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405자)

도장 위의 손

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· 문채겸

한 시 사십 분⁠, 상담실 유리문이 열리고 맹서흔이 먼저 들어왔다⁠. 서른아홉 살 처형은 목에 코팅한 이름표를 걸고 있었다⁠. 「⁠휘담 리버파크 입주예정자 협의회 회장 맹서흔⁠」 글자가 이름표 가장자리까지 꽉 차 있었다⁠. 서흔 뒤로 해린이 들어왔다⁠. 해린은 아침에 형우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⁠, 새결을 서흔의 남편에게 맡기고 왔다⁠.

“⁠형부⁠, 은행원이 집 사는 날 얼굴이 왜 그래요⁠. 대출 심사 떨어진 사람처럼⁠.⁠” 서흔이 형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⁠. “⁠내가 지난주에 먼저 했잖아요⁠. 우리 107동⁠, 해린이 102동⁠. 걸어서 삼 분이야⁠. 김장도 같이 하고 애들도 같이 키우고⁠.⁠”

형우의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었다⁠. 화면을 켜자 알림이 쏟아졌다⁠. 「⁠협의회장님이 반형우님을 초대했습니다⁠」 곧이어 「⁠환영합니다⁠」가 열여섯 줄 올라왔고⁠, 맨 위에 공지가 고정되어 있었다⁠. 「⁠1⁠. 부정적인 글 자제 부탁드립니다 2⁠. 이모티콘은 하루 세 개 3⁠. 우리 단지 이름은 줄여 쓰지 않습니다(⁠휘리파 ✕⁠)⁠」

“⁠휘리파가 왜 안 돼요⁠?⁠” 형우가 물었다⁠.

“⁠어감이 싸잖아요⁠. 시세는 이름에서부터 나와요⁠, 형부⁠.⁠”

알림 사이로 한 통이 더 왔다⁠. 입행 동기 왕상칠의 회사 메신저였다⁠. 토요일에도 메신저를 켜 두는 사람은 지점에서 상칠 하나였다⁠. 「⁠형 벼리셀 이번주 +31% 실화냐⁠」「⁠월요일 가즈아⁠」 아래에 차트 사진이 붙어 있었다⁠. 빨간 막대가 계단처럼 오른쪽 위로 올라갔다⁠.

형우는 차트를 오래 보았다⁠. 벼리셀은 2차전지 소재를 만드는 회사였다⁠. 처음 살았던 2023년 여름⁠, 상칠이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날이 있었다⁠. “⁠열 배야⁠, 열 배⁠! 내가 이 년 전에 팔았던 거⁠!⁠” 형우는 상칠을 놀렸다⁠. 놀리면서 속으로는 부러웠다⁠.

상담 실장이 흰 탁자 위에 계약서를 내려놓았다⁠. 큰 유리창으로 한낮의 볕이 탁자를 하얗게 덮었다⁠. 창밖 강 건너 공사장의 세 동은 9층까지 올라와 있었고⁠, 크레인 한 대가 철근 다발을 매달고 천천히 돌았다⁠. 계약서 맨 아래 공급받는 자 칸이 두 개였다⁠. 위 칸에 맹해린⁠, 아래 칸에 반형우⁠. 이름 옆 도장 자리에 동그란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⁠.

경렬이 맞은편에 앉으며 사탕 그릇을 가운데로 밀었다⁠. “⁠사모님⁠, 동호수 102동 1503호⁠. 남향에 강 보이는 라인이에요⁠. 계약금은 분양가의 10퍼센트⁠, 오늘 가계약금 빼고 칠천구백만 원 들어오시면 되고⁠, 중도금은 새마루은행 집단대출로 나갑니다⁠. 잔금은 입주 때⁠.⁠”

해린이 가방에서 도장을 꺼냈다⁠. 아침에 형우 서랍에서 꺼내 온 형우의 도장도 같이 나왔다⁠. 해린이 형우의 도장을 인주에 찍으려고 뚜껑을 열 때⁠, 형우가 손바닥을 펴서 아래 칸 점선 위에 올렸다⁠. 한 손으로는 도장 자리를 덮고⁠, 다른 손에는 벼리셀 차트가 떠 있는 휴대전화를 쥔 채였다⁠.

“⁠손 치워⁠.⁠”

“⁠못 치워⁠.⁠”

서흔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해린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⁠. 상담 실장은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뺐다⁠. 옆 탁자에서 계약하던 부부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⁠.

“⁠이 손 치우면 우리 집은 2027년에 이억 천만 원 빚이 남아⁠.⁠” 형우가 낮게 말했다⁠. “⁠두 해만 기다리자⁠. 계약금으로 넣을 돈⁠, 내가 두 해 안에 두 배로 만들어 올게⁠. 그때 사⁠. 그때는 지금보다 싸⁠.⁠”

“⁠당신이⁠? 무슨 수로⁠?⁠” 해린이 형우의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⁠. “⁠적금 이자도 엑셀로 돌리는 사람이 두 배를 어떻게 만들어⁠.⁠”

형우는 대답 대신 차트를 보여 주었다⁠. 해린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넓혀 보았다⁠.

“⁠이거 이번 주에 31퍼센트 오른 거잖아⁠.⁠” 해린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⁠. “⁠꼭대기에서 사라고⁠? 방금 당신 입으로 꼭대기에서 사지 말라며⁠.⁠”

서흔이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⁠. 경렬도 고개를 숙이고 사탕 껍질을 만지작거렸다⁠. 형우는 할 말이 없었다⁠. 집은 꼭대기고 주식은 바닥이라는 말을⁠, 2023년을 살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⁠.

“⁠과장님⁠.⁠” 경렬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⁠. “⁠부부 사이 일에 제가 낄 건 아닌데요⁠. 남편분이 이렇게까지 반대하시면⁠, 공동명의 말고 사모님 단독으로 하시는 방법도 있어요⁠. 중도금 집단대출은 단지 전체로 묶여서 나가니까⁠, 개인 대출보다 심사가 덜 까다롭거든요⁠. 사모님 소득으로 모자라면 그때 남편분이 보증만 서 주시면 되고⁠.⁠”

“⁠그 대출⁠, 우리 지점에서 나갑니다⁠.⁠” 형우가 경렬을 보았다⁠. “⁠제 손 거쳐요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요⁠. 과장님 손 거치니까 얼마나 든든해요⁠.⁠” 경렬이 웃었다⁠. “⁠실장님⁠, 단독으로 한 장 다시 뽑아 줘요⁠.⁠”

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프린터로 갔다⁠. 프린터가 웅웅거리며 새 종이를 밀어냈다⁠. 형우가 덮고 있던 계약서 옆으로 새 계약서가 놓였다⁠. 공급받는 자 칸이 하나뿐이었다⁠. 맹해린⁠.

해린이 형우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⁠. 손바닥이 차가웠다⁠. 해린은 형우의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들어 올렸다⁠. 약지⁠, 중지⁠, 검지⁠. 엄지만 남았을 때 해린이 말했다⁠.

“⁠반형우 씨⁠. 손 치워 주세요⁠.⁠”

해린이 존댓말을 쓰는 것은 화가 끝까지 났을 때였다⁠. 결혼하고 아홉 해 동안 형우가 들은 해린의 존댓말은 손에 꼽았다⁠. 형우는 엄지를 들었다⁠. 해린은 형우가 덮었던 계약서를 옆으로 밀어 두고⁠, 새 계약서의 점선 위에 자기 도장을 눌렀다⁠. 인주가 종이에 스미는 소리가 났다⁠.

형우는 시계를 보았다⁠. 도장이 종이에 닿는 순간 숫자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⁠. 무엇이든 하나라도 다르게 했으니 숫자도 다르게 나올 것이라고⁠.

「⁠−210⁠,000⁠,000⁠」

숫자는 그대로였다⁠. 한 자리도 바뀌지 않았다⁠. 명의를 바꿔도⁠, 손을 덮어도⁠, 2027년 10월 16일 오후 세 시 십일 분의 형우네 집은 똑같이 이억 천만 원을 빚지고 있었다⁠.

“⁠축하드립니다⁠, 사모님⁠.⁠” 경렬이 박수를 두 번 쳤다⁠. 서흔이 따라 쳤고⁠, 옆 탁자의 부부도 영문을 모른 채 따라 쳤다⁠. 서흔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⁠. 서흔이 화면을 보고 소리 내어 읽었다⁠. “⁠102동 1503호 계약 완료⁠! 우리 동생이에요⁠, 여러분⁠!⁠” 단톡방에 폭죽 이모티콘이 올라오기 시작했다⁠. 형우의 휴대전화도 함께 떨었다⁠. 폭죽이 화면을 위로 밀어 올렸다⁠.

해린이 화장실에 간 사이⁠, 서흔이 형우의 팔을 끌고 입구의 단지 모형 앞으로 갔다⁠. 유리 상자 안에서 손가락만 한 나무 모형들이 초록 스펀지 위에 줄지어 있었다⁠. 서흔이 목소리를 낮췄는데⁠, 낮춘 목소리도 상담실 끝까지 갔다⁠.

“⁠형부⁠, 진짜 왜 그래요⁠. 형부가 은행원이라 해린이가 형부 말이라면 다 믿었잖아요⁠. 형부가 손 덮고 있을 때 옆 탁자 부부 표정 봤어요⁠? 그 사람들 내가 데려온 사람들이에요⁠. 내 보험 고객⁠. 내가 이 단지에 데려온 집만 마흔 가구예요⁠. 협의회장이 데려온 집에서 은행원이 계약서 덮고 난리 치면⁠, 내 얼굴이 뭐가 돼요⁠?⁠”

“⁠마흔 가구요⁠?⁠”

“⁠마흔⁠. 내가 다 설명했어요⁠. 학교 가깝지⁠, 강 보이지⁠, 대행사 대표님이 책임지고 웃돈 붙여 준다 그러지⁠.⁠” 서흔이 모형 속 107동 꼭대기를 손톱으로 톡 쳤다⁠. “⁠형부⁠, 주식 하고 싶으면 차라리 우리 단지 주식 사요⁠. 휘담디앤씨⁠. 여기 시행사요⁠. 구 대표님이 그러는데⁠, 우리 웃돈 붙을 때마다 그 회사 주가도 같이 뛴대요⁠. 운영진은 벌써 다 샀어⁠. 집도 오르고 주식도 오르고⁠, 한 번에 두 번 버는 거지⁠.⁠”

형우는 처음 살았던 날들에서 휘담디앤씨라는 이름을 찾았다⁠. 2023년 여름 어느 아침⁠, 상칠이 메신저로 하한가 화면을 보내며 「⁠형 처형분 괜찮으셔⁠?⁠」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⁠. 형우는 상칠의 메신저를 읽고도 처형에게 전화하지 않았다⁠. 집 이자를 막느라 남의 집 사정을 물을 겨를이 없었다⁠.

“⁠처형⁠, 그 주식은⁠…⁠…⁠”

“⁠부정적인 말은 단톡방 공지 1번이에요⁠, 형부⁠.⁠” 서흔이 이름표를 바로 세우고 웃었다⁠. “⁠나 운영진 모임 가요⁠. 해린이 잘 데려가요⁠.⁠”

*

견본주택 주차장의 아스팔트가 볕에 물렁했다⁠. 서흔은 협의회 운영진 모임이 있다며 먼저 갔고⁠, 해린은 차 문을 열다가 멈췄다⁠. 형우가 운전석 반대편에 서 있었다⁠.

“⁠당신 이름 뺐어⁠.⁠” 해린이 말했다⁠. “⁠이제 당신 집 아니야⁠. 그러니까 반대할 자격도 없어⁠. 당신은 내 집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 해⁠. 월세는 안 받을게⁠.⁠”

“⁠세입자는 세 번 해 봤어⁠.⁠” 형우가 말했다⁠. “⁠네 번째는 좀 다르게 해 볼게⁠.⁠”

“⁠어떻게⁠?⁠”

“⁠이 집 갖고 버틸 돈을 벌어 올게⁠. 이억 천만 원⁠.⁠”

해린이 차 지붕에 손을 얹었다⁠. 손바닥이 뜨거워서 금방 뗐다⁠. “⁠당신 아침부터 이상해⁠. 미래에서 왔다면서⁠, 중꺾마라면서⁠. 무슨 병이면 병원에 가자⁠. 진짜야⁠. 나 화난 거랑 별개로 걱정돼⁠.⁠”

형우는 해린의 손을 보았다⁠. 아홉 해 전 결혼반지가 손가락에 조금 헐렁했다⁠. 처음 살았던 2023년 봄에 해린은 이 반지를 금은방에 팔았다⁠. 중도금 이자가 두 배로 뛰던 달이었다⁠. 형우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진 것을 석 달 뒤에야 알았다⁠.

“⁠병원은 가 볼게⁠. 대신 하나만 해 줘⁠.⁠”

“⁠뭐⁠?⁠”

“⁠우리 둘 다 아는 것만 믿지 말고⁠, 내가 맞히는 거 한 번만 봐 줘⁠.⁠” 형우가 왼손목을 들었다⁠. 해린 눈에는 멈춘 낡은 시계로만 보일 손목이었다⁠. “⁠다음 주 목요일⁠.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올려⁠. 0⁠.5에서 0⁠.75로⁠.⁠”

해린이 차 문을 닫았다⁠. “⁠그건 뉴스에 다 나와⁠. 다들 올린다 그래⁠.⁠”

“⁠그럼 하나 더⁠.⁠” 형우는 잠깐 망설였다⁠. 이 말은 처음 살았던 2023년에야 해린이 울면서 꺼낸 말이었다⁠. 지금 꺼내면 해린이 숨기고 있는 것을 형우가 안다는 것이 드러났다⁠. “⁠그것도 그 주에 말할게⁠. 당신이 들으면 화낼 거라서⁠, 목요일에⁠.⁠”

해린은 형우를 한참 보다가 운전석에 올랐다⁠. 창문이 내려갔다⁠. “⁠집에 걸어와⁠. 머리 좀 식히고⁠.⁠”

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⁠. 형우는 견본주택 담장을 따라 걸었다⁠. 담장에 붙은 현수막이 바람에 부풀었다⁠. 「⁠동탄 최고 분양가 완판⁠! 지금이 가장 싼 날입니다⁠」 버스 정류장 안내 화면에는 날씨 옆으로 뉴스가 흘렀다⁠. 「⁠미 연준 의장 “⁠연내 자산 매입 축소 적절⁠”⁠」 처음 살 때는 한 번도 읽지 않았던 글자였다⁠.

*

토요일 밤⁠, 형우는 새결을 재우고 거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⁠. 은행 앱에 찍힌 숫자는 단출했다⁠. 예금은 계약금으로 다 빠졌고⁠, 남은 건 비상금 통장의 삼백만 원과 형우 이름으로 받을 수 있는 신용대출 한도였다⁠. 직원 우대 금리로 삼천만 원까지 나왔다⁠.

은행 직원은 주식 계좌를 회사에 신고해야 했다⁠. 월요일 아침에 신고하면 화요일부터 살 수 있었다⁠. 형우는 신용대출 신청 화면을 띄워 놓고 한참 손을 대지 않았다⁠. 집을 영끌로 사지 말자고 아내 손을 덮은 날 밤에⁠, 주식을 사려고 빚을 내는 손이었다⁠.

안방 문이 열렸다⁠. 해린이 물을 마시러 나오다가 화면을 보았다⁠.

“⁠신용대출⁠?⁠” 해린이 냉장고 문을 연 채 멈췄다⁠. “⁠집은 영끌이라면서⁠, 이건 뭔데⁠?⁠”

“⁠이건 오르는 거 알아⁠.⁠”

“⁠집도 오른다며⁠. 두 해 동안은⁠.⁠” 해린이 생수병을 꺼냈다⁠. “⁠당신 말대로라면⁠.⁠”

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해린이 안방으로 돌아가고⁠, 형우는 신청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 두었다⁠. 시계는 세 시 십일 분이었다⁠. 빨간 숫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⁠. 형우는 버튼을 눌렀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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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좌시훈2026.11.01· 2화

    처형 이름표에 「입주예정자 협의회 회장」이 가장자리까지 꽉 찬 장면, 그 글자 크기만으로 성격이 다 보여요.

    • 문채겸작가2026.11.01

      서흔 씨는 이름표를 직접 코팅해 왔어요. 그 자부심 때문에 형우가 도장 위에서 손을 떼기가 더 어렵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