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35자)

감시원

라면 스프의 비밀 · 은해록

감시원 김정호가 정문을 들어서고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공장장이 본관 현관에서 뛰어나왔다⁠. 뛰어나오면서 넥타이 매듭을 고쳤고⁠, 감시원 앞에 와서는 걸음을 늦췄다⁠. 숨이 차 보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문 채 코로 숨을 쉬었다⁠.

“⁠시청에서 오셨다고요⁠. 공장장 변도순입니다⁠. 연락을 주셨으면 차라도 내드렸을 텐데⁠.⁠”

“⁠연락하고 오면 볼 게 없어서요⁠.⁠”

감시원은 공장장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서류 가방을 고쳐 들었다⁠. 공장장은 내민 손으로 자연스럽게 본관을 가리켰다⁠.

“⁠어디부터 보시겠습니까⁠?⁠”

“⁠창고부터요⁠. 원료 들어오는 데⁠.⁠”

나는 감시원 뒤를 따라 걸었다⁠. 따라오라는 사람도 가라는 사람도 없었다⁠. 사진기를 멘 젊은 직원이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작게 물었다⁠.

“⁠여기 라면 맛있어요⁠? 저 어제 저녁에도 라면 먹었는데⁠.⁠”

“⁠어느 회사 거요⁠?⁠”

“⁠빨간 거요⁠.⁠”

창고 문을 열자 코가 먼저 놀랐다⁠. 표백제 냄새가 창고 안에 가득했다⁠. 바닥은 물걸레질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아 번들거렸다⁠. 붉은 띠 드럼 스무 개가 누워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⁠. 드럼이 눌러 앉았던 동그란 자국만 시멘트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⁠. 금요일 저녁까지 드럼은 거기 있었다⁠. 토요일과 일요일 밤 나는 식당 가마솥 앞에 있었다⁠.

감시원이 쪼그려 앉아 동그란 자국에 손가락을 댔다⁠. 손가락을 코에 가져갔다⁠.

“⁠청소를 일요일에 하십니까⁠?⁠”

“⁠월급날 전에 쥐를 잡느라고요⁠.⁠” 공장장이 웃었다⁠. “⁠굴포천 쥐가 고양이만 해서⁠.⁠”

감시원은 웃지 않았다⁠. 사진기 멘 직원이 동그란 자국을 찍었다⁠. 플래시가 터지자 창고 벽에 우리 그림자가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⁠.

*

배합실에서 감시원은 유리병 세 개를 꺼냈다⁠. 배합 통 셋에서 가루를 한 숟갈씩 떠 담았다⁠. 셋 다 내가 새벽에 섞은 야간 2조 통이었다⁠. 서울로 가는 상자에 들어갈 통이었다⁠. 드럼 가루는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았다⁠.

공장장은 배합실에 들어오지 않았다⁠. 복도에서 유리창 너머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⁠. 감시원이 유리병 뚜껑을 닫고 내 앞으로 왔다⁠. 안경 너머의 눈이 내 명찰을 읽었다⁠.

“⁠배철순 씨⁠. 배합 담당이시죠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육수 가루는 어디서 받습니까⁠?⁠”

“⁠원료 창고에서 받습니다⁠.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사무실에서 압니다⁠.⁠”

“⁠붉은 띠 드럼이라는 걸 본 적 있습니까⁠? 허리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⁠, 바닥에 영어 글자가 찍힌 드럼이요⁠.⁠”

나는 유리창을 보았다⁠. 공장장이 팔짱을 풀었다⁠. 손가락이 넥타이 매듭으로 올라갔다⁠. 한 번 눌렀다⁠. 이백 명⁠, 하고 첫날 밤 배합 통을 가리키던 손가락이었다⁠. 사택 골목에서 스무 집을 하나하나 짚던 손가락이었다⁠. 시험실에서 넥타이 매듭을 두 번 놓치던 손가락이었다⁠.

“⁠없습니다⁠.⁠”

감시원이 한참 나를 보았다⁠.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 썼다⁠.

“⁠신고 내용은 꽤 구체적이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배합실에는 그런 드럼이 없습니다⁠.⁠”

배합실에는 없었다⁠. 거짓말은 아니었다⁠.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⁠. 첫날 밤의 첫 통⁠, 사택 골목의 반반에 이어 세 번째였다⁠. 세 번째에는 공장장이 고개를 끄덕여 줄 필요도 없었다⁠. 내가 먼저 끄덕였다⁠.

감시원이 유리병들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⁠. 유리창 너머에서 공장장의 손가락이 넥타이에서 내려왔다⁠.

*

점심때 공장장은 감시원과 직원을 공장 식당으로 모셨다⁠. 봉덕 아주머니는 감시원 앞에 고깃국을 놓았다⁠. 월급날도 아닌데 고깃국이었다⁠. 줄 서 있던 짐꾼들이 서로 쳐다보았다⁠.

감시원은 고깃국보다 깍두기를 먼저 집었다⁠. 깍두기 한 조각을 씹고 젓가락을 멈췄다⁠. 또 한 조각을 씹었다⁠.

“⁠아주머니⁠, 이 깍두기 어떻게 담그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비결이 있지⁠.⁠”

“⁠무슨 비결입니까⁠?⁠”

“⁠비결을 알려 주면 시청에서 우리 공장 봐줄 거유⁠?⁠”

“⁠깍두기는 깍두기고⁠, 공장은 공장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비결은 비결이고⁠.⁠”

식당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⁠. 감시원은 웃지 않으려다 입꼬리가 실룩였다⁠. 사진기 멘 직원은 고깃국을 두 그릇째 받아 갔다⁠. 공장장은 감시원 맞은편에서 국을 한 숟갈도 뜨지 않고 박하사탕만 굴렸다⁠.

감시원은 깍두기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⁠. 정문 앞에서 지프에 오르기 전에 공장장에게 말했다⁠.

“⁠시료 결과 나오면 다시 옵니다⁠. 그리고 신고한 곳이 신문사라는 것만 말씀드리죠⁠. 해안일보요⁠.⁠”

지프가 정문을 나갔다⁠. 공장장은 지프 꽁무니를 보지 않고 나를 보았다⁠.

“⁠잘했다⁠.⁠”

나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잘했다는 말이 목 뒤에 남았다⁠. 드럼 가루를 삼킨 다음처럼 따끔했다⁠.

*

저녁에 정문 공중전화로 주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⁠. 주 기자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물었다⁠.

“⁠감시원 왔었죠⁠? 뭐 나왔어요⁠?⁠”

“⁠아무것도요⁠. 드럼은 일요일 밤에 다 빠졌어요⁠. 시료는 제 가루로 섞은 통에서 떠 갔고요⁠.⁠”

“⁠그럼 연구소 결과는 출처 모를 가루가 되는 거예요⁠.⁠” 수화기 너머에서 주 기자가 무엇을 탁 내려놓았다⁠. “⁠부장이 오늘 그랬어요⁠. 감시원이 빈손으로 오면 이 기사는 못 낸다고⁠. 이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모를까⁠.⁠”

“⁠감시원이 물었어요⁠. 드럼을 본 적 있냐고⁠.⁠”

“⁠뭐라고 했어요⁠?⁠”

나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주 기자도 다시 묻지 않았다⁠. 한참 뒤 주 기자가 낮게 말했다⁠.

“⁠드럼이 어디로 갔는지만 알아내요⁠. 그럼 감시원을 거기로 보낼 수 있어요⁠.⁠”

*

화요일 새벽 두 시⁠, 통을 싣고 포장실로 내려가자 포장반 야간 여공들이 깔때기 앞에서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⁠. 감시원이 왔다 간 이야기가 하루 만에 공장 안을 한 바퀴 돈 것이었다⁠. 야간 반장 아주머니가 손전등으로 꼬리표를 비추며 말했다⁠.

“⁠배 씨⁠, 시청에서 배합실까지 들어왔다며⁠. 뭐 물어봐⁠?⁠”

“⁠가루 어디서 받냐고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⁠?⁠”

“⁠창고에서 받는다고 했어요⁠.⁠”

아주머니가 손전등을 껐다⁠. 순희가 통 뚜껑을 열어 코를 댔다⁠. 내 가루로만 섞은 통이었다⁠. 순희가 고개를 끄덕여 통을 받게 하고⁠, 나를 포장실 문 밖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⁠.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⁠.

“⁠감시원이 드럼 봤냐고 물었다면서요⁠. 포장반 언니가 식당에서 사진 찍는 총각한테 들었대요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뭐라고 했어요⁠?⁠”

“⁠없다고 했어요⁠.⁠”

순희는 한참 말이 없었다⁠.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순희의 얼굴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⁠.

“⁠포장반은 날마다 꼬리표를 봐요⁠. 배 씨 도장은 첫날 하루만 빼고 맨날 반듯해요⁠.⁠” 순희가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⁠. 팔뚝에 은박지에 긁힌 자국이 여러 줄 나 있었다⁠. “⁠도장은 반듯한데 아저씨는 비뚤어졌네요⁠.⁠”

순희는 포장실로 들어갔다⁠. 문이 닫히고 봉지 기계가 철컥철컥 다시 돌기 시작했다⁠. 나는 복도에 남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⁠. 손가락 끝이 붉었다⁠. 비누로 씻어도 빠지지 않는 붉은색이었다⁠.

*

화요일 밤 열두 시⁠, 배합실 문이 벌컥 열렸다⁠. 기남이었다⁠. 낮 근무를 마치고 기숙사에서 자고 있어야 할 기남이 잠옷 바지에 작업복 윗도리를 걸치고 숨을 몰아쉬었다⁠.

“⁠형⁠, 왕 반장님네 할머니가 쓰러졌어⁠. 배를 붙잡고⁠. 왕 반장님이 할머니 업고 병원 갔어⁠.⁠”

나는 주걱을 놓았다⁠. 기남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⁠.

“⁠월급날 회사에서 사택에 라면 한 상자씩 줬잖어⁠. 주간 조 상자⁠. 할머니가 그걸 저녁마다 끓여 드셨대⁠. 이가 안 좋아서 라면이 제일 편하다고⁠. 왕 반장님 아줌니가 그러는데⁠, 국물에서 튀김 솥 냄새가 났대⁠.⁠”

“⁠사택에 줬다고⁠?⁠”

“⁠스무 집 다⁠. 우리 숙모네도 받았어⁠.⁠”

나는 위생모를 벗고 기남을 따라 뛰었다⁠. 공장 뒷문을 나서 사택 골목으로 들어가자 왕 반장네 집 앞에 이웃들이 나와 있었다⁠. 왕 반장 아내가 문간에 주저앉아 앞치마로 얼굴을 덮고 있었고⁠, 포장반 경자가 등을 쓸어 주었다⁠. 방 안에는 할머니가 덮던 이불이 둘둘 말려 있었다⁠. 부엌 아궁이 옆에 주황 상자가 뜯긴 채 놓여 있었다⁠. 옆구리의 도장을 읽었다⁠. 「⁠11월 4일 주간 1조⁠」⁠.

골목 끝에서 손전등 불빛 하나가 다가왔다⁠. 공장장이었다⁠. 내복 위에 점퍼를 걸쳤고⁠,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⁠.

기남이 공장장 앞을 막았다⁠. 가로등 아래에서 기남의 얼굴이 하얬다⁠.

“⁠삼촌⁠.⁠”

“⁠너 왜 여기 있어⁠? 낮 근무가 밤에 왜 돌아다녀⁠?⁠”

“⁠삼촌⁠, 드럼 삼촌 집 연탄 창고에 있잖유⁠.⁠” 기남의 목소리가 떨렸다⁠. “⁠일요일 밤에 나 봤어⁠. 추 사장네 애들이 리어카로 날랐어⁠. 반은 삼촌 연탄 창고에 넣고⁠, 반은 굴포천 창고로 실어 갔어⁠. 내가 숙모한테 김치 받으러 갔다가 다 봤어⁠.⁠”

공장장이 손전등을 내렸다⁠. 불빛이 골목 바닥에 동그랗게 떨어졌다⁠.

“⁠30일까지만이다⁠. 어음 막는 날까지만⁠. 그다음엔 다 버린다⁠. 굴포천에 묻든 태우든⁠.⁠”

“⁠그동안 할머니가 또 드시면유⁠? 경자네 애 엄마가 드시면유⁠?⁠”

“⁠사택 라면은 오늘 밤에 다 거둔다⁠.⁠”

“⁠시장 라면은유⁠? 동문 할머니네 라면은유⁠?⁠”

공장장이 대답하지 않았다⁠. 왕 반장네 문간에서 왕 반장 아내가 앞치마를 내리고 공장장을 보았다⁠. 공장장은 왕 반장 아내의 눈을 피해 손전등을 껐다⁠. 골목이 가로등 불빛만 남았다⁠.

기남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⁠. 기남이 삼촌에게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⁠.

“⁠삼촌⁠, 숙모 김치에 소금 치는 거 나 알어⁠. 삼 년 됐잖어⁠. 삼촌 맛 모르잖어⁠.⁠”

공장장의 어깨가 굳었다⁠. 골목 저편에서 개 한 마리가 짖다가 그쳤다⁠. 공장장은 기남을 보지 않고 나를 보았다⁠. 나는 고개를 저었다⁠. 내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⁠. 공장장은 내 고갯짓을 알아들었다⁠. 공장장이 기남을 보았다⁠.

“⁠맛을 몰라도 숫자는 안다⁠. 이백 명이 몇 명인지는 안다⁠.⁠”

“⁠할머니 하나는 몇 명인디유⁠?⁠”

공장장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돌아서서 골목 끝 제 집으로 걸어갔다⁠. 내복 바지 자락이 점퍼 밑에서 펄럭였다⁠.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골목에 크게 울렸다⁠.

십 분쯤 지나 대문이 다시 열렸다⁠. 공장장 아내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손수레를 끌고 나왔다⁠. 집집의 문을 두드려 주황 상자를 받아 수레에 실었다⁠. 뜯긴 상자도⁠, 안 뜯긴 상자도 받았다⁠. 경자네는 반쯤 남은 상자를 내주며 고개를 숙였고⁠, 공장장 아내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⁠. 스무 집을 다 돈 수레는 주황 상자로 수북했다⁠. 공장장 아내는 수레를 끌고 제 집 마당으로 들어가 연탄 창고 앞에 세웠다⁠.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다가 열지 않고 수레만 두고 들어갔다⁠.

*

수요일 아침 여섯 시⁠, 근무를 마치고 배합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 계단에 기남이 앉아 있었다⁠. 밤새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⁠. 기남이 일어나 주먹 쥔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⁠.

“⁠형⁠, 손 줘 봐⁠.⁠”

나는 손바닥을 폈다⁠. 기남이 주먹을 풀었다⁠. 녹슨 열쇠 하나가 내 손바닥에 떨어졌다⁠. 열쇠고리에 빨간 털실이 감겨 있었다⁠.

“⁠숙모가 부엌 못에 걸어 두는 여벌 열쇠여⁠. 연탄 창고 거⁠.⁠” 기남이 소매로 코를 훔쳤다⁠. “⁠숙모는 내가 김치 가지러 가면 늘 저 못을 가리켰어⁠. 연탄 한 장 갖다 기숙사 난로에 넣으라고⁠.⁠”

기남은 열쇠를 쥔 내 손을 제 두 손으로 꽉 감쌌다⁠. 손이 차가웠다⁠.

“⁠오늘 밤 열두 시⁠. 삼촌은 열한 시면 자⁠.⁠”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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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일곱줄2026.11.01· 9화

    감시원이 연락하고 오면 볼 게 없다는 말 시원했어요. 근데 기남이가 숙모 열쇠를 가져온 게 더 마음 아프네요.

    • 은해록작가2026.11.01

      기남이는 삼촌과 형 사이에서 처음으로 한쪽 손을 잡았어요. 빨간 털실 열쇠가 오늘 밤 어디를 여는지 봐 주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