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092자) · 지환 · 1월 16일

작성자

지워진 남자와 돌아온 남자 · 윤재하

조서는 금요일 오후 두 시에 올라갔다⁠. 전자결재 화면에서 상신 버튼을 누르자 작은 확인 창이 떴다⁠. 작성자 서지환으로 상신하시겠습니까⁠. 지환은 이 한 줄을 읽는 데 삼 초를 썼다⁠. 오 년 동안 이 창을 본 적이 없었다⁠. 후배 조서를 고쳐 돌려보낼 때는 이 창이 후배들 화면에 떴고⁠, 지환의 화면에는 열람 완료라는 회색 글자만 남았다⁠. 확인을 누르자 결재선 첫 칸에 지환의 이름이 박혔다⁠. 검은 글씨가 아니라 파란 링크였다⁠. 누르면 이름 주인의 소속과 직급과 사번이 뜬다⁠. 지환은 자기 이름을 한 번 눌러 봤다⁠. 감사본부⁠, 매니저⁠, 1204로 시작하는 사번까지 빠짐없이 거기 있었다⁠.

사십 분 만에 메신저가 울렸다⁠. 차미숙⁠, 셋 다 들어와⁠.

파트너실에서 미숙은 앉아 있지 않았다⁠. 통유리 앞에 서서 셋이 들어오는 걸 봤고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⁠. 셋은 문 앞에 나란히 섰다⁠. 채린이 가운데였고⁠, 지환은 채린의 어깨가 자기 팔꿈치 높이에서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다⁠.

“⁠이거 뭔가⁠?⁠”

“⁠세운정밀 매출채권 조서입니다⁠.⁠”

“⁠뭔지는 나도 알아⁠. 내용을 물었어⁠.⁠”

“⁠매출채권 회수기간 이상입니다⁠. 12월 마지막 주 입금 열아홉 건이 십사 분 안에 들어왔고⁠, 그 열아홉 곳의 사업장 주소가 네 개입니다⁠. 한정 사유가 됩니다⁠.⁠”

미숙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⁠. 앉고 나서 셋을 올려다봤는데⁠, 올려다보는 사람이 더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⁠.

“⁠서 매니저⁠, 오 년 전에 같은 걸 올렸지⁠. 그때 내가 뭐라고 했나⁠?⁠”

“⁠이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⁠, 라고 하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지금도 그 말은 같아⁠. 회사 거래처가 한 건물에 모여 있다고 가짜가 되는 건 아니야⁠. 산단 회사들 원래 그래⁠.⁠”

“⁠파트너님⁠, 오 년 전에는 열여섯 곳에 주소가 세 개였습니다⁠. 지금은 열아홉 곳에 네 개입니다⁠. 판단할 일이 아니었으면 오 년 동안 늘지는 말았어야 합니다⁠.⁠”

미숙이 펜을 놓았다⁠. 그리고 건우를 봤다⁠.

“⁠남 회계사⁠, 검토자 칸에 이름을 넣었네⁠. 그 회사 대표가 누군지 알고⁠?⁠”

“⁠압니다⁠, 제 형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러면 이해관계자니까 이 건에서 빠져야 해⁠. 그게 규정이야⁠.⁠”

건우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옆에서도 보였다⁠. 건우는 소매를 걷지 않았다⁠. 두 손을 바지 옆선에 붙인 채였다⁠.

“⁠파트너님⁠, 오 년 전에도 그 규정은 있었습니다⁠. 그때는 저한테 빠지라고 안 하셨습니다⁠. 중환자실 앞으로 전화하셔서 이름 빼 줄까⁠, 물으셨습니다⁠.⁠”

파트너실 안이 조용해졌다⁠. 통유리 너머 층에서는 전화가 울리고 복합기가 돌고 있었는데⁠, 이 소리가 유리에 막혀 먼 데서 나는 것처럼 뭉개졌다⁠. 미숙은 천천히 의자를 돌려 한강 쪽을 봤다⁠.

“⁠남 회계사⁠, 그 말을 여기서 하면 나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야⁠.⁠”

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미숙이 다시 돌아앉아 이번에는 채린을 봤다⁠.

“⁠오 수습⁠, 이거 처음 찾은 게 자네라고 들었는데⁠. 작성자 칸에 이름이 없네⁠.⁠”

채린이 지환을 봤다⁠. 지환이 먼저 말했다⁠.

“⁠그건 제가 뺐습니다⁠. 수습이 쓸 조서가 아닙니다⁠.⁠”

“⁠그렇지⁠, 수습이 쓸 조서는 아니지⁠.⁠”

미숙은 고개를 끄덕였고⁠,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쳤다⁠.

“⁠그런데 서 매니저⁠, 그거 오 년 전에 내가 한 거랑 뭐가 다른가⁠? 나도 자네 이름을 뺐어⁠, 자네를 위해서⁠. 지금 자네는 오 수습 이름을 뺐지⁠. 저 친구를 위해서고⁠. 그러면 나랑 자네가 뭐가 다르지⁠?⁠”

지환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입안이 한 번에 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⁠. 오 년 동안 준비한 말이 많았는데 이 질문에 맞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⁠.

채린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⁠.

“⁠그건 다릅니다⁠.⁠”

“⁠오 수습⁠, 자네한테 묻지 않았어⁠.⁠”

“⁠파트너님⁠, 매니저님은 이름을 빼겠다고 저한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⁠. 왜 빼는지⁠, 빼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다 말씀하셨어요⁠. 파트너님은 오 년 전에 매니저님한테 말씀하셨습니까⁠?⁠”

채린의 목소리가 떨렸다⁠. 떨리는데 말은 한 번도 안 끊겼다⁠. 미숙은 채린을 오래 봤다⁠.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고⁠, 오래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오 수습⁠, 전환 심사가 두 달 뒤지⁠. 지금 이 방에서 나가면 나는 오늘 일을 못 본 걸로 할 수 있어⁠. 조서는 다시 쓰면 되고⁠.⁠”

채린이 손에 든 노트북을 열었다⁠. 결재 화면이 이미 떠 있었다⁠. 수정 요청 버튼을 누르고 작성자 칸에 커서를 놓더니⁠, 지환 쪽을 한 번 봤다⁠. 눈이 젖어 있었는데 흔들리지 않았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빼 주셔서 감사합니다⁠. 근데 그거 제가 정할 일입니다⁠.⁠”

키보드를 세 번 쳤다⁠. 성과 이름과 엔터⁠. 작성자 칸에 이름이 서지환⁠, 오채린 둘이 됐다⁠. 이 아래 검토자 칸에 남건우⁠.

“⁠최종 결재는 파트너님이십니다⁠.⁠”

지환의 목소리가 그제야 돌아왔다⁠.

“⁠지우실 수 있습니다⁠. 그런데 지우면 누가 언제 지웠는지가 같이 남습니다⁠.⁠”

미숙이 지환을 봤다⁠.

“⁠서 매니저⁠, 오 년 동안 그거 세고 있었나⁠?⁠”

“⁠세지는 않았고⁠, 오 년 동안 알게 됐습니다⁠.⁠”

미숙이 이 말에 웃었다⁠. 소리를 내서 아주 짧게 웃었고⁠, 웃음이 끝나자 손을 내저었다⁠.

“⁠이제 나가 봐⁠.⁠”

*

문이 닫히자 채린이 복도 벽에 등을 붙였다⁠. 무릎이 먼저 풀리고 등이 다음에 미끄러져서⁠, 벽을 따라 한 뼘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⁠.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⁠.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가슴에 안았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저 잘렸습니까⁠?⁠”

“⁠저도 모릅니다⁠.⁠”

“⁠그거 위로 아닙니다⁠.⁠”

“⁠모르는 게 맞습니다⁠. 위로는 아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⁠.⁠”

채린이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⁠. 웃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⁠. 건우가 옆에서 정수기 종이컵에 물을 받아 와 내밀었고⁠, 채린은 이걸 한 번에 다 마시고 컵을 구겼다⁠. 그리고 구긴 컵을 다시 펴서 보더니⁠, 이거 재활용이 되냐고 물었다⁠. 건우는 모른다고 했다⁠. 셋 다 이 자리에 서서 이유 없이 한참 웃었다⁠. 지나가던 다른 팀 매니저가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고⁠, 셋 중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⁠.

*

밤 열 시에 미숙이 지환의 자리로 왔다⁠.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든 채였다⁠. 파트너가 퇴근길에 매니저 자리에 서는 일은 드물어서⁠, 남아 있던 사람 여섯이 동시에 모니터 뒤로 머리를 숙였다⁠. 미숙은 지환의 책상 모서리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 서 있었다⁠. 코트 소매에서 바깥 공기 냄새가 났다⁠. 한겨울 여의도 강바람에 섞인 매연과⁠, 누군가의 담배 연기가 옷감에 밴 냄새였다⁠.

“⁠서 매니저⁠, 하나만 말해 두지⁠. 자네 이름을 뺀 건 나야⁠. 그건 내가 했어⁠. 그런데 오 년 전 그 보고서를 멈춘 건 내가 아니야⁠.⁠”

지환은 의자를 돌리지 않았다⁠. 모니터에 비친 미숙의 얼굴을 봤다⁠.

“⁠그럼 누굽니까⁠?⁠”

“⁠그건 자네가 찾아⁠. 나한테 들었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내 말이 되니까⁠.⁠”

“⁠그 사람이 아직 이 법인에 있습니까⁠?⁠”

미숙은 대답하지 않고 층 끝 복도 쪽으로 턱을 한 번 들었다가 내렸다⁠. 거기에는 불 꺼진 유리문이 하나 있었다⁠. 품질관리실⁠. 감사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나갔다 온 사람들의 서류를 보는 방이었다⁠. 미숙은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⁠, 걸어가는 동안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⁠.

*

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다⁠. 채린은 열두 시에 보냈고 층에는 둘이 남았다⁠. 결재 화면은 오후 그대로였다⁠. 작성자 칸에 이름 둘⁠, 검토자 칸에 남건우⁠, 상태는 검토 대기⁠. 검토자가 검토 완료를 눌러야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데⁠, 건우는 아홉 시간째 이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었다⁠.

“⁠검토 완료 안 누르십니까⁠?⁠”

“⁠누르기 전에 조서를 한 번 더 보고 있습니다⁠. 검토자니까 첫 장부터요⁠.⁠”

송풍구가 멎은 층은 종이 냄새로 차 있었다⁠. 지환은 의자를 굴려 건우 자리 옆으로 갔다⁠. 두 사람의 의자 팔걸이가 부딪쳤다가 떨어졌다⁠. 모니터에는 조서 열일곱 쪽이 떠 있었고⁠, 건우는 마우스 휠을 한 칸씩 내리면서 숫자 하나하나에 커서를 올렸다 내렸다⁠. 오 년 전 막내 때 지환이 가르친 방식이었다⁠. 합계는 맨 아래부터 거꾸로 올라오면서 본다⁠. 위에서 내려오면 눈이 먼저 맞다고 믿어 버리니까⁠.

열일곱 번째 쪽에서 건우의 손이 멈췄다⁠. 커서가 검토 완료 버튼 위에 떠 있었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오 년 전 그날 밤에 왜 저한테 먼저 물어보셨습니까⁠?⁠”

지환은 모니터를 봤다⁠. 대답이 입 안에서 두 번 돌았다⁠.

“⁠혼자 올리기 무서웠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 말은 그때 안 하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때는 못 했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지금은요⁠?⁠”

“⁠지금은 방금 했습니다⁠.⁠”

건우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눌렀다⁠. 딸깍 소리가 공조기 없는 층에서 이상할 만큼 크게 울렸다⁠. 검토자 칸 옆에 시각이 찍혔다⁠. 오전 두 시 십칠 분⁠. 지환은 이 숫자를 봤고⁠, 책상 모서리를 짚고 있던 제 손등 위로 건우의 손이 잠깐 얹혔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⁠. 온기가 남은 자리가 손등 가운데 동전 하나만 했다⁠. 둘 다 이 얘기는 하지 않았다⁠. 화면 속 결재선은 승인자 칸에서 멈춘 채 비어 있었다⁠. 최종 파트너가 사람을 지정해야 채워지는 칸이었다⁠.

*

월요일 아침⁠, 결재 화면에 최종 칸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⁠. 차미숙 파트너의 한 줄이었다⁠. 보류 — 거래처 실사 후 재상신할 것⁠. 이름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다⁠.

건우가 이거 미루는 거냐고 물었다⁠. 지환은 고개를 저었다⁠. 덮으려면 그냥 승인하고 한정 문구를 빼면 된다고⁠, 실사를 가라는 건 증거를 더 가져오라는 뜻이라고 말했다⁠.

같은 날 오후⁠, 채린 앞으로 인사팀 메일이 왔다⁠. 수습 회계사 전환 심사 일정 변경 안내⁠. 당초 3월 20일에서 변경 2월 11일⁠. 사유 칸에는 심사위원 일정 조정에 따름이라고 적혀 있었다⁠. 한 달 하고 아흐레가 당겨졌다⁠. 참조 칸에 담당 매니저로 지환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는데⁠, 이 메일이 지환의 이름을 참조에 넣은 첫 인사 메일이라는 것을 지환은 읽으면서 알았다⁠. 이름을 넣어 줄 때는 이렇게 넣는구나 싶었다⁠. 뒷목이 차가워졌다가 천천히 달아올랐다⁠.

“⁠삼십구 일입니다⁠.⁠”

채린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⁠.

“⁠공부하던 삼 년 동안 시험까지 남은 날 세는 건 제가 제일 잘했어요⁠. 그래서 알아요⁠. 당긴 사람은 제가 그 삼십구 일 동안 조서를 못 볼 거라고 생각한 거죠⁠.⁠”

지환은 대답 대신 복도 끝을 봤다⁠. 월요일 오후의 품질관리실 유리문 안쪽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⁠,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사람 발끝만 보였다⁠.

채린은 이 메일을 읽고 형광펜 네 자루를 필통에 넣었다⁠. 노랑만 다시 꺼냈다⁠. 그러고는 모니터를 지환 쪽으로 돌렸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실사 언제 갑니까⁠? 저 2월 11일 전에 다 보고 싶습니다⁠.⁠”

3화는 어땠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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