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104자) · 지환 · 1월 5일

파견자 명단

지워진 남자와 돌아온 남자 · 윤재하

감사 시즌에는 이십팔 층 불이 안 꺼진다⁠. 정확히는 새벽 두 시에 한 번 꺼지는 것이 있는데⁠, 불이 아니라 공조기다⁠. 천장 송풍구에서 밤새 흘러나오던 미지근한 바람이 두 시 정각에 멎으면⁠, 파티션 열두 줄 사이에 깔려 있던 웅웅거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빠지고 이 자리로 종이 냄새가 올라온다⁠. 복합기가 토해 낸 조서 더미와 바인더 속 누런 전기 조서와 식은 커피가 섞인 냄새다⁠. 그제야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는지 안다⁠.

서지환은 이 시간을 좋아했다⁠.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고⁠, 오 년 동안 두 시에 자리에 남아 있었을 뿐이다⁠. 이 시간에 후배들이 낮에 올린 조서를 하나씩 열었다⁠. 숫자가 틀린 줄에 연필로 점을 찍고⁠, 근거가 하나 빠진 문단 옆에 짧게 적고⁠, 아침이 되기 전에 고친 파일을 작성자에게 돌려보냈다⁠. 조서는 이후배의 이름으로 올라갔다⁠. 지환의 이름은 어디에도 붙지 않았고⁠, 아무도 이걸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⁠. 오 년이 그렇게 지나면 이상한 것도 자리가 된다⁠.

1월 5일 월요일 아침⁠, 감사본부 전체 메일로 배정표가 왔다⁠. 회사 이름 열두 개가 줄지어 있었고 맨 위가 세운정밀이었다⁠. 시흥 시화산단에서 자동차 시트 레일을 만드는 코스닥 회사⁠, 직원 육백사십 명⁠. 담당 매니저 칸에 서지환⁠, 이 아래 파견 인력 칸에 부산 지점 남건우⁠. 지환은 이 줄을 오래 봤다⁠. 오래 봤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챌 만큼 오래 봤고⁠, 그러는 동안 마우스를 쥔 손가락이 휠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⁠. 오 년 전 3월에 별도 보고서를 올린 회사가 세운정밀이었고⁠, 이 보고서 검토자 칸에 이름을 넣기로 했다가 빠진 사람이 남건우였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저 어디 앉습니까⁠?⁠”

수습 오채린이 파일 한 뭉치를 안고 서 있었다⁠. 입사 일 년 차⁠, 이번 시즌 조서 보조⁠. 시즌 첫날이라 다들 머리가 반쯤 눌려 있는데 채린은 세수를 하고 화장까지 하고 왔다⁠. 이 층에서 제일 이상한 일이 그거였다⁠.

“⁠옆줄 두 자리 가운데 창 쪽입니다⁠. 안쪽은 부산에서 오는 분 자리고요⁠. 출력은 3호기로 하지 마십시오⁠.⁠”

“⁠3호기가 왜요⁠?⁠”

“⁠금요일마다 종이를 씹습니다⁠.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괜찮을 겁니다⁠.⁠”

채린은 이게 농담인지 한참 생각하는 얼굴로 앉았다⁠. 앉자마자 필통에서 형광펜 네 자루를 꺼내 색깔 순서대로 늘어놓았는데⁠, 노랑이 제일 앞이었다⁠. 지환은 이걸 보고 속으로 한 주는 가겠다고 생각했다⁠. 노랑이 제일 먼저 닳는 사람은 대개 한 주 안에 뭘 찾는다⁠.

*

파트너실은 층 북쪽 끝의 통유리 방이다⁠. 안에서 밖은 보이는데 밖에서 안은 잘 안 보이게 필름을 붙였고⁠, 붙일 때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⁠. 감사본부 자리에서 이 방까지 걸어가는 데 사십 초가 걸리는데⁠, 이 사십 초 동안 파티션 위로 머리들이 한 번씩 올라왔다가 내려간다⁠. 차미숙은 창 쪽으로 의자를 돌린 채 한강을 보고 있다가 지환이 들어오자 돌아앉았다⁠.

“⁠세운정밀⁠, 자네가 봐⁠. 남 회계사가 붙고⁠.⁠”

“⁠메일 봤습니다⁠.⁠”

“⁠오 년 만이지⁠. 이번에는 조용히 가자⁠.⁠”

지환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한 번 골랐다⁠. 목 뒤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⁠.

“⁠조용히라는 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서 매니저⁠. 그때 위에서는 자네를 내보내라고 했어⁠. 나는 이름만 뺐고⁠. 자르라는 걸 이름만 뺀 거야⁠. 지금도 매니저고 급여도 그대로지⁠. 오 년이면 사람이 좀 편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⁠?⁠”

“⁠파트너님⁠, 작년에 제가 손본 조서가 몇 건인지 아십니까⁠?⁠”

미숙이 펜을 내려놓았다⁠. 대답은 없었다⁠.

“⁠백 건이 넘습니다⁠. 본부에서 제일 많습니다⁠. 그중에 제 이름이 검토자 칸에 들어간 건 영 건입니다⁠. 승인자도 영 건이고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 오늘 뭘 하겠다는 건가⁠?⁠”

“⁠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⁠. 제 이름이 없으면 제가 조용히 가든 시끄럽게 가든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⁠.⁠”

미숙은 이 말을 끝까지 듣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⁠. 화가 나면 목소리 대신 손가락을 쓴다⁠.

“⁠세운정밀 수임료가 일 년에 구억이야⁠. 이 층에 그 돈으로 성과급 받는 사람이 스무 명이고⁠. 자네 이름 하나 때문에 그 스무 명 설 연휴를 흔들 건가⁠?⁠”

“⁠제 이름은 오 년 전에 파트너님이 가져가셨습니다⁠. 흔들 게 없습니다⁠.⁠”

미숙은 의자를 다시 창 쪽으로 돌렸다⁠. 유리 너머 강변로에 차들이 소리 없이 흘렀다⁠.

“⁠나가 봐⁠.⁠”

돌아오는 사십 초 동안 파티션 위로 머리들이 또 올라왔다 내려갔다⁠. 지환은 자리에 앉아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⁠. 컵을 내려놓을 때 바닥이 책상에 두 번 닿았다⁠. 한 번에 내려놓으려 했는데 손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⁠. 이 두 번째 소리를 옆자리 채린이 들었을까 봐 모니터 볼륨 버튼을 괜히 한 번 눌렀다⁠. 채린은 형광펜 네 자루를 다시 줄 세우고 있었고⁠,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는 데 서툴렀다⁠.

*

남건우는 오후 세 시에 캐리어를 끌고 왔다⁠. 부산에서 KTX를 타고 곧장 온 모양이었고 셔츠 등판이 구겨져 있었다⁠. 이 층에서 이 년을 일한 사람이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⁠. 바퀴 소리가 파티션 사이를 곧게 지나와 지환의 자리 앞에서 멈췄다⁠.

“⁠오랜만입니다⁠, 매니저님⁠.⁠”

“⁠자리는 안쪽입니다⁠. 짐 푸시고 전기 조서부터 보십시오⁠. 킥오프는 수요일 시흥입니다⁠.⁠”

“⁠오 년 만인데 그게 답니까⁠?⁠”

지환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⁠. 건우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더니 셔츠 소매를 한 번 걷었다⁠. 오 년 전에도 긴장하면 그랬다⁠. 한겨울인데 걷어 올린 팔뚝에 부산 볕에 탄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⁠.

이 주 내내 두 사람 사이로는 서류만 오갔다⁠. 건우가 매출채권 명세를 뽑아 넘기면 지환이 여백에 연필로 두 줄을 적어 돌려주었고⁠, 건우는 이 두 줄을 고쳐 다시 넘겼다⁠. 종이 끝이 두 손 사이에서 잠깐 휘었다가 펴졌다⁠. 말은 없었다⁠. 채린은 이 사이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⁠, 수요일 아침에 참지 못하고 두 분 원래 이렇게 말이 없냐고 물었다⁠. 지환은 업무 중이라고 했고⁠, 건우는 매니저님이 원래 이렇다고 했다⁠. 채린은 둘 다 거짓말 같다고 하고 노랑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⁠.

*

킥오프는 수요일 오후 시흥 세운정밀 본사 삼 층 회의실에서 했다⁠. 산단 바람은 바다 냄새에 쇳가루가 섞여 있어서⁠, 주차장에서 건물 입구까지 걷는 동안 입안이 조금 비렸다⁠. 공장동 쪽에서 프레스가 일정한 간격으로 쿵 내려앉을 때마다 발밑 보도블록이 아주 약하게 떨렸다⁠. 회의실 벽에는 창업주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⁠. 남정호⁠, 1987년 창업⁠. 사진 속 남자는 작업복 차림으로 프레스 앞에 서서 카메라가 아니라 기계를 보고 있었다⁠.

재무팀장 유정란이 자료 목록을 나눠 주고 일정표를 읽었다⁠. 목소리가 차분하고 빨랐다⁠. 채린이 매출채권 거래처 원장을 첫 주에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⁠, 유정란은 이번 주는 결산 마감 때문에 어렵다고 웃으며 말했다⁠. 웃음이 입가에서만 움직였다⁠.

대표 남건혁은 회의가 시작되고 십 분 뒤에 들어왔다⁠. 마흔일곱⁠, 짙은 남색 양복⁠, 누구에게나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⁠. 남건혁은 미숙과 악수하고⁠, 유정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⁠, 건우 앞에서 멈춰 크게 웃었다⁠.

“⁠우리 막내 회계사님⁠. 부산에서 고생 많았지⁠?⁠”

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⁠. 건우가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고⁠, 소매를 또 걷었다⁠. 남건혁은 다음에 지환을 봤다⁠. 오래 보지 않았다⁠. 명함을 읽는 사람처럼 한 번 훑었다⁠.

“⁠서 매니저님이시구나⁠. 오 년 만이네요⁠. 아직 계셨구나⁠.⁠”

“⁠네⁠, 있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이번엔 우리 막내가 있으니까 편하게들 하시죠⁠. 서로 아는 사이끼리 얼굴 붉힐 일 있겠습니까⁠?⁠”

남건혁은 앉지 않고 나갔다⁠. 문이 닫히고 나서야 채린이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는데⁠, 지환이 곁눈으로 보니 「⁠막내⁠?⁠」라는 두 글자에 물음표가 세 개 붙어 있었다⁠. 돌아오는 차 안에서 건우는 창밖 방조제만 봤고⁠, 채린은 두 번 입을 열었다가 두 번 다 닫았다⁠.

이날 밤 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을 때⁠, 층에는 둘이 남아 있었다⁠. 지환은 창 쪽 끝자리에⁠, 건우는 이 옆 안쪽 자리에⁠. 송풍구가 멎자 건우의 키보드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고⁠, 건우도 이걸 느꼈는지 손을 멈췄다⁠. 한동안 층 전체에서 들리는 것은 둘 중 누군가가 삼키는 침 소리와 창밖 여의도 대로를 지나가는 택시의 먼 바퀴 소리뿐이었다⁠. 지환은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삼십 분 동안 한 줄도 넘기지 않았다⁠. 두 시 사십 분에 건우가 먼저 가방을 들었다⁠. 인사는 없었다⁠. 대신 지환의 키보드 옆에 명세서 한 장이 놓여 있었고⁠, 오른쪽 위에 노란 접착 메모가 붙어 있었다⁠. 「⁠3쪽 합계 안 맞습니다⁠. 제 실수입니다⁠. 내일 아침까지 고치겠습니다⁠.⁠」 오 년 전 막내 때와 같은 글씨였다⁠. 받침 ㅁ을 늘 네모 대신 동그라미처럼 굴려 쓰는 글씨⁠. 지환은 이 메모를 떼어 서랍에 넣으려다 말고 명세서에 도로 붙였다⁠.

*

금요일 밤 열한 시⁠, 3호기가 예고대로 종이를 씹었다⁠. 채린은 복합기 옆구리를 열고 구겨진 종이를 빼내다가 손가락에 토너를 묻힌 채로 태블릿을 들고 왔다⁠.

“⁠매니저님⁠, 오 년 전 조서에 이상한 게 있습니다⁠.⁠”

화면에 특기사항 한 줄이 떠 있었다⁠. 「⁠매출채권 회수기간 관련 — 별도 보고⁠」 이 아래 연결 문서 칸이 비어 있었다⁠.

“⁠별도 보고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⁠?⁠”

“⁠없으면 없는 겁니다⁠.⁠”

“⁠없을 수가 있습니까⁠? 그리고 여기요⁠, 이 조서 결재선에 매니저님 이름이 없어요⁠. 담당은 매니저님이었는데요⁠.⁠”

지환은 대답 대신 자기 결재 이력을 열었다⁠. 조회 범위를 오 년으로 걸자 네 줄이 떴다⁠. 작성자 0⁠, 검토자 0⁠, 승인자 0⁠, 열람자(⁠최근 삼십 일⁠) 212⁠. 화면 맨 아래에 작은 회색 글씨로 안내가 붙어 있었다⁠. 열람 이력은 30일간 보관 후 자동 삭제됩니다⁠. 오 년 동안 새벽마다 연 조서들은 이 한 줄 아래로 전부 빠져나가고 없었다⁠.

“⁠이게 매니저님 거예요⁠? 오 년 치가요⁠?⁠”

“⁠오 수습⁠, 그거 찾지 마십시오⁠.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요⁠.⁠”

“⁠왜요⁠? 제가 찾으면 안 되는 건가요⁠, 아니면 찾아도 소용이 없는 건가요⁠?⁠”

“⁠둘 다입니다⁠. 오 수습 전환 심사가 3월이죠⁠. 그때까지는 조서 보조만 하십시오⁠.⁠”

채린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⁠. 대답을 고르는 동안 태블릿 모서리를 쥔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⁠.

채린은 태블릿을 내리면서 지환을 봤다⁠. 토너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문지르면서도 눈은 한 번도 비키지 않았다⁠. 지환은 이 눈을 알고 있었다⁠. 오 년 전 3월⁠, 별도 보고서를 올리러 가던 아침에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지환을 마주 보던 눈이었다⁠.

1화는 어땠나요?

댓글 1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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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윤재하작가2026.10.09· 1화

    작가 윤재하입니다. 결재선에서 이름만 빠진 감사인의 이야기입니다. 1화의 파견자 명단을 읽고, 여러분의 일터에도 일은 하는데 칸에 없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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