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387자)

졸업함

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· 도결애

목요일 새벽 다섯 시⁠, 예림 언니는 라희 옆 함지 앞에 서서 쌀을 씻었다⁠. 두 사람의 팔꿈치가 쌀을 휘저을 때마다 부딪쳤다⁠. 부딪칠 때마다 라희가 웃었다⁠. 예림 언니는 내 함지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⁠. 나는 맞은편 함지에서 쌀을 씻으며 예림 언니의 손을 보았다⁠. 노점 철판 앞에서 굳은 손이 찬물에 들어가자 금방 빨개졌다⁠.

“⁠예림 언니 손 빨라⁠.⁠” 짠물이 감탄했다⁠. “⁠쌀 씻는 데 재능 있어⁠.⁠”

“⁠컵밥집 육 년 하면 다 빨라져⁠.⁠” 예림 언니가 쌀을 쥐었다 놓았다⁠. 이백원이 옆에서 숫자를 늘어놓자 예림 언니가 끊었다⁠. “⁠이백이⁠, 쌀 앞에서 계산하지 마⁠. 쌀이 쫄아⁠.⁠”

“⁠이백이요⁠?⁠”

“⁠이백원은 길어⁠. 이백이 해⁠.⁠”

식구들이 웃었다⁠. 이백원은 이백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안경을 고쳐 쓰며 따라 웃었다⁠. 예림 언니는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식구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⁠. 나만 식구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⁠.

아침 식탁에서 예림 언니는 밥을 두 공기 먹었다⁠. 첫 공기는 빨랐고⁠, 두 번째 공기는 라희가 옆에서 “⁠천천히⁠” 하고 말할 때마다 숟가락을 멈췄다⁠. 동생이 언니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하는 식탁이었다⁠. 예림 언니의 배에서는 더 이상 빈 냄비 소리가 나지 않았다⁠. 나는 빈 냄비 소리가 사라진 것이 기뻤고⁠, 기쁜 만큼 무서웠다⁠.

*

점심이 끝나고 예림 언니의 동의서를 들고 2층에 올라간 것도 나였다⁠. 이사장실 포스트잇에 「⁠설예림 동의서 — 오늘⁠」이 붙어 있었다⁠. 예림 언니는 라희의 침대에 걸터앉아 라희의 확인서를 보고 있었다⁠. 내가 종이와 볼펜을 내밀자 예림 언니가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보았다⁠.

“⁠네가 갖고 왔네⁠.⁠”

“⁠제 일이에요⁠.⁠”

“⁠읽어 줘 봐⁠. 너 법 좋아하잖아⁠.⁠” 예림 언니가 비웃듯 말했다⁠. 비웃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⁠.

나는 두 번째 줄을 읽었다⁠. “⁠참여자는 영원하우스의 공동생활에 참여하며⁠, 공동 부엌의 봉사 활동에 함께한다⁠.⁠” 세 번째 줄도 읽었다⁠. “⁠숙식비는 봉사 공제와 같은 금액으로 정리한다⁠.⁠” 읽는 내 목소리가 이사장실 프린터 소리처럼 납작했다⁠.

“⁠봉사 좋네⁠.⁠” 예림 언니가 볼펜을 받아 들었다⁠. “⁠나 원래 봉사 좋아해⁠. 노점에서 육 년 동안 남은 떡 봉사했어⁠.⁠”

예림 언니는 이름을 또박또박 썼다⁠. 설예림⁠. 마지막 획을 길게 끌었다⁠. 서명이 끝나자 종이를 나한테 돌려주지 않고 라희의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⁠.

“⁠가져가⁠. 네가 가져가⁠.⁠”

나는 베개 위의 종이를 집었다⁠. 잉크가 아직 젖어 있었다⁠. 반지하왕의 잉크가 손가락에 남긴 얼룩 위로 예림 언니의 잉크가 겹쳐 묻었다⁠.

*

오후 세 시⁠, 공부방에서 노동법 기본서를 폈다⁠. 표지가 닳아 모서리가 둥글었다⁠. 석 달 동안 공기업 필기 문제를 풀려고 읽던 책이었다⁠. 「⁠근로기준법⁠」 장을 펴고 조문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⁠. 임금⁠, 근로시간⁠, 해고⁠. 손가락이 스물한 번째 조문에서 멈췄다⁠.

「⁠제21조(⁠전차금 상계의 금지⁠) 사용자는 전차금이나 그 밖에 근로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전대채권과 임금을 상계하지 못한다⁠.⁠」

전차금은 일하기 전에 미리 빌려준 돈이었다⁠. 상계는 서로 갚을 돈을 맞바꿔 지우는 일이었다⁠.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월급과 맞바꿔 지우면 안 된다는 조문이었다⁠. 시험에 자주 나오는 조문이라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⁠. 나는 밑줄을 손톱으로 따라 그었다⁠.

영원하우스의 동의서에는 일이라는 말이 없었다⁠. 봉사였다⁠. 봉사로 지은 밥을 골목 고시원 사장들이 돈을 내고 사 갔다⁠. 돈은 한솥살림으로 들어갔다⁠. 돈을 받고 파는 밥을 짓는 일은 봉사가 아니었다⁠. 일이었다⁠. 일이면 한솥살림은 사용자였고⁠, 식구들은 근로자였다⁠. 식구들의 빚을 사 온 주인이 식구들에게 일을 시키고⁠, 일한 값을 빚과 맞바꿔 지우고 있었다⁠.

나는 공책에 숫자를 썼다⁠. 새벽 다섯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⁠, 하루 아홉 시간⁠. 한 달을 최저임금으로만 쳐도 백이십만 원보다 훨씬 컸다⁠. 숙식비를 다 빼도 남았다⁠. 곰국은 열다섯 달을 일했다⁠. 곰국이 받아야 할 돈이 곰국의 빚보다 클 수도 있었다⁠.

공부방 태블릿에서 낮 뉴스가 작게 흘렀다⁠. 「⁠국제 쌀값 넉 달 연속 상승 … 아시아 수입국 비상⁠」 이백원이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⁠. 쌀이 비싸지면 우리가 씻는 쌀도 비싸지는 거냐고⁠. 짠물이 대답했다⁠. 우리 쌀은 원래 공짜라 비싸질 게 없다고⁠. 두 사람 다 웃었고⁠, 나는 웃지 못했다⁠. 공짜인 쌀을 씻는 손도 공짜였다⁠.

필요한 것은 셋이었다⁠. 밥을 판 돈이 오간 종이⁠, 식구들이 일한 시간⁠, 그리고 줄지 않은 잔액⁠. 나는 공책에 세 줄을 쓰고 공책을 덮었다⁠. 셋 다 이 집 안에 있었고⁠, 셋 다 내 것이 아니었다⁠.

*

금요일 새벽 배달 길⁠, 은행나무고시원 부엌에서 창길이 김밥 한 줄을 들고 시계를 보고 있었다⁠. 편의점에서 다섯 시 오십구 분에 반값이 되는 김밥이었다⁠. 지금은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⁠. 창길은 김밥을 사지 않고 들고만 왔다⁠. 반값이 될 때까지 들고 기다렸다가 도로 가서 살 생각이었다⁠.

“⁠총무님⁠, 영수증이요⁠.⁠”

“⁠또⁠?⁠”

“⁠사장님이 한솥살림에 낸 반찬 값 영수증이요⁠. 한 달에 한 장씩 오잖아요⁠.⁠”

창길이 김밥을 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다⁠. 팔짱을 꼈다⁠.

“⁠그거 주면 나 어떻게 되는데⁠? 사장님이 알면 나 방 빼야 돼⁠. 공짜 방⁠. 봉투도 끊기고⁠. 시험 두 달 남았어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⁠”

“⁠알면서 왜 해⁠?⁠” 창길이 라희와 같은 말을 했다⁠. 라희와 같은 얼굴이었다⁠. “⁠너 맨날 사람들한테 알면서 왜 하냐는 소리 듣지⁠?⁠”

“⁠요즘 자주 들어요⁠.⁠”

창길이 웃었다⁠. 웃다가 냉장고 위 김밥을 다시 집었다⁠. 시계를 보았다⁠. 다섯 시 사십삼 분이었다⁠.

“⁠적시소비 알지⁠? 필요한 걸 필요할 때 딱 사는 거⁠. 영수증도 똑같아⁠. 딱 그때가 있어⁠.⁠” 창길이 김밥을 흔들었다⁠. “⁠지금은 아직 아니야⁠.⁠”

“⁠그때가 언제예요⁠?⁠”

“⁠나도 몰라⁠. 근데 지금은 아니야⁠.⁠” 창길은 김밥을 들고 편의점으로 갔다⁠. 십육 분 일찍 가서 계산대 앞에서 기다릴 것이었다⁠.

*

금요일 저녁 여섯 시⁠, 이사장실은 비어 있었다⁠. 채묘정은 신림 2호점 공사를 보러 갔다⁠. 나는 오른쪽 모니터를 켜고 표를 열었다⁠. 라희의 줄⁠, 곰국의 줄⁠, 짠물의 줄⁠, 내 줄⁠. 하나씩 칠해서 인쇄를 눌렀다⁠. 프린터가 웅웅거리며 네 장을 밀어냈다⁠. 「⁠채권액⁠」과 「⁠잔액⁠」이 나란히 찍힌 종이였다⁠. 표 맨 아래 「⁠관리인⁠」이라고 이름 붙은 칸이 따로 있었지만⁠, 눌러도 열리지 않았다⁠. 비밀번호를 물었다⁠.

인쇄 기록을 지우는 법은 몰랐다⁠. 지우는 법을 몰라서 지우지 않았다⁠. 나는 따뜻한 종이 네 장을 노동법 기본서 제21조가 있는 장 사이에 끼우고 책을 덮었다⁠.

책상 위 전화가 울렸다⁠. 채묘정이었다⁠.

“⁠참을인⁠, 2호점 신청서 다 뽑았어⁠?⁠”

“⁠다 뽑았어요⁠.⁠”

거짓말은 아니었다⁠. 신청서는 점심에 다 뽑아 두었다⁠. 나는 거짓말 아닌 말로 전화를 끊었다⁠. 책을 가슴에 안고 이사장실 문을 잠갔다⁠. 책이 평소보다 무겁지 않았다⁠. 종이 네 장은 아무 무게도 없었다⁠.

*

밤 열 시⁠, 식당에서 나는 예림 언니를 붙잡았다⁠. 식구들은 2층으로 올라갔고 식당에는 비상등만 켜져 있었다⁠.

“⁠언니⁠, 나가요⁠. 라희 데리고⁠.⁠”

“⁠또 시작이야⁠?⁠”

“⁠여기 숫자가 다 가짜예요⁠. 라희가 일한 만큼 다 숙식비로 나가요⁠. 법에 그러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요⁠. 언니도 내일부터 그렇게 돼요⁠.⁠”

“⁠법⁠.⁠” 예림 언니가 웃었다⁠. “⁠하린아⁠, 나 육 년 동안 9급 시험 봤어⁠. 법 과목도 봤어⁠. 법이 나 밥 줬어⁠?⁠”

“⁠법이 밥을 주는 게 아니라⁠, 언니가 일한 돈을 언니 거라고 해 줘요⁠.⁠”

“⁠내 거라고 해 주는 사이에 굶는다니까⁠.⁠” 예림 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⁠. “⁠걔가 처음으로 밥을 먹어⁠. 나도 처음으로 먹어⁠. 너 하나 정의로우려고 우리 둘 굶기지 마⁠.⁠”

“⁠정의로우려는 거 아니에요⁠.⁠”

“⁠그럼 뭔데⁠?⁠”

나는 대답하려다 말았다⁠. 예림 언니가 내 팔을 뿌리쳤다⁠. 가슴에 안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⁠. 노동법 기본서가 펼쳐지면서 사이에 끼워 둔 종이 네 장이 타일 위로 미끄러졌다⁠. 한 장은 식탁 다리에 걸리듯 멈췄고⁠, 한 장은 계단 아래까지 미끄러졌다⁠.

계단 아래에 태언이 서 있었다⁠. 태언이 발치의 종이를 주웠다⁠. 비상등 아래에서 종이를 읽었다⁠. 라희의 줄이었다⁠.

「⁠설라희 · 채권액 23⁠,000⁠,000 · 잔액 23⁠,000⁠,000⁠」

태언은 오래 읽었다⁠. 라희의 벽에 붙은 확인서를 매일 아침 보는 사람이었다⁠. 「⁠남은 빚 21⁠,800⁠,000원⁠」 두 숫자가 태언의 눈에서 부딪쳤다⁠.

“⁠이거 어디서 났어요⁠?⁠”

“⁠이사장실 화면이요⁠.⁠”

태언은 아무 말 없이 바닥의 다른 종이들을 주웠다⁠. 곰국⁠, 짠물⁠, 내 것⁠. 네 장을 가지런히 모아 들고 이사장실로 걸어갔다⁠. 이사장실 문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⁠. 채묘정이 신림에서 돌아와 있었다⁠.

*

태언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⁠. 나도 따라 들어갔다⁠. 예림 언니는 식당에 남았다⁠. 채묘정은 책상 앞에서 귤을 까다가 태언의 손에 든 종이를 보았다⁠. 놀라지 않았다⁠.

“⁠이사장님⁠, 라희 씨 잔액이 그대로예요⁠.⁠”

“⁠그렇지⁠.⁠” 채묘정이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⁠. “⁠잔액은 회계상 숫자야⁠. 조합이 산 채권이 서류에서 갑자기 없어지면 세금 문제가 생겨⁠. 그래서 졸업할 때 한 번에 정리해⁠. 그전까지는 숙식비로 맞춰 놓는 거야⁠.⁠”

“⁠한 번에요⁠?⁠”

“⁠태언아⁠, 너 그렇게 졸업했잖아⁠.⁠” 채묘정이 태언을 올려다보았다⁠.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⁠. 귤을 까던 손으로 태언의 손등을 덮었다⁠. “⁠네 확인서 영 원 맞잖아⁠. 내가 직접 뽑아 줬잖아⁠. 네 지갑에 있잖아⁠.⁠”

태언이 바람막이 가슴께를 손으로 짚었다⁠. 지갑이 있는 자리였다⁠.

“⁠네⁠.⁠”

“⁠그럼 됐어⁠.⁠” 채묘정이 태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⁠. “⁠참을인은 공부를 많이 해서 숫자를 무섭게 봐⁠. 이건 장사 서류야⁠. 장사 서류를 밖에 들고 나가면 조합 식구들 다 다쳐⁠. 태언이 네가 지켜⁠.⁠”

태언이 나를 돌아보았다⁠. 웃음이 걷힌 얼굴이었다⁠.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⁠. 은행나무고시원 부엌에서⁠, 창길의 봉투를 내밀 때 한 번 본 얼굴이었다⁠.

“⁠하린 님⁠, 이건 제가 갖고 있을게요⁠.⁠”

*

태언은 종이 네 장을 들고 식당의 졸업함 앞으로 갔다⁠. 바람막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⁠. 맨 아래 오른쪽⁠, 스물네 번째 문을 열었다⁠. 안에 내 휴대전화가 누워 있었다⁠. 열하루 동안 꺼진 채였다⁠.

태언은 종이 네 장을 반으로 접어 휴대전화 위에 얹었다⁠.

“⁠이건 밖의 숫자예요⁠.⁠” 태언이 철문을 닫았다⁠. 열쇠가 돌아갔다⁠. “⁠밖에 나갈 때 같이 가져가요⁠. 휴대전화 꺼낼 때요⁠.⁠”

“⁠꺼내면 퇴소잖아요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 태언이 열쇠를 안주머니에 넣었다⁠. “⁠그러니까 꺼내지 마세요⁠.⁠”

이사장실 문간에서 채묘정이 귤껍질을 쓰레기통에 털며 말했다⁠.

“⁠참을인⁠, 일요일에 2호점 가⁠. 고등어랑 같이⁠. 거기 부엌 꾸려⁠.⁠”

식당 구석에서 예림 언니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⁠. 예림 언니는 아무 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⁠.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끝까지 차분했다⁠. 나는 졸업함 앞에 남았다⁠. 스물네 번째 문의 통풍 틈에 손가락을 댔다⁠. 철문은 차가웠고⁠, 틈 안쪽은 캄캄했다⁠.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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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옥수현2026.11.01· 9화

    쌀 씻다가 팔꿈치 부딪칠 때마다 웃는 라희를 지켜보는 화자가 너무 쓸쓸했어요.

    • 도결애작가2026.11.01

      새벽 노점 일은 손이 먼저 친해져요. 화자는 그 손을 보면서 졸업을 생각합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