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45자)

해 질 녘

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남이랑

육현배는 11월 4일 목요일 새벽 다섯 시⁠, 평창동 회장 집 마당에서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⁠. 회장의 몸으로 맞는 마지막 아침이었다⁠. 알람 없이 눈이 떠지는 것도⁠, 일어날 때 무릎이 먼저 인사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었다⁠. 감나무 꼭대기에 감 하나가 남아 있었다⁠. 까치밥으로 남겨 둔 것인지⁠, 손이 안 닿아 남은 것인지 현배는 몰랐다⁠.

안방 문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⁠. 삼 주 동안 현배는 평창동에 오면 거실 소파에서 잤다⁠. 남의 아버지 침대에 눕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⁠. 안방 화장대 위에 사진 액자 하나가 있었다⁠. 머리를 짧게 친 여자가 조청 솥 앞에서 나무 주걱을 들고 웃고 있었다⁠. 사진 아래쪽에 볼펜 글씨가 기울어 있었다⁠. 시험 생산실 공책과 같은 글씨였다⁠. 「⁠1974⁠. 첫 솥⁠」⁠.

현배는 사진 앞에 오래 있지 않았다⁠. 틀니를 닦아 끼우고 마지막으로 회장의 넥타이핀을 꽂았다⁠. 금색 핀이 넥타이 위에서 볕을 받았다⁠.

여덟 시에 허기성이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⁠.

“⁠회장님⁠, 은행에서 담보 다시 평가한다고 해서 받아 온 겁니다⁠. 부회장님 보증 갱신 때문에요⁠.⁠” 비서가 봉투를 내밀었다⁠. 「⁠동학빌딩 감정평가서⁠」⁠. “⁠보시지 말라고 할까 하다가 가져왔어요⁠. 오늘이 마지막이시잖아요⁠.⁠”

현배는 새 돋보기를 꺼냈다⁠. 감정평가서 맨 앞 장에 숫자 하나가 크게 박혀 있었다⁠. 현배는 숫자 아래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 수를 하나씩 셌다⁠. 두 번 셌다⁠. 세 번째 세다가 그만두었다⁠.

“⁠허 비서⁠, 이거 성준이⁠, 아니 부회장님 자료랑 같이 볼 수 있어⁠? 공장 삼 년 버티는 데 드는 돈⁠.⁠”

“⁠그건 매일 보시는 자료라서요⁠. 부회장님 메일함에⁠…⁠…⁠.⁠” 비서가 말을 멈췄다⁠. “⁠회장님⁠, 그건⁠…⁠… 지금 보시면 안 될 것 같은 걸 보시려는 거죠⁠?⁠”

“⁠응⁠.⁠”

“⁠그럼 출력해 오겠습니다⁠.⁠”

*

구동학은 같은 날 아침 일곱 시⁠, 면목동 빌라 식탁에서 다솔의 양말을 개고 있었다⁠. 이번에는 짝을 맞췄다⁠. 분홍은 분홍끼리⁠, 줄무늬는 줄무늬끼리⁠. 다솔이 식탁 밑에서 양말 더미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⁠.

“⁠아빠⁠, 오늘은 짝이 맞네⁠?⁠”

“⁠삼 주 연습했다⁠.⁠”

순정이 김치찌개 냄비를 식탁 한가운데 내려놓았다⁠. 첫날 아침과 같은 찌개였다⁠. 순정은 국자를 동학 앞에 놓으며 다솔이 못 듣게 작게 말했다⁠.

“⁠마지막 아침이시죠⁠?⁠”

“⁠해 질 녘이라니까 저녁까지는 내가 네 남편이오⁠.⁠”

“⁠그럼 저녁까지는 등짝 맞으셔도 돼요⁠.⁠” 순정이 손바닥을 한 번 들었다가 내렸다⁠. 웃고 있었다⁠.

동학은 밥을 세 그릇 먹었다⁠. 세 그릇째는 천천히 먹었다⁠. 마흔두 살 몸이 반기는 밥맛을 오래 입안에 두었다⁠. 내일부터 동학의 몸은 죽 반 그릇이면 배가 불렀다⁠.

휴대전화에 아침 기사가 떴다⁠. 「⁠동학제과 내일 임시주총 · 창업주 표에 매각 성패 달려⁠」⁠. 기사 사진은 여전히 오 년 전 창립 기념식 때 모습이었다⁠. 동학은 기사를 닫았다⁠. 다솔이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가다 돌아보았다⁠.

“⁠아빠⁠, 오늘 저녁엔 다시 아빠로 와⁠?⁠”

동학은 수저를 내려놓았다⁠. 순정이 다솔을 보았고⁠, 다솔은 대답을 기다렸다⁠. 아홉 살은 모르는 척을 잘했다⁠. 다 알고 하는 모르는 척이었다⁠.

“⁠온다⁠.⁠” 동학이 말했다⁠. “⁠허리 아프다고 엄살 부리면서 올 거다⁠.⁠”

다솔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⁠. 동학은 식탁 위 보리별 한 봉지를 다솔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현관문을 밀었다⁠. 계단을 두 칸씩⁠, 마지막으로 뛰어 내려갔다⁠.

*

육현배는 오후 다섯 시 반⁠, 회장실 큰 창 앞에 서 있었다⁠. 창으로 늦가을 볕이 비스듬히 들었다⁠. 청계천 물빛이 주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⁠. 책상 위에 감정평가서와 「⁠안성 공장 3개년 현금 흐름⁠」 출력물이 나란히 놓였고⁠, 출력물 옆에 노란 봉지 하나가 있었다⁠. 「⁠2027⁠.11⁠.04까지⁠」⁠.

회장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⁠. 해고된 과장의 몸이 1층 보안을 통과하지 못해서 허기성이 화물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올라왔다⁠. 회장은 상자 더미 사이에 쪼그려 앉아 올라왔다며 와이셔츠에 묻은 골판지 부스러기를 털었다⁠. 화물 엘리베이터는 오십육 년 만에 처음 타 본다며⁠, 제 건물에 짐 싣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고 안에 공장 박스 냄새가 배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⁠. 허기성은 문가에서 회장의 말을 휴대전화에 받아 적다가⁠, 회장의 눈길을 받고 얼른 화면을 껐다⁠. 메모장 맨 위에 「⁠화물 엘리베이터 처음⁠」이 남았다⁠.

“⁠해고된 사람이 회장실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구먼⁠.⁠”

“⁠회장님 회장실이잖아요⁠.⁠”

“⁠이제 성준이 거다⁠.⁠”

문이 열렸다⁠. 성준이 들어오다 소파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⁠. 은테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⁠.

“⁠육 과장님⁠. 어제 해고되신 분이 여기 왜 계십니까⁠?⁠”

“⁠내가 불렀소⁠.⁠” 회장이 일어났다⁠. 과장의 몸이 성준보다 머리 하나 작았다⁠. “⁠문자도 내가 보냈고⁠.⁠”

“⁠회장님이 부르셨다고 쓰셨던데요⁠.⁠”

“⁠내가 회장이다⁠.⁠”

성준이 현배를 보았다⁠. 현배는 창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⁠. 성준의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⁠.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농담하실 기분 아닙니다⁠.⁠”

“⁠성준아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 과장의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⁠. “⁠너 아홉 살 때 공장 창고에서 보리별 한 상자를 몰래 꺼내다 들켰지⁠. 공장 고양이가 그랬다고 우겼어⁠. 고양이가 상자를 어떻게 드냐고 내가 물었더니⁠, 두 마리였다고 했다⁠.⁠”

성준의 얼굴이 굳었다⁠.

“⁠너희 어머니 마지막 날 병원에서⁠, 둘이 밥 좀 같이 먹으라고 했다⁠. 너 그날 복도에서 울고 나는 주차장에서 담배 피웠다⁠. 담배 끊은 지 삼십 년 만에⁠.⁠”

“⁠그만하세요⁠.⁠” 성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⁠. “⁠그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어요⁠? 회장님이 육 과장님한테 다 하셨어요⁠?⁠”

“⁠내가 했지⁠. 지금 하고 있잖냐⁠.⁠”

“⁠육 과장님⁠. 아버지 흉내 내지 마세요⁠. 이건 선 넘으신 거예요⁠.⁠” 성준이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⁠. 감정평가서와 출력물을 보았다⁠. 무엇을 보려고 펼쳐 둔 것인지 단번에 읽어 낸 얼굴이었다⁠. “⁠빌딩이요⁠?⁠”

“⁠이 빌딩 팔면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 “⁠공장 안 팔아도 되잖아⁠.⁠”

“⁠삼 년 버팁니다⁠.⁠” 성준이 바로 받았다⁠. 출력물 맨 아래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⁠. “⁠정확히 삼 년이요⁠. 기계 반을 바꾸고 삼 년⁠. 그 뒤에는 오늘이랑 같은 자리예요⁠. 하버라인은 일본 공장을 사서 우리 납품 자리를 내년 봄부터 가져갈 거고요⁠. 빌딩 팔고 삼 년 뒤에 망하면⁠, 남은 육백한테는 빌딩도 없는 회사가 남습니다⁠. 지금 팔면 육백이 하버라인 공장에서 월급을 받아요⁠. 제 숫자 틀린 데 있으면 짚어 주세요⁠. 오늘은 제발 짚어 주세요⁠.⁠”

아무도 짚지 못했다⁠. 현배도⁠, 과장의 몸에 든 회장도⁠.

“⁠네 숫자 맞다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 “⁠오십육 년 동안 과자 판 내가 본 숫자도 같다⁠.⁠”

“⁠그럼 왜 이러세요⁠?⁠”

“⁠숫자에 안 들어가는 게 있어서⁠.⁠” 회장이 휴대전화를 꺼냈다⁠. 메모장을 열어 성준 앞에 내밀었다⁠. 맨 위 줄 「⁠만세슈퍼 · 보리별 · 1⁠」부터 백스무 줄이 이어져 있었다⁠. “⁠이건 공장 반나절이다⁠. 너 말이 맞아⁠. 그런데 이 백스무 군데 사장들이⁠, 잘린 영업과장 이름을 대고 주문을 넣었다⁠. 내가 오십육 년 동안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를 위해 주문 넣는 사장은 한 사람도 못 봤다⁠.⁠”

성준이 화면을 내려다보았다⁠. 엄지로 화면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⁠. 백스무 줄이 다 지나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⁠.

“⁠그 보리별⁠.⁠” 성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⁠. “⁠제가 만들라고 했어요⁠.⁠”

회장의 어깨가 움찔했다⁠.

“⁠어머니 기일에 아버지가 혼잣말하셨어요⁠. 보리별 한 번만 더 먹어 봤으면 좋겠다고⁠. 아버지는 제가 들은 줄 모르세요⁠. 그래서 시험 생산실 반장님한테 어머니 공책을 드렸어요⁠. 대표이사 내려놓으시는 날⁠, 마지막 회식 가실 때 들고 가시라고⁠.⁠” 성준이 휴대전화를 회장에게 돌려주었다⁠. “⁠숫자로는 하나도 안 맞는 일이었죠⁠. 저도 그런 걸 해요⁠, 가끔⁠.⁠”

볕이 붉어졌다⁠. 창으로 든 주황빛이 회장실 바닥을 길게 건너와 소파 다리까지 닿았다⁠. 책상 위 노란 봉지의 파란 날짜 글씨가 붉은빛 속에서 검게 보였다⁠.

현배는 창틀을 붙잡았다⁠. 발밑이 기울었다⁠. 회장실 바닥이 배 갑판처럼 천천히 흔들렸다⁠. 맞은편에서 과장의 몸이 소파 팔걸이를 붙잡는 것이 보였다⁠. 둘이 같은 박자로 휘청였다⁠.

“⁠회장님⁠?⁠” 성준이 현배에게 손을 뻗었다⁠. “⁠육 과장님⁠?⁠”

입안에 조청 단맛이 번졌다⁠. 노가리 골목에서 별 하나를 깨물던 순간의 맛이었다⁠. 현배는 눈을 감았다⁠.

*

육현배는 소파 팔걸이를 붙잡은 채 눈을 떴다⁠. 허리가 먼저 아팠다⁠. 십 년 묵은 허리 디스크가 반갑게 욱신거렸다⁠. 무릎은 조용했다⁠. 배가 고팠다⁠.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⁠. 현배는 손을 넣어 접힌 종이를 꺼냈다⁠. 「⁠징계 해고 통지서 · 영업2팀 과장 육현배⁠」⁠.

창 앞에서 작은 노인이 창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⁠. 노인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⁠. 반듯하게 빗어 넘긴 백발⁠, 두꺼운 흰 눈썹⁠. 노인이 혀로 틀니를 한 번 밀어 제자리에 맞추더니⁠, 제 손등을 오래 내려다보았다⁠.

“⁠성준아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 쉬고 바람이 새는⁠, 여든한 살 제 목소리였다⁠.

성준이 아버지를 보았다⁠. 손을 뻗은 채였다⁠.

“⁠보리별 맛있더라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 “⁠집사람 거랑 똑같았다⁠. 불만 조금 셌어⁠.⁠”

성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⁠. 육 과장에게 방금 털어놓은 말을⁠, 아버지가 아버지 목소리로 받고 있었다⁠. 성준은 아버지와 소파의 과장을 번갈아 보았다⁠. 안경을 벗었다⁠. 다시 쓰지 않았다⁠.

문이 벌컥 열렸다⁠. 보안요원 둘이 들어왔다⁠. 뒤에 길영춘 본부장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⁠.

“⁠대표님⁠, 해고된 직원이 화물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고 해서요⁠!⁠” 본부장이 소파를 가리켰다⁠. “⁠저 사람입니다⁠.⁠”

보안요원이 현배의 양팔을 잡았다⁠. 현배는 일어났다⁠. 허리가 찌릿했다⁠. 회장이 창 앞에서 한 걸음 내딛다가 멈췄다⁠.

“⁠놔줘라⁠, 하고 싶은데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 “⁠나는 이제 대표가 아니라서 못 잡는다⁠.⁠”

“⁠내일 주총엔 오세요⁠?⁠” 현배가 끌려가며 물었다⁠.

“⁠간다⁠. 내 몸으로⁠.⁠” 회장이 성준을 보았다⁠. “⁠성준아⁠, 내일 내가 직접 간다⁠. 위임장은 없다⁠. 내 표는 내가 던진다⁠.⁠”

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안경을 손에 쥔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⁠.

보안요원들이 현배를 엘리베이터에 태웠다⁠. 문이 닫히기 직전⁠, 현배는 회장실 문틈으로 회장이 책상 위 노란 봉지를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⁠. 날짜가 지나가는 봉지였다⁠.

일 층 로비를 지나 동학빌딩 정문 밖으로 밀려 나오자 을지로 골목에 저녁 불이 하나둘 켜졌다⁠. 현배는 보도블록 위에 서서 7층을 올려다보았다⁠. 맨 위층 큰 창에만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⁠. 현배는 휴대전화를 꺼냈다⁠. 제 휴대전화였다⁠. 화면이 현배의 얼굴을 알아보고 저절로 열렸다⁠.

“⁠순정아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 “⁠나야⁠. 허리 아파⁠.⁠”

수화기 너머에서 한참 아무 소리가 없다가⁠, 순정이 웃는 소리인지 우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⁠. 현배는 정문 앞 화단 턱에 걸터앉아 허리를 짚었다⁠.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길게 났다⁠. 마흔두 살 몸이 저녁밥을 조르고 있었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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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느린독자2026.11.06· 9화

    성준 부회장이 숫자로 끝까지 버티다가 보리별을 다시 만들게 한 사람이 자기라고 털어놓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. 해 지면서 몸이 돌아가고 현배가 보안요원한테 끌려 나가는 건 너무하잖아요?

    • 남이랑작가2026.11.06

      성준의 숫자는 처음부터 틀린 적이 없어요. 다만 그 숫자를 누가 들고 있었는지가 달랐죠. 현배가 건물 밖에서 무엇을 보는지는 마지막 화에 있어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