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103자) · 지환 · 1월 12일

두 시

지워진 남자와 돌아온 남자 · 윤재하

채린이 회의실을 잡은 것은 월요일 오전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⁠. 시즌 두 번째 주 월요일이면 이십팔 층 사람들은 반쯤 사람이 아니다⁠. 세수를 안 하고 온 사람이 절반이고⁠, 소회의실 옷걸이에는 누군가의 여벌 셔츠가 비닐도 안 벗긴 채 걸려 있다⁠. 채린은 이 셔츠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노트북을 폈다⁠.

“⁠여기서 말씀드려도 되는데 굳이 방을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말씀하세요⁠, 듣고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매출채권 회수기간이 3분기에 백사십 일까지 늘었다가 결산 마지막 주에 예순두 일로 줄었습니다⁠. 연말에 몰아서 받는 회사도 있으니까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아니죠⁠. 그래서 통장 사본을 봤는데⁠, 12월 마지막 주에 들어온 입금이 스물세 건이고 그중 열아홉 건이 같은 날 같은 시각입니다⁠. 십사 분 안에요⁠.⁠”

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채린이 화면을 넘겼다⁠.

“⁠유 팀장님이 원장을 안 주셔서 세금계산서 합계표에서 사업자 번호를 뽑았습니다⁠. 그걸로 주말에 법인 등기부를 열아홉 통 뗐어요⁠. 한 통에 칠백 원⁠, 합계 만 삼천삼백 원⁠. 영수증은 나중에 청구하겠습니다⁠.⁠”

마지막 화면에 표가 하나 있었다⁠. 거래처 열아홉 곳⁠, 이 옆에 사업장 주소⁠. 같은 주소가 파랗게 묶여 있었다⁠. 시흥 정왕동 상가 이 층⁠, 안산 고잔동 오피스텔 1407호⁠, 시흥 배곧 공유오피스⁠, 시흥 물왕동 단독주택⁠. 열아홉 곳의 주소가 네 개였다⁠.

지환은 이 표를 오래 봤다⁠. 목구멍 안쪽이 마른 종이처럼 버석거렸다⁠. 오 년 전에 본 것이 이거였다⁠. 당시에는 열여섯 곳에 주소가 세 개였다⁠. 오 년 동안 세 곳과 주소 하나가 늘었다⁠.

“⁠이거 누구한테 보여 줬습니까⁠?⁠”

“⁠매니저님이 처음입니다⁠. 전기 조서 특기사항 담당이 매니저님이었으니까요⁠.⁠”

“⁠오 수습⁠, 이걸 조서에 올리면 작성자 칸에 오 수습 이름이 들어갑니다⁠. 그리고 두 달 뒤에 전환 심사가 있습니다⁠.⁠”

채린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도로 굳었다⁠.

“⁠그거 협박입니까⁠?⁠”

“⁠설명입니다⁠. 제가 오 년 전에 딱 그렇게 됐습니다⁠. 보고서를 올리면 파일로 남고⁠, 아무 데도 안 가고⁠, 그다음에 이름이 사라집니다⁠. 자르지는 않는데⁠, 그게 더 오래 갑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매니저님은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⁠?⁠”

“⁠더는 찾지 마십시오⁠. 찾은 건 저한테 넘기시고⁠, 오 수습은 보조로 계십시오⁠.⁠”

채린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⁠. 대신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는데⁠, 오른손 엄지가 왼손 손등을 계속 긁고 있었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저 이 시험 삼 년 준비했습니다⁠. 두 번 떨어졌고 이번이 세 번째였어요⁠. 그래서 여기 진짜로 오래 있고 싶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⁠.⁠”

“⁠근데요⁠, 오래 있으려고 못 본 척하면⁠, 오래 있어서 뭐 합니까⁠?⁠”

회의실 유리 너머로 누가 지나갔다⁠. 안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밖에서 안 들린다⁠. 지환은 이 그림자가 다 지나갈 때까지 대답을 못 했다⁠.

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⁠, 건우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⁠.

“⁠자리에 안 계셔서요⁠.⁠”

건우는 한 잔을 지환 앞에 놓으려다 화면을 봤고⁠, 잔을 쥔 채로 멈췄다⁠. 파랗게 묶인 주소 넷을 읽는 동안 건우의 목젖이 한 번 오르내렸다⁠. 잔이 책상에 닿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이거 오 년 전 거랑 같은 항목이죠⁠.⁠”

“⁠같은 항목입니다⁠.⁠”

“⁠조서 어떻게 쓰실 겁니까⁠? 오 년 전이랑 같이 가실 겁니까⁠?⁠”

“⁠같이 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남 회계사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⁠?⁠”

건우는 대답 대신 셔츠 소매를 걷었다⁠. 채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⁠, 지금 두 분이 저 빼고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냐고 물었다⁠.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⁠.

*

이날 오후 지환은 자리에서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었다⁠. 오 년 동안 거의 안 연 칸이라 레일이 한 번 걸렸고⁠, 두 번째에 덜컥 빠지면서 먼지가 형광등 빛 속으로 떠올랐다⁠. 이 안에 클리어 파일 하나가 누워 있었다⁠. 비닐이 누렇게 뜨고 모서리가 갈라진 파일 속에 A4 열한 장이 들어 있었다⁠. 2021년 3월 3일 자 별도 보고서 출력본⁠. 법인 밖으로 가져가면 안 되는 문서의 사본이라⁠, 규정대로라면 오 년 전에 파쇄했어야 했다⁠. 첫 장 맨 아래 결재란에 네 칸이 인쇄돼 있었고 작성자 칸에만 글자가 있었다⁠. 서지환⁠. 검토자 칸은 비어 있었다⁠. 이 칸에 들어가기로 했던 이름을 지환은 알고 있었다⁠. 종이에서 오래된 토너 냄새와 서랍 속 나무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⁠. 지환은 파일을 꺼내지 않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가 서랍을 닫았다⁠. 오 년 동안 이 종이 한 장만 지환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⁠.

옆자리에서 채린이 등기부 영수증 열아홉 장을 스테이플러로 찍고 있었다⁠. 한 번에 안 들어가서 세 번을 내리쳤고⁠, 세 번째에 이십팔 층 사람 여럿이 고개를 들었다⁠. 채린은 죄송하다고 말하고 네 번째를 쳤다⁠.

*

화요일 밤에는 셋이 남았다⁠. 채린은 열두 시에 보냈다⁠. 내일 아침에 시흥에서 자료를 받아 와야 하고 그건 수습이 밤새워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하자⁠, 채린은 매니저님은 왜 밤새우시냐고 되물었다⁠. 지환은 매니저는 원래 그렇다고 했고⁠, 채린은 이 말을 수첩에 받아 적는 시늉을 하고 나갔다⁠.

열두 시가 넘으면 이십팔 층은 다른 층이 된다⁠. 낮에는 전화벨과 복합기와 메신저 알림이 뒤섞여 있다가⁠, 사람이 빠지면 형광등이 내는 가느다란 전기 소리와 공조기 바람만 남는다⁠. 이 소리 위로 건우의 휴대폰이 두 번 울었다⁠.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화면에 「⁠형⁠」 한 글자가 떴다⁠. 건우는 이 글자를 끝까지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엎었다⁠. 세 번째 진동은 엎어진 채로 책상 상판을 따라 떨리다 멎었다⁠. 지환은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이 떨림이 멎을 때까지 숫자 하나를 세 번 다시 읽었다⁠. 건우가 먼저 말했다⁠. 받으면 킥오프 때 이 얼굴로 오 분 동안 웃을 거라고⁠, 그래서 안 받는다고⁠. 지환은 대답하지 않았고⁠, 건우도 대답을 바라지 않는 목소리였다⁠.

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다⁠. 송풍구 날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떨고 멎자⁠, 천장에서 내려오던 바람이 끊기면서 책상 위 조서 귀퉁이들이 일제히 내려앉았다⁠. 층 전체의 소리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⁠. 이 조용함 속에서 제일 먼저 들린 것은 건우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⁠. 길고⁠, 낮고⁠,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리였다⁠.

“⁠저녁을 안 먹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, 여기까지 다 들립니다⁠.⁠”

건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⁠. 오 년 만에 처음 듣는 웃음이었고⁠, 웃음이 끝나자 의자를 지환 쪽으로 반 바퀴 돌렸다⁠. 창 너머로 여의도 불빛이 번져 있었고⁠, 불을 켜 둔 사무실 유리에는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비쳤다⁠. 지환은 유리 속 건우를 봤다⁠. 진짜 건우를 보는 것보다 이게 쉬웠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오 년 전 3월 2일 밤에요⁠. 보고서 올리기 전날 밤⁠.⁠”

“⁠다 기억합니다⁠.⁠”

“⁠매니저님이 저한테 물어보셨습니다⁠. 검토자 칸에 이름 같이 올릴 거냐고⁠. 저는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겠다고 했고요⁠.⁠”

“⁠그 대답도 기억합니다⁠.⁠”

“⁠그날 새벽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⁠.⁠”

지환은 유리에서 눈을 뗐다⁠. 건우는 자기 손을 보고 있었다⁠.

“⁠세운정밀 대표가 제 아버지였습니다⁠. 지금 대표는 제 이복형이고요⁠. 아버지가 재혼하기 전에 낳은 사람이라 저는 스무 살에 처음 봤습니다⁠. 그날 밤 형이 아버지한테 감사팀이 뭘 찾았다고 전했답니다⁠.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고 서재에서 쓰러지셨어요⁠. 뇌출혈이었고⁠, 지금도 말을 못 하십니다⁠.⁠”

“⁠그때 왜 말 안 했습니까⁠?⁠”

“⁠말했으면 매니저님이 보고서 안 올리셨을 겁니까⁠?⁠”

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

“⁠올리셨을 겁니다⁠. 그래서 말을 안 했습니다⁠.⁠”

건우는 정리할 것도 없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⁠. 볼펜을 필통에 넣었다 뺐다⁠. 지환은 이 손을 봤다⁠.

“⁠아침 일곱 시쯤 중환자실 앞에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⁠. 차 파트너님이었는데⁠, 그때는 파트너님도 아니었죠⁠.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⁠. 네 이름 빼 줄까⁠.⁠”

“⁠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⁠?⁠”

“⁠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⁠. 대답을 안 했어요⁠. 대답 안 하면 뺀다는 뜻이라는 걸⁠, 저는 그때 몰랐습니다⁠.⁠”

건우의 목소리가 거기서 한 번 갈라졌다⁠. 건우는 기침으로 이걸 덮으려다 실패했고⁠, 이후로 한참 볼펜만 쥐고 있었다⁠. 볼펜 끝이 책상을 아주 작게 톡톡 쳤다⁠. 지환은 손을 뻗을까 하다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⁠. 손바닥 안에서 손톱이 네 개 박혔다⁠.

“⁠지금은 압니까⁠?⁠”

“⁠이제는 압니다⁠.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안산 요양병원에 계십니다⁠. 형은 석 달 만에 대표가 됐고⁠, 저는 병원 복도에서 그 공시를 휴대폰으로 봤습니다⁠. 그래서 부산에서 오 년 있었습니다⁠. 그해 여름 발령 신청을 제가 냈습니다⁠. 매니저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요⁠. 인사도 못 드리고 내려갔죠⁠.⁠”

“⁠제 이름은 누가 뺐는지 아십니까⁠?⁠”

“⁠짐작은 하고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 짐작이 맞습니다⁠. 그리고 아무도 저한테 묻지 않았습니다⁠. 빼 줄까⁠, 라는 말도 없었습니다⁠.⁠”

건우가 고개를 들었다⁠. 유리 속이 아니라 진짜 얼굴을 봤다⁠. 지환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⁠. 새벽 두 시 반의 층에는 둘밖에 없었고⁠, 둘 사이의 거리는 의자 바퀴 하나만큼이었다⁠.

“⁠남 회계사⁠, 내일부터 세운정밀 조서는 제가 씁니다⁠. 작성자 칸에 제 이름으로요⁠. 검토는 남 회계사가 하십시오⁠.⁠”

“⁠그거 파트너님이 정하는 거 아닙니까⁠?⁠”

“⁠기본값은 파트너님이 정합니다⁠. 그런데 작성자 칸은 쓰는 사람이 적어 넣는 겁니다⁠. 지우는 건 그다음 문제고요⁠.⁠”

건우는 오래 아무 말도 안 했다⁠. 그러다 걷어 올렸던 소매를 천천히 내리고 단추까지 채웠다⁠.

“⁠이번에는 내일 아침까지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⁠.⁠”

“⁠지금 대답하겠다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검토자 칸에 제 이름 넣겠습니다⁠. 형이 전화하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⁠.⁠”

지환은 가방을 들었다⁠. 일어서면서 건우의 책상 끝을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⁠. 이 이상은 하지 않았다⁠.

“⁠가시죠⁠, 편의점 김밥은 두 시 반에도 있습니다⁠.⁠”

엘리베이터 층 표시가 28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⁠. 거울 속에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⁠. 오 년 전 3월에는 거기 한 사람뿐이었다⁠.

수요일 아침 여덟 시 반⁠, 채린은 출근하자마자 공유 폴더에 올라온 조서 초안을 열었다⁠. 첫 장 결재선 작성자 칸에 서지환⁠, 검토자 칸에 남건우⁠, 이 아래 보조 칸에 오채린이 들어가 있었다⁠. 채린은 노랑 형광펜 뚜껑을 열었다가 칠할 데가 없어서 도로 닫았다⁠. 그러고는 옆자리 두 사람이 똑같이 충혈된 눈으로 똑같이 편의점 김밥 포장지를 버리는 것을 보고⁠, 두 분 어젯밤에 싸우셨냐고 물었다⁠. 둘 다 아니라고 했다⁠. 이번에는 거짓말 같지 않았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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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새벽세시2026.09.21· 2화

    새벽 두 시에 공조기가 꺼지는 곳이 어디예요? 우주선 같기도 하고 연구소 같기도 해서요?

    • 윤재하작가2026.09.22

      어디인지는 1화에 적어 두었어요. 둘만 남는 시간이라는 게 더 중요해서 장소는 일부러 작게 썼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