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609자)

과자 한 봉지

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· 남이랑

육현배는 10월 14일 목요일 오후 두 시⁠, 동학빌딩 7층 대회의실 맨 뒷줄에서 볼펜 뚜껑을 씹고 있었다⁠. 앞 화면에 빨간 막대 다섯 개가 떴다⁠. 막대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한 뼘씩 짧아졌고⁠, 맨 끝 비어 있는 자리 위에 「⁠2030년 현금 0원⁠」이 굵게 박혀 있었다⁠.

“⁠삼 년입니다⁠.⁠”

구성준 부회장이 리모컨을 내렸다⁠. 키가 크고 마른 몸에 은테 안경을 썼고⁠, 회색 넥타이를 목울대까지 바짝 조인 사람이었다⁠. 목소리가 크지 않은데도 대회의실 끝까지 또렷하게 건너왔다⁠.

“⁠설탕과 밀가루 값은 두 배가 됐고⁠, 아이 과자를 사 줄 아이는 줄었습니다⁠. 안성 공장 기계는 절반이 저보다 조금 어립니다⁠.⁠” 앞줄에서 누가 웃다가 얼른 기침으로 바꿨다⁠. “⁠공장을 지금 팔면 남은 육백 명이 삽니다⁠. 안 팔면 삼 년 뒤에 구백 명이 다 나갑니다⁠.⁠”

화면이 넘어갔다⁠. 「⁠안성 공장 매각 추진 · 인수 후보 하버라인 캐피털(⁠홍콩⁠)⁠」⁠. 다음 장에는 더 짧은 글자가 떴다⁠. 「⁠희망퇴직 300명 · 동네 슈퍼 영업 철수⁠」⁠.

현배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영업2팀 단톡방이었다⁠.

「⁠막내⁠: 과장님 동네 슈퍼 철수면 그거 우리 팀 아니에요⁠?⁠」

「⁠막내⁠: 아 방금 깨달았어요⁠」

「⁠막내님이 채팅방 이름을 영업2팀(⁠반만 남음⁠)으로 바꿨습니다⁠」

현배는 휴대전화를 엎었다⁠. 볼펜 뚜껑이 어금니 사이에서 납작해졌다⁠. 동네 슈퍼만 십구 년이었다⁠. 면목동 골목 이 끝에서 저 끝까지⁠, 셔터 내리는 소리만 듣고도 어느 가게인지 알았다⁠.

*

통보는 작은 회의실에서 한 사람씩 했다⁠. 길영춘 영업본부장은 탁자 위에 휴대전화를 세워 놓고 화면을 곁눈으로 읽었다⁠.

“⁠육 과장⁠. 이건⁠, 기회야⁠.⁠” 본부장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었다⁠. “⁠회사는 육 과장의 새 출발을⁠, 어⁠, 진심으로 응원하는⁠…⁠… 응원하는 마음으로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⁠, 화면 꺼졌어요⁠. 다음 줄 안 넘어가요⁠.⁠”

본부장이 화면을 두드려 켜고 종이 한 장을 밀었다⁠. 「⁠희망퇴직 통보서 · 영업2팀 과장 육현배⁠」⁠. 아래에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⁠. 「⁠10월 15일 18시까지 서명 시 위로금 기본급 24개월분 지급 · 미서명 시 대기발령⁠」⁠.

“⁠내일 여섯 시까지네요⁠.⁠”

“⁠위로금이 일억 사천이야⁠. 요즘 이만한 데 없어⁠.⁠” 본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⁠. “⁠솔직히 동네 슈퍼는 끝났어⁠. 편의점 하나 들어오면 골목 슈퍼 셋이 닫잖아⁠. 육 과장이 제일 잘 알지⁠.⁠”

“⁠본부장님은요⁠?⁠”

“⁠나⁠?⁠” 본부장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⁠. “⁠나는 남아⁠. 누군가는 남아서 정리를 해야지⁠.⁠”

현배는 통보서를 반으로 접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⁠. 접힌 종이가 숨 쉴 때마다 바스락거렸다⁠.

*

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⁠, 현배는 손을 밀어 넣어 문을 다시 열었다⁠. 안에 구성준 부회장이 혼자 있었다⁠. 문이 닫히자 거울 벽에 두 사람이 나란히 비쳤다⁠.

거울 속 현배는 부회장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⁠. 통통한 몸에 앞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짧은 머리⁠, 처진 눈⁠,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흰 와이셔츠에 느슨하게 풀린 남색 넥타이⁠. 목에 건 사원증 사진은 입사 때 찍은 것이라 머리숱이 지금의 두 배였다⁠. 가슴 주머니에서 접힌 통보서 모서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⁠.

“⁠부회장님⁠. 영업2팀 육현배입니다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 면목동이랑 상봉동이시죠⁠.⁠” 성준이 층수 표시를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동네 슈퍼 사장님들은 어떡합니까⁠? 제 거래처만 팔백 곳입니다⁠. 철수하면 그 가게들에서 동학 과자가 다 빠집니다⁠.⁠”

“⁠팔백 곳을 다 합치면 편의점 서른 곳만큼 팝니다⁠.⁠” 성준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⁠. “⁠과장님이 기름값 쓰고 사흘 돌아서 받는 주문을⁠, 편의점 본사는 메일 한 통으로 줍니다⁠. 저도 슈퍼 사장님들 좋아해요⁠.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월급을 못 드려서 그렇죠⁠.⁠”

“⁠공장 사람들은요⁠? 이백 명 넘게 나가잖아요⁠.⁠”

“⁠그분들이 남으면 다른 육백 명이 나갑니다⁠. 저는 육백을 고른 거예요⁠.⁠”

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열렸다⁠. 성준이 먼저 내리다 돌아보았다⁠.

“⁠위로금은 꼭 받으세요⁠. 내일 지나면 깎입니다⁠. 그 말은 진심이에요⁠.⁠”

문이 닫혔다⁠. 1층에 볼일이 없던 현배를 싣고 엘리베이터가 도로 6층 영업부로 올라갔다⁠.

*

저녁 여덟 시⁠,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로 꽉 찼다⁠. 영업2팀 열두 명이 맥줏집 앞 철제 탁자 두 개를 붙여 앉았고⁠, 탁자 위로 노가리 껍질과 소주병이 쌓여 갔다⁠. 송별 회식이었는데 누가 누구를 보내는지 아무도 몰랐다⁠. 절반은 통보서를 받았고⁠, 나머지는 내일 받을까 봐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⁠.

“⁠건배사는 과장님이 하세요⁠.⁠” 막내 대리가 잔을 들었다⁠.

현배는 일곱 번째 잔을 들고 일어났다⁠. “⁠우리가⁠!⁠”

“⁠우리가⁠!⁠”

“⁠잘려도⁠!⁠”

“⁠잘려도⁠!⁠”

“⁠동네 슈퍼는⁠!⁠”

“⁠…⁠…동네 슈퍼는⁠?⁠”

“⁠영원하다⁠!⁠”

아무도 따라 하지 않았다⁠. 옆 탁자의 넥타이 부대만 박수를 쳤다⁠.

골목 입구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췄다⁠. 양복 입은 젊은 남자가 뒷문을 열었고⁠, 작고 마른 노인이 차에서 내렸다⁠. 반듯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골목 알전구 아래서 하얗게 빛났고⁠, 두꺼운 흰 눈썹이 눈두덩을 덮었다⁠. 짙은 회색 쓰리피스 양복의 조끼 단추를 끝까지 채웠고⁠, 넥타이에는 금색 넥타이핀을 꽂았다⁠. 젊은 남자가 종이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 뒤를 따랐다⁠.

“⁠회장님이다⁠.⁠” 막내가 의자에서 일어나다 탁자에 무릎을 찧었다⁠.

구동학 회장은 탁자를 돌며 노란 종이 봉지를 하나씩 내려놓았다⁠. 봉지마다 빨간 별 하나가 찍혀 있었다⁠. 「⁠보리별⁠」⁠.

“⁠옛날 과자다⁠. 공장에서 한 솥 다시 쪄 봤어⁠.⁠” 노인의 목소리가 몸보다 컸다⁠. “⁠나가는 사람들한테 하나씩 주고 싶었다⁠.⁠”

막내가 봉지를 뒤집어 보았다⁠. “⁠이거 저 태어나기 전에 없어진 거예요⁠.⁠”

“⁠1998년에 끊었지⁠. 그해에 다들 뭘 끊었어⁠.⁠” 회장이 현배 앞에 봉지를 놓았다⁠. “⁠자네가 육 과장이지⁠. 면목동⁠.⁠”

현배는 봉지를 내려다보았다⁠. 일곱 잔이 뱃속에서 한꺼번에 올라왔다⁠.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⁠.

“⁠회장님⁠. 과자 한 봉지로 십구 년을 퉁치십니까⁠?⁠”

골목이 조용해졌다⁠. 상자를 든 비서가 한 발 앞으로 나오다가 회장의 손짓에 멈췄다⁠.

“⁠퉁 치려고 온 거 아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뭡니까⁠? 저희 자르는 서류에 도장 찍으신 분이⁠.⁠”

“⁠나도 내일 잘린다⁠.⁠” 회장이 빈 의자를 끌어다 현배 맞은편에 앉았다⁠. 무릎이 다 펴지지 않아 의자에 떨어지듯 앉았다⁠. “⁠대표이사에서 내려오기로 했어⁠. 아들이 하자는 대로⁠. 여든한 살이면 내려올 때가 한참 지났다더라⁠.⁠”

“⁠그래서 같이 잘리니까 동지라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동지는 무슨⁠.⁠” 회장이 봉지를 뜯었다⁠. 볶은 보리 냄새와 조청 단내가 노가리 연기 사이로 번졌다⁠. “⁠먹어 보고 욕을 해⁠. 안 먹고 하는 욕은 내가 안 들어⁠.⁠”

현배는 봉지를 뜯었다⁠. 손바닥만 한 갈색 별이 하나 나왔다⁠. 회장도 별 하나를 집었다⁠.

“⁠하나⁠, 둘⁠.⁠” 회장이 말했다⁠.

“⁠셋은 제가 합니다⁠.⁠”

두 사람이 같은 박자로 깨물었다⁠. 바삭⁠. 같은 순간 골목 전봇대 꼭대기에서 퍽 소리가 났다⁠. 변압기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고⁠, 골목의 알전구가 한꺼번에 꺼졌다⁠. 어둠 속에서 누가 소주병을 엎었다⁠. 현배는 혀끝에 조청 단맛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고⁠, 맞은편에서도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⁠.

*

육현배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⁠. 알람도 없는데 눈이 저절로 떠졌다⁠. 천장이 높았고⁠, 낯선 가죽 냄새가 났다⁠. 몸 밑이 푹신한 가죽 소파였다⁠.

일어나려는데 무릎이 먼저 우두둑 소리를 냈다⁠.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반쯤 일어나다 다시 주저앉았다⁠. 십 년 묵은 허리 디스크는 감쪽같이 조용했고⁠, 대신 무릎 두 짝이 남의 것처럼 따로 놀았다⁠.

탁자 위 물컵에 무언가 잠겨 있었다⁠. 분홍 잇몸에 하얀 이가 가지런히 박힌 물건이었다⁠. 현배는 혀로 입안을 훑었다⁠. 위쪽이 미끈하게 비어 있었다⁠.

“⁠으아아⁠.⁠”

목소리가 높고 갈라져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⁠. 현배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⁠. 손등에 검버섯이 앉아 있었다⁠.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고 손등 핏줄이 지렁이처럼 불거졌다⁠.

현배는 무릎을 달래 가며 큰 책상까지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⁠. 창밖으로 청계천 위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⁠. 책상 위에 어젯밤 현배가 가슴 주머니에 넣었던 「⁠희망퇴직 통보서 · 영업2팀 과장 육현배⁠」가 펴져 있었고⁠, 옆에 노란 봉지가 반쯤 남은 보리별 상자가 놓여 있었다⁠. 창유리에 백발의 작은 노인이 비쳤다⁠. 노인이 제 주름진 손을 들여다보며 입을 떡 벌렸다⁠. 틀니가 없어서 입이 동굴처럼 깊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, 깨셨습니까⁠?⁠”

문가에 어젯밤 상자를 들던 젊은 비서가 양복 단추를 다 채우고 고개를 작게 숙이고 있었다⁠.

“⁠어⁠…⁠… 누구⁠?⁠”

“⁠허기성입니다⁠, 회장님⁠. 삼 년째 모시고 있습니다⁠.⁠” 비서가 휴대전화 메모를 열었다⁠. “⁠어젯밤 쓰러지셨는데 병원은 절대 안 된다⁠, 회사로 가자 하셔서 모셨습니다⁠. 쓰러지시면서도 또렷하게 말씀하셔서 받아 적어 뒀습니다⁠.⁠” 비서가 화면을 읽었다⁠. “⁠「⁠병원 말고 회사⁠. 소파⁠. 틀니는 물에⁠.⁠」 그리고 손에 종이 한 장을 꽉 쥐고 계셔서 책상에 펴 두었습니다⁠. 육 과장님 주머니에서 떨어진 걸 집으셨나 봅니다⁠.⁠”

“⁠맞은편에 쓰러진 사람은⁠? 영업부 육 과장⁠.⁠”

“⁠영업부 분들이 댁으로 모셔 갔다고 들었습니다⁠. 술이 과했다고요⁠.⁠”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⁠. “⁠회장님이 직원 안부를 물으시는 건 처음 봅니다⁠.⁠”

물컵 속에서 회장의 틀니가 현배를 보고 웃고 있었다⁠.

*

여덟 시 오십 분⁠,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⁠. 틀니를 끼운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현배의 혀는 아직 제자리를 못 찾고 있었다⁠. 구성준 부회장이 서류철을 펼쳐 책상에 놓았다⁠. 「⁠안성 공장 매각 의향서 · 하버라인 캐피털⁠」⁠. 맨 아래 도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⁠.

“⁠아홉 시 이사회 전에 이것부터 찍으시죠⁠. 어젯밤 쓰러지셨다니까 더 오늘 끝내셔야 합니다⁠. 하버라인은 월요일까지 의향서가 안 오면 일본 공장으로 갑니다⁠.⁠”

현배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⁠. 붉은 인주와 상아색 도장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⁠. 손이 저절로 도장 손잡이로 갔다⁠. 손가락이 도장 쥐는 모양을 알고 있었다⁠. 오십 년 동안 도장을 쥔 손이었다⁠.

“⁠회장님⁠?⁠”

현배는 도장을 도로 넣고 서랍을 닫았다⁠. “⁠안 찍어⁠.⁠”

안경 너머 성준의 눈이 한 번 깜박였다⁠. “⁠어제 아침에 찍겠다고 하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어제는 어제고⁠.⁠” 혀가 틀니에 밀려 ‘⁠어제⁠’가 ‘⁠어제에⁠’로 늘어졌다⁠. “⁠공장 사람들 얼굴은 봤어⁠? 이백사십 명⁠.⁠”

“⁠이백삼십구 명입니다⁠. 한 분은 지난주에 먼저 나가셨어요⁠.⁠” 성준이 바로 받았다⁠. “⁠숫자는 제가 봅니다⁠. 회장님은 도장만 찍으시면 돼요⁠. 지난 오 년 동안 우리가 그렇게 나눠서 일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오늘은 안 나누자⁠.⁠”

성준은 의자를 끌어다 앉지 않았다⁠. 책상 너머에 선 채 서류 끝을 손가락으로 반듯하게 맞췄다⁠.

“⁠여기서 하루 미루시면 하버라인은 값을 깎습니다⁠. 값이 깎이면 삼백이 사백이 돼요⁠. 회장님이 미루신 하루를 누가 갚는지 아시잖아요⁠.⁠”

현배가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⁠, 책상 위에서 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화면에 번호 하나가 떴다⁠. 십구 년 동안 거래처마다 명함으로 돌린 번호⁠, 현배의 번호였다⁠.

“⁠받으세요⁠. 이제 직원 전화도 다 받으시나 봐요⁠.⁠” 성준이 서류를 덮었다⁠. “⁠아홉 시에 이사회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⁠.⁠”

성준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⁠. 현배는 전화를 받았다⁠. 아침마다 면도하며 듣던⁠, 조금 쉰 마흔두 살 남자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⁠. 제 목소리였다⁠.

“⁠야⁠, 육 과장⁠.⁠” 제 목소리가 느릿느릿 말했다⁠. “⁠내 몸으로 도장 찍지 마라⁠. 찍으면 너 죽는다⁠.⁠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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