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430자)

한 줄

라면 스프의 비밀 · 은해록

밤 열한 시⁠, 배합실 문을 밀자 고춧가루 냄새가 콧속을 한 번 긁고 지나갔다⁠. 형광등 여섯 개 가운데 하나는 늘 가늘게 떨었고⁠, 스테인리스 배합 통 셋이 불빛을 받아 둥글게 번들거렸다⁠. 주간 반장이 손을 씻다 말고 턱으로 벽의 클립보드를 가리켰다⁠. 새 배합표 한 장이 집게에 물려 있었다⁠.

“⁠위에서 내려왔어⁠. 오늘 밤부터래⁠.⁠”

주간 반장은 더 말하지 않고 위생모를 벗어 털며 나갔다⁠. 나는 클립보드 앞으로 갔다⁠.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⁠. 흰 위생모 밑으로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가 삐죽 나왔고⁠, 짙은 눈썹 아래 눈이 졸려 보였다⁠. 하늘색 작업복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흰 수건을 둘렀다⁠. 어깨가 두꺼워 작업복이 늘 팽팽했다⁠. 클립보드를 잡은 손가락 끝이 붉었다⁠. 붉은 스프 가루는 비누로 씻어도 손톱 밑에서 빠지지 않았고⁠, 여섯 해째 내 손끝은 늘 고춧물 든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⁠.

배합표는 늘 보던 것과 같았다⁠. 소금⁠, 고춧가루⁠, 마늘 가루⁠, 후춧가루⁠, 간장 가루⁠, 육수 가루⁠. 한 줄만 달랐다⁠. 육수 가루 칸에 볼펜으로 줄이 그어졌고⁠, 옆에 새 글씨가 붙어 있었다⁠.

「⁠육수 가루 — 붉은 띠 드럼으로 전량 바꿈⁠. 옛 가루는 금요일 반품⁠.⁠」

맨 아래에는 공장장 변도순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⁠. 인주가 덜 말라 손가락에 묻어날 것처럼 붉었다⁠.

“⁠형⁠, 붉은 띠가 뭐여⁠?⁠”

하기남이 밀가루 포대 더미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⁠. 기남은 야간 2조 내 보조였고⁠, 공장장의 누나 아들이었다⁠. 입에 면 부스러기를 물고 있었다⁠. 1층 제면기에서 끊어져 나온 부스러기를 기남은 늘 주머니 가득 담아 올라왔다⁠. 공짜라서 맛있다고 했다⁠.

창고 문 앞에 드럼 열 개가 놓여 있었다⁠. 허리에 붉은 페인트로 띠를 둘렀고⁠, 상표 자리는 쇠솔로 박박 긁어 은빛 쇠가 드러나 있었다⁠. 나는 맨 앞 드럼의 뚜껑 고리를 풀었다⁠. 뚜껑이 들리자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⁠. 1층 튀김 솥 기름을 사흘 갈지 않았을 때 나는 냄새였다⁠. 묵은 기름이 쉬면서 내는 쩐내 밑에 젖은 종이 상자 같은 냄새가 깔려 있었다⁠.

기남이 포대에서 내려와 코를 들이밀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⁠.

“⁠소가 울다 갔나 벼⁠.⁠”

나는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헹궜다⁠. 가루를 반 숟갈 떠서 혀에 올렸다⁠. 처음 닿는 맛은 진했다⁠. 쇠고기를 오래 고은 국물을 졸여 놓은 것처럼 짙었다⁠. 혀끝이 먼저 이상한 것을 알았다⁠. 녹슨 못을 핥은 것 같은 쇠맛이 혀끝에 남았고⁠, 삼키고 나니 목 뒤 한가운데가 바늘 끝으로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⁠. 물로 입을 헹궈도 따끔함은 한참 남았다⁠.

혀는 맨 처음 한 숟갈만 믿어라⁠. 여섯 해 전 나에게 혀를 가르친 사람이 처음 해 준 말이었다⁠. 두 번째 숟갈부터는 혀가 맛에 길들어서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⁠. 첫 숟갈이 싫다고 했다⁠.

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⁠.

*

자정에 공장 식당으로 야식을 먹으러 내려갔다⁠. 식당 봉덕 아주머니는 야간 조에게 늘 한솥라면을 끓여 줬다⁠. 주황 봉지에 검은 솥 그림이 박힌⁠, 우리 공장 라면이었다⁠. 기남은 냄비 앞에서 그릇을 두 개 내밀었다⁠.

“⁠아줌니⁠, 하나는 저 먹고 하나는 저 이따 먹을 거유⁠.⁠”

“⁠이따 먹을 놈은 이따 와⁠.⁠”

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로 기남의 손등을 톡 쳤다⁠. 기남은 그릇 하나를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⁠. 배식대 위 라디오에서 밤 뉴스가 나왔다⁠. 수입 쇠고기를 더 들여온다는 말과 물가를 단단히 잡겠다는 정부의 말이 이어졌다⁠. 봉덕 아주머니가 라디오를 껐다⁠.

“⁠물가 잡는다고 라면값은 꽁꽁 묶어 놓고⁠, 서울 큰 회사들은 가게마다 한 상자 사면 한 봉지 얹어 준다잖어⁠. 우리 공장 장사가 되겄냐⁠?⁠”

나는 국물을 한 숟갈 떴다⁠. 옛 육수 가루로 만든 국물이었다⁠. 멸치와 쇠고기가 같이 우러난 단맛이 혀 가운데에 오래 머물렀다⁠. 강화 장터에서 국숫집을 하는 어머니의 국물과 닮아서⁠, 처음 이 공장에 왔을 때 나는 이 라면을 먹고 울 뻔했다⁠.

기남은 감춘 그릇까지 비우고 배를 두드렸다⁠.

“⁠형⁠, 아까 그 가루 말여⁠. 삼촌한테 말할 겨⁠?⁠”

“⁠말해야지⁠.⁠”

“⁠삼촌은 한 번 내린 말은 안 거둬⁠. 우리 엄마가 그래서 시집도 삼촌이 정한 데로 갔어⁠.⁠”

*

새벽 한 시⁠, 배합실 유리창 너머 복도에 공장장이 서 있었다⁠. 회색 양복바지에 작업복 윗도리를 걸치고⁠, 깃 사이로 짙은 밤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⁠. 공장장은 공장 안에서도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⁠. 넥타이 끝을 작업복 단추 사이로 쑤셔 넣어 기계에 말려 들어가지 않게 했다⁠. 팔짱을 낀 채 나를 보다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⁠.

“⁠왜 손이 놀고 있어⁠?⁠”

“⁠드럼 가루가 이상합니다⁠.⁠”

공장장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집었다⁠. 드럼 가루를 듬뿍 떠서 혀에 올리고 입술을 오물거렸다⁠. 한참 오물거리다 삼키고⁠, 물도 마시지 않았다⁠.

“⁠진하네⁠. 쇠고기 맛이 옛 가루보다 두 배는 진해⁠.⁠”

“⁠혀끝에 쇠맛이 납니다⁠. 삼키면 목 뒤가 따끔하고요⁠. 쩐내도 납니다⁠.⁠”

“⁠끓이면 날아가⁠. 매운 거 조금 올려⁠. 고춧가루 한 되만 더 넣으면 아무도 모른다⁠.⁠”

“⁠어디서 온 겁니까⁠?⁠”

“⁠알 거 없어⁠.⁠”

공장장은 숟가락을 물통에 던져 넣었다⁠. 물이 튀어 내 작업복 가슴에 동그란 얼룩이 졌다⁠. 공장장은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러 고쳐 맸다⁠.

“⁠철순아⁠. 서울 회사들이 도매값을 내렸다⁠. 가게에 덤까지 얹어 준다⁠. 우리는 라면값을 정부가 묶어 놨으니 따라 내리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해⁠. 밀가루 값은 올랐고 기름 값도 올랐다⁠. 11월 말일에 은행 어음이 돌아와⁠. 못 막으면 공장 문 닫는다⁠.⁠”

“⁠그래도 이건 사람이 먹는 겁니다⁠.⁠”

“⁠이백 명⁠.⁠” 공장장이 손가락으로 배합 통을 가리켰다⁠. “⁠이백 명 월급이 이 통 안에 있어⁠. 공장 뒤에 사택이 스무 채다⁠. 스무 집 연탄을 누가 넣어 주는지 알아⁠?⁠”

나는 대답하지 못했다⁠. 공장장은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⁠. 담배 냄새와 박하사탕 냄새가 같이 났다⁠.

“⁠네 혀는 내가 가르쳤다⁠. 맨 처음 한 숟갈⁠. 내 첫 숟갈이 괜찮대⁠.⁠”

“⁠반장님 혀가 괜찮다고 하시면⁠…⁠.⁠”

“⁠지금은 공장장이다⁠.⁠” 공장장은 팔짱을 다시 꼈다⁠. “⁠섞어⁠. 다 섞을 때까지 여기 있겠다⁠.⁠”

나는 섞었다⁠.

드럼을 기울여 가루를 바가지로 퍼 담았다⁠. 저울 바늘이 배합표의 숫자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⁠. 쩐내가 바가지에서 피어올라 위생모 안까지 스몄다⁠. 가루를 통에 붓고 고춧가루를 한 되 더 붓고 나무 주걱으로 저었다⁠. 통 바닥에서부터 위로⁠, 열두 번 뒤집었다⁠. 숟가락을 헹궈 한 숟갈 떴다⁠. 매운맛이 혀를 덮어서 쇠맛이 뒤로 숨었다⁠. 목 뒤는 여전히 따끔했다⁠.

꼬리표를 통에 매달았다⁠. 「⁠10월 11일 · 야간 2조 · 1통⁠」⁠. 서랍에서 나무 도장을 꺼냈다⁠. 「⁠배⁠」 한 글자를 새긴 도장이었다⁠. 인주를 묻혀 꼬리표 아래에 눌렀다⁠.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도장 자리가 비뚤게 번졌다⁠.

공장장은 꼬리표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⁠.

“⁠다음 통부터는 혼자 해⁠.⁠”

공장장은 복도로 나가 유리창 너머에서 잠깐 나를 보다가 계단으로 사라졌다⁠. 기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포대 위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⁠.

*

두 시⁠, 첫 통을 손수레에 싣고 화물 승강기로 1층에 내려갔다⁠. 포장실 문 앞에서 포장반 야간 반장 아주머니가 손전등으로 꼬리표부터 비췄다⁠. 도장이 없는 통은 아주머니가 절대 받지 않았다⁠. 지난봄에 도장을 깜빡한 통 하나를 아주머니가 밤새 문밖에 세워 두는 바람에⁠, 나는 아침 조회에서 공장장에게 꿀밤을 맞았다⁠.

“⁠배 씨 도장 비뚤어졌네⁠. 졸았어⁠?⁠”

“⁠손목이 좀 저려서요⁠.⁠”

“⁠총각이 벌써 손목이 저리면 장가는 어떻게 가⁠.⁠”

아주머니는 깔깔 웃으며 통을 받아 갔다⁠. 통이 깔때기 위로 들려 기울어지자 가루가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려갔다⁠. 봉지 기계가 철컥철컥 손가락만 한 은박 봉지를 토해 냈다⁠. 봉지는 면 덩어리와 함께 주황 봉지에 들어가 열로 입이 붙고⁠, 서른 개씩 상자에 담겼다⁠. 상자 옆구리에 고무도장이 내려앉았다⁠. 「⁠10월 11일 야간 2조⁠」⁠.

나는 은박 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⁠. 손바닥에 올려 보니 가벼웠다⁠. 열 손가락으로 쥐면 다 가려지는 크기였다⁠. 봉지를 뒤집어도 아무 글자도 없었다⁠. 아침이면 트럭이 상자를 싣고 부평시장으로⁠, 주안으로⁠, 공단 앞 구멍가게들로 간다⁠. 냄비에 물이 끓고⁠, 누군가 봉지 귀퉁이를 이로 뜯는다⁠.

봉지를 도로 상자에 넣으려다 손이 멈췄다⁠. 아주머니가 나를 보았다⁠.

“⁠왜⁠, 하나 슬쩍하게⁠?⁠”

“⁠아뇨⁠.⁠”

봉지를 상자에 넣었다⁠. 포장실 창 너머로 공장 뒤 사택 지붕들이 보였다⁠. 슬레이트 지붕 스무 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었고⁠, 한 집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⁠. 공장장 집이었다⁠.

*

새벽 세 시⁠, 기남은 포대 위에서 코를 골았다⁠. 1층 튀김 솥이 쉬는 시간이라 공장이 조용했다⁠. 형광등 떠는 소리와 굴포천 둑길을 지나는 화물차 소리만 들렸다⁠. 통금이 풀린 지 두 해째라 새벽에도 둑길은 비지 않았다⁠.

나는 창고 구석으로 갔다⁠. 밀가루 포대 뒤에 옛 육수 가루 포대 열두 개가 쌓여 있었다⁠. 포대마다 「⁠반품⁠」이라고 쓴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⁠. 금요일에 수원 원료상 트럭이 와서 실어 가기로 한 포대였다⁠. 딱지 하나를 손톱으로 들어 보았다⁠. 풀이 덜 말라 쉽게 일어났다⁠.

포대 하나를 열어 혀에 올렸다⁠. 멸치와 쇠고기가 같이 우러난 단맛이 혀 가운데로 천천히 퍼졌다⁠. 쇠맛도 따끔함도 없었다⁠. 야식 국물의 맛이었다⁠.

포대를 손바닥으로 하나씩 눌러 보며 세었다⁠. 열두 포대였다⁠. 야간 2조가 하룻밤에 섞는 통이 여섯이니⁠, 아껴 쓰면 열흘은 버틸 수 있었다⁠. 열흘 뒤에는 무엇으로 섞을지 몰랐다⁠. 금요일에 트럭이 오면 열흘도 없었다⁠.

어머니는 국물을 낼 때 멸치를 한 마리씩 손으로 갈라 똥을 땄다⁠. 귀찮다고 한 번 건너뛰면 국물이 쓰다고⁠, 손님은 쓴 줄 몰라도 국물을 남긴다고 했다⁠. 어린 나는 장터 국숫집 평상에 앉아 손님들이 남긴 국물 그릇을 날랐다⁠. 바닥까지 비운 그릇과 반쯤 남긴 그릇을 나란히 놓고 보면⁠, 어느 솥에서 나온 국물인지 알 수 있었다⁠.

공장장의 도장이 찍힌 배합표가 클립보드에 그대로 있었다⁠. 나는 클립보드를 보지 않으려고 등을 돌렸다⁠.

두 번째 통에는 옛 가루를 넣었다⁠. 저울 바늘은 배합표의 숫자까지만 올렸다⁠. 고춧가루 한 되는 넣지 않았다⁠. 주걱으로 열두 번 뒤집고 숟가락을 헹궈 맛을 보았다⁠. 혀끝이 깨끗했다⁠. 목 뒤도 조용했다⁠. 꼬리표를 달았다⁠. 「⁠10월 11일 · 야간 2조 · 2통⁠」⁠. 도장을 눌렀다⁠. 이번에는 도장이 반듯하게 찍혔다⁠.

빈 포대는 접어서 밀가루 포대 더미 맨 밑에 밀어 넣었다⁠. 드럼에서는 내가 쓴 만큼의 가루를 퍼서 창고 뒷문 밖 하수구에 흘려보냈다⁠. 둑 아래 굴포천으로 이어지는 하수구였다⁠. 가루가 물에 닿자 붉은 기름띠가 동그랗게 퍼졌다가 흘러갔다⁠. 공장장이 드럼을 들여다보면⁠, 가루는 두 통을 섞은 만큼 줄어 있어야 했다⁠.

세 번째 통을 저을 때였다⁠. 등 뒤에서 포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⁠.

기남이 포대 위에 앉아 있었다⁠.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몰랐다⁠. 손에 면 부스러기를 한 줌 쥐고⁠, 씹지도 않고 나를 보았다⁠. 기남의 눈이 내 손의 바가지에서 창고 구석의 접힌 포대로⁠, 다시 내 얼굴로 왔다⁠.

“⁠형⁠.⁠”

나는 주걱을 놓지 못했다⁠.

“⁠그거 삼촌이 반품하라던 거잖아⁠.⁠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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