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499자)

부장 회의

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남이랑

육현배는 10월 18일 월요일 아침 여덟 시⁠, 대회의실 상석에 앉아 부장 열한 명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⁠. 회장이 월요 부장 회의에 들어온 것은 오 년 만이라고 비서 허기성이 귀띔했다⁠. 부장들은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였고⁠, 숙인 채로 자리에 앉았고⁠, 앉아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⁠.

주말 이틀을 현배는 평창동 회장 집에서 보냈다⁠.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넓은 집이었는데⁠, 냉장고에는 두부 한 모와 요구르트 열 개뿐이었다⁠. 회장의 몸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고 오후 세 시면 소파에서 고개를 떨궜다⁠. 토요일 오후에 현배는 한 시간을 졸다 깨서 마당 감을 하나 땄고⁠, 틀니로 감을 씹다가 틀니가 감에 박혀 같이 뽑혀 나왔다⁠. 일요일에는 감을 안 땄다⁠.

“⁠시작하겠습니다⁠.⁠” 사회를 보는 기획부장이 말했다⁠. “⁠먼저 영업본부 보고입니다⁠.⁠”

길영춘 본부장이 일어나 화면을 켰다⁠. 「⁠동네 슈퍼 채널 철수 진행 현황⁠」⁠. 막대그래프 하나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⁠.

“⁠동네 슈퍼 철수는 연말까지 마무리합니다⁠. 거래처 팔백 곳에 순차적으로 통보하고 반품을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길 본부장⁠.⁠” 현배가 말을 끊었다⁠.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회의실이 한꺼번에 조용해졌다⁠. “⁠지난 석 달 동안 본부장이 직접 가 본 슈퍼가 몇 곳이야⁠?⁠”

본부장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⁠. “⁠제가 직접은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몇 곳⁠?⁠”

“⁠…⁠…없습니다⁠.⁠”

“⁠영⁠.⁠” 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⁠. 십구 년 동안 하고 싶던 말이 목구멍까지 줄을 서 있었다⁠. “⁠오늘 오후에 면목동 가⁠. 영업2팀 육 과장 따라다니면서 사장님들한테 철수 통보 직접 해⁠.⁠”

“⁠제가요⁠?⁠”

“⁠본부장이 안 가 본 데를 철수하는 게 말이 돼⁠?⁠”

생산부장이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⁠.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몰랐는데⁠, 고개를 들자 눈가가 젖어 있었다⁠. 안성 공장에서 삼십 년을 일한 사람이었다⁠.

현배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짚었다⁠. 무릎이 시큰거려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앉은 채로 말했다⁠.

“⁠안성 공장⁠, 안 판다⁠.⁠”

부장들의 고개가 한꺼번에 올라왔다⁠. 열한 개의 얼굴이 같은 표정이었다⁠. 맨 끝자리에서 성준이 펜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회장님⁠. 그럼 대안을 말씀해 주세요⁠.⁠” 성준의 목소리는 지난주 설명회와 똑같았다⁠. “⁠삼 년 동안 공장을 돌릴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⁠? 은행은 이미 한도를 다 줬고⁠, 하버라인이 빠지면 일본 공장이 하버라인 돈으로 기계를 바꿔서 우리 납품가 밑으로 들어옵니다⁠.⁠”

“⁠슈퍼에서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동네 슈퍼 팔백 곳 매출을 다 모아도 공장 이틀 돌리면 끝납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편의점에서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편의점은 1+1 행사비를 저희가 냅니다⁠. 팔수록 손해 보는 물건이 넷 중 하나예요⁠.⁠” 성준이 자료 한 장을 넘겼다⁠. “⁠회장님⁠, 제가 숫자로 잘못 말씀드린 데가 있으면 짚어 주세요⁠. 한 줄이라도요⁠.⁠”

현배는 성준이 내민 자료를 보았다⁠. 돋보기가 없어서 숫자가 번졌다⁠. 돋보기를 쓴다고 해도 읽을 수 없는 숫자였다⁠. 현배가 아는 숫자는 슈퍼 사장님 생일⁠, 가게 셔터 내리는 시각⁠, 박스당 몇 봉지 들어가는지였다⁠.

“⁠숫자는 모르겠고⁠.⁠” 현배가 목소리를 높였다⁠. “⁠사람은 안 판다⁠!⁠”

‘⁠판다⁠’에서 힘이 너무 들어갔다⁠. 위쪽 틀니가 혀를 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⁠. 틀니는 회의 탁자 위를 미끄러져 기획부장의 커피잔 앞에서 멈췄다⁠. 회의실 공기가 그대로 얼었다⁠. 기획부장은 틀니를 보았고⁠, 틀니도 기획부장을 보았다⁠.

비서 허기성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와 손수건으로 틀니를 집었다⁠. “⁠회⁠, 회장님⁠, 그건⁠…⁠…⁠”

성준은 틀니를 보지 않았다⁠. 손목시계를 보고 수첩에 무언가 적었다⁠.

*

구동학은 오후 두 시⁠, 면목동 골목 만세슈퍼 유리문 앞에서 길영춘 본부장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⁠. 유리문에는 매직으로 꾹꾹 눌러 쓴 골판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⁠. 「⁠우리도 1+1 한다 · 편의점 가지 마⁠」⁠.

“⁠본부장님 먼저 들어가시죠⁠.⁠”

“⁠육 과장이 먼저 들어가⁠. 여기 육 과장 거래처잖아⁠.⁠”

“⁠회장님이 본부장님더러 직접 하라고 하셨다면서요⁠.⁠”

본부장이 넥타이를 한 번 고쳐 매고 문을 밀었다⁠.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⁠. 계산대 뒤에서 머리에 보라색 두건을 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⁠. 슈퍼 사장 방옥란이었다⁠. 동학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사장은 동학을⁠, 정확히는 현배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흘겼다⁠.

“⁠육 과장⁠, 이번 주 물건 안 넣었지⁠. 꿀호박칩 비었어⁠.⁠” 사장이 본부장을 아래위로 훑었다⁠. “⁠이 넥타이는 또 누구야⁠?⁠”

“⁠동학제과 영업본부장 길영춘입니다⁠.⁠” 본부장이 명함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⁠. “⁠사장님⁠, 드릴 말씀이 있어서 직접 왔습니다⁠. 다음 달부터 저희 회사가 동네 슈퍼 공급을⁠…⁠…⁠.⁠”

“⁠직접 왔어⁠? 십구 년 만에⁠?⁠”

본부장의 명함이 허공에서 멈췄다⁠.

동학은 둘을 내버려 두고 과자 진열대 앞으로 갔다⁠. 진열대는 다섯 칸이었다⁠. 맨 위 칸과 둘째 칸은 남의 회사 젤리와 감자칩이 차지했고⁠, 셋째 칸은 라면이었다⁠. 동학제과 과자는 맨 아래 칸⁠, 바닥에서 한 뼘 위에 있었다⁠. 꿀호박칩 세 봉지와 동학 웨하스 두 상자가 누워 있었다⁠. 동학은 쪼그려 앉아 웨하스 상자를 집었다⁠. 상자 위에 손가락으로 쓸 만큼 먼지가 앉아 있었다⁠.

“⁠사장님⁠, 이거 왜 맨 아래에 있소⁠?⁠”

“⁠그럼 어디 둬⁠. 위에 두면 애들이 손도 안 대⁠.⁠” 사장이 계산대에서 나왔다⁠. 걸음이 빨랐다⁠. “⁠애들은 편의점 가고⁠, 노인네들은 이가 안 좋아서 딱딱한 거 못 먹어⁠. 육 과장⁠, 이거 누가 사⁠?⁠”

“⁠이거 내가 만든 거요⁠.⁠”

“⁠니가 만들었으면 니가 사 가⁠.⁠”

동학은 웨하스 상자를 든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⁠. 회사를 세우고 오십육 년⁠, 동학은 진열대 맨 위 칸만 보고 다녔다⁠. 백화점 진열대⁠, 대형마트 입구 진열대⁠, 신문 광고 사진 속 진열대였다⁠. 바닥에서 한 뼘 위는 본 적이 없었다⁠. 현배의 무릎은 쪼그려 앉아도 아프지 않았고⁠, 그래서 동학은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⁠.

“⁠사장님⁠, 그러니까 공급 중단은 다음 달 1일부터⁠…⁠…⁠.⁠” 본부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⁠.

사장이 몸을 돌려 본부장을 마주 보았다⁠. “⁠십구 년을 들락거리던 회사가 그만 오겠다고⁠? 그 말을 넥타이가 해⁠? 육 과장⁠, 니 입으로 말해⁠.⁠”

본부장과 사장이 동시에 동학을 보았다⁠. 동학은 웨하스 상자를 진열대에 도로 올려놓았다⁠. 맨 아래 칸이 아니라 계산대 바로 앞⁠, 껌과 사탕이 놓인 작은 선반 위였다⁠.

“⁠안 그만 옵니다⁠.⁠”

“⁠육 과장⁠!⁠” 본부장이 낮게 외쳤다⁠.

“⁠다음 주에 꿀호박칩 넣어 드리고⁠, 이거는 계산대 앞에 두시오⁠. 애들은 계산할 때 눈높이에 있는 걸 집어요⁠.⁠” 동학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⁠, 그것이 1975년에 아내가 했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⁠.

사장이 동학을 한참 보더니 가게 뒤 창고 문을 열었다⁠. 창고 안에 동학제과 박스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⁠. 유통기한이 지난 봉지도 있었고⁠, 아직 안 지난 봉지도 있었다⁠.

“⁠반품 안 했어⁠. 반품하면 육 과장 실적 깎인다며⁠. 그래서 그냥 뒀어⁠.⁠” 사장이 팔짱을 꼈다⁠. “⁠육 과장 오늘 말하는 게 좀 이상하다⁠? 어디 아퍼⁠?⁠”

동학은 박스 더미를 올려다보았다⁠. 박스마다 「⁠동학제과⁠」 글자가 찍혀 있었다⁠. 1988년 안성 공장을 짓던 날 동학이 직접 고른 글씨체였다⁠.

“⁠사장님⁠, 옛날 별 과자 있으면 받겠소⁠? 보리별⁠.⁠”

“⁠그 노란 봉지⁠? 그거면 받지⁠. 우리 영감이 그거 좋아했어⁠. 이도 없는 양반이 침으로 녹여 먹었어⁠.⁠” 사장이 창고 문을 닫았다⁠. “⁠그거 없어진 지가 언젠데⁠.⁠”

“⁠가져오면 받는 거요⁠.⁠”

“⁠가져와 봐⁠.⁠”

가게를 나서자 본부장이 동학의 팔을 잡았다⁠. “⁠육 과장⁠, 미쳤어⁠? 철수 통보하러 와서 주문을 받아⁠?⁠”

“⁠한 곳이오⁠.⁠”

“⁠한 곳이고 뭐고⁠!⁠”

동학은 대답하지 않고 과장의 휴대전화를 꺼냈다⁠. 메모장을 열고 첫 줄에 적었다⁠. 「⁠만세슈퍼 · 보리별 · 1⁠」⁠.

*

육현배는 오후 네 시⁠, 임시 이사회실 상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깼다⁠. 입가가 축축했다⁠. 회장의 몸은 오후 세 시만 넘으면 저절로 눈이 감겼고⁠, 성준은 임시 이사회를 세 시 반에 잡았다⁠. 현배가 깨어 보니 안건은 이미 끝나 있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, 깨셨습니까⁠?⁠” 성준이 서류를 덮었다⁠. “⁠안건 두 개가 통과됐습니다⁠. 대표이사 구동학 해임⁠, 대표이사 구성준 선임⁠. 찬성 넷⁠, 기권 하나입니다⁠.⁠”

“⁠내가 자는 사이에⁠?⁠”

“⁠회장님이 주무셔서 기권으로 했습니다⁠. 깨우려고 했는데 허 비서가 말렸어요⁠. 회장님이 낮잠 깨우는 사람은 자르신다고⁠.⁠”

문가에서 허기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⁠. 현배는 비서를 노려보다가 그만두었다⁠. 회장이라면 정말 하고도 남을 말이었다⁠.

“⁠오늘 아침 부장 회의는 회의록으로 남았습니다⁠. 개인 한 명 희망퇴직을 직접 빼신 것도요⁠.⁠” 성준이 손을 내밀었다⁠. “⁠직인 주시죠⁠. 회장님은 계속 회장님이십니다⁠. 주주로서⁠, 창업주로서요⁠. 회사 도장만 제가 찍겠습니다⁠.⁠”

허기성이 금고에서 붉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⁠. 주머니 안에 회사 직인이 들어 있었다⁠. 비서가 현배를 보았고⁠, 현배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⁠. 직인이 성준의 손바닥 위로 옮겨 갔다⁠.

현배는 탁자 끝을 붙잡았다⁠. 손등 핏줄이 불거졌다⁠.

“⁠주총에서 반대할 거다⁠. 내 지분이 삼분의 일 넘는 거⁠, 너도 알지⁠?⁠”

“⁠압니다⁠.⁠” 성준이 직인 주머니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⁠. “⁠주총은 주주가 정하는 거니까요⁠. 회장님 뜻대로 하세요⁠.⁠”

성준은 웃지 않았다⁠. 일어나면서 서류철 맨 뒷장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을 뿐이었다⁠.

*

구동학은 밤 열 시⁠, 빌라 베란다 빨래 건조대 옆에 쪼그려 앉아 과장의 휴대전화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⁠. 「⁠동학제과 창업주 구동학 대표이사 퇴진 · 아들 구성준 단독 대표 체제로⁠」⁠. 사진 속 여든한 살 노인은 오 년 전 창립 기념식 때 모습이었다⁠. 기사 아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⁠.

「⁠여든하나면 진작 내려왔어야지⁠」

「⁠과자 회사 주가 오늘 왜 오름⁠?⁠」

「⁠보리별 만들던 데 아님⁠? 그거 아직도 생각남⁠」

동학은 마지막 댓글을 손가락으로 눌러 오래 보았다⁠. 손가락 끝에 화면 온기가 남았다⁠.

베란다 문이 드르륵 열렸다⁠. 순정이 다솔의 알림장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⁠.

“⁠당신 토요일에 경비실 가서 신문 빌려 왔다며⁠?⁠” 순정이 문틀에 기댔다⁠. “⁠경비 아저씨가 그러더라⁠. 육 과장이 한자 나오는 사설을 소리 내서 읽더니⁠, 이 기자 놈이 뭘 모른다고 혼을 내더래⁠. 우리 남편이 한자를 읽어⁠?⁠”

“⁠조금⁠.⁠”

“⁠그리고 다솔이한테 용돈 만 원 줬지⁠?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으면서⁠.⁠” 순정이 알림장을 흔들었다⁠. “⁠다솔이가 아빠가 할아버지 같대⁠. 그래서 예약했어⁠. 금요일 저녁에 신경과⁠. 같이 가⁠.⁠”

“⁠나 멀쩡하다⁠.⁠”

“⁠멀쩡한 사람이 위로금을 차 버려⁠?⁠”

순정이 들어가고 베란다 문이 탁 닫혔다⁠.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화면에 「⁠회장님⁠」이 떴다⁠. 과장의 휴대전화가 회장을 그렇게 저장해 두고 있었다⁠. 동학은 받자마자 제 목소리가 하는 말을 들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, 저 잘렸어요⁠. 대표이사요⁠. 자는 사이에요⁠.⁠”

“⁠들었다⁠. 테레비에 나왔어⁠.⁠”

“⁠주총에서 반대표 던질 겁니다⁠. 회장님 지분으로요⁠.⁠”

수화기 너머의 제 숨소리가 거칠었다⁠. 동학은 건조대에 걸린 다솔의 작은 양말 한 짝을 손끝으로 만졌다⁠. 양말이 아직 덜 말라 축축했다⁠.

“⁠그건 주총 날 내가 한다⁠.⁠” 동학이 말했다⁠. “⁠내 몸으로⁠.⁠”

전화를 끊고 동학은 메모장을 열었다⁠. 첫 줄 아래에 둘째 줄을 적으려다 아직 적을 것이 없어서 화면을 껐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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