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05자)

징계위원회

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남이랑

구동학은 11월 2일 밤 열한 시⁠, 식탁 위 볼펜을 집어 들었다⁠. 순정은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개수대 앞에서 그릇을 닦고 있었다⁠. 이미 닦은 그릇을 또 닦았다⁠.

동학은 재신청서 맨 아래 서명 자리에 볼펜 끝을 대 보았다⁠. 과장의 손이 저절로 첫 획을 그으려 했다⁠. 동학은 손에 힘을 주어 볼펜을 띄웠다⁠.

서명하면 순정은 일억 사천을 받는다⁠. 전셋집에 칠천을 넣고 남은 돈으로 빚을 갚는다⁠. 현배는 회사를 떠나고⁠, 회장 곁에 붙어 다니던 과장이 사라진다⁠. 성준은 내용증명 한 장쯤은 주총장에서 아버지가 직접 뒤집으리라 믿을 것이다⁠. 목요일 해 질 녘에 동학이 제 몸으로 돌아가면⁠, 금요일 아침 주총장에서 찬성을 던지면 된다⁠. 성준의 집도 지키고⁠, 회사도 지키고⁠, 순정의 전셋집도 지킨다⁠. 동학이 처음 정한 길이었다⁠.

“⁠내일 징계위원회 들어가기 전에 쓰겠다⁠.⁠” 동학이 말했다⁠.

개수대의 물소리가 멈췄다⁠. 순정이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⁠.

초인종이 울렸다⁠. 문을 여니 계단참에 백발 노인이 서 있었다⁠. 동학의 몸이었다⁠. 아래층 현관 앞에 검은 승용차가 비상등을 켜고 있었다⁠.

“⁠순정이 좀 볼게요⁠, 회장님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 숨이 찼다⁠. 3층까지 올라오느라 계단참마다 쉰 숨이었다⁠.

순정이 앞치마를 벗고 나갔다⁠. 두 사람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⁠. 동학은 현관문을 다 닫지 않았다⁠. 손가락 하나만큼 열린 틈으로 말소리가 들어왔다⁠.

“⁠서명해도 돼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 “⁠내 몸이 서명하든 말든⁠, 당신이 정해⁠. 당신이 정하면 나 안 싸울게⁠.⁠”

“⁠이제 와서⁠?⁠”

“⁠이제 와서⁠. 사전 안내 받고 보름 숨긴 거⁠, 위로금 날린 거⁠, 다 내가 했어⁠. 당신한테 한 번도 안 물어보고⁠.⁠” 계단 센서등이 꺼졌다⁠. 현배가 손뼉을 쳐서 다시 켰다⁠. 회장의 손뼉이라 소리가 작아서 두 번 쳤다⁠. “⁠다솔이 열두 살 되면 내가 잘려 있을지도 몰라⁠. 그건 맞아⁠. 그래도 그때까지 당신이 그 사람 미워하면서 살게는 안 할게⁠.⁠”

“⁠누구를⁠?⁠”

“⁠나를⁠.⁠”

순정이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⁠. 센서등이 또 꺼졌다⁠. 이번에는 아무도 손뼉을 치지 않았다⁠. 어둠 속에서 순정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 났다⁠.

동학은 문틈에서 물러나 식탁 앞에 앉았다⁠. 볼펜이 재신청서 위에 가로로 놓여 있었다⁠. 1998년⁠, 아내 차옥분이 공장에서 돌아와 사흘 동안 밥을 안 먹을 때 동학은 아내 옆에 앉아 본 적이 없었다⁠. 계단에 나란히 앉아 본 적도 없었다⁠.

*

구동학은 11월 3일 수요일 오후 두 시⁠, 대회의실 긴 탁자 끝에 혼자 앉아 있었다⁠. 맞은편으로 징계위원 다섯이 줄지어 앉았다⁠. 가운데에 성준이 앉았고⁠, 성준 양옆으로 길영춘 본부장과 인사팀장⁠, 노조 대표와 처음 보는 법무팀 변호사가 앉았다⁠. 탁자 위에 「⁠징계 사유서 · 영업2팀 과장 육현배⁠」가 놓였다⁠.

“⁠사유 첫째⁠, 동네 슈퍼 철수 지시 불이행⁠. 사유 둘째⁠, 창업주에게 부당한 영향을 끼쳐 인사에 개입함⁠.⁠” 인사팀장이 읽었다⁠. “⁠피징계자는 규정에 따라 가족 한 사람을 동석시킬 수 있습니다⁠.⁠”

문이 열렸다⁠. 순정이 반찬가게 앞치마를 벗어 손에 든 채 들어왔다⁠. 눈가가 부어 있었다⁠. 순정은 동학의 옆자리에 앉지 않고 한 칸 띄어 앉았다⁠.

순정 뒤로 문이 한 번 더 열렸다⁠. 백발 노인이 무릎을 짚으며 들어와 벽 옆 의자에 앉았다⁠. 허기성이 뒤따라 들어와 노인 곁을 지켰다⁠.

“⁠회장님⁠.⁠” 성준이 일어났다⁠. “⁠징계위원회는 위원만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주주야⁠. 구경만 해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

성준이 잠깐 노인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⁠. 길영춘 본부장이 서류 묶음을 들었다⁠.

“⁠육 과장은 철수 통보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철수 대상 거래처에서 단종 과자 주문을 받아 왔습니다⁠. 마흔 곳이 넘습니다⁠. 공장에 추가 생산까지 요청했고요⁠.⁠” 본부장이 위원들을 둘러보았다⁠. “⁠본부장으로서 참담합니다⁠.⁠”

“⁠마흔 곳이면 공장이 반나절 돕니다⁠.⁠” 성준이 덧붙였다⁠. 목소리에 날이 없었다⁠. “⁠육 과장님⁠, 주문을 받아 오신 건 영업하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일이에요⁠. 그런데 회사는 반나절로 삼 년을 못 버팁니다⁠. 제가 매일 들여다보는 숫자가 그래요⁠.⁠”

동학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성준의 숫자는 맞았다⁠. 동학이 오십육 년 동안 본 숫자도 같았다⁠.

성준이 재신청서를 동학 앞에 밀었다⁠. 어젯밤 식탁 위에 있던 것과 같은 종이였다⁠. 볼펜 한 자루가 옆에 놓였다⁠.

“⁠지금 서명하시면 위원회는 여기서 끝납니다⁠. 징계는 없고⁠, 위로금은 원안대로요⁠.⁠”

동학은 볼펜을 집었다⁠. 과장의 손가락이 볼펜을 익숙하게 쥐었다⁠. 볼펜 끝이 서명 자리로 내려갔다⁠.

볼펜을 쥔 손 위로 손 하나가 얹혔다⁠. 순정의 손이었다⁠. 손등에 반찬가게 고춧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⁠.

“⁠서명 안 해요⁠.⁠”

위원들이 순정을 보았다⁠. 순정은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로 말했다⁠. 목소리가 작았는데 대회의실 끝까지 갔다⁠.

“⁠제 아버지가 면목동에서 구멍가게를 하셨어요⁠. 고씨상회요⁠. 1998년에 보리별이 끊길 때 동학 영업 아저씨가 와서 미안하다고 소주를 사 주셨대요⁠. 가게 닫는 날에도 와서 웨하스를 사 가셨고요⁠.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얘기를 했어요⁠. 동학 사람들은 의리가 있다고⁠.⁠” 순정이 성준을 똑바로 보았다⁠. “⁠이 돈은 제 남편이 입 닫고 회장님 곁에서 떠나라고 주시는 돈이잖아요⁠. 그 돈 받으면 저 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할 말이 없어요⁠.⁠”

“⁠사모님⁠, 전세 만기가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제 집이에요⁠. 제가 제일 잘 알아요⁠.⁠” 순정이 동학의 손 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⁠. “⁠부회장님도 집 거셨다면서요⁠. 그럼 아시겠네요⁠. 집 걸고 하는 일은 남이 돈 준다고 안 그만둬요⁠.⁠”

성준이 입을 다물었다⁠. 벽 옆 의자에서 현배가 고개를 숙였다⁠. 허기성이 현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회장님 어깨라는 것을 떠올리고 얼른 거두었다⁠.

동학은 볼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⁠.

“⁠서명 안 하겠소⁠.⁠”

인사팀장이 헛기침을 했다⁠. 위원들이 표결지를 받아 들었다⁠. 노조 대표만 표결지를 한참 들고 있다가 맨 마지막에 냈다⁠. 인사팀장이 표결지를 세고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찬성 넷⁠, 반대 하나⁠. 징계 해고로 의결합니다⁠.⁠”

*

육현배는 오후 세 시⁠, 대회의실 앞 복도에서 성준의 팔을 붙잡았다⁠. 회장의 손가락은 가늘어서 성준의 양복 소매를 반밖에 쥐지 못했다⁠. 세 시가 넘어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현배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러 가며 버텼다⁠.

“⁠해고 거둬⁠.⁠”

“⁠못 합니다⁠.⁠” 성준이 소매를 빼지 않았다⁠. 대신 걸음을 멈추고 회장의 손을 내려다보았다⁠. “⁠회장님은 이제 대표가 아니세요⁠. 직인은 제가 갖고 있고요⁠. 회장님 말씀 한마디로 사람 하나를 빼고 넣는 일은⁠, 이제 이 회사에서 없습니다⁠. 그게 회장님이 제게 넘기신 회사예요⁠.⁠”

“⁠저 사람이 잘린 건 나 때문이야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 그래서 잘랐습니다⁠.⁠” 성준이 손을 들어 회장의 손을 소매에서 천천히 떼어 냈다⁠. 손길이 조심스러웠다⁠. 여든한 살 손가락을 하나씩 펴는 손이었다⁠. “⁠사모님 말씀은 잘 들었어요⁠. 그 영업 아저씨 얘기는 어머니한테도 들었습니다⁠. 의리요⁠. 저도 그 말 좋아해요⁠. 그런데 의리로는 삼 년 뒤에 월급을 못 드려요⁠.⁠”

성준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⁠. 현배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⁠. 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화면에 「⁠하버라인 캐피털⁠」이 떴다⁠.

“⁠회장님⁠, 팩트로 가시죠⁠.⁠” 탄산수 병 뚜껑 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났다⁠. “⁠내용증명 잘 받았습니다⁠. 주총에서 반대하시면 저희는 일본 공장을 삽니다⁠. 계약서는 이미 써 놨어요⁠. 그 공장이 기계를 바꾸면 동학 편의점 납품 자리를 가져갈 겁니다⁠. 내년 봄쯤이요⁠. 저희가 동학을 안 사면⁠, 동학이랑 싸우는 회사를 사는 겁니다⁠. 그것도 비즈니스죠⁠.⁠”

전화가 끊겼다⁠. 현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⁠. 화면 속 시계가 15시 12분이었다⁠. 성준이 매일 들여다본다는 숫자가 처음으로 현배의 눈에도 보였다⁠. 맞는 숫자였다⁠. 맞는 숫자가 사람을 자르고⁠, 맞는 숫자가 사람을 살렸다⁠. 현배는 자르는 숫자와 살리는 숫자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⁠. 돋보기를 써도 똑같은 숫자였다⁠. 복도 창밖으로 청계천 물이 늦은 볕을 받아 번쩍였다⁠.

허기성이 복도 끝에서 뛰어왔다⁠. “⁠회장님⁠, 육 과장님이⁠, 아니 회장님이⁠…⁠… 인사팀 가셨어요⁠. 통지서 받으러요⁠.⁠”

*

구동학은 오후 네 시⁠, 6층 인사팀 창구 앞에서 봉투 하나를 받았다⁠. 창구 직원은 육 과장의 얼굴을 보지 않고 봉투를 내밀었다⁠. 「⁠징계 해고 통지서 · 영업2팀 과장 육현배 · 2027년 11월 3일부⁠」⁠.

동학은 봉투를 열어 통지서를 꺼냈다⁠. 아래쪽에 회사 직인이 찍혀 있었다⁠. 열엿새 전에 회장실 금고에서 성준의 손으로 옮겨 간 직인이었다⁠. 동학이 1971년 을지로 도장집에서 처음 새긴 직인이었다⁠.

오십육 년 동안 동학은 해고 통지서를 수백 장 보았다⁠. 결재 서류로⁠, 명단으로⁠, 숫자로 보았다⁠. 손에 쥐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⁠. 종이 한 장이 생각보다 무거웠다⁠. 통지서를 쥔 과장의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⁠.

동학은 통지서를 두 번 접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⁠. 노가리 골목에서 현배가 통보서를 접어 넣었던 주머니였다⁠. 숨을 들이쉴 때마다 종이 모서리가 가슴을 찔렀다⁠.

엘리베이터 앞에서 현배가 기다리고 있었다⁠. 허기성이 한 걸음 뒤에 있었다⁠. 백발 노인의 얼굴이 동학을 올려다보았다⁠. 눈이 붉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, 죄송해요⁠. 제가 위임 거두지 않았으면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네 탓 아니다⁠. 내가 너 동그라미 쳤잖아⁠.⁠” 동학이 가슴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⁠. “⁠잘리는 날이 이런 거구나⁠. 오십육 년 동안 남한테만 시켰다⁠.⁠”

*

구동학은 밤 여덟 시⁠, 빌라 식탁에서 과장의 휴대전화가 멈추지 않고 떠는 것을 보고 있었다⁠. 낮에 방옥란 사장이 만든 단톡방이었다⁠. 「⁠면목 상봉 중화 슈퍼 사장님들⁠」⁠. 사장 마흔 명으로 시작한 방이 저녁 사이에 백 명을 넘겼다⁠.

「⁠만세슈퍼⁠: 육 과장 잘렸단다⁠. 우리 별과자 넣다가⁠」

「⁠대박슈퍼⁠: 헐 형님 잘렸어요⁠? 저 보리별 다섯 상자 추가요⁠」

「⁠중화할머니슈퍼⁠: 딱딱해도 나도 받을게 손주들 주게⁠」

「⁠만세슈퍼⁠: 동학제과에 다 주문 넣어⁠. 육 과장 이름 대고⁠」

동학은 메모장을 열어 단톡방 주문을 한 줄씩 옮겨 적었다⁠. 열한 줄이 스물일곱 줄이 되었고 마흔 줄을 넘었다⁠. 밤 아홉 시가 넘자 백스무 줄이 되었다⁠. 맨 위 줄은 여전히 「⁠만세슈퍼 · 보리별 · 1⁠」이었다⁠.

순정이 휴대전화를 들고 와 맞은편에 앉았다⁠. 집주인과의 대화방이 열려 있었다⁠. 순정이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 보였다⁠. 「⁠12월 만기 때 나가겠습니다⁠. 그동안 감사했습니다⁠」⁠.

“⁠보냈어⁠?⁠”

“⁠보냈어요⁠.⁠” 순정이 휴대전화를 엎었다⁠. “⁠회장님⁠, 내일 해 질 녘이라면서요⁠. 돌아가는 거⁠.⁠”

동학은 고개를 끄덕였다⁠. 가슴 주머니 속 통지서가 바스락거렸다⁠. 동학은 과장의 휴대전화로 번호 하나를 찾아 문자를 썼다⁠. 오십육 년 동안 한 번도 직접 보내 본 적 없는 번호였다⁠.

「⁠내일 해 질 녘 다섯 시 반⁠, 회장실로 오시오⁠. 회장님이 보자고 하십니다⁠. 육현배⁠」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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