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43자)

문답실 문이 열리고 본부장 이름이 나왔다

사내 연애 적발 감사팀 · 모세담

4월 20일 화요일 아침 아홉 시⁠, 대륙증권 7층 끝 회의실 문에 A4 한 장이 붙어 있었다⁠. 「⁠대기 인원 대기실⁠」⁠. 대기가 두 번 들어간 문장이었다⁠. 안에는 탁자 하나에 의자 여섯 개⁠, 창문 하나⁠, 화이트보드 하나가 있었다⁠. 먼저 와 있는 사람이 둘이었다⁠.

창가에 앉은 남자는 채권운용팀 대리였다⁠. 지난주 주문 화면에서 숫자 0을 하나 더 쳐서 십억짜리 채권을 백억어치 샀다고 했다⁠. 손가락이 굵어서 생긴 일이라고 본인이 먼저 말했다⁠. 화이트보드 앞의 여자는 전산팀 주임이었다⁠. 대표이사 앞으로 가야 할 보안 공지를 전 직원에게 「⁠전체 답장⁠」으로 보냈고⁠, 보안 공지 메일에 삼천 명이 다시 「⁠전체 답장⁠」을 눌러 회사 메일 서버가 이틀 멈췄다⁠.

“⁠감사팀은 무슨 일로⁠?⁠” 채권 대리가 물었다⁠.

“⁠이해충돌이요⁠.⁠”

“⁠그게 뭐예요⁠?⁠”

“⁠조사하는 사람이 조사받는 사람하고 사귄 거요⁠.⁠”

전산 주임이 화이트보드 마커를 내려놓았다⁠. “⁠여기서 제일 재밌는 사연이 들어왔네⁠.⁠”

나는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고 육 차장의 형광펜 필통을 꺼냈다⁠. 할 일이 없었다⁠. 감사 시스템 접속 권한이 꺼져 있었다⁠. 노란 형광펜으로 탁자 위 메모지에 줄만 그었다⁠. 빨강은 사람 입에서 나와야 칠한다고 했다⁠. 이 방에서 입을 열 사람은 없었다⁠.

*

수요일 오후 세 시⁠, 채권 대리가 휴대전화를 내 쪽으로 밀었다⁠. 화면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⁠. 표정이 먼저 말했다⁠.

익명 게시판에 사진 두 장이 올라와 있었다⁠. 지하 4층 주차장 D-17 기둥 옆 흰 경차⁠, 망원동 편의점 불빛 아래 준서의 넥타이를 잡은 나⁠. 제목은 「⁠감사팀 연애 감사 결과 공유합니다⁠」였다⁠. 이번에는 십 분 만에 지워지지 않았다⁠. 댓글이 백 개를 넘었다⁠. 「⁠감사팀이 감사를 받아야 함⁠」 「⁠저 경차 1등 차 맞음⁠?⁠」 「⁠사랑의 회전율 1⁠,200퍼센트⁠」⁠. 웃자고 단 말들이 웃기지 않게 쌓였다⁠.

“⁠이거 직장 내 괴롭힘이에요⁠.⁠” 전산 주임이 내 어깨 너머로 보며 말했다⁠. “⁠사생활 소문 퍼뜨려서 일 못 하게 만드는 거⁠. 우리 회사 규정에도 3월에 새로 들어갔잖아요⁠.⁠”

“⁠제가 넣었어요⁠. 그 조항⁠.⁠”

“⁠아⁠.⁠” 전산 주임이 입을 막았다⁠. “⁠그럼 저 게시글이 첫 적용 사례네요⁠.⁠”

“⁠올린 사람 찾을 수 있어요⁠?⁠”

“⁠게시판 서버 로그 보면 접속 위치 정도는 나와요⁠. 근데 저 대기 발령 중이라 권한이 없어요⁠.⁠” 전산 주임이 나를 보았다⁠. “⁠둘 다 없네요⁠.⁠”

채권 대리가 휴대전화를 거두며 말했다⁠. “⁠경차 1등 차 맞아요⁠?⁠”

“⁠맞아요⁠.⁠”

“⁠멋있네⁠.⁠”

*

수요일 밤 열한 시⁠,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준서였다⁠. 목소리 뒤로 수도꼭지 물소리가 쏟아졌다⁠.

“⁠나 화장실이야⁠. 손 씻는 척하고 있어⁠.⁠”

“⁠어딘데⁠?⁠”

“⁠여의도 일식집⁠. 본부장님이 계속 술 따라 줘⁠. 내년 영업2팀 팀장 자리 얘기하셔⁠.⁠”

“⁠그래서⁠?⁠”

“⁠그래서 손 씻는 중이야⁠. 십오 분째⁠. 지문이 다 닳을 것 같아⁠.⁠”

“⁠준서야⁠.⁠”

“⁠내일 문답에서 뭐라고 할지 아직 모르겠어⁠. 본부장님이 방금 그러셨어⁠. 준서야⁠,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한다⁠.⁠” 물소리가 멈췄다⁠. “⁠은혜는 알아⁠. 근데 염명숙 고객님 은혜는 누가 갚아⁠? 이 년 반 동안 아침마다 내 전화 받아 주신 거⁠.⁠”

누가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⁠. 준서가 “⁠손 씻어요⁠!⁠” 하고 외쳤고⁠, 전화가 끊겼다⁠. 나는 노란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했다⁠. 밤새 원룸에는 뚜껑 소리만 났다⁠.

*

4월 22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⁠, 20층 검사장 앞 복도⁠. 방준서 대리의 금감원 문답이 시작됐다⁠. 나는 참고인으로 오후에 불려 갈 예정이라 복도 끝 의자에 앉아 있었다⁠. 문은 두꺼웠고⁠, 안에서 나는 소리는 하나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⁠. 한 시간마다 검사역 한 명이 나와 정수기 물을 텀블러에 받아 갔다⁠. 회사 물이었다⁠. 텀블러에 담는 건 괜찮은 모양이었다⁠.

열한 시⁠,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노강철 본부장이 내렸다⁠. 오후 두 시 두 번째 문답을 받으러 일찍 온 길이었다⁠. 금색 넥타이핀을 새로 꽂았는지 유난히 반짝였다⁠. 노 본부장이 내 옆 의자에 한 칸 띄고 앉았다⁠.

“⁠사진 봤지⁠? 나 아니야⁠.⁠”

“⁠3층 무선망이요⁠?⁠”

“⁠3층에 마흔 명이 있어⁠.⁠” 노 본부장이 다리를 꼬았다⁠. “⁠채가온 씨⁠, 지금 안에서 준서가 뭐라고 할 것 같아⁠? 걔는 착해⁠. 착한 애는 은혜를 알아⁠. 첫 고객 넘겨준 사람을 금감원에 파는 애가 아니야⁠.⁠”

“⁠착한 사람이면 사실대로 말하겠죠⁠.⁠”

“⁠사실대로가 뭔데⁠. 내가 전화해서 담으라고 했다⁠? 그 전화 녹음 있어⁠? 없어⁠. 내 휴대전화는 내 거야⁠.⁠” 노 본부장이 웃었다⁠. 이번에는 눈까지 웃었다⁠. 자신 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⁠. “⁠처제 계좌는 위임장 있고⁠, 세 건은 준서 감이고⁠, 감사 보고서는 여자친구가 썼어⁠. 금감원도 계산할 줄 알아⁠.⁠”

나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대표의 계산과 노 본부장의 계산이 같은 답을 내고 있었다⁠. 둘 다 준서가 입을 다무는 데에 걸어 놓은 계산이었다⁠.

열두 시 십 분⁠, 검사장 문이 열렸다⁠. 준서가 나왔다⁠.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⁠. 남색 정장 단추를 다 풀고⁠, 손에 문답서 사본을 들고 있었다⁠. 얼굴이 하얬다⁠. 복도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보고 준서가 걸음을 멈췄다⁠. 나를 먼저 보았고⁠, 이어서 노 본부장을 보았다⁠.

노 본부장이 일어나 준서의 어깨를 두드렸다⁠. “⁠고생했다⁠. 밥 먹으러 가자⁠.⁠”

준서는 어깨를 빼지 않았다⁠. 손도 올리지 않았다⁠. 복도 한가운데 선 채로 말했다⁠.

“⁠본부장님⁠. 세 건⁠, 본부장님 전화 받고 샀다고 말했습니다⁠.⁠”

노 본부장의 손이 준서 어깨 위에서 멈췄다⁠.

“⁠오전에 큰 거 들어온다고 하신 거⁠. 날짜랑 시간이랑⁠, 제 개인 휴대전화 통화 기록 냈습니다⁠. 녹음은 없어도 통화 기록은 남아요⁠. 1월 11일 아홉 시 사십팔 분⁠, 2월 3일 아홉 시 오십이 분⁠, 2월 17일 아홉 시 오십 분⁠.⁠” 준서의 목소리가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⁠. “⁠염명숙 고객님 계좌는 본부장님이 하시던 대로 이어서 했다고 말했습니다⁠. 고객님이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⁠, 저는 알아서 했습니다⁠. 일임 맞습니다⁠. 그것도 말했어요⁠. 큰 거가 뭔지 안 물어본 것도요⁠. 물으면 알게 될까 봐 안 물었다고⁠.⁠”

복도가 조용했다⁠. 정수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꼬르륵 났다⁠.

“⁠너 내가 키웠어⁠.⁠” 노 본부장이 말했다⁠.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았다⁠.

“⁠네⁠. 그래서 말했어요⁠.⁠” 준서가 노 본부장 손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⁠. 밀어내지 않고⁠, 들어서 내려놓았다⁠. “⁠본부장님이 저한테 첫 고객 넘겨주셨잖아요⁠. 그다음 사람한테는 안 넘기셨으면 해서요⁠.⁠”

노 본부장이 나를 보았다⁠. 내가 시킨 일이라고 믿는 눈이었다⁠. 나는 시키지 않았다⁠. 시킬 수도 없었다⁠. 어젯밤 일식집 화장실에서 십오 분 동안 손만 씻던 준서는 끝내 어떻게 할지 말하지 않았다⁠. 지문이 닳도록 씻고 나온 손으로 준서는 오늘 아침 문답서에 서명했다⁠.

검사장 문이 다시 열렸다⁠. 공태림 반장이 텀블러를 들고 나왔다⁠.

“⁠노강철 본부장님⁠. 두 시 문답⁠, 지금 하시죠⁠. 확인할 게 늘었어요⁠.⁠”

*

목요일 오후⁠, 나는 참고인 문답을 마치고 7층 대기실로 돌아왔다⁠. 휴대전화에 은행 앱 알림이 와 있었다⁠. 준서와 같이 쓰던 「⁠우리 집⁠」 통장 공유 알림이었다⁠.

「⁠우리 집 — 출금 30⁠,000⁠,000원 — 받는 분 염명숙⁠」

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대기실 밖 복도로 나갔다⁠. 전화를 걸었다⁠. 준서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⁠.

“⁠통장 봤어⁠?⁠”

“⁠어⁠. 수수료 삼천팔백 중에 삼천⁠. 나머지는 회사가 배상할 거래⁠. 고객님 돈이 내 약정으로 나갔으니까⁠, 약정 몫은 내가 돌려드리는 게 맞아⁠.⁠”

“⁠그거 우리 계약금이었어⁠.⁠”

“⁠알아⁠. 그래서 내 몫만 냈어⁠. 네가 넣은 돈은 그대로 있어⁠.⁠” 준서의 목소리 너머로 차 소리가 났다⁠. “⁠고객님한테 전화했더니 우시더라⁠. 돈 때문에 우신 게 아니래⁠. 이제 아침 아홉 시에 누가 전화하냐고⁠.⁠”

전화를 끊고 대기실로 돌아오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⁠. 띄어쓰기를 한 칸도 틀리지 않은⁠, 교무실에서 쓰던 문장이었다⁠.

「⁠감사팀 아가씨⁠, 염명숙이에요⁠. 방 선생이 돈을 보냈어요⁠. 돌려보내도 안 받는대요⁠. 아가씨가 좀 말려 줘요⁠. 그리고 방 선생한테 전해 줘요⁠. 아침 아홉 시 전화는 이제 내가 걸겠다고⁠. 밥 먹었냐고⁠.⁠」

나는 답장 칸에 글자를 세 번 썼다 지웠다⁠. 마지막에 남긴 것은 한 줄이었다⁠.

「⁠네⁠, 고객님⁠. 꼭 전하겠습니다⁠. 저도 밥 먹을게요⁠.⁠」

채권 대리가 창가에서 나를 힐끔 보더니 말없이 초코우유 하나를 탁자 위로 밀어 주었다⁠. 대기실 사람들은 서로의 사연을 다 알았고⁠, 아무도 묻지 않았다⁠.

*

4월 23일 금요일 밤 아홉 시⁠, 여의도 한강공원에 비가 내렸다⁠. 우리는 마포대교 아래 계단에 우산 하나를 펴고 앉았다⁠. 회사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만 만난다는 규칙은 이제 아무 뜻도 없었다⁠. 사진은 이미 회사 전체가 보았다⁠.

“⁠나 사표 쓸까 해⁠.⁠” 준서가 강을 보며 말했다⁠.

“⁠쓰지 마⁠.⁠”

“⁠어차피 징계위원회 가면 정직이야⁠. 금감원 제재도 따로 나오고⁠. 투자권유 자격도 몇 달 정지될 거래⁠. 업계에 소문은 다 났고⁠.⁠”

“⁠사표 쓰면 노 본부장 말이 맞는 게 돼⁠. 개인 일탈한 직원이 겁먹고 도망갔다⁠. 그러면 네가 오늘 복도에서 한 말이 도망간 사람 말이 돼⁠.⁠”

“⁠가온아⁠.⁠” 준서가 우산 손잡이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⁠. “⁠너는 처음부터 감사팀이 먼저였어⁠. 녹취 붙인 날부터⁠. 그날 나 정말 화났어⁠. 아직도 조금 화나 있어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 나는 우산을 준서 쪽으로 기울였다⁠. 준서가 도로 내 쪽으로 밀었다⁠. “⁠그날 내가 녹취를 안 붙였으면⁠, 너 오늘 복도에서 그 말 못 했어⁠. 거짓말 위에 다른 거짓말을 쌓았겠지⁠. 휴대전화로 받았어요⁠, 그 위에 본부장님은 모르세요⁠, 그 위에 제 감이에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 고맙다고 해야 돼⁠?⁠”

“⁠아니⁠. 화내도 돼⁠.⁠” 비가 우산 위로 세게 떨어졌다⁠. “⁠근데 사표는 쓰지 마⁠.⁠”

준서가 일어났다⁠. 비를 맞으며 계단을 두 칸 내려갔다가 돌아보았다⁠. 넘긴 검은 머리가 비에 젖어 이마로 흘러내렸다⁠.

“⁠조사 끝날 때까지 만나지 말자⁠. 네가 내 여자친구면 네 참고인 진술도 내 여자친구 말이 돼⁠. 오늘 복도에서 노 본부장 눈 봤지⁠? 다들 그렇게 볼 거야⁠.⁠”

“⁠그건 헤어지자는 말이야⁠?⁠”

“⁠모르겠어⁠.⁠” 준서가 비 속에서 웃으려다 말았다⁠. “⁠장 마감⁠. 동시호가 없음⁠.⁠”

준서는 우산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⁠. 남색 등이 가로등 사이로 작아졌다⁠. 나는 우산을 쥔 채 계단에 앉아 있었다⁠. 우산 하나에 비가 다 떨어졌다⁠. 혼자 쓰니 우산이 넓었다⁠.

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옥경 팀장이었다⁠. 처음 받는 문자였다⁠.

「⁠서버의 3층 무선망 접속 기록이 지워졌다⁠. 4월 19일 대표 결재로 기록 보존 기한이 석 달에서 한 달로 바뀌었고⁠, 4월 20일 밤에 자동 삭제⁠. 금감원에 낸 네 외장 하드가 남은 전부다⁠. 5월 14일 감사위원회 임시회의⁠. 대표가 직접 나온다⁠.⁠」

나는 지갑을 꺼냈다⁠. 외장 하드를 넣느라 닫히지 않던 지갑이 이제 잘 닫혔다⁠. 하드는 공태림 반장의 증거 봉투 안에 있었다⁠. 비가 우산 끝에서 줄지어 떨어졌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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