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538자)

지금 안 사면

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· 문채겸

상담실 입구 가격표에는 84제곱미터 9억 4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⁠. 반형우는 숫자부터 읽었다⁠. 여섯 해 전 같은 크기의 1차 분양가보다 오천만 원 비쌌고⁠, 오늘 아침 휴대전화에 온 문자보다는 한참 큰 숫자였다⁠. 문자는 짧았다⁠. 「⁠대출이자 2⁠,184⁠,000원 10/20 출금 예정⁠」

2027년 10월 16일 토요일 오후⁠, 동탄 강변의 휘담 리버파크 2차 견본주택은 볕이 들어 따뜻했다⁠. 형우는 옆을 짧게 친 검은 머리에 이마가 조금 넓은 마흔한 살 남자였고⁠,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안으로 들어갔다⁠. 하늘색 와이셔츠 깃 아래로 남색 넥타이가 반쯤 풀려 있었다⁠. 넉 달째 안 팔리는 1차 아파트를 내놓은 부동산 사장이 오늘 아침 말했다⁠. 2차 상담실이 손님을 다 빨아들인다고⁠, 거기 가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듣는지 들어 보라고⁠.

안쪽 흰 탁자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형우는 알았다⁠. 여섯 해 전에 들은 목소리였다⁠.

“⁠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사요⁠, 사모님⁠. 1차 보세요⁠. 분양가 위로 웃돈이 두 해 동안 얼마나 붙었는지⁠.⁠”

단비하우징 대표 구경렬은 예순이 다 됐는데도 목소리가 부드러웠다⁠. 맞은편에는 서른 언저리의 부부가 앉아 있었다⁠. 남편은 택배 회사 조끼를 입은 채였고⁠, 아내는 계약서 위에 도장을 쥐고 있었다⁠. 경렬이 홍삼 사탕 두 개를 부부 앞에 밀어 놓았다⁠. 형우는 사탕 껍질의 금색 글씨까지 기억났다⁠.

“⁠두 해 동안만 올랐죠⁠.⁠”

형우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갔다⁠. 상담 직원 둘이 고개를 들었다⁠. 경렬은 형우를 보고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웃었다⁠.

“⁠반 과장님이시네⁠. 1차 102동⁠. 잘 지내시죠⁠?⁠”

“⁠그 집⁠, 넉 달째 안 팔립니다⁠. 분양가에서 삼억 빠졌는데도요⁠.⁠” 형우는 부부를 보았다⁠. “⁠저도 육 년 전에 이 자리에서 똑같은 말 듣고 샀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때 제 말 맞았잖아요⁠. 두 해 동안은⁠.⁠” 경렬이 부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⁠. “⁠이분은 타이밍을 놓치신 거예요⁠. 사고 나서 파실 때를 놓친 거지⁠, 산 게 잘못은 아니에요⁠.⁠”

아내의 손이 도장을 계약서 쪽으로 내렸다⁠. 형우는 손바닥을 펴서 서명란을 덮었다⁠. 종이가 따뜻했다⁠. 아내가 놀라서 손을 멈췄고⁠, 남편이 반쯤 일어났다⁠.

“⁠아저씨⁠, 뭐 하시는 거예요⁠?⁠”

형우는 대답하려고 숨을 들이켰다⁠. 숨이 가슴 한가운데서 막혔다⁠. 누가 갈비뼈 안쪽을 손으로 꽉 쥔 것 같은 통증이 왼팔로 번졌고⁠, 흰 탁자 모서리가 기울어지며 눈앞으로 올라왔다⁠. 바닥에 뺨이 닿기 직전⁠, 왼손목의 낡은 갈색 가죽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⁠. 아버지가 차던 시계였다⁠. 바늘이 세 시 십일 분을 가리킨 채 떨리다가 멈췄다⁠.

*

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말하고 있었다⁠. “⁠미국의 소비자물가가 13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오르면서⁠…⁠…⁠”

형우는 소파에서 눈을 떴다⁠. 천장에 누런 물 자국이 있었다⁠. 학교 앞 구축 아파트⁠, 세 번째 전셋집 거실의 천장이었다⁠.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⁠. 「⁠시중은행⁠, 가계대출 문턱 높인다⁠」 오른쪽 위 시각은 밤 열한 시 삼 분이었다⁠.

몸이 가벼웠다⁠. 소파에서 일어날 때 무릎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⁠. 마흔이 넘으면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왼쪽 무릎이 시큰거렸는데⁠,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⁠. 형우는 욕실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⁠. 이마는 여전히 조금 넓었고 은테 안경도 그대로였지만⁠, 눈 밑이 팽팽했고 귀밑에 섞여 있던 흰머리가 없었다⁠. 휴대전화를 켰다⁠. 2021년 8월 20일 금요일⁠.

왼손목을 들었다⁠. 가죽 시계는 세 시 십일 분에 멈춰 있었다⁠.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⁠. 유리 위로 빨간 숫자가 떠 있었는데⁠, 손목을 기울여도 유리에 비친 그림자처럼 따라오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⁠.

「⁠−210⁠,000⁠,000⁠」

은행에서 열세 해를 일한 눈이 먼저 읽었다⁠. 마이너스 이억 천만 원⁠. 형우는 이 숫자를 알았다⁠. 2027년 봄⁠, 해린과 식탁에 앉아 집을 팔고 대출을 다 갚으면 얼마가 남는지 계산기로 두드려 본 날이 있었다⁠. 남는 게 없었다⁠. 이억 남짓을 더 갚아야 했다⁠. 해린은 계산기를 덮고 베란다로 나가 오래 서 있었다⁠.

거실 식탁에 해린이 앉아 있었다⁠. 노트북 옆에 서류 한 장과 인주가 묻은 도장이 놓여 있었다⁠. 형우는 서류 맨 위의 글자를 읽었다⁠. 「⁠휘담 리버파크 공급계약 신청서⁠」 해린의 이름 옆에 빨간 도장이 또렷했다⁠.

“⁠일어났어⁠? 피곤했나 봐⁠.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자더라⁠.⁠” 해린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⁠. “⁠봐⁠. 아까 여섯 시에 보냈어⁠.⁠”

「⁠단비하우징 — 가계약금 10⁠,000⁠,000원 입금 확인되었습니다⁠. 8/21(⁠토⁠) 14⁠:00 본계약 진행 예정입니다⁠.⁠」

형우는 문자를 두 번 읽었다⁠. 가계약금은 계약하겠다는 뜻으로 먼저 보내는 돈이었다⁠. 처음 살았던 2021년에는 형우가 퇴근하고 와서 이 문자를 보았고⁠, 고개를 끄덕였고⁠, 이튿날 두 시에 도장을 찍었다⁠. 오늘은 문자가 여섯 시간 일찍 와 있었다⁠.

“⁠내일 안 가⁠.⁠”

해린이 노트북을 덮었다⁠. “⁠뭐⁠?⁠”

“⁠계약 안 해⁠. 가계약금은 내가 어떻게든 돌려받을게⁠.⁠”

“⁠어제까지 같이 모델하우스 세 번 갔잖아⁠. 당신이 대출 계산 다 해 놓고⁠.⁠” 해린이 신청서를 손바닥으로 눌렀다⁠. “⁠내 도장은 벌써 찍었어⁠.⁠”

형우는 식탁 의자를 끌어 앉았다⁠.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⁠, 가장 짧은 말부터 했다⁠.

“⁠나 미래에서 왔어⁠.⁠”

해린은 형우를 한참 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내 형우 앞에 놓았다⁠.

“⁠몇 잔 마셨어⁠?⁠”

“⁠안 마셨어⁠. 2027년 10월에 상담실에서 쓰러졌어⁠. 이 집⁠, 그러니까 우리가 내일 사는 집⁠, 입주하고 이 년 지나면 분양가 밑으로 떨어져⁠. 금리가 계속 올라⁠. 우리 한 달 이자만 이백십팔만 원 나가⁠.⁠”

“⁠이백⁠? 지금 금리가 몇 퍼센트인데 이백이야⁠.⁠” 해린이 웃었다⁠. “⁠당신 회사에서 무슨 시뮬레이션 했어⁠? 최악의 경우 이런 거⁠?⁠”

“⁠최악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돼⁠. 중꺾마야⁠, 이건 중요한 거라고⁠.⁠”

“⁠중⁠… 뭐⁠?⁠”

“⁠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⁠.⁠” 형우는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⁠. 내년 겨울 월드컵이 끝나고서야 생길 말이었다⁠.

해린이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찾다가 내려놓았다⁠. “⁠검색해도 안 나오는데⁠. 당신 회사 동기 상칠 씨가 만든 말이지⁠?⁠”

새결이 방문을 반쯤 열고 나왔다⁠. 여섯 살 아들은 공룡 잠옷을 입고 눈을 비볐다⁠. 형우가 처음 살았던 2027년에 새결은 열두 살이었고⁠, 아빠와 말을 섞지 않았다⁠. 지금은 문틀에 기대어 엄지를 빨다가 형우를 보고 손을 뺐다⁠.

“⁠아빠 왜 시계를 자꾸 봐⁠? 시계가 아빠한테 화났어⁠?⁠”

“⁠아냐⁠. 시계가 좀 고장 났어⁠.⁠” 형우가 새결을 안아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⁠. 이불을 덮어 주는 손에서 빨간 숫자가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⁠. 숫자는 손목에 붙어 있지 않았다⁠. 형우 눈에만 떠 있었다⁠.

거실로 나오자 해린이 식탁 위에 종이 세 장을 늘어놓고 있었다⁠. 지난 세 번의 전세 계약서였다⁠. 오산⁠, 병점⁠, 그리고 지금 이 집⁠.

“⁠오산은 집주인이 판다고 나가라 그랬지⁠. 병점은 보증금 오천 올려 달라 그랬고⁠. 여기는 어제 문자 왔어⁠. 집주인 아들이 결혼해서 들어온대⁠. 갱신 거절이야⁠. 내년 이월에 나가야 돼⁠.⁠” 해린이 세 장을 손가락으로 차례로 짚었다⁠. “⁠새결이 내년 삼월에 저 앞 학교 들어가⁠. 입학하고 한 달 만에 또 전학 보내⁠? 우리 집 하나 갖자는 게 그렇게 이상해⁠?⁠”

형우는 처음 살았던 2021년의 이 대화를 기억했다⁠. 처음에 형우는 고개를 끄덕였고⁠, 해린의 손을 잡았다⁠. 오늘은 고개가 내려가지 않았다⁠.

“⁠이상한 거 아니야⁠. 가격이 꼭대기라서 그래⁠.⁠”

“⁠꼭대기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해린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⁠. “⁠내일 두 시야⁠. 당신이 안 오면 나 혼자 가⁠.⁠” 안방 문이 닫혔다⁠. 문틈으로 해린이 휴대전화를 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⁠. 형우는 시계를 보았다⁠. 세 시 십일 분⁠, 마이너스 이억 천만 원⁠. 소파 쿠션이 아직 형우 몸 모양으로 눌려 있었다⁠.

*

토요일 아침 아홉 시⁠, 형우는 새결이 내년에 다닐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걸었다⁠. 정문 옆 현수막에 「⁠2022학년도 신입생 취학 통지 안내⁠」가 붙어 있었다⁠.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처형 맹서흔의 음성 메시지였고⁠, 길이가 삼 분 십이 초였다⁠.

“⁠형부⁠! 오늘 두 시 맞죠⁠? 해린이가 형부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한다던데⁠, 형부 은행원이잖아요⁠, 은행원이 집값 떨어진다 그러면 우리 협의회 사람들 다 쓰러져요⁠. 아 참⁠, 협의회 단톡방 지금 천구백 명 넘었어요⁠. 이따 형부도 초대할게요⁠. 공지는 꼭 읽어 주시고요⁠, 이모티콘은 하루 세 개까지예요⁠. 그리고⁠…⁠…⁠”

형우는 메시지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⁠. 처음 살았던 2021년에는 처형의 단톡방 공지를 하루도 빠짐없이 읽었다⁠. 이천 가구 가운데 누가 웃돈을 받고 팔았는지⁠, 누가 대출이 막혀 울었는지도 다 단톡방에서 읽었다⁠.

오전 열 시⁠, 휘담 리버파크 1차 견본주택은 2027년보다 새것이었다⁠. 큰 유리창으로 한낮의 햇빛이 쏟아졌고⁠, 창밖 강 건너 공사장에는 골조를 올린 세 동과 크레인 한 대가 보였다⁠. 입구 가격표의 84제곱미터 칸에는 8억 9천만 원이 적혀 있었다⁠. 동탄에서 이 크기 새 아파트에 붙은 가격으로는 가장 높았다⁠.

경렬은 쉰넷이었다⁠. 머리숱이 많았고⁠, 목소리는 여섯 해 뒤와 똑같이 부드러웠다⁠. 경렬이 흰 탁자 맞은편 의자를 빼 주었다⁠.

“⁠반 과장님⁠. 사모님은 두 시에 오신다고 들었는데⁠, 먼저 오셨네요⁠. 대출 상담이시면 제가 은행보다 빨라요⁠. 새마루은행이 우리 단지 중도금 맡았거든요⁠. 과장님 지점이잖아요⁠.⁠”

“⁠가계약금 돌려받으러 왔습니다⁠.⁠”

경렬은 놀라지 않았다⁠. 홍삼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고⁠, 하나는 형우 앞에 놓았다⁠.

“⁠가계약금은 사모님 이름으로 들어왔어요⁠. 신청서 도장도 사모님 거고요⁠. 돌려드리려면 사모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셔야죠⁠. 근데 왜요⁠? 어제까지 제일 꼼꼼하게 물어보신 분이 과장님인데⁠.⁠”

“⁠이 단지⁠, 입주하고 이 년 지나면 분양가 밑으로 갑니다⁠.⁠”

“⁠누가 그래요⁠?⁠”

“⁠제가요⁠.⁠”

경렬이 웃었다⁠. 비웃음이 아니라 손님이 농담했을 때 따라 웃어 주는 웃음이었다⁠. “⁠과장님⁠, 저 이 일 이십 년 했어요⁠. 2008년에 저도 과장님처럼 말하는 사람 많이 봤어요⁠. 집값 떨어진다고⁠. 그 사람들 지금 다 전세 살아요⁠.⁠” 경렬이 탁자 위로 손바닥을 펴서 창밖 크레인을 가리켰다⁠. “⁠저 세 동⁠, 이천 가구 다 팔렸어요⁠. 남은 건 계약 취소분 몇 개⁠. 사모님이 잡으신 동호수도 취소분이에요⁠. 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사요⁠.⁠”

“⁠영영이요⁠?⁠”

“⁠제 말이 틀리면 그때 와서 저한테 따지세요⁠.⁠” 경렬이 손을 내밀었다⁠. “⁠두 시에 뵙죠⁠.⁠”

형우는 오른손을 내밀려다가 왼손을 내밀었다⁠. 경렬이 잠깐 어색하게 웃고 왼손으로 맞잡았다⁠. 말랑하고 마른 손이었다⁠. 시계 위의 빨간 숫자가 깜박이더니 다른 숫자로 바뀌었다⁠. 이번에는 검은색이었다⁠.

「⁠+4⁠,120⁠,000⁠,000⁠」

사십일억 이천만 원⁠. 2027년 10월 16일⁠, 구경렬의 집이 가진 것에서 진 빚을 뺀 돈이었다⁠. 손을 놓자 숫자는 다시 빨간 마이너스 이억 천만 원으로 돌아왔다⁠.

형우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⁠. 같은 날⁠, 같은 상담실에서⁠, 한 사람은 쓰러졌고 한 사람은 사십일억을 갖고 있었다⁠.

“⁠과장님⁠, 괜찮으세요⁠? 얼굴이 하얘요⁠.⁠”

“⁠두 시에 오겠습니다⁠.⁠” 형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⁠. “⁠막으러요⁠.⁠”

경렬이 사탕 껍질을 반으로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⁠. “⁠기다릴게요⁠. 오실 때 사모님 손 꼭 잡고 오세요⁠.⁠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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