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491자)

반품 딱지

라면 스프의 비밀 · 은해록

아침 여섯 시 반⁠, 남자 기숙사 3호실은 양말 냄새와 연탄 난로 냄새로 꽉 차 있었다⁠. 이층 침대 넷에 여덟 명이 잤고⁠, 주간 조는 벌써 나가고 야간 조만 돌아와 누웠다⁠. 나는 아랫칸에 걸터앉아 작업복 단추를 풀었다⁠. 기남은 윗칸에 올라가지 않고 내 앞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⁠.

“⁠형⁠, 나 밤새 생각혀 봤는데⁠.⁠”

“⁠자고 있었잖아⁠.⁠”

“⁠자면서 생각혔어⁠.⁠” 기남은 손가락을 하나 폈다⁠. “⁠첫째⁠, 이 아랫칸⁠.⁠”

“⁠너 윗칸에서 떨어진 게 벌써 두 번이다⁠.⁠”

“⁠그러니께⁠. 세 번째는 죽어⁠. 형은 몸이 단단하니께 떨어져도 바닥이 깨지지⁠.⁠” 기남은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⁠. “⁠월급날 고깃국⁠. 형 그릇의 고기는 내 그릇으로⁠.⁠”

“⁠다른 건⁠?⁠”

“⁠삼촌한테는 내가 아무것도 못 봤어⁠. 근데 형⁠.⁠” 기남이 목소리를 낮췄다⁠. “⁠삼촌이 알면 나는 사택 가서 연탄 갈아야 혀⁠. 우리 엄마가 삼촌한테 나 사람 만들어 달라고 맡겼거든⁠. 삼촌 손에 사람 되는 거⁠, 그거 연탄 가는 거여⁠.⁠”

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⁠. 기남은 웃지 않았다⁠. 기남이 바닥에서 일어나 내 베개를 끌어안았다⁠.

“⁠그리고 형⁠, 하나만 물어보자⁠. 왜 그랬어⁠? 삼촌이 섞으라 했잖아⁠.⁠”

“⁠목 뒤가 따끔했어⁠.⁠”

“⁠그게 다여⁠?⁠”

“⁠첫 숟갈이 싫다고 했어⁠.⁠”

기남은 한참 나를 보다가 내 베개를 들고 아랫칸으로 기어들어 갔다⁠. 나는 윗칸으로 올라갔다⁠. 천장이 낮아서 고개를 들자마자 정수리를 박았다⁠. 아랫칸에서 기남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로 말했다⁠.

“⁠삼촌이 전화하는 거 들었어⁠. 추 사장이라고⁠, 드럼 갖다 준 사람⁠. 미군 부대 물건 대는 사람이랴⁠.⁠”

*

아홉 시에 나는 잠을 포기하고 짐 싣는 자리로 내려갔다⁠. 트럭 세 대가 후진으로 들어와 꽁무니를 창고 문에 대고 있었다⁠. 짐꾼들이 상자를 어깨에 메고 날랐다⁠. 상자 옆구리마다 「⁠10월 11일 야간 2조⁠」가 찍혀 있었다⁠. 첫 통에서 나온 상자와 두 번째 통에서 나온 상자는 똑같이 생겼다⁠. 고무도장은 통을 가리지 않았다⁠.

포장실 야간 반장 아주머니에게 들은 대로라면 첫 통 상자는 맨 먼저 쌓였고⁠, 맨 먼저 쌓인 상자는 맨 먼저 트럭에 들어갔다⁠. 첫 번째 트럭 운전기사가 담배를 물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⁠.

“⁠기사님⁠, 이 차 어디로 갑니까⁠?⁠”

“⁠부평시장⁠. 왜⁠, 누구 보낼 사람 있어⁠?⁠”

“⁠시장 어느 가게들로 가요⁠?⁠”

“⁠동문 안 구멍가게 다섯 집⁠, 그다음 공단 앞⁠. 요새 우리 거 잘 안 받아 줘서 다섯 집도 사정사정해서 넣는 거야⁠. 서울 회사 영업 사원이 매일 와서 덤을 얹어 주거든⁠.⁠”

트럭이 매연을 뿜으며 정문을 나갔다⁠. 정문 옆 공중전화 앞에 주간 조 여공 둘이 동전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⁠. 나는 트럭 꽁무니를 보다가⁠, 봉지 기계가 토해 내던 은박 봉지를 떠올렸다⁠. 열 손가락으로 쥐면 다 가려지는 봉지가 상자에 서른 개⁠, 첫 통에서 상자가 마흔 개쯤 나왔다⁠.

*

금요일 새벽 다섯 시⁠, 나와 기남은 반품 포대 여섯 개를 밀가루 포대 더미 뒤로 옮겼다⁠. 노란 반품 딱지를 떼어 낸 자리에는 밀가루 포대에서 뜯은 딱지를 붙였다⁠. 기남은 포대 하나를 질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⁠.

“⁠형⁠, 이거 다 하면 고깃국 두 그릇이여⁠.⁠”

“⁠한 그릇⁠.⁠”

“⁠그럼 한 그릇 반⁠.⁠”

일곱 시에 수원 원료상 트럭이 들어왔다⁠. 공장장이 출근부보다 먼저 짐 싣는 자리에 나와 있었다⁠. 넥타이를 작업복 단추 사이에 쑤셔 넣고 손에 반품 확인서를 들었다⁠. 짐꾼들이 반품 포대를 트럭에 올리는 동안 공장장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셌다⁠. 여섯에서 손가락이 멈췄다⁠.

“⁠여섯이 어디 갔어⁠?⁠”

창고 안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⁠. 공장장은 반품 확인서를 들어 보였다⁠.

“⁠여기 열둘이라고 돼 있다⁠. 내가 화요일 낮에 직접 셌어⁠.⁠”

“⁠쥐가 먹었습니다⁠.⁠”

내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⁠. 공장장이 나를 보았다⁠. 기남이 내 등 뒤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왔다⁠.

“⁠삼촌⁠, 요새 쥐가 커유⁠. 굴포천 쥐는 고양이만 혀⁠. 지난주에 식당 아줌니가 국자로 하나 잡았는디⁠, 국자가 휘었어유⁠.⁠”

짐꾼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떨었다⁠. 공장장은 기남을 보지 않았다⁠. 공장장의 눈이 내 손으로 내려왔다⁠. 반품 포대를 지느라 나는 장갑을 벗고 있었다⁠. 손가락 끝이 스프 가루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⁠. 공장장은 한참 내 손가락을 보다가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눌러 고쳐 맸다⁠.

“⁠철순아⁠. 너 요새 하룻밤에 숟가락 몇 번 대냐⁠?⁠”

“⁠통마다 한 번씩입니다⁠.⁠”

“⁠한 번이면 됐다⁠.⁠” 공장장이 반품 확인서에 볼펜으로 숫자를 고쳤다⁠. 열둘에 줄을 긋고 여섯을 썼다⁠. “⁠여섯 포대 값은 쥐한테 받을 수가 없으니까 네 월급에서 깐다⁠. 쥐가 네 방에 사나 보다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기남이 너는 오늘부터 고깃국 없다⁠.⁠”

“⁠삼촌⁠, 나는 왜유⁠?⁠”

“⁠쥐를 국자로 잡았다며⁠. 식당 국자 값⁠.⁠”

공장장이 돌아서는데 정문에서 경적이 세 번 울렸다⁠. 짙은 초록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⁠. 짐칸에 붉은 띠 드럼이 열 개 실려 있었다⁠. 운전석에서 가죽 잠바를 입은 사내가 내렸다⁠. 껌을 씹고 있었고⁠, 손목에 금시계를 차고 있었다⁠. 공장장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⁠.

“⁠공장장님⁠, 추덕배가 왔습니다⁠. 화요일 거 맛 좋았죠⁠?⁠”

추덕배는 공장장에게 담배를 권하고⁠, 짐꾼들에게 드럼을 내리라고 손짓했다⁠. 그러고는 금시계를 들여다보며 나에게로 걸어왔다⁠. 껌 씹는 소리가 가까워졌다⁠.

“⁠이 친구가 그 혀인가⁠? 공장장님이 자랑하던⁠.⁠”

“⁠배합실 배철순입니다⁠.⁠”

“⁠혀가 좋다며⁠?⁠” 추덕배가 껌을 반대편 어금니로 옮겼다⁠. “⁠혀 좋은 사람 오래 못 살아⁠.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어서⁠. 하하⁠.⁠”

추덕배는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⁠. 손이 무거웠다⁠. 드럼이 트럭에서 내려와 창고 바닥에 하나씩 쿵쿵 떨어졌다⁠. 추덕배는 공장장 곁으로 돌아가며 지나가듯 말했다⁠.

“⁠아⁠, 사장님이 서울에서 안부 전하시랍니다⁠. 어음 날짜 잊지 마시라고⁠.⁠”

*

점심때 공장 식당은 국자 이야기로 시끄러웠다⁠. 짐꾼 하나가 밥을 받으며 아주머니에게 국자 휘어진 것 좀 보자고 했고⁠, 다음 사람도 또 다음 사람도 같은 말을 했다⁠. 봉덕 아주머니는 배식대 너머에서 국자를 높이 들어 보였다⁠. 반듯했다⁠.

“⁠누가 그래⁠? 내가 쥐를 국자로 잡았다고⁠?⁠”

열 사람쯤이 동시에 기남을 쳐다보았다⁠. 기남은 식판을 든 채 줄 맨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⁠. 봉덕 아주머니는 기남의 식판이 앞에 오자 국을 한 국자 떠서⁠, 국자를 기울이다 말고 건더기만 도로 냄비에 털어 넣었다⁠. 기남의 국그릇에는 맑은 국물만 담겼다⁠.

“⁠아줌니⁠, 고기가 하나도 없는디유⁠.⁠”

“⁠쥐가 먹었나 보지⁠. 굴포천 쥐는 고양이만 하다며⁠.⁠”

식당이 떠나가게 웃음이 터졌다⁠. 기남은 맑은 국물을 들고 내 맞은편에 앉아 내 국그릇을 오래 바라보았다⁠. 나는 국그릇의 고기 두 점을 기남의 그릇으로 옮겼다⁠. 고깃국은 월급날 것만 약속이었지만⁠, 쥐 이야기를 지어낸 몫은 쳐 줘야 했다⁠.

식당 벽에는 「⁠근검절약 · 품질 제일⁠」이라고 쓴 액자가 있었고⁠, 액자 옆에 이번 달 월급날이 25일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⁠. 누가 종이 귀퉁이에 볼펜으로 고깃국 그림을 그려 놓았다⁠. 김이 세 줄 올라가는 그림이었다⁠. 나는 숟가락을 국에 담갔다가 맛을 보지 않고 도로 꺼냈다⁠. 저녁부터 야간 2조는 반품 딱지를 뗀 여섯 포대로 버텨야 했다⁠. 엿새였다⁠. 숨긴 가루가 바닥나면 나는 붉은 띠 드럼을 혼자 섞어야 했다⁠.

*

일요일 아침⁠, 나와 기남은 부평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탔다⁠. 버스 안내양이 문에 매달려 “⁠오라이⁠” 하고 차체를 두 번 두드렸다⁠. 나는 동전을 냈고⁠, 기남은 주머니에서 학생 회수권을 한 장 꺼냈다⁠. 고등학교 다니는 사촌 동생한테 얻었다고 했다⁠.

안내양이 회수권을 받아 들고 기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아저씨가 무슨 학생이에요⁠?⁠”

“⁠늦게 배우는 학생이유⁠. 야학⁠.⁠”

“⁠야학은 회수권 없어요⁠.⁠”

“⁠그럼 제가 첫 번째 하쥬⁠.⁠”

뒷자리 할머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⁠. 안내양은 웃지 않고 손바닥을 내밀었다⁠. 나는 기남 몫의 동전을 한 번 더 냈다⁠. 기남은 회수권을 도로 받아 소중하게 지갑에 넣었다⁠.

부평시장 동문 안 구멍가게는 다섯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⁠. 첫 집 앞에 빨간 봉지 라면 상자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⁠. 서울 큰 회사의 상자였고⁠, 꼭대기에 「⁠한 상자 사면 한 봉지 더⁠」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⁠. 우리 주황 상자는 빨간 상자 밑에 깔려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었다⁠.

세 번째 집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⁠. 할머니 옆에 우리 상자가 뜯긴 채 놓여 있었다⁠. 상자 옆구리의 도장을 읽었다⁠. 「⁠10월 11일 야간 2조⁠」⁠.

“⁠할머니⁠, 이 상자 언제 들어왔어요⁠?⁠”

“⁠수요일⁠. 태성 거는 원래 잘 안 나가⁠. 근데 이번 거는 금방 나갔어⁠. 공단 아가씨들이 퇴근길에 다섯 봉지씩 사 갔어⁠. 월급날 전이라 싼 걸로⁠.⁠”

할머니가 콩나물 꼬리를 똑똑 끊는 사이⁠, 가게 앞에 자전거 한 대가 멈췄다⁠.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조끼를 입은 젊은 사내가 짐받이에서 빨간 봉지 한 묶음을 내렸다⁠. 서울 회사 영업 사원이었다⁠. 사내는 묻지도 않고 빨간 상자 탑 꼭대기에 봉지 다섯 개를 얹었다⁠.

“⁠할머니⁠, 이번 주 덤이에요⁠. 태성 거는 빼시고 저희 거 앞에 놓으시면 다음 주에 한 묶음 더 드릴게요⁠.⁠”

“⁠태성 거는 우리 동네 공장 거야⁠.⁠”

“⁠동네 공장이 할머니 먹여 살려요⁠? 저희가 살려 드리죠⁠.⁠” 사내는 웃으며 내 손의 주황 봉지를 힐끗 보았다⁠. “⁠아저씨도 태성 거 드세요⁠? 의리 있으시네⁠.⁠”

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음 가게로 갔다⁠. 할머니는 빨간 봉지 다섯 개를 평상 밑에 밀어 넣고 혀를 찼다⁠.

상자 안에 일곱 봉지가 남아 있었다⁠. 나는 일곱 봉지를 다 샀다⁠. 할머니가 봉지를 신문지에 싸 주다가 손을 멈췄다⁠.

“⁠총각⁠, 태성 다녀⁠?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그럼 물어보자⁠. 어제 다섯 봉지 사 간 아가씨가 저녁에 다시 왔어⁠. 배를 이렇게 붙잡고⁠. 국물에서 냄새가 났대⁠. 그 아가씨도 태성 다닌다던데⁠, 포장반이라고⁠.⁠”

할머니는 신문지 꾸러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⁠. 꾸러미가 가벼웠다⁠. 나머지 다섯 집을 다 돌았다⁠. 다섯 집에 들어간 상자 가운데 첫 통에서 나온 것이 몇 상자인지⁠, 어느 집의 어느 상자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⁠. 기남이 마지막 집 앞에서 내 소매를 잡았다⁠.

“⁠형⁠, 다 살 겨⁠?⁠”

“⁠다 못 사⁠.⁠”

“⁠그럼 왜 왔어⁠?⁠”

나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신문지 꾸러미를 겨드랑이에 끼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⁠. 정류장 옆 전파사 진열장에서 텔레비전 여섯 대가 같은 연속극을 틀고 있었다⁠. 다섯 대는 흑백이었고 한 대만 색이 나왔다⁠.

*

저녁 일곱 시⁠, 기숙사 휴게실의 흑백 텔레비전 앞에 사내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⁠. 인천 야구단이 또 졌다는 소식에 누가 화투짝을 바닥에 내리쳤다⁠. 나는 휴게실 문간에서 신문지 꾸러미를 든 채로 서 있었다⁠.

튀김반 젊은 친구가 화투짝을 주우며 말했다⁠.

“⁠들었어⁠? 여자 기숙사에 난리 났대⁠. 포장반 아가씨 하나가 어제부터 배를 붙잡고 누웠는데 오늘은 일어나지도 못한대⁠. 사감이 의무실 선생을 불렀대⁠.⁠”

“⁠누군데⁠?⁠”

“⁠남순희⁠. 목포 아가씨⁠. 야학 다니는⁠.⁠”

기남이 내 옆에서 들고 있던 귤을 떨어뜨렸다⁠. 귤이 휴게실 바닥을 굴러 텔레비전 앞까지 갔다⁠. 튀김반 친구가 귤을 주워 껍질을 까며 한마디를 보탰다⁠.

“⁠태성 라면 먹고 그랬대⁠. 제 손으로 싼 라면을⁠.⁠”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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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연필깎이2026.11.01· 2화

    기남이 윗칸에서 두 번 떨어졌다고 아랫칸 달라는 거ㅋㅋ 세 번째는 죽는다는 말에 빵 터졌어요.

    • 은해록작가2026.11.01

      기남이는 배고픈 것만 빼면 다 협상합니다. 1983년 기숙사 이층 침대는 정말 그렇게 좁았어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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