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0화(5,343자)

연탄 창고

라면 스프의 비밀 · 은해록

수요일 밤 열한 시 오십 분⁠, 나는 마지막 통을 섞고 꼬리표에 도장을 찍었다⁠. 통을 손수레에 싣고 포장실로 내려가 야간 반장 아주머니에게 넘기며 말했다⁠.

“⁠아주머니⁠, 한 시간만 자리 비우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어디 가게⁠?⁠”

“⁠그냥요⁠.⁠”

“⁠총각이 밤 열두 시에 그냥 가는 데는 두 군데밖에 없어⁠. 포장마차 아니면 연애⁠.⁠” 아주머니가 손전등으로 내 얼굴을 비췄다⁠. “⁠누가 찾으면 배탈 났다고 할게⁠. 배합실 사람이 배탈 났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겠지만⁠.⁠”

공장 뒷문을 나서자 굴포천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⁠. 사택 골목 입구 전봇대 밑에 기남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⁠. 기남 옆에 순희가 서 있었다⁠. 누런 카디건 위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⁠.

“⁠순희 씨가 왜⁠…⁠.⁠”

“⁠망은 봐 줄게요⁠.⁠” 순희가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올렸다⁠. “⁠신문사는 안 가요⁠. 동생 등록금⁠. 근데 망은 봐도 일당이 안 깎이잖아요⁠.⁠”

기남이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⁠. 기남은 순희가 온 것이 저 때문인 줄 아는 얼굴이었다⁠.

*

사택 골목은 연탄 냄새와 잠든 집들의 숨소리로 고요했다⁠. 가로등 하나가 골목 한가운데를 비췄고⁠, 우리는 가로등을 피해 담 그늘로 걸었다⁠. 왕 반장네 대문 앞을 지날 때 누렁이 한 마리가 개집에서 고개를 들었다⁠. 누렁이가 목을 울리며 일어났다⁠.

기남이 잽싸게 작업복 주머니에서 면 부스러기를 한 줌 꺼내 개집 앞에 뿌렸다⁠. 누렁이가 짖으려던 입을 다물고 부스러기를 핥았다⁠. 우리가 몇 걸음 가자 누렁이가 부스러기를 다 먹고 개집에서 나와 우리를 따라왔다⁠. 꼬리를 흔들었다⁠.

“⁠기남 씨⁠, 개가 따라와요⁠.⁠”

“⁠부스러기는 공짜인디 맛있거든유⁠.⁠”

“⁠공짜로 먹고 따라오는 건 기남 씨 닮았네요⁠.⁠”

기남은 순희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한참 생각하는 얼굴로 걸었다⁠. 누렁이는 공장장 집 대문 앞에서 멈춰 앉았다⁠. 대문은 빗장 없이 닫혀 있었다⁠. 기남이 대문을 조금 밀자 경첩이 끼익 울었다⁠. 우리 셋은 숨을 멈췄다⁠. 안채 창문은 캄캄했다⁠.

마당 구석 연탄 창고 앞에 손수레가 있었다⁠. 사택 스무 집에서 거둔 주황 상자가 수북했다⁠. 나는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⁠. 녹이 슬어 들어가지 않았다⁠. 손가락 끝으로 열쇠를 비틀어 밀었다⁠. 덜컥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⁠.

연탄 창고 안에는 연탄이 벽마다 허리 높이로 쌓여 있었다⁠. 기남이 성냥을 그었다⁠. 목련다방에서 가져온 성냥이었다⁠. 불빛이 흔들리는 사이로 연탄 더미 뒤에 붉은 띠가 보였다⁠. 드럼 열 개가 서로 기대어 있었다⁠.

나는 드럼 하나를 기울였다⁠. 바닥을 들여다보았다⁠. 은빛 쇠뿐이었다⁠. 쇠솔 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⁠. 다음 드럼도⁠, 또 다음 드럼도 마찬가지였다⁠. 열 개를 다 기울였을 때 내 작업복은 연탄 가루로 시커멨고⁠, 기남의 얼굴은 성냥불 아래에서 탄광 사람처럼 보였다⁠.

“⁠형⁠, 다 긁었어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“⁠그럼 어떡혀⁠? 가루만 가져가면 감시원이 어디서 났냐고 할 거 아녀⁠.⁠”

문간에서 망을 보던 순희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⁠. 성냥불이 꺼지고 기남이 새 성냥을 그었다⁠. 순희는 드럼 하나의 뚜껑 고리를 손가락으로 만지다가 고리를 풀었다⁠. 뚜껑을 들어 뒤집었다⁠.

“⁠여기요⁠.⁠”

뚜껑 안쪽에 검은 페인트 글자가 그대로 있었다⁠. 「⁠CONDEMNED · 1979⁠」⁠. 쇠솔질하던 사내들은 드럼 바닥만 긁고 뚜껑은 뒤집어 보지 않았다⁠.

“⁠포장반은 상자를 싸면 뚜껑부터 확인해요⁠.⁠” 순희가 성냥불 아래에서 웃었다⁠. 얼굴에 연탄 가루가 한 줄 묻어 있었다⁠. “⁠뚜껑 안쪽에 상자 번호가 있거든요⁠.⁠”

나는 뚜껑을 품에 안았다⁠. 차갑고 무거웠다⁠.

*

창고 문간이 갑자기 환해졌다⁠. 손전등 불빛이 우리 셋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⁠. 공장장이었다⁠. 내복 바람에 점퍼를 걸쳤고⁠,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⁠. 누렁이가 공장장 다리 옆에서 꼬리를 흔들었다⁠.

공장장의 손전등이 기남의 얼굴에서 멈췄다⁠.

“⁠네 숙모가 부엌 못을 가리킨 게 이런 데 쓰라고였냐⁠?⁠”

“⁠삼촌⁠…⁠.⁠”

“⁠네 엄마가 너를 나한테 맡겼다⁠. 사람 만들어 달라고⁠.⁠” 공장장의 목소리가 낮았다⁠. 화가 날수록 낮아지는 목소리였다⁠. “⁠이게 사람 된 거냐⁠? 한밤에 삼촌 집 창고를 터는 게⁠?⁠”

기남의 어깨가 떨렸다⁠. 기남은 연탄 가루 묻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⁠. 얼굴이 더 시커메졌다⁠.

“⁠삼촌이 나 맡았으면⁠, 삼촌 혀 죽은 것도 나한테 말했어야지⁠.⁠” 기남이 공장장을 똑바로 보았다⁠. “⁠나는 삼촌이 혀 좋은 사람이라서 이 공장 왔어⁠. 우리 엄마가 그랬어⁠. 니 외삼촌은 부평에서 혀가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⁠. 그 사람 밑에서 배우라고⁠.⁠”

공장장의 손전등이 흔들렸다⁠. 불빛이 기남의 얼굴에서 연탄 더미로⁠, 드럼의 붉은 띠로 미끄러졌다⁠. 공장장은 불빛을 내 품의 뚜껑에 멈췄다⁠.

“⁠너는⁠?⁠”

“⁠감시원한테 거짓말했습니다⁠. 이제 안 합니다⁠.⁠”

공장장이 오래 나를 보았다⁠. 손전등 불빛 너머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⁠. 대문 밖에서 누렁이가 짧게 짖었다⁠. 안채 창문에 불이 켜졌다⁠. 공장장 아내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⁠.

“⁠누구예요⁠? 도둑이에요⁠?⁠”

“⁠아니야⁠. 들어가 자⁠.⁠”

“⁠기남이 목소리 같은데⁠.⁠”

“⁠들어가⁠.⁠”

창문이 닫혔다⁠. 불은 꺼지지 않았다⁠. 공장장이 손전등을 내렸다⁠.

“⁠왕 반장 노모는 오늘 저녁에 퇴원했다⁠. 장염이래⁠. 며칠 죽 먹으면 된대⁠.⁠” 공장장이 고무신 코로 마당 흙을 긁었다⁠. “⁠공장이 닫히면 왕 반장은 노모 약값을 어디서 대냐⁠. 그건 생각해 봤냐⁠?⁠”

“⁠생각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생각만 했지⁠.⁠”

공장장은 연탄 창고 문짝에 손을 짚었다⁠. 한참 그대로 있다가 손을 뗐다⁠.

“⁠가져가라⁠.⁠” 공장장이 몸을 돌렸다⁠. “⁠대신 내일 아침부터 너희 둘 다 공장에 없다⁠. 그리고 철순아⁠, 꼬리표 도장은 누구 거냐⁠? 첫날 밤 첫 통 꼬리표⁠. 반반 통 꼬리표⁠. 내 서랍에 다 있다⁠.⁠”

공장장은 안채로 걸어갔다⁠. 고무신 소리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서 그쳤다⁠. 순희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⁠. 우리는 뚜껑을 안고 대문을 빠져나왔다⁠. 누렁이가 골목 끝까지 따라오다가 제 집으로 돌아갔다⁠.

*

목요일 아침⁠, 나와 기남은 드럼 뚜껑을 보자기에 싸서 시내버스를 탔다⁠. 안내양이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⁠. 보자기 밑으로 둥근 쇠 테두리가 삐져나와 있었다⁠.

“⁠그건 뭐예요⁠?⁠”

“⁠솥뚜껑이유⁠.⁠” 기남이 얼른 대답했다⁠. “⁠삼겹살 구워 먹으려고⁠.⁠”

“⁠아침부터요⁠?⁠”

“⁠아침부터 먹으면 하루가 든든하쥬⁠.⁠”

안내양은 고개를 저으며 동전을 받았다⁠. 기남은 이번에도 회수권을 꺼내지 않았다⁠.

시청 위생과는 별관 3층이었다⁠. 감시원 김정호는 책상에서 도시락 뚜껑을 막 열던 참이었다⁠. 깍두기 냄새가 났다⁠. 봉덕 아주머니의 깍두기였다⁠. 감시원은 보자기를 보고 도시락 뚜껑을 도로 덮었다⁠.

나는 보자기를 풀었다⁠. 뚜껑 안쪽의 글자를 감시원 앞으로 돌렸다⁠. 감시원이 안경을 고쳐 쓰고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⁠.

“⁠어디서 났습니까⁠?⁠”

“⁠공장 뒤 사택⁠, 공장장 집 연탄 창고에 드럼 열 개가 있습니다⁠. 나머지는 굴포천 하류 추덕배라는 원료상 창고에 있습니다⁠. 서른 개쯤요⁠.⁠”

“⁠월요일에 배합실에서 본 적 없다고 하셨죠⁠.⁠”

“⁠거짓말했습니다⁠. 배철순입니다⁠. 태성식품 스프 배합실 야간 2조 배합 반원입니다⁠.⁠”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⁠. “⁠제 이름을 쓰셔도 됩니다⁠.⁠”

감시원은 서류철을 꺼내 무엇을 적었다⁠. 한참 적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내일 새벽에 갑니다⁠. 경찰도 같이 갑니다⁠.⁠”

해안일보 편집국에서 주 기자는 뚜껑 사진을 찍고 내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⁠. 부장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내 손을 잡고 한 번 흔들었다⁠. 사환은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⁠. 주 기자가 계단 앞까지 따라 나왔다⁠.

“⁠내일 아침 신문이에요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⁠”

“⁠괜찮아요⁠?⁠”

나는 대답 대신 계단을 내려갔다⁠.

*

목요일 밤⁠, 나는 배합실에 올라가지 않았다⁠. 목요일 밤 야간 2조 통은 아무도 섞지 않았다⁠. 대신 공장 식당 뒷문을 두드렸다⁠. 봉덕 아주머니는 내일 아침 쌀을 씻어 불려 놓고 앞치마를 벗던 참이었다⁠.

“⁠오늘은 솥 안 빌려줘⁠. 너 근무 아니라며⁠. 공장장이 낮에 식당까지 와서 너 오면 쫓아내라더라⁠.⁠”

“⁠솥은 안 빌립니다⁠. 자루만 맡아 주세요⁠.⁠”

식당 구석에 재워 둔 새우 머리 세 자루와 빻은 멸치 부스러기 두 자루가 있었다⁠. 어머니 말대로 하룻밤씩 재운 것이었다⁠. 자루 주둥이를 풀자 고소한 단내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⁠. 봉덕 아주머니가 코를 들이밀었다⁠.

“⁠어이구⁠. 처음 볶은 거랑 냄새가 다르네⁠.⁠”

“⁠재우니까 달라졌어요⁠.⁠”

봉덕 아주머니는 자루를 하나씩 들어 찬장 맨 아래 칸에 밀어 넣었다⁠. 찬장 문을 닫고 문 앞에 쌀 포대 두 개를 세워 가렸다⁠. 그러고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⁠.

“⁠내일 무슨 일 있지⁠? 네 얼굴이 솥 바닥 눌어붙은 얼굴이다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큰일이냐⁠?⁠”

“⁠공장이 멈출 수도 있어요⁠.⁠”

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를 허리춤에서 빼어 들었다⁠. 국자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았다⁠.

“⁠내가 이 식당에서 이십 년 밥을 했어⁠. 공장이 멈춘 날도 밥은 했다⁠. 사람이 오면 밥은 해⁠.⁠” 봉덕 아주머니가 찬장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⁠. “⁠이건 내가 지켜 줄게⁠. 쥐가 먹었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⁠.⁠”

기숙사로 돌아가자 기남이 아랫칸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⁠. 주간 조 2호실로 옮긴 뒤로 처음 3호실에 와서 누운 밤이었다⁠.

“⁠형⁠, 내일 기사 나가면 우리 공장 어떻게 돼⁠?⁠”

“⁠모르겠다⁠.⁠”

“⁠형은 알잖아⁠. 형은 첫 숟갈 믿는다며⁠.⁠”

나는 윗칸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⁠. 천장이 낮아서 숨을 크게 쉬면 이불이 천장에 닿았다⁠. 아랫칸에서 기남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 소리가 났다⁠. 둘 다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왔다⁠. 창밖 둑길로 첫 화물차가 지나가며 유리창을 덜덜 흔들었다⁠.

*

금요일 아침 여섯 시⁠, 부평역 가판대에 해안일보가 쌓였다⁠. 사회면 머리에 드럼 뚜껑 사진이 실려 있었다⁠. 제목이 굵었다⁠.

「⁠부평 라면 공장⁠, 미군 부대 폐기 원료 썼다 — 연구소 “⁠곰팡이·상한 기름⁠” 배합 반원 실명 증언⁠」

공장으로 돌아가자 정문 앞에 지프 두 대와 경찰 순찰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⁠. 감시원과 경찰들이 본관으로 들어갔고⁠, 출근하던 사람들이 정문 밖에서 걸음을 멈췄다⁠. 경비실 유리창과 정문 철문에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⁠. 시청 도장이 찍혀 있었다⁠.

「⁠생산 중지 — 시청 위생과⁠」

정문 옆 공중전화 앞에는 벌써 줄이 길었다⁠. 고향에 전화하려는 사람⁠, 다른 공장 친구에게 자리를 알아보려는 사람이 동전을 손에 쥐고 발을 굴렀다⁠. 이백 명이 정문 밖 둑길에 모였다⁠. 포장반 여공들이 신문을 돌려 읽었고⁠, 제면반 사내들이 담배를 물었다⁠.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⁠. 왕 반장이 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정문의 봉인 종이를 오래 보았다⁠. 포장반 경자는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나와 있었다⁠. 아기가 칭얼거리자 경자는 몸을 좌우로 흔들었고⁠, 흔들면서도 눈은 봉인 종이에서 떼지 않았다⁠. 사택 골목에서 공장장 아내가 앞치마 차림으로 나와 사람들 뒤에서 잠깐 기웃거리다 금방 돌아갔다⁠.

뒷줄에서 누가 소리쳤다⁠.

“⁠누가 신문에 팔았어⁠?⁠”

10화는 어땠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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