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437자)

감사위원회 탁자에서 돋보기가 한 줄을 찾았다

사내 연애 적발 감사팀 · 모세담

5월 14일 금요일 오후 세 시⁠, 대륙증권 24층 이사회실 탁자는 길고 검었다⁠. 표면이 거울처럼 닦여 있어서 앉은 사람마다 탁자 위에 얼굴이 하나 더 비쳤다⁠. 상석에 감사위원장이 앉았다⁠. 은퇴한 법학 교수로⁠, 흰 머리를 뒤로 묶고 돋보기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있었다⁠. 양옆에 사외이사 감사위원 둘⁠. 오른쪽 줄에 위상진 대표와 비서실장⁠, 왼쪽 줄에 옥경 팀장과 육 차장⁠, 준법감시인 상무⁠. 나는 탁자 끝 참고인 자리에 앉았다⁠. 대기 발령 26일째였다⁠.

탁자 가운데에 금융감독원 검사의견서가 놓여 있었다⁠. 5월 10일에 온 문서였다⁠. 검사에서 확인한 사실을 적어 회사에 보내고⁠, 회사의 의견을 듣는 서류다⁠. 회사가 반론을 내면 다툼이 되고⁠, 반론 없이 받아들이면 제재심의위원회로 바로 간다⁠. 지적 사항은 다섯 줄이었다⁠. 임직원 차명 거래⁠, 정보교류 차단 위반⁠, 일임매매⁠, 녹취 의무 위반⁠, 내부통제 운영 미흡⁠.

육 차장이 탁자 밑에서 견과류 봉지를 조용히 뜯다가 비서실장과 눈이 마주쳤다⁠. 봉지를 도로 접었다⁠. 이사회실에서 아몬드 씹는 소리는 총소리처럼 컸다⁠.

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돌리려고 꺼냈다가 아침에 온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⁠. 「⁠IT헬프데스크⁠: 어제 정직 두 달 받았어⁠. 오늘 잘해⁠. 만나지 말자고 한 거⁠, 메시지는 빼고였어⁠.⁠」 삼 주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온 첫 줄이었다⁠.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⁠. 대신 저장된 이름 「⁠IT헬프데스크⁠」를 지우고 「⁠방준서⁠」 석 자를 쳐 넣었다⁠. 감사위원회가 끝나면 새 이름으로 답장할 생각이었다⁠.

“⁠시작하겠습니다⁠.⁠” 감사위원장이 안경을 내렸다⁠. “⁠오늘 정할 것은 하나입니다⁠. 검사의견서에 회사가 반론을 낼지⁠, 그대로 받을지⁠. 대표이사께서 먼저 말씀하시죠⁠.⁠”

위상진 대표가 일어나지 않고 앉은 채 말했다⁠.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다⁠.

“⁠다섯 줄 중 세 줄은 받겠습니다⁠. 일임매매⁠, 녹취 의무 위반⁠, 방준서 대리 건입니다⁠. 본인이 인정했고⁠, 회사가 배상합니다⁠. 두 줄은 다투겠습니다⁠. 정미옥 계좌는 본인의 위임장이 있는 가족 대리 거래입니다⁠. 차명인지는 법원에서도 다툴 여지가 있습니다⁠. 정보교류 차단도⁠, 노강철 본부장이 법인영업부 주문 정보를 알았다는 직접 증거가 없습니다⁠. 통화 기록은 통화를 했다는 증거지⁠, 무슨 말을 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⁠.⁠”

감사위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⁠. 틀린 말이 아니었다⁠.

“⁠그리고 내부통제 운영 미흡 중에 기록 삭제 건⁠.⁠” 대표가 비서실장에게 손짓했다⁠. 비서실장이 문서를 나눠 주었다⁠. 「⁠전산 비용 절감 TF 결과 보고 — 2027년 2월 22일⁠」⁠. “⁠무선망 접속 기록 보존 기한을 석 달에서 한 달로 줄이자는 건 2월에 전산팀이 올린 안입니다⁠. 저는 4월 19일에 결재했을 뿐이에요⁠. 결재가 밀려 있었습니다⁠. 날짜가 겹친 건 불운입니다⁠. 저는 불운을 반론하겠습니다⁠.⁠”

감사위원장이 TF 보고서를 넘겼다⁠. 2월 날짜⁠, 전산팀장 서명⁠, 「⁠보존 기한 석 달 → 한 달⁠」⁠. 비용 절감액까지 적혀 있었다⁠. 서류에는 빈틈이 없었다⁠.

“⁠심 팀장님⁠, 감사팀 의견은요⁠?⁠”

옥경 팀장이 일어났다⁠. 빨간 정장이었다⁠. 진주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⁠. 처음 보는 맨목이었다⁠.

“⁠감사 보고에 앞서⁠, 제 진술서를 먼저 내겠습니다⁠.⁠”

옥경 팀장이 서류 봉투에서 종이 여섯 장을 꺼내 감사위원장 앞에 놓았다⁠. 대표가 처음으로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⁠.

“⁠2017년 3월 동양정공 보고서 유출 건입니다⁠. 보고서를 쓴 사람은 저였고⁠, 발간 전날 밤 보고서 내용을 말한 상대는 당시 영업본부장이던 위상진 대표이사입니다⁠. 다음 날 아침 발간 칠 분 전에 차명계좌 다섯 개로 매수 주문을 넣은 사람은 당시 영업부 차장 노강철입니다⁠. 회사는 금감원에 영업부 대리 한 명과 리서치센터 보조연구원 석주희 씨가 유출했다고 보고했고⁠, 두 사람은 해고됐습니다⁠. 저는 알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⁠.⁠”

이사회실이 조용했다⁠. 탁자 위에 비친 얼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⁠.

“⁠오늘 대표이사께서 감사 보고서의 신뢰를 묻는 데 이 일을 쓰실 줄 알았습니다⁠.⁠” 옥경 팀장이 대표를 보지 않고 감사위원장만 보았다⁠. “⁠그래서 제가 먼저 냅니다⁠. 이 감사 보고서는 십 년 전에 정보를 흘린 사람이 쓴 보고서가 맞습니다⁠. 이번엔 흘리지 않았습니다⁠.⁠”

대표가 손을 들었다⁠. 서두르지 않았다⁠.

“⁠감사위원장님⁠. 심 팀장의 진술은 존중합니다⁠. 다만 십 년 전 저녁 식탁의 대화입니다⁠. 증거는 심 팀장 기억뿐이에요⁠. 당시 금감원 조사도 끝났습니다⁠. 오늘 안건은 2027년 검사의견서입니다⁠.⁠” 대표가 탁자 위 손을 깍지 꼈다⁠. “⁠그리고 심 팀장 진술이 사실이라면⁠, 심 팀장이야말로 오늘 이 자리에서 감사 보고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⁠. 2027년 보고서 작성자는 조사 대상의 연인이고⁠, 감사팀장은 십 년 전 유출 당사자입니다⁠. 저는 이 보고서로 금감원과 다투지 않겠다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⁠.⁠”

감사위원 둘이 서로를 보았다⁠. 대표의 계산은 여기까지 와 있었다⁠. 옥경 팀장이 카드를 먼저 내도⁠, 대표는 옥경 팀장의 카드로 보고서 전체를 덮을 수 있었다⁠. 옥경 팀장의 손가락이 탁자 가장자리를 눌렀다⁠. 손톱 끝이 하얘졌다⁠.

감사위원장이 안경을 이마로 올렸다⁠. “⁠참고인⁠. 채가온 씨⁠. 하실 말씀 있습니까⁠?⁠”

나는 일어났다⁠. 무릎이 한 번 떨렸다⁠. 탁자 위에 비친 내 얼굴이 길게 늘어났다⁠.

*

지난 열흘⁠, 나는 대기실에서 할 일이 없어 TF 보고서를 찾았다⁠. 대기 발령자는 회사 시스템에 들어갈 수 없었다⁠. 대기실 화이트보드 앞의 전산 주임이 2월 TF 원안을 기억하고 있었다⁠. 「⁠전체 답장⁠」 사고를 낸 주임은 원래 전산 비용 절감 TF의 막내 실무자였다⁠. 주임은 사흘 동안 기억을 더듬어 원안 마지막 장을 손으로 다시 써 주었고⁠, 어제 대기 발령이 풀리자마자 전산팀 공유 폴더에서 원안 파일을 찾아 출력해 왔다⁠. 채권 대리는 출력물을 두 부 복사해 와서 하나는 내 가방에⁠, 하나는 자기 가방에 넣었다⁠.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가 있게⁠.

“⁠대표님이 나눠 주신 TF 보고서와 같은 날짜⁠, 같은 서명의 원안입니다⁠.⁠” 나는 종이를 감사위원장 앞에 놓았다⁠. 그리고 놋쇠 돋보기를 같이 놓았다⁠. 손잡이의 「⁠대륙증권 감사팀⁠」이 탁자에 비쳤다⁠. “⁠마지막 장 맨 아래⁠, 작은 글씨입니다⁠.⁠”

감사위원장이 돋보기를 들어 종이에 댔다⁠.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⁠.

“⁠「⁠단⁠, 감사·검사가 진행 중이거나 예정된 사안과 관련된 기록은 보존 기한 단축에서 제외한다⁠」⁠.⁠”

감사위원장이 대표가 나눠 준 종이를 다시 집었다⁠. 같은 자리를 돋보기로 보았다⁠. 단서 줄이 없었다⁠. 마지막 장은 비용 절감액 표로 끝나 있었다⁠.

“⁠대표님 결재본에는 이 단서가 없습니다⁠.⁠”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반듯하게 나왔다⁠. 3월 4일 소회의실에서 주문 시각을 읽던 목소리였다⁠. “⁠4월 19일⁠, 정미옥 계좌가 감사 보고서에 올라가고 금감원 검사가 시작된 지 일주일 뒤에 결재됐습니다⁠. 결재 과정에서 단서 한 줄이 빠졌고⁠, 다음 날 밤 3층 무선망 기록이 지워졌습니다⁠. 거짓말은 없어요⁠. 한 줄이 없을 뿐입니다⁠.⁠”

비서실장의 얼굴이 하얘졌다⁠. 대표는 하얘지지 않았다⁠. 깍지 낀 손이 풀리지도 않았다⁠.

“⁠그 한 줄을 누가 뺐는지⁠, 참고인은 아십니까⁠?⁠”

“⁠모릅니다⁠. 결재한 분은 압니다⁠.⁠”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⁠. “⁠그리고 4월 16일 금요일 저녁 여섯 시⁠, 감사팀장실에서 제가 들은 말이 있습니다⁠. 방준서 하나로 닫자⁠. 노강철은 내가 하반기에 정리할게⁠. 처제 계좌가 나가면 차단이 나가고⁠, 차단이 나가면 책무구조도가 나가⁠. 4월 19일 아침 여덟 시⁠, 대표이사실에서 제가 받은 제안도 있습니다⁠. 정미옥 계좌는 「⁠추가 확인 필요⁠」로 낮춰서 금감원에 내자⁠. 두 날 모두 기록하고 날짜와 시각을 적어 두었습니다⁠. 대기실에서 할 일이 없어서요⁠.⁠”

육 차장이 탁자 밑에서 견과류 봉지를 다시 쥐었다⁠. 이번에는 뜯지 않았다⁠.

대표가 나를 오래 보았다⁠. 4월 19일 아침 창가 소파에서 보던 눈이었다⁠. 계산을 다시 하는 눈이었다⁠.

“⁠채가온 씨는 조사 대상의 연인입니다⁠.⁠” 대표가 감사위원장에게 말했다⁠. “⁠방준서 대리를 지키려고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⁠. 아래 사람 하나를 덜 다치게 하려고 회사를 다치게 하는 거예요⁠.⁠”

“⁠방준서 대리는 정직 두 달을 받았습니다⁠.⁠” 내가 대답했다⁠. “⁠어제 징계위원회에서요⁠. 본인이 다 말했고⁠, 다 받았어요⁠. 저는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⁠. 이제 대표님 차례예요⁠.⁠”

“⁠채가온 씨⁠.⁠”

“⁠대표님이 2017년에 남긴 천팔백 명 중에는 오늘 대기실에 있는 채권 대리님도⁠, 전산 주임님도 있어요⁠. 그분들이 대표님 결재본에서 빠진 한 줄을 찾아 줬습니다⁠. 대표님이 지킨 사람들이 대표님 서류를 읽었어요⁠.⁠”

이사회실 공기가 한 칸 내려앉았다⁠. 3월 2일 엘리베이터에서 빨간 소매가 들어오던 때와 같은 무게였다⁠. 이번에는 빨간 소매가 내 편에 있었다⁠.

*

감사위원장이 돋보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⁠. 놋쇠가 탁자에 닿아 낮게 울렸다⁠.

“⁠표결하겠습니다⁠.⁠” 감사위원장이 손을 들려다 말고 육 차장을 보았다⁠. “⁠아⁠, 그 전에⁠. 검사 자료에 들어 있던 교제 신고서 말입니다⁠. 3층 커피 머신⁠. 처리는 어떻게 됐어요⁠?⁠”

육 차장이 허리를 폈다⁠. “⁠개정 규정상 신고 대상이 아니라서 반려했습니다⁠. 원두가 떨어져서 사이도 정리됐답니다⁠.⁠”

“⁠다행이네요⁠. 한쪽만 마음이 있는 관계는 오래가면 안 됩니다⁠.⁠” 감사위원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⁠. “⁠첫 번째 안건⁠. 검사의견서 다섯 줄을 반론 없이 받아들인다⁠.⁠”

육 차장이 탁자 밑에서 내 발을 톡 찼다⁠. 웃지 말라는 신호였다⁠.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⁠.

감사위원 셋이 손을 들었다⁠. 셋 다였다⁠.

“⁠두 번째 안건⁠. 정보교류 차단 실패와 기록 삭제에 대한 대표이사의 내부통제 총괄 관리 책임을 이사회에 보고하고⁠, 이사회 결정 전까지 대표이사의 직무 정지를 건의한다⁠. 노강철 본부장은 즉시 직무에서 배제하고⁠, 수사기관 통보는 금감원 결정에 따른다⁠.⁠”

셋이 다시 손을 들었다⁠. 감사위원장이 자기 손도 들었다⁠. 넷이었다⁠.

“⁠세 번째 안건⁠. 심옥경 감사팀장의 2017년 진술서를 금감원에 그대로 제출한다⁠.⁠”

옥경 팀장이 감사위원장보다 먼저 말했다⁠. “⁠제출해 주십시오⁠. 제 사직서도 같이 넣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사직서는 안건이 아닙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제 서랍에 둡니다⁠. 다음 주에 인사팀에 내겠습니다⁠.⁠”

위상진 대표가 일어났다⁠. 회색 정장 단추를 하나 채웠다⁠. 비서실장이 따라 일어나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⁠.

“⁠검사의견에 반론은 내지 않겠습니다⁠. 이사회 결정은 받겠습니다⁠.⁠” 대표가 말했다⁠. 목소리는 끝까지 높낮이가 없었다⁠.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⁠. “⁠채가온 씨⁠, 하나만 물읍시다⁠. 지금 이 회사 삼천 명 중에 몇 명이 내년에 남을지⁠, 계산해 봤어요⁠?⁠”

“⁠아니요⁠.⁠” 나는 대답했다⁠. “⁠남을 사람이 남는 회사였으면 해서요⁠. 지울 줄을 고르는 회사 말고요⁠.⁠”

대표는 대답하지 않고 이사회실 문을 열었다⁠. 문이 닫혔다⁠. 탁자 위에 대표가 앉았던 자리의 얼굴만 잠깐 남았다가 사라졌다⁠.

옥경 팀장이 의자에 앉았다⁠. 맨목에 손을 얹었다⁠. 진주 목걸이가 있던 자리였다⁠. 탁자 밑으로 옥경 팀장의 손이 내려왔다⁠. 내 손등을 한 번⁠, 짧게 덮었다가 떠났다⁠. 사십 초가 아니었다⁠. 삼 초쯤이었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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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마필제2026.11.06· 9화

    대표 서류에 거짓말은 없고 한 줄이 빠져 있었다는 게 제일 무서웠어요. 마지막에 옥경 팀장이 가온 손등을 삼 초 덮는 장면에서 울컥했습니다. 사십 초가 아니라 삼 초라는 줄이 오래 남네요.

    • 모세담작가2026.11.06

      사십 초는 2화 책상 밑에서 잡은 손이었어요. 마지막 화에서 가온과 준서가 어디에 서는지 확인해 주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