⁠사진은 제 개인 메일로 보내 두세요⁠. 경찰서 메일 말고요⁠.⁠”

경찰서를 나오자 찬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⁠. 「⁠대표님이 월요일에 면담하재요⁠. 장학금 이야기래요⁠.⁠」 병곤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⁠. 무엇을 쓰든 세창의 제안보다 가벼웠다⁠.

*

월요일 저녁⁠, 병곤은 성동구 병원 7층에 다시 갔다⁠. 수요일까지 데려오겠다고 한 사람을 데려오지 못했으니 사진이라도 들고 가야 했다⁠. 병실 앞 의자에서 주란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⁠. 병곤을 보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은 채 턱만 들었다⁠.

“⁠데려왔어⁠?⁠”

병곤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⁠. 지하 2층 커튼 안⁠, 은발의 남자가 파란 불을 켜고 누워 있는 사진이었다⁠. 주란은 사진을 한참 보다가 손가락으로 크게 벌렸다⁠.

“⁠이 사람 텔레비전 나오는 사람이잖아⁠. 법 만든다는⁠.⁠”

“⁠그 새벽에 제 몸 안에 있던 사람입니다⁠. 회사 기록에 그렇게 나옵니다⁠.⁠”

주란은 컵라면을 내려놓았다⁠. 국물이 출렁여 손등에 튀었는데 닦지 않았다⁠. 주란은 병실로 들어갔고⁠, 병곤은 문간에 서 있었다⁠. 주란이 엄마 침대 등받이를 올리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⁠. 양례는 안경을 찾아 쓰고 사진을 오래 봤다⁠. 반찬 간을 볼 때처럼 고개를 기울였다⁠.

“⁠자는 얼굴로는 몰라⁠.⁠” 양례가 말했다⁠. “⁠말을 해 봐야 알지⁠. 그 사람은 얼굴 말고 입으로 기억해⁠.⁠”

“⁠엄마⁠, 이 사람 국회의원이야⁠.⁠”

“⁠국회의원도 입은 있잖아⁠.⁠” 양례는 휴대전화를 딸에게 돌려주고 탁자 위의 병원 밥을 숟가락으로 뒤적였다⁠. “⁠여기 미역국은 미역을 아껴⁠. 우리 조리실이면 혼나⁠.⁠”

복도로 나온 주란이 문을 닫고 병곤을 봤다⁠. 목소리가 낮았다⁠.

“⁠그 대표가 오늘 또 전화했어⁠. 사억으로 올렸어⁠. 수요일까지만⁠.⁠” 주란은 컵라면을 들어 식은 국물을 마셨다⁠. “⁠사억이면 엄마 집 근처로 이사 가⁠. 엘리베이터 있는 데로⁠. 엄마 다리로는 우리 집 사층 계단 못 올라가⁠.⁠”

병곤은 할 말이 없었다⁠. 사억은 병곤이 평생 모은 것보다 많았고⁠, 엘리베이터 있는 집은 사진 한 장으로 생기지 않았다⁠.

“⁠사진 말고⁠.⁠” 주란이 말했다⁠. “⁠엄마가 저 사람 입을 들어야 돼⁠. 수요일은 지나가도 돼⁠. 근데 너무 늦지는 마⁠. 내가 돈 앞에서 얼마나 버틸지 나도 몰라⁠.⁠”

*

화요일 아침⁠, 병곤의 휴대전화에 기사가 떴다⁠. 「⁠성수동 뺑소니 피의자 길병곤 씨⁠, 기소 의견 송치⁠」 기사 맨 끝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⁠. 「⁠경찰은 피의자가 신체 대여 업체에 책임을 돌리고 있으나 근거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⁠.⁠」 근거는 확인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다⁠. 병곤은 기사를 닫고 넥타이를 맸다⁠. 오후 두 시에 회사에서 불렀다⁠.

여의도 온새손해보험 15층 상무실은 에어컨이 셌다⁠. 상무는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병곤에게 한 잔을 밀었다⁠. 병곤은 손대지 않았다⁠.

“⁠「⁠여벌⁠」에서 공문이 왔어⁠. 우리 회사 부장이 자기네 지하에 무단 침입했다고⁠. 청소 조끼 입고⁠.⁠” 상무는 커피를 마셨다⁠. “⁠길 부장⁠, 그건 사실이야⁠?⁠”

“⁠조끼는 사실입니다⁠.⁠”

“⁠신체 귀속 원칙 통과되면 우리 회사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⁠?⁠” 상무는 태블릿을 돌려 그래프를 보여 주었다⁠. 막대가 계단처럼 올라갔다⁠. “⁠몸 빌려주는 사람 전부가 우리 고객이 돼⁠. 지금 이천 명⁠, 법 통과되면 이만 명⁠, 삼 년 뒤면 이십만 명⁠. 매출이 이 년 안에 두 배야⁠. 사장님이 이 건에 회사 이름 걸었어⁠. 그런데 자네가 이기면 그 법 한 줄이 날아가⁠.⁠”

“⁠제가 이기면 몸 안에 있던 사람이 책임지는 겁니다⁠.⁠” 병곤이 말했다⁠. “⁠그게 보험 원칙 아닙니까⁠. 차가 아니라 운전자가 책임진다⁠. 스무 해 동안 우리가 법원에서 싸운 말이 그거였잖습니까⁠. 차를 빌려 간 사람이 사고를 냈는데 차 주인한테 물어내라고 하면⁠, 우리가 제일 먼저 들고일어났잖아요⁠.⁠”

“⁠차는 차고⁠, 몸은 몸이야⁠.⁠”

“⁠몸은 차보다 더하죠⁠.⁠” 병곤은 상무 책상 뒤 액자를 봤다⁠. 골프장 잔디 위에서 서른 살쯤 된 남자가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⁠. “⁠상무님도 지난봄에 서른 살 몸 빌려서 골프 치셨잖습니까⁠. 언더파 치셨다고 임원 단톡방에 사진 올리셨다고 들었습니다⁠.⁠”

상무의 귀가 붉어졌다⁠. “⁠그건 그 몸이 잘 친 거지⁠.⁠”

“⁠그 몸이 친 거면 상무님 기록이 아니네요⁠.⁠”

“⁠골프는 달라⁠.⁠” 상무는 액자를 엎어 놓았다⁠. 엎어 놓고 나서 더 어색해졌는지 도로 세웠다⁠.

상무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⁠. 잔 받침에 부딪치는 소리가 컸다⁠.

“⁠자네가 말하는 원칙은 돈이 안 돼⁠. 신체 귀속은 돈이 돼⁠. 원칙으로 월급 주는 회사는 없어⁠.⁠” 상무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⁠. 「⁠사직서⁠」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⁠. “⁠자네 퇴직금 깎지 않을게⁠. 내가 사장님한테 따로 말해 놓을게⁠. 스물두 해 근속이야⁠. 그만하면 좋게 나가는 거야⁠.⁠”

병곤은 사직서를 내려다봤다⁠. 같은 해에 입사해서 같은 해에 과장을 달고⁠, 상무는 한 번 더 올라갔고 병곤은 사고 현장에 남았다⁠. 상무는 숫자를 보고 병곤은 영상을 봤다⁠. 둘 다 그렇게 살아왔다⁠.

“⁠서명 안 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징계위원회야⁠. 사유는 회사 이름 실추⁠. 퇴직금 깎여⁠.⁠”

“⁠알겠습니다⁠.⁠”

상무가 병곤을 오래 봤다⁠. 무언가 말을 고르다가 고개를 저었다⁠.

“⁠자네는 옛날부터 이랬어⁠. 블랙박스 카드 하나 찾겠다고 폐차장을 사흘 뒤졌지⁠. 그거 찾아서 보험금 천만 원 아꼈고⁠, 그 사흘 출장비가 이백이었어⁠.⁠”

“⁠그 사람은 보험 사기였습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 상무는 사직서를 서랍에 도로 넣었다⁠. “⁠알아서 하는 소리야⁠.⁠”

*

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막내가 보낸 개인 메시지였다⁠. 입사 이 년 차⁠, 병곤이 면접을 봤던 사원이었다⁠.

「⁠부장님 저 이거 보내면 잘리나요⁠?⁠」

「⁠뭘⁠?⁠」

「⁠계약팀 공유 폴더에 떠다니길래요⁠. 제가 열어 본 거 아니고 그냥 열려 있었습니다⁠.⁠」

파일 하나가 올라왔다⁠. 「⁠온새–여벌 신체 대여 책임보험 계약서(⁠초안 3차⁠)⁠」 병곤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파일을 열었다⁠. 서른 장이 넘는 계약서였다⁠. 보험 약관은 스무 해 동안 병곤이 가장 많이 읽은 글이었다⁠. 병곤은 목차를 건너뛰고 맨 끝 특약부터 펼쳤다⁠. 사기는 언제나 맨 끝에 있었다⁠.

「⁠특약 7조 · 보관 중 신체의 제삼자 사용 · 대여 회사 보관 중인 신체를 회사가 지정한 제삼자가 사용하는 동안 발생한 사고는⁠, 신체 귀속 원칙에 따라 해당 신체의 주인이 책임진다⁠. 보험금은 신체 주인의 책임보험에서 지급한다⁠.⁠」

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⁠. 문이 열렸는데 병곤은 내리지 않았다⁠. 문이 다시 닫혔다⁠.

회사가 지정한 제삼자⁠. 빈방이었다⁠. 「⁠여벌⁠」은 빈 몸을 빌려준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⁠. 보험사와 함께 계약서에 적어 두었다⁠. 사고가 나면 자고 있던 사람이 물어내도록 미리 줄을 그어 두었다⁠. 줄 끝에 온새손해보험의 직인 자리가 비어 있었다⁠. 법이 통과되는 날 찍힐 자리였다⁠.

막내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⁠.

「⁠부장님 저 잘리면 서핑 가르쳐 주세요⁠. 뉴스 보니까 잘 타시던데요⁠.⁠」

병곤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봤다⁠. 마흔여섯 살 남자가 휴대전화를 쥐고 웃고 있었다⁠.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⁠. 일주일 만이었다⁠. 병곤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내리며 반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⁠.

“⁠경위님⁠, 개인 메일 주소 한 번 더 불러 주세요⁠. 이번엔 사진 말고 계약서입니다⁠. 보험사 직인 자리가 비어 있는⁠.⁠”

8화는 어땠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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