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374자)

보리별 첫 솥

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남이랑

구동학은 10월 15일 금요일 아침 일곱 시 십 분⁠, 남의 집 이불 속에서 등짝을 맞고 깼다⁠.

“⁠일어나⁠! 오늘 서명하는 날이잖아⁠!⁠”

머리를 집게 핀으로 틀어 올린 여자가 반찬가게 앞치마를 두른 채 이불을 걷었다⁠. 동학은 눈을 끔벅였다⁠. 천장에 물 자국이 번진 좁은 방이었고⁠, 벽에는 아이가 그린 크레파스 그림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⁠. 머리가 깨질 듯 울렸다⁠. 소주 일곱 잔이 아직 이마 안쪽에서 출렁거렸다⁠.

“⁠새댁은 누구요⁠?⁠”

“⁠새댁⁠?⁠” 여자가 손바닥을 한 번 더 들었다⁠. “⁠결혼 십일 년 차한테 새댁⁠? 술이 덜 깼구나⁠.⁠”

등짝이 또 울렸다⁠. 동학은 이불을 밀치고 일어났다⁠. 한 번에 일어났다⁠. 무릎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⁠. 동학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⁠. 또 앉았다가 일어났다⁠. 여든한 살 무릎으로는 십 년 동안 못 해 본 동작이었다⁠.

“⁠엄마⁠, 아빠가 스쿼트 해⁠.⁠” 문가에서 아홉 살쯤 된 여자아이가 칫솔을 문 채 구경했다⁠.

화장실 거울 속에 처진 눈의 사내가 있었다⁠. 앞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짧은 머리⁠, 통통한 볼⁠, 어젯밤 노가리 골목에서 의자를 넘어뜨리며 대들던 과장의 얼굴이었다⁠. 동학은 수염 자국이 거뭇한 턱을 쓸어 보다가 짧게 웃었다⁠. 놀랄 일도 아니었다⁠. 겪어 본 일이었다⁠.

“⁠또 이거구먼⁠.⁠”

식탁에는 계란말이와 김치찌개가 올라와 있었다⁠. 동학은 밥을 한 그릇 비우고⁠, 두 그릇째 퍼 왔고⁠, 세 그릇째에서 여자가 수저를 내려놓았다⁠.

“⁠당신 아침 안 먹잖아⁠. 속 쓰리다고⁠.⁠”

“⁠새댁 손맛이 좋아서⁠.⁠”

“⁠새댁 소리 한 번만 더 해 봐⁠.⁠” 여자가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밀었다⁠. 「⁠집주인⁠: 12월 만기 때 보증금 칠천 올려 주셔야 합니다⁠. 답 주세요⁠」⁠. “⁠위로금 들어오면 칠천 넣고 남은 걸로 대출 갚아⁠. 여섯 시까지 서명 안 하고 오면 나 다솔이 데리고 친정 간다⁠. 진짜야⁠.⁠”

여자의 앞치마 가슴께에 「⁠엄마손반찬 · 고순정⁠」 이름표가 박혀 있었다⁠. 동학은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굴렸다⁠. 고순정⁠, 다솔⁠. 과장의 휴대전화는 동학이 화면을 들여다보자마자 저절로 열렸다⁠.

“⁠얼굴이 열쇠구먼⁠.⁠”

“⁠아빠 할아버지 같아⁠.⁠” 다솔이 가방을 메며 말했다⁠.

동학은 기억하는 번호 하나를 눌렀다⁠. 쉰 데다 바람이 새는⁠, 제 목소리가 받았다⁠. 할 말만 하고 끊은 뒤 동학은 현관문을 밀고 나가 빌라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⁠. 지하철역 계단은 두 칸씩 뛰어 올랐다⁠. 숨이 차는데 무릎은 멀쩡했다⁠. 개찰구 앞에서 동학은 누가 보든 말든 주먹을 한 번 쥐었다⁠.

7호선 객차 문 위 화면에 아침 뉴스 자막이 흘렀다⁠. 「⁠제과업계 구조조정 바람 · 외국 사모펀드 중견 제과사 잇단 인수⁠」⁠. 옆자리 청년이 자막을 보더니 이어폰을 꽂으며 중얼거렸다⁠. “⁠과자 회사도 망하네⁠. 요즘 누가 과자를 사 먹어⁠.⁠” 동학은 청년의 가방 옆 주머니에 꽂힌 편의점 젤리 봉지를 보았다⁠. 남의 회사 젤리였다⁠. 동학은 말없이 청년의 가방을 오래 노려보았고⁠, 청년은 두 정거장 뒤에 자리를 옮겼다⁠.

*

육현배는 아홉 시 이사회실 상석에 앉아 틀니로 혀를 깨물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⁠. 긴 탁자에 이사 다섯이 앉아 있었다⁠. 성준과 전무 하나⁠, 처음 보는 사외이사 둘⁠, 회계를 맡은 상무 하나였다⁠.

“⁠아이고⁠, 이사님들⁠.⁠” 현배가 입을 열었다⁠. 십구 년 동안 슈퍼 문을 열 때마다 하던 첫마디였다⁠. “⁠아침부터 이렇게 다 모여 주시고⁠, 얼굴들이 다 좋으십니다⁠.⁠”

사외이사 하나가 찻잔을 든 채 굳었다⁠. 성준이 서류를 넘겼다⁠.

“⁠회장님⁠, 의향서는 서명 안 하신 걸로 알겠습니다⁠. 그럼 절차대로 가겠습니다⁠. 공장을 넘기려면 어차피 주주총회 특별결의가 필요합니다⁠. 임시 주주총회를 11월 5일 금요일에 열자는 안건을 올립니다⁠.⁠”

“⁠반대⁠.⁠”

“⁠이사회는 과반이면 됩니다⁠.⁠” 성준이 손을 들었다⁠. 전무와 상무가 따라 들었고⁠, 사외이사 둘이 서로 눈치를 보다 들었다⁠. “⁠통과됐습니다⁠. 회장님 지분이 삼분의 일이 넘으니까⁠, 주총에서 회장님 뜻을 말씀하시면 됩니다⁠. 그때까지 숫자를 한 번만 더 보세요⁠.⁠”

성준이 두툼한 자료를 현배 앞에 밀었다⁠. 표지에 「⁠안성 공장 3개년 현금 흐름⁠」이 박혀 있었다⁠. 현배는 첫 장을 넘겼다가 덮었다⁠. 숫자가 개미 떼처럼 기어 다녔다⁠. 돋보기가 없으면 회장의 눈은 글자를 읽지 못했다⁠.

*

열 시 반⁠, 비서 허기성이 회장실 문을 반쯤 열고 말끝을 흐렸다⁠.

“⁠회장님⁠, 그건⁠…⁠… 영업부 육 과장이 1층 보안에서 막혔는데요⁠. 회장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⁠, 안 들여보내 주면 회장님 틀니가 어디 있는지 다 말해 버리겠다고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들여보내⁠.⁠”

문이 열리고 현배의 몸이 들어왔다⁠. 어제 입은 와이셔츠 그대로였고 넥타이는 아예 매지 않았다⁠. 현배의 몸은 회장실 한가운데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에 등을 묻었다⁠. 다리를 꼬았다⁠. 현배는 제 다리가 저렇게 꼬이는 줄 처음 알았다⁠.

“⁠허 비서는 나가 있어⁠.⁠” 현배의 몸이 회장 목소리 같은 말투로 말했다⁠. 비서가 현배를 보았다⁠. 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⁠. 비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뒷걸음으로 나갔다⁠.

“⁠회장님이세요⁠?⁠”

“⁠너는 육 과장이고⁠.⁠” 회장이 탁자 위 보리별 상자를 끌어당겼다⁠. “⁠1974년 봄이다⁠. 보리별 첫 솥을 쪄서 집사람이랑 같이 깨물었어⁠. 그날 화덕에서 연탄가스가 샜다⁠. 둘 다 쓰러졌다가 깼더니 내가 집사람 몸에 들어가 있더라⁠.⁠”

“⁠그래서 어떻게 돌아오셨는데요⁠?⁠”

“⁠봉지에 날짜를 찍었거든⁠. 처음 찍은 과자 날짜였다⁠. 그날 해 질 녘에 돌아왔어⁠.⁠” 회장이 봉지 하나를 집어 뒤집었다⁠. 노란 종이 아래쪽에 파란 도장 글씨가 찍혀 있었다⁠. 「⁠2027⁠.11⁠.04까지⁠」⁠.

현배가 봉지를 받아 들었다⁠. 볼 틈도 없이 문이 열렸다⁠. 허기성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, 그건⁠…⁠… 부회장님이 주총 날짜 공지 올리라고 하셔서요⁠. 11월 5일 금요일 열 시로 올리겠습니다⁠.⁠”

문이 닫혔다⁠. 두 사람이 봉지를 사이에 두고 한참 서로를 보았다⁠.

“⁠하루 전이네요⁠.⁠” 현배가 말했다⁠.

“⁠하루 전에 돌아가는 거지⁠.⁠” 회장이 다리를 풀었다⁠. “⁠잘됐다⁠. 주총엔 내가 내 몸으로 간다⁠. 너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⁠. 도장 찍지 말고⁠, 회의 들어가지 말고⁠, 그냥 소파에 앉아 있어⁠.⁠”

“⁠회장님은 그럼 제 몸으로 뭘 하시게요⁠?⁠”

“⁠네 집 가서 밥 먹고⁠, 네 회사 나와서 앉아 있어야지⁠. 새댁 손맛이 좋더라⁠.⁠”

“⁠오늘 여섯 시까지 서명 안 하면 대기발령이에요⁠. 대기발령 받으면 위로금이 반으로 깎여요⁠.⁠” 현배가 봉지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⁠. 검버섯이 앉은 손이 조금 떨렸다⁠. “⁠회장님 몸으로 제 희망퇴직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너 하나 빼 주면 공평하냐⁠?⁠” 회장의 목소리가 느려졌다⁠. 느려질수록 무서운 목소리였다⁠. “⁠이백삼십구 명은⁠?⁠”

“⁠그 사람들은 회장님이 자르셨잖아요⁠.⁠”

회장이 대답하지 않았다⁠. 현배는 책상 전화기를 들었다⁠. 인사팀 번호가 단축키 3번에 저장돼 있었다⁠.

“⁠인사팀장⁠? 나 회장이야⁠.⁠” 현배는 혀에 힘을 주었다⁠. “⁠영업2팀 육현배 과장⁠, 희망퇴직 없던 걸로 해⁠. 대기발령도 없어⁠.⁠”

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하다가 더듬었다⁠. “⁠회⁠, 회장님⁠, 개인 한 명을 직접 빼시는 건 처음이라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처음이니까 잘 기억해 둬⁠.⁠”

전화를 내려놓자 회장이 소파에서 일어났다⁠. 현배의 몸이 현배를 내려다보았다⁠. 처진 눈이 잔뜩 치켜떠져 있었다⁠.

“⁠네가 지금 뭘 했는지 모르지⁠.⁠”

“⁠아시잖아요⁠. 회장님도 제 몸으로 제 마누라한테 새댁이라고 하셨잖아요⁠. 아까 그러셨잖아요⁠, 새댁 손맛이 좋더라고⁠.⁠”

“⁠그거랑 이거랑 같으냐⁠?⁠”

“⁠제 입장에선 둘 다 큰일이에요⁠.⁠”

*

구동학은 회장실을 나오다 복도에서 아들과 마주쳤다⁠. 성준이 서류철을 든 채 걸음을 멈췄다⁠. 동학의 눈높이가 아들의 어깨께였다⁠. 여든한 살 몸으로 늘 올려다보던 얼굴을 마흔두 살 과장의 몸으로도 올려다봐야 했다⁠.

“⁠육 과장님⁠. 회장님 방에서 나오시네요⁠.⁠”

“⁠볼일이 좀 있어서⁠.⁠”

“⁠희망퇴직 빼 달라는 볼일이요⁠?⁠” 성준은 벌써 알고 있었다⁠. 인사팀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부회장실에 알렸다⁠. “⁠과장님⁠, 저희 회장님은 사람 얼굴을 보고 정하세요⁠. 우는 얼굴⁠, 굽신거리는 얼굴⁠. 그래서 회사가 여기까지 왔고⁠, 그래서 여기서 더 못 갑니다⁠. 저는 얼굴을 안 보려고 숫자를 봐요⁠.⁠”

“⁠아버지 얼굴은 보나⁠?⁠”

성준의 눈썹이 올라갔다⁠. “⁠네⁠?⁠”

“⁠아니⁠, 회장님 얼굴은 보시느냐고요⁠.⁠”

“⁠보고 드릴 때만 봅니다⁠. 오 년째요⁠.⁠” 성준이 안경을 벗어 넥타이 끝으로 닦았다⁠. “⁠과장님이 회장님을 어떻게 구워삶으셨는지 모르겠지만⁠, 다음엔 저한테 오세요⁠. 회장님 마음은 하루 이틀이면 바뀌는데 제 마음은 안 바뀌거든요⁠.⁠”

성준이 회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⁠. 동학은 복도 끝 창유리에 비친 과장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⁠. 아들이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을 남의 얼굴로 듣기는 처음이었다⁠.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동학은 과장의 넥타이 없는 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⁠. 목이 휑했다⁠.

*

구동학은 오후 두 시⁠, 6층 영업부 길영춘 본부장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⁠. 본부장은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동학을 위아래로 훑었다⁠.

“⁠육 과장⁠, 회장님이 직접 빼 줬다며⁠. 무슨 줄을 잡았어⁠? 회장님 손주 과외라도 했어⁠?⁠”

“⁠줄은 무슨⁠.⁠”

“⁠말이 짧다⁠?⁠” 본부장이 의자를 바로 했다⁠. “⁠좋아⁠. 남았으면 일을 해야지⁠. 동네 슈퍼 철수는 그대로 가⁠. 오늘부터 면목동 거래처 돌면서 다음 달부터 우리 과자 안 들어간다고 알리고⁠, 남은 물건 반품 받아 와⁠. 팔백 곳⁠. 연말까지⁠.⁠”

“⁠내가⁠?⁠”

“⁠그럼 내가 해⁠?⁠” 본부장이 명함 한 통을 책상 위에 던졌다⁠. 「⁠동학제과 영업2팀 과장 육현배⁠」⁠. “⁠회장님 빽으로 남은 사람이 제일 먼저 궂은일 하는 거야⁠. 그게 회사야⁠.⁠”

동학은 명함 통을 집었다⁠. 오십육 년 동안 남에게 명함을 받아만 본 손이었다⁠. 회사를 세우던 해에도 명함은 없었다⁠. 연탄 화덕 앞에서 강정을 튀기며 이름은 입으로 댔다⁠.

“⁠본부장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⁠.⁠” 동학은 이를 한 번 물었다⁠. “⁠내가⁠, 아니 제가 돌면 슈퍼에서 우리 과자 팔리는 거 볼 수 있습니까⁠?⁠”

본부장이 웃었다⁠. “⁠안 팔리는 걸 보겠지⁠.⁠”

*

구동학은 밤 아홉 시⁠, 면목동 빌라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⁠. 다솔은 일찍 잠들었고⁠, 순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들어와 식탁 맞은편 의자를 빼고도 앉지 않았다⁠. 화면에 인사팀 문자가 떠 있었다⁠. 현배의 휴대전화로 온 문자를 순정이 먼저 본 것이었다⁠.

「⁠육현배 과장님 희망퇴직 철회 처리 완료되었습니다⁠. 대기발령 해당 없음 · 정상 근무⁠」

“⁠이게 뭐야⁠.⁠”

“⁠회사에 남게 됐어⁠.⁠”

“⁠누가 남겨 달래⁠?⁠” 순정의 목소리가 낮았다⁠. 낮아서 더 컸다⁠. “⁠위로금은⁠? 일억 사천은⁠?⁠”

동학은 대답할 말을 골랐다⁠. 회의실에서 반대 발언을 하던 상무들의 얼굴보다 순정의 얼굴이 무서웠다⁠.

순정이 서랍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식탁에 탁 내려놓았다⁠. 펼쳐진 마지막 줄에 잔액이 찍혀 있었다⁠. 「⁠3⁠,120⁠,000⁠」⁠.

“⁠이 통장에 칠천 넣어 와⁠. 12월까지⁠.⁠” 순정이 통장을 동학 앞으로 밀었다⁠. “⁠못 넣으면 당신이 나가⁠.⁠”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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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귤까는중2026.11.06· 2화

    여든한 살 회장님이 과장 몸으로 깨자마자 아내한테 등짝 맞고 출근하는 데서 빵 터졌어요. 그런데 희망퇴직을 거두니까 위로금이 사라졌다고 통장을 내미는 순정 씨, 이거 누구 편 들어야 하죠?

    • 남이랑작가2026.11.06

      순정 씨는 언제나 통장 편이에요. 보리별 첫 솥 이야기는 회장님이 순정 씨 앞에서 처음으로 말이 막히는 대목이라 아껴 두었어요.

보리별 첫 솥 · 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