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492자)

고해방

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· 도결애

아침 일곱 시 정각⁠, 골목 편의점 직원이 진열대 앞에 쪼그려 앉아 노란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⁠. 「⁠유통기한 임박 50%⁠」 직원의 손이 우유와 샌드위치를 지나 달걀 칸에 닿기도 전에 창길이 진열대 끝에서 걸어 나왔다⁠. 삼십 분째 컵라면 코너를 서성이던 사람이었다⁠.

창길은 반값 스티커가 붙은 낱개 달걀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⁠. 직원이 달걀 하나를 찍는 동안 창길은 휴대전화 시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⁠. 나는 공용 부엌에서 아침 공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유리문 밖에서 달걀 하나가 팔려 나가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⁠.

“⁠달걀 하나 사려고 삼십 분을 기다렸어요⁠?⁠”

“⁠기다린 게 아니라 고른 거야⁠.⁠” 창길이 달걀을 손바닥에 올려 햇빛에 비춰 보았다⁠. “⁠필요한 걸⁠, 필요할 때⁠, 제일 싼 순간에 딱 사는 거⁠. 적시소비라고⁠. 너네 무지출은 필요할 때도 안 사잖아⁠. 그건 절약이 아니라 버티기야⁠.⁠”

나는 이 말투를 알고 있었다⁠. 단톡방에서 매일 밤 무지출파와 싸우는 회원이 있었다⁠. 「⁠필요한 걸 필요할 때 사는 게 진짜 절약임⁠」 「⁠안 사고 참다가 몰아서 사면 그게 더 손해임⁠」 닉네임은 딱그때였다⁠.

“⁠총무님이 딱그때예요⁠?⁠”

창길이 달걀을 든 채 굳었다⁠. 이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⁠.

“⁠방장한테 제 이름 알려 줬죠⁠?⁠”

“⁠물어보길래⁠.⁠” 창길이 달걀을 의자 모서리에 톡 쳤다⁠. 날달걀이었다⁠. 창길은 껍데기에 구멍을 내고 그대로 쪽 빨아 마셨다⁠. “⁠참을인이 누구냐고⁠. 우리 고시원 사람이냐고⁠. 맞다고 했지⁠. 그게 다야⁠.⁠”

“⁠방장을 알아요⁠?⁠”

“⁠새벽마다 김치 갖다주는 사람이잖아⁠.⁠” 창길이 빈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⁠. 들어가지 않았다⁠. 창길은 일어나서 주워 넣고 다시 앉았다⁠. “⁠그리고 나도 고해방 있어⁠.⁠”

*

고해방은 「⁠한 푼도 안 쓴다⁠」 안에 따로 있는 작은 단톡방이었다⁠. 빚을 털어놓는 방이었고⁠, 방장이 부른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⁠. 창길이 휴대전화를 내 앞에 밀어 놓았다⁠. 참여자는 서른한 명이었다⁠.

「⁠딱그때⁠: 학자금 팔백⁠. 적시에 빌렸음⁠. 후회 없음⁠」

창길의 고해는 한 줄이 다였다⁠. 나는 화면을 위로 밀었다⁠. 위로 갈수록 숫자가 무거워졌다⁠.

「⁠고등어반토막⁠: 쇼핑몰 하다 망했어요⁠. 이천삼백이요⁠. 언니가 보증 섰어요⁠. 언니한테 미안해서 하루 한 끼만 먹어요⁠.⁠」

라희가 고해를 올린 날은 3월 17일 수요일이었다⁠. 나흘 뒤 일요일⁠, 라희는 주간 일등이 되었다⁠.

「⁠이백원의기적⁠: 학자금이랑 카드론 합쳐서 천구백⁠. 이자 내고 나면 통장에 이백 원 남아요⁠. 그래서 닉네임이 이거예요⁠.⁠」

3월 24일이었다⁠. 다음 일요일에 이백원의기적이 일등을 했다⁠.

「⁠짠물요정⁠: 엄마 병원비요⁠. 삼천이요⁠. 엄마한테는 말 안 했어요⁠.⁠」

3월 31일이었다⁠. 짠물요정은 지난 일요일에 일등을 했고⁠, 어제 새벽 네 시에 나갔다⁠. 나는 날짜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같은 주에 올라온 다른 고해들을 훑었다⁠. 사백⁠, 칠백⁠, 천이백⁠. 일등이 된 사람은 언제나 한 주 동안 가장 큰 숫자를 올린 사람이었다⁠.

“⁠참은 돈 순위는요⁠?⁠”

“⁠그건 보여 주기용이지⁠.⁠” 창길이 하품을 했다⁠. “⁠나도 고해했는데 팔백이라 순위 밖이야⁠. 빚도 경쟁이더라⁠. 적게 빌린 사람이 지는 판⁠.⁠”

창길은 웃었다⁠. 나는 웃지 못했다⁠. 편의점 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남은 스티커를 김밥에 붙이고 있었다⁠. 반값이 된 삼각김밥이 진열대에 줄지어 누웠다⁠. 배가 아침 공짜 밥을 벌써 잊고 김밥을 쳐다봤다⁠.

*

낮 열두 시⁠, 고시원 옥상에서 빨래를 걷는데 아버지 전화가 왔다⁠. 아버지는 대전에서 대리운전을 했고⁠, 낮에 자고 밤에 일했다⁠. 자다 깬 목소리였다⁠.

“⁠하린아⁠, 밥은 먹냐⁠?⁠”

“⁠먹어요⁠. 고시원에서 밥 줘요⁠. 공짜로⁠.⁠”

“⁠공짜가 어딨어⁠. 방세에 다 들어 있지⁠.⁠”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⁠. 담배를 끊은 지 일 년이 되었는데 기침은 아직 남아 있었다⁠. “⁠그 카드 건은 어떻게 됐냐⁠. 아빠가 이번 달에 조금 보탤까⁠?⁠”

“⁠다 갚았어요⁠. 작년에⁠.⁠”

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⁠. 아버지는 내가 거짓말할 때 목소리가 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⁠, 나는 아버지가 모르는 척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⁠. 우리 둘 다 참는 데는 선수였다⁠.

“⁠그래⁠. 잘했다⁠. 우리 딸이 아빠보다 낫다⁠.⁠”

“⁠아빠⁠, 밥 먹어요⁠. 대리 손님 기다리면서 편의점 컵라면 말고⁠.⁠”

“⁠아빠는 손님이 사 줘⁠. 술 취한 손님이 착해⁠.⁠”

아버지가 웃었다⁠. 나도 웃었다⁠. 전화를 끊고 걷어 온 빨래를 개는데⁠, 회색 후드티 등판이 맨 위에 올라왔다⁠. 흐려진 글씨는 「⁠남궁 순댓국⁠」이었다⁠. 가게가 문을 닫던 날⁠, 아버지는 이 후드티를 직원 둘에게 한 벌씩 더 주고 싶어 했지만 줄 돈도 줄 옷도 없었다⁠. 나는 옷을 개다 말고 등판을 손바닥으로 쓸었다⁠. 실밥이 일어난 자리가 까슬했다⁠.

*

밤 열한 시 반⁠, 컵밥 골목은 시험 끝난 학원생들로 붐볐다⁠. 예림 언니는 주황 앞치마를 두르고 철판 앞에서 제육을 볶았다⁠. 철판 위로 김이 솟을 때마다 예림 언니의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다⁠.

“⁠언니⁠, 일등 한 사람들은 다 빚이 제일 컸어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⁠?⁠”

예림 언니는 국자를 멈추지 않았다⁠. 나는 고해방에서 본 것을 차례로 말했다⁠. 라희가 올린 이천삼백도 말했다⁠. 예림 언니의 국자가 이천삼백에서 한 번 철판을 세게 긁었다⁠.

“⁠그 숫자 내가 제일 잘 알아⁠. 보증 선 사람이 나야⁠.⁠”

“⁠라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⁠?⁠”

“⁠몰라⁠.⁠” 예림 언니가 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⁠. “⁠알고 싶지도 않아⁠. 알면 가 보고 싶잖아⁠. 가 보면 데려오고 싶잖아⁠. 데려오면 걔 또 하루 한 끼 먹어⁠.⁠”

노점 구석에 매달린 작은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나왔다⁠. 「⁠청년 채무조정 신청 석 달째 늘어⁠」 손님 하나가 화면을 보며 컵밥을 퍼먹다가 말했다⁠. “⁠저거 다 나야⁠.⁠” 옆 손님이 “⁠나도⁠”라고 받았다⁠. 둘은 서로를 모르는 사이였고⁠, 동시에 웃었다⁠.

“⁠너 걔 사진 봤지⁠? 볼 통통한 거⁠.⁠” 예림 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⁠. “⁠내가 일 년 동안 못 해 준 거야⁠. 하린아⁠, 너는 착해서 그러는 거 아는데⁠, 들쑤시지 마⁠. 너 들쑤시면 걔 쫓겨나⁠.⁠”

“⁠쫓겨날 데면 좋은 데가 아니잖아요⁠.⁠”

“⁠좋은 데가 어딘데⁠?⁠” 예림 언니가 국자로 철판을 탕 쳤다⁠. “⁠여기⁠? 너 방⁠? 창도 없는 방⁠?⁠”

노점 사장이 철판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⁠. “⁠예림아⁠, 손님 앞에서 싸우지 마⁠. 싸울 거면 제육 다 볶고 싸워⁠.⁠”

열두 시에 노점이 문을 닫았다⁠. 예림 언니가 팔다 남은 컵밥 하나를 비닐봉지에 담아 내밀었다⁠.

“⁠폐기야⁠. 지출 아니야⁠.⁠”

나는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잠깐 따졌다⁠. 돈을 안 냈으니 지출이 아니었다⁠. 남이 준 걸 받았으니 빚도 아니었다⁠. 단톡방 공지에는 폐기 음식 조항이 없었다⁠. 따지는 동안 봉지 속 제육 냄새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올라왔고⁠, 배가 내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울었다⁠. 나는 골목 계단에 앉아 컵밥을 먹었다⁠. 따뜻한 밥은 석 달 만이었다⁠. 고시원 밥솥의 밥은 늘 보온 표시등만 켜진 채 미지근했다⁠.

*

이튿날 새벽 다섯 시⁠, 나는 공용 부엌 불을 끄고 밥솥 옆에 앉아 기다렸다⁠. 다섯 시 십이 분⁠, 골목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⁠. 고무바퀴가 시멘트 이음매를 넘을 때마다 덜컥⁠, 덜컥 했다⁠. 손수레가 고시원 뒷문 앞에 멈췄다⁠.

태언이 김치 통 두 개를 안고 부엌에 들어왔다⁠. 불을 켜자 내가 앉아 있었다⁠. 태언은 놀라지 않았다⁠.

“⁠일찍 일어나셨네요⁠.⁠”

“⁠일등은 빚 순서죠⁠.⁠”

태언이 김치 통을 냉장고에 넣었다⁠. 하나를 넣고⁠, 하나를 더 넣고⁠, 냉장고 문을 닫은 뒤에 나를 돌아보았다⁠.

“⁠맞아요⁠.⁠”

너무 쉽게 나온 대답이라 나는 다음 말을 잃었다⁠. 태언이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텀블러에 수돗물을 받았다⁠.

“⁠배가 가라앉으면 누구부터 구명조끼 입혀요⁠? 제일 무거운 사람부터요⁠. 이천삼백을 진 사람이 팔백 진 사람보다 먼저 물에 빠져요⁠.⁠”

“⁠라희는 하루 한 끼 먹는다고 썼어요⁠. 그래서 뽑았어요⁠?⁠”

“⁠그래서 뽑았어요⁠.⁠” 태언은 망설이지 않았다⁠. “⁠고해방에 올라온 글은 제가 다 읽어요⁠. 한 줄도 안 빼고요⁠. 하루 한 끼 먹는 사람을 하루 세 끼 먹게 해 주는 게 제 일이에요⁠.⁠”

“⁠그 사람들한테 순서를 말해 줬어요⁠? 빚이 커서 뽑혔다고요⁠.⁠”

“⁠말하면 부끄러워해요⁠.⁠” 태언이 텀블러를 내려놓았다⁠. “⁠다들 참아서 일등 했다고 믿고 들어와요⁠. 그래야 고개를 들고 밥을 먹어요⁠. 하린 님⁠, 사람은 이겨서 받은 밥은 맛있게 먹고 불쌍해서 받은 밥은 체해요⁠.⁠”

“⁠그럼 순위는 왜 참은 돈으로 올려요⁠?⁠”

“⁠웃으라고요⁠.⁠” 태언이 물을 마셨다⁠. “⁠거지왕자 님 포르쉐 보고 다들 웃잖아요⁠. 이번 주에 아메리카노 사만 원어치 참았다⁠, 그런 걸로 이기고 지고 하면서 웃어요⁠. 웃을 거리가 있어야 버텨요⁠.⁠”

“⁠속이는 거잖아요⁠.⁠”

“⁠누구를요⁠?⁠” 태언이 고개를 기울였다⁠. “⁠일등 못 한 사람은 빚이 적은 사람이에요⁠. 다행인 거예요⁠. 하린 님 이등 한 것도 다행인 거고요⁠.⁠”

태언이 텀블러 뚜껑을 닫았다⁠. 그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⁠.

“⁠하린 님은 빚 없어요⁠?⁠”

“⁠없어요⁠.⁠”

거짓말이었다⁠. 태언은 내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⁠. 내 손을 봤다⁠. 나는 후드티 소매 안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⁠.

“⁠그럼 영원하우스는 하린 님 집이 아니에요⁠.⁠” 태언이 손수레 손잡이를 잡았다⁠. “⁠빚 없는 사람한테 방 내주면 빚 있는 사람이 방을 못 받아요⁠.⁠”

손수레가 덜컥거리며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⁠. 김치 통을 넣고 간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렸다⁠.

*

목요일 밤 열한 시 사십 분⁠, 예림 언니가 내 방 문을 세게 두드렸다⁠. 문을 열자 예림 언니가 휴대전화를 내 귀에 들이밀었다⁠. 손이 떨려서 휴대전화가 내 귓바퀴를 몇 번 쳤다⁠.

“⁠들어 봐⁠. 라희야⁠. 모르는 번호로 왔어⁠. 세 주 만이야⁠.⁠”

음성 메시지였다⁠. 라희의 목소리가 높고 밝았다⁠.

“⁠언니⁠! 나 오늘 밥 두 공기 먹었어⁠. 계란말이도 두 번 받았어⁠. 김 있으면 좋겠다⁠, 김⁠. 아 근데 나 잘 있어⁠. 진짜로⁠. 언니는 밥 먹고 다녀⁠? 노점 떡 말고 밥⁠.⁠”

라희의 목소리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작게 끼어들었다⁠. “⁠통화 삼 분이요⁠.⁠” 태언의 목소리였다⁠. 라희가 “⁠네⁠, 방장님⁠” 하고 대답하고⁠, 다시 빠르게 말했다⁠. “⁠언니 나 끊어야 돼⁠. 사랑해⁠. 김⁠.⁠”

메시지가 끝났다⁠. 예림 언니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복도 벽에 기대 웃었다⁠. 웃다가 울었고⁠, 울다가 다시 웃었다⁠.

“⁠김 달래⁠. 김⁠.⁠” 예림 언니가 코를 훌쩍였다⁠. “⁠얘가 밥을 먹으니까 반찬 타령을 해⁠.⁠”

나는 웃는 예림 언니 얼굴을 보면서 삼 분을 생각했다⁠. 세 주 만의 전화가 삼 분이었다⁠. 누군가 옆에서 시계를 보고 있었다⁠. 밥을 두 공기 먹는 사람의 전화를 삼 분 만에 끊게 하는 집이었다⁠. 공짜 밥 두 공기와 삼 분⁠. 나는 두 숫자를 나란히 놓아 보았다⁠. 어느 숫자도 다른 숫자를 지우지 못했다⁠.

예림 언니가 방으로 돌아간 뒤⁠,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⁠. 「⁠절약왕님이 참을인님을 고해방에 초대했습니다⁠.⁠」 창길이 초대를 넣었고⁠, 태언이 곧바로 받아 준 것이었다⁠.

나는 고해방 입력 칸을 눌렀다⁠. 엄지로 「⁠참을인⁠: 이천⁠」까지 쳤다⁠. 다음 숫자에서 엄지가 멈췄다⁠. 석 달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 엄지 밑에서 식어 갔다⁠. 벽 너머에서 예림 언니가 음성 메시지를 한 번 더 틀었다⁠. “⁠언니⁠! 나 오늘 밥 두 공기 먹었어⁠.⁠”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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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새벽세시2026.10.31· 2화

    반값 스티커 붙는 순간 컵라면 코너에서 걸어 나오는 창길 씨, 무지출 챌린지 해 본 사람은 다 알아요.

    • 도결애작가2026.11.01

      삼십 분 기다린 달걀 한 알이에요. 단톡방에서는 그걸 털어놓는 방을 「고해방」이라고 부릅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