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39자)

참은 배

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· 도결애

월요일 아침 아홉 시⁠, 나는 이사장실 열쇠로 문을 열었다⁠. 채묘정은 없었다⁠. 열쇠는 어젯밤 내가 쥐지 않고 책상 위에 두고 나왔는데⁠, 아침에 보니 내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⁠. 태언이 넣어 둔 것이었다⁠. 이사장님이 그러라고 했다고⁠, 태언은 미안한 얼굴도 없이 말했다⁠.

책상 위에 오늘 할 일이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었다⁠. 「⁠반지하왕 서류 · 2호점 신청서 출력 · 고시원 4월분 정리⁠」 나는 포스트잇의 글씨를 오래 보았다⁠. 둥글고 큰 글씨였다⁠. 귤을 까는 손이 쓴 글씨였다⁠.

반지하왕은 새벽 네 시에 들어온 스물일곱 남자였다⁠.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밥을 세 공기 먹었다고 했다⁠. 나는 반지하왕의 서류를 프린터로 뽑았다⁠. 맨 위 종이의 제목은 「⁠공동생활 참여 동의서⁠」였다⁠.

「⁠참여자는 영원하우스의 공동생활에 참여하며⁠, 공동 부엌의 봉사 활동에 함께한다⁠.⁠」

「⁠조합은 참여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며⁠, 숙식비는 봉사 공제와 같은 금액으로 정리한다⁠.⁠」

「⁠참여자의 채무는 조합이 인수하며⁠, 상환 일정은 조합이 정한다⁠.⁠」

봉사였다⁠. 일이라는 낱말은 동의서 어디에도 없었다⁠. 새벽 다섯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 찬물에 손을 담그는 일이⁠, 종이 위에서는 함께하는 봉사가 되어 있었다⁠. 나는 프린터에서 나온 동의서를 반으로 접어 서류철에 넣었다⁠. 반지하왕은 오늘 저녁에 여기 서명할 것이었다⁠. 서명하기 전에 밥부터 먹었으니⁠, 서명은 쉬울 것이었다⁠.

「⁠고시원⁠」 서랍에는 골목 고시원 스물여덟 곳의 4월분 입금표가 있었다⁠. 고시원마다 세입자 수에 만 오천 원을 곱한 돈이 들어와 있었다⁠. 다 더하니 한 달에 천만 원이 조금 넘었다⁠. 지하 부엌의 식구 스물넷은 이 돈을 한 원도 만져 보지 못했다⁠.

나는 확인서 셋을 더 뽑았다⁠. 모두 숫자가 줄어 있었다⁠. 뽑을 때마다 프린터가 따뜻한 종이를 내밀었고⁠, 나는 종이를 받아 도장 칸이 위로 오게 쌓았다⁠. 손은 시키는 일을 잘했다⁠. 잘하는 손이 싫었다⁠.

*

저녁 식탁에서 반지하왕의 서명을 받는 일도 내 몫이었다⁠. 나는 동의서와 볼펜을 반지하왕의 식판 옆에 놓았다⁠. 반지하왕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종이를 넘겼다⁠.

“⁠읽고 서명하세요⁠.⁠” 내가 말했다⁠. “⁠두 번째 줄 보세요⁠. 일이라는 말이 없어요⁠. 봉사라고 돼 있어요⁠.⁠”

“⁠밥 세 공기 먹은 사람한테 뭘 읽으래요⁠?⁠” 반지하왕이 웃었다⁠. 식탁이 따라 웃었다⁠. “⁠봉사든 일이든 밥 주면 해요⁠. 반지하에서는 봉사해도 밥을 안 줬어요⁠.⁠”

반지하왕은 서명 칸에 크게 「⁠반지하왕⁠」이라고 썼다⁠. 끝을 위로 휘감아 올렸다⁠. 태언이 옆에서 웃으며 종이를 다시 내밀었다⁠.

“⁠본명으로요⁠.⁠”

“⁠아⁠, 본명⁠.⁠” 반지하왕이 머리를 긁었다⁠. “⁠본명 쓰는 거 오랜만이라 까먹을 뻔했네⁠.⁠”

반지하왕은 닉네임 밑에 본명을 작게 썼다⁠. 내가 종이를 거둘 때 잉크가 덜 말라 손가락에 묻었다⁠. 나는 손가락을 앞치마에 문질렀다⁠. 잉크는 지워지지 않고 번졌다⁠.

*

밤 열 시⁠, 2층 방에서 나는 라희에게 말했다⁠. 화면에서 본 것을 처음부터⁠. 매입 날짜와 원 채권자⁠, 채권액과 잔액⁠, 봉사 공제와 숙식비⁠. 라희는 침대에 앉아 벽에 붙은 확인서를 보면서 들었다⁠. 다 듣고 나서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⁠.

“⁠말하지 말라고 했잖아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“⁠알면서 왜 해⁠?⁠”

“⁠네 손이 한 달 동안 일한 게 다 숙식비로 나갔어⁠. 확인서 숫자는 내려가도 진짜 빚은 그대로야⁠. 일 년을 있어도⁠, 이 년을 있어도 그대로야⁠.⁠”

라희가 벽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⁠. 볼이 통통했다⁠. 눈은 밝았다⁠.

“⁠언니⁠. 숫자가 안 줄어도 나 여기서 밥 먹어⁠.⁠” 라희가 천천히 말했다⁠. 천천히 말하는 라희는 처음이었다⁠. “⁠밖에서는 숫자도 안 줄고 밥도 없었어⁠. 이자 붙어서 숫자가 늘었어⁠. 여기서는 숫자는 그대로고 밥은 있어⁠. 그럼 여기가 나은 거잖아⁠.⁠”

“⁠여기 숫자가 그대로인 건 네가 공짜로 일해서야⁠.⁠”

“⁠밖에서는 돈 받고 일해도 숫자가 늘었어⁠.⁠” 라희가 웃었다⁠. 웃는 얼굴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⁠. “⁠언니는 아직 굶어 본 지 석 달이잖아⁠. 나는 일 년이야⁠. 일 년 굶으면 숫자보다 배가 먼저야⁠.⁠”

나는 할 말이 없었다⁠. 라희가 고개를 갸웃했다⁠.

“⁠언니 빚도 그 화면에 있어⁠?⁠”

“⁠있어⁠.⁠”

“⁠그럼 언니도 여기서 못 나가네⁠.⁠” 라희가 웃었다⁠.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이었다⁠. “⁠우리 같은 편이네⁠.⁠”

라희가 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⁠. 둥글게⁠, 시계 방향으로⁠.

“⁠아⁠, 또 체했나 봐⁠. 저녁에 고등어 빨리 먹었어⁠.⁠”

“⁠천천히 먹으라니까⁠.⁠”

“⁠언니 목소리 하지 말라니까⁠.⁠” 라희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⁠. “⁠매실 마시고 올게⁠. 방장님이 체하면 매실이래⁠. 부엌에 큰 병 있어⁠.⁠”

라희가 슬리퍼를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⁠. 지하에서 냉장고 문이 열리고 닫혔다⁠. 나는 벽의 확인서를 보았다⁠. 내가 엄지로 누른 귀퉁이가 반듯했다⁠. 라희는 십 분 뒤 돌아와 트림을 하고 “⁠나았다⁠”라고 말하고 잠들었다⁠. 라희는 자면서도 손바닥을 배 위에 얹고 있었다⁠.

*

화요일 아침 여덟 시⁠, 식당 태블릿에서 뉴스가 먼저 지나갔다⁠. 「⁠기준금리 동결 … 청년층 이자 부담 여전⁠」 곰국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겼다⁠. 이 집에서 금리는 남의 나라 날씨였다⁠. 뉴스 다음에 방송이 나왔다⁠. 아침 정보 방송이었다⁠. 「⁠빚더미 청년들의 기적 — 무지출 끝판왕의 집⁠」 함지에 쌀을 쏟는 장면⁠, 취반기 서랍이 열리는 장면⁠, 이백원이 카메라 값을 묻는 장면이 지나갔다⁠. 식구들이 이백원 장면에서 일제히 웃었다⁠. 이백원은 귀까지 빨개졌다⁠.

“⁠저 장면 이백 원짜리 몇 개야⁠?⁠” 짠물이 놀렸다⁠.

“⁠값 매기지 말라며⁠.⁠”

쌀 씻는 손이 화면 가득 나왔다⁠. 손등이 빨갰다⁠. 얼굴이 없는 손이었다⁠. 내 손이었다⁠. 자막이 손 위로 지나갔다⁠. 「⁠청년들이 스스로 지은 밥⁠, 골목 고시원 스물여덟 곳의 아침이 됩니다⁠」

방송이 끝나자마자 이사장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⁠. 채묘정이 열 시에 와서 식당에 식구들을 모았다⁠.

“⁠다음 주 일요일에 신림에 2호점 연다⁠. 방송 보고 신청한 애들이 오백 명이 넘어⁠. 2호점 부엌 꾸리려면 여기서 몇 명 가야 돼⁠. 태언이랑 고등어⁠, 참을인⁠.⁠”

라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⁠. “⁠저 가요⁠! 2호점 가요⁠!⁠”

식구들이 손뼉을 쳤다⁠. 태언이 웃었다⁠. 공용 태블릿 화면 맨 위의 단톡방 참여자 숫자가 삼천을 넘어 있었다⁠.

*

수요일 새벽 배달 길에 은행나무고시원 뒷문에서 창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⁠. 창길은 손에 바나나 두 개를 들고 있었다⁠. 하나씩 떼어 파는 편의점 바나나였다⁠.

“⁠이번 주 셋이야⁠.⁠” 창길이 목소리를 낮췄다⁠. 낮춘 목소리가 은행나무까지 갔다⁠. “⁠셋 다 자기들이 먼저 보내 달래⁠. 방송 보고⁠. 봉투 셋이면 십오만⁠. 적시 대박⁠. 축하하려고 바나나 샀어⁠. 다섯 시 오십구 분에 반값 됐어⁠.⁠”

“⁠총무님⁠, 은행나무 사장님이 한솥살림에 반찬 값 내는 영수증 있죠⁠?⁠”

창길이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멈췄다⁠.

“⁠그건 왜⁠?⁠”

“⁠있으면 나중에 주세요⁠.⁠”

“⁠사장님 거야⁠. 내가 왜⁠.⁠” 창길이 바나나를 한입 베어 물었다⁠. 우물거리며 나를 보았다⁠. “⁠너 거기서 뭐 하냐⁠? 방송 보니까 손만 나오던데⁠. 그 손 네 손이지⁠? 후드티 소매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손 예쁘게 나왔더라⁠.⁠” 창길은 바나나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⁠. “⁠먹어⁠. 반값이야⁠. 내 지출이니까 네 지출 아니야⁠.⁠”

나는 바나나를 받지 않았다⁠. 창길은 내밀었던 바나나를 거두지 않고 김치 통 위에 얹었다⁠. 수레가 덜컥거릴 때마다 바나나가 굴렀다⁠. 다음 고시원에 닿기 전에 바나나는 수레 밖으로 떨어졌고⁠, 나는 줍지 않았다⁠.

*

수요일 밤 열한 시⁠, 옥상에서 태언이 빨랫줄의 앞치마를 걷고 있었다⁠. 바람이 차서 앞치마들이 태언의 얼굴을 자꾸 때렸다⁠. 나는 집게를 받아 들었다⁠.

“⁠방장님⁠, 확인서 숫자가 가짜예요⁠.⁠”

태언이 앞치마를 접다 멈췄다⁠.

“⁠라희 잔액이 한 원도 안 줄었어요⁠. 이사장실 화면에 다 있어요⁠. 봉사로 갚은 만큼 숙식비로 나가요⁠. 곰국 오빠도⁠, 짠물도⁠, 다 그래요⁠.⁠”

“⁠보여 줘요⁠.⁠”

“⁠이사장실 화면에 있다고요⁠.⁠”

“⁠그 화면은 이사장님 화면이에요⁠.⁠” 태언이 앞치마를 차곡차곡 접었다⁠. “⁠저는 제 확인서를 봐요⁠.⁠”

태언이 바람막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⁠. 지갑 안에서 네 번 접은 종이가 나왔다⁠. 접힌 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⁠. 태언은 종이를 펴서 옥상 비상등 아래 들어 보였다⁠.

「⁠상환 확인서 · 육태언 · 남은 빚 0원 · 졸업⁠」

“⁠삼 년 전에 받았어요⁠. 이사장님이 직접 뽑아 주셨어요⁠. 그날 처음으로 밥을 한 공기 다 먹었어요⁠. 그전까지는 반 공기만 먹었거든요⁠. 빚이 있는 사람이 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⁠.⁠”

“⁠지금도 반 공기 드시잖아요⁠.⁠”

“⁠버릇이에요⁠.⁠” 태언이 종이를 도로 접었다⁠.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⁠. “⁠하린 님⁠. 숫자가 그대로든 아니든⁠, 여기서 스물네 명이 밥을 먹어요⁠. 다음 주엔 2호점에서 마흔 명이 먹어요⁠. 하린 님이 가짜라고 말하면⁠, 그 마흔 명은 어디서 먹어요⁠?⁠”

“⁠일한 만큼 받으면 밖에서도 먹어요⁠.⁠”

“⁠밖에서 일한 만큼 받은 사람이 여기 왜 왔겠어요⁠?⁠”

태언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⁠. 바람 소리보다 컸다⁠. 태언은 앞치마 더미를 안아 배를 가렸다⁠. 나는 집게를 앞치마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⁠. 우리 둘 다 더 말하지 않았다⁠. 아래층 어딘가에서 누군가 매실 병을 여는 소리가 났다⁠.

*

밤 열한 시 반⁠,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⁠. 태언이 옥상에서 뛰어 내려갔고⁠, 나도 따라 내려갔다⁠. 현관에 예림 언니가 서 있었다⁠. 노점 앞치마를 두르지 않은 예림 언니는 처음이었다⁠.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⁠. 내가 들어올 때 멘 것과 같은 크기의 가방이었다⁠.

“⁠창길이가 쪽지 넘겼대⁠. 이사장이 오늘 데리러 왔어⁠.⁠” 예림 언니가 신발을 벗었다⁠. 타일의 냉기에 발가락을 오므렸다⁠. “⁠하린아⁠.⁠”

“⁠언니⁠.⁠”

“⁠나 이제 너 편 아니야⁠.⁠” 예림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⁠. “⁠라희 편이야⁠.⁠”

계단에서 라희가 뛰어 내려왔다⁠. 맨발이었다⁠. 라희가 예림 언니의 목에 매달렸다⁠. 예림 언니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⁠. 둘이 엉켜서 울다가 웃었고⁠, 웃다가 예림 언니의 배에서 길고 낮은 소리가 났다⁠. 빈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⁠.

“⁠언니 배고프지⁠? 밥 있어⁠. 지하에 밥 있어⁠. 맨날 있어⁠.⁠”

라희가 예림 언니의 손을 잡고 지하로 끌고 가다가 졸업함 앞에서 멈췄다⁠. 예림 언니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⁠. 액정 귀퉁이가 금 간 전화기였다⁠. 태언이 졸업함 맨 아래 줄 끝에 새로 단 스물다섯 번째 문을 열었다⁠.

“⁠라희 거는 몇 번이에요⁠?⁠”

“⁠아홉 번이요⁠.⁠” 태언이 위에서 두 번째 줄을 가리켰다⁠.

“⁠멀다⁠.⁠” 예림 언니가 중얼거리고 전화기를 스물다섯 번째 칸에 넣었다⁠. 매일 새벽 네 시에 아홉 번째 칸으로 전화를 걸던 전화기였다⁠. 철문이 닫히자 예림 언니는 라희의 손에 끌려 지하로 내려갔다⁠. 나는 현관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들었다⁠. 가방에서 고추장 냄새가 났다⁠. 지하에서 밥솥 뚜껑이 열렸고⁠, 라희가 “⁠천천히 먹어⁠, 언니⁠!⁠” 하고 외치는 소리가 올라왔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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