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395자)

영 원 인증

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· 도결애

밤 열 시 오십팔 분⁠, 침대에 엎드려 은행 앱을 열었다⁠. 화면 한가운데 「⁠오늘 지출 0원⁠」이 떴다⁠.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찍는 동안 배가 길게 울었다⁠. 다섯 시에 공용 부엌에서 공짜 밥 한 공기와 김치 몇 조각을 먹었고⁠, 배는 꼬박꼬박 다섯 시간 뒤에 따지러 왔다⁠. 나는 손바닥으로 배를 한 번 눌러 달래고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⁠.

「⁠참을인⁠: 오늘 지출 0원⁠. 참은 것⁠: 편의점 앞 호빵⁠. 김이 나를 쳐다봤음⁠.⁠」

마감 이 분 전이었다⁠. 열한 시가 넘으면 인증이 안 된다⁠. 나는 석 달 동안 늘 이 분을 남기고 올렸다⁠. 일찍 올리면 밤사이 무언가를 살까 봐⁠, 늦게 올리면 놓칠까 봐 고른 시각이었다⁠.

노량진 은행나무고시원 207호에는 창이 없었다⁠. 침대 끝에 책상이 붙어 있고⁠, 책상 위에는 공기업 필기 전공 과목인 노동법 기본서가 펼쳐져 있었다⁠. 문고리에 걸어 둔 큼직한 회색 후드티는 아버지 순댓국집의 단체복이었다⁠. 등판의 가게 이름은 세탁기에 수없이 돌아 흐려져 있었다⁠.

인증 사진이 화면 위로 줄줄이 올라왔다⁠.

「⁠통장잔고요정⁠: 0원⁠. 참은 것⁠: 아메리카노⁠. 탕비실 믹스커피로 버팀⁠. 탕비실은 회사가 준 유일한 복지⁠」

「⁠거지왕자⁠: 0원⁠. 참은 것⁠: 포르쉐⁠」

「⁠절약왕⁠: 거지왕자 님⁠, 참은 것은 평소에 사던 것만 올려요⁠. 포르쉐는 평소에 안 사잖아요⁠.⁠」

「⁠거지왕자⁠: 마음속으로는 매일 삼⁠」

웃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⁠. 전부 공짜 이모티콘이었다⁠. 지난달 유료 이모티콘을 쓴 회원은 방장에게 「⁠그거 얼마 주고 샀어요⁠?⁠」라는 질문을 받고 사흘 동안 말이 없었다⁠.

방 이름은 「⁠한 푼도 안 쓴다⁠」였다⁠. 하루 지출을 영 원으로 이어 가는 무지출 챌린지 익명 단톡방이었고⁠, 참여자는 이백열넷이었다⁠. 인증 글 끝에는 하루 동안 사지 않고 넘긴 물건을 「⁠참은 것⁠」으로 적었고⁠, 참은 것의 가격을 더한 돈이 일주일 순위의 잣대였다⁠.

일요일 밤마다 방장 절약왕이 주간 순위를 올렸다⁠. 이번 주 일등은 짠물요정⁠, 이등은 나였다⁠. 지난주에도⁠, 지지난 주에도 이등이었다⁠.

내 기록은 연속 구십삼 일이었다⁠. 이번 주에 참은 돈도 짠물요정보다 많았다⁠. 숫자만 보면 내가 일등이어야 했다⁠.

*

열한 시 반⁠, 옆방 209호 문이 열렸다⁠. 벽이 얇아서 예림 언니가 앞치마 끈을 푸는 소리까지 들렸다⁠. 예림 언니는 컵밥 골목 노점에서 밤 장사를 돕고 대개 새벽에 돌아왔는데⁠, 오늘은 일찍 왔다⁠. 내 방 문을 두 번 두드렸다⁠.

“⁠하린아⁠, 자⁠?⁠”

문을 열자 고추장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⁠. 예림 언니는 주황 앞치마를 팔에 걸치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⁠. 화면에 동생 라희의 SNS 사진이 있었다⁠. 식판 위에 밥이 두 공기⁠, 제육볶음이 수북했다⁠.

「⁠오늘 점심 제육 두 번 받음⁠. 언니 나 살쪘어⁠」

“⁠얘가 밥을 먹어⁠.⁠” 예림 언니가 엄지와 검지로 사진을 키웠다⁠. “⁠하루 세 번⁠. 세 번을 먹는대⁠.⁠”

라희는 단톡방에서 고등어반토막이라는 닉네임을 썼다⁠. 고등어 반 마리로 나흘을 버틴 날 지은 이름이라고⁠, 예림 언니가 웃으며 말해 준 적이 있었다⁠. 라희는 3월 21일 일요일 밤에 주간 일등을 했고⁠, 이튿날 새벽 짐 가방 하나를 들고 고시원을 나갔다⁠.

예림 언니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⁠. 길고 낮게⁠, 빈 냄비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는 소리였다⁠. 예림 언니가 앞치마로 배를 덮었다⁠.

“⁠노점에서 먹었어⁠. 떡 남은 거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나는 더 묻지 않았다⁠. 남의 배에서 나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는 일도 석 달 동안 연습했다⁠. 예림 언니는 사진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⁠, 화면을 끄고⁠,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⁠. 얇은 벽 너머로 예림 언니가 물을 마시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⁠.

*

새벽 네 시 이 분⁠, 배가 나를 깨웠다⁠. 공용 부엌에 내려가 물을 한 컵 마실까 하다가 휴대전화부터 켰다⁠. 단톡방 맨 아래에 회색 글씨 한 줄이 떠 있었다⁠.

「⁠짠물요정님이 나갔습니다⁠.⁠」

어젯밤의 일등이었다⁠. 인증을 백 일 넘게 이어 온 사람이 축하 이모티콘을 산더미로 받고⁠, 다섯 시간 만에 아무 말 없이 나갔다⁠. 나는 화면을 위로 밀었다⁠. 일주일 치 대화가 손가락 밑으로 흘러갔다⁠.

「⁠이백원의기적님이 나갔습니다⁠.⁠」 3월 29일 월요일⁠, 새벽 네 시 일 분이었다⁠.

더 밀었다⁠. 「⁠고등어반토막님이 나갔습니다⁠.⁠」 3월 22일 월요일⁠, 새벽 네 시 삼 분이었다⁠.

세 사람 다 일요일 밤에 일등을 했고⁠, 이튿날 새벽 네 시 무렵에 나갔다⁠. 나가면서 인사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⁠. 단톡방은 매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아침 인증을 이어 갔다⁠. 빈속에 찬물을 들이켠 것처럼 명치 밑이 식었다⁠.

「⁠참을인⁠: 일등 하신 분들 다 어디 가셨어요⁠? 세 주째 월요일 새벽에 나가셨는데요⁠.⁠」

새벽인데도 답이 금방 달렸다⁠. 무지출을 하는 사람들은 밤이 길었다⁠. 배가 고프면 잠이 안 오고⁠, 잠이 안 오면 단톡방을 열었다⁠.

「⁠거지왕자⁠: 졸업하면 연락 끊는 게 국룰⁠」

「⁠통장잔고요정⁠: 일등 하면 0원을 넘어서 마이너스 지출로 가는 거임⁠. 돈이 들어오는 경지⁠」

「⁠거지왕자⁠: 그럼 나도 일등 하면 돈 들어옴⁠?⁠」

「⁠절약왕⁠: 졸업했습니다⁠. 축하해 주세요⁠.⁠」

방장 글 아래로 링크가 붙었다⁠. 하나씩 눌렀다⁠. 짠물요정의 SNS에는 어제 저녁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⁠. 식판에 밥 두 공기와 미역국⁠, 계란말이가 놓였고⁠, 짠물요정은 마스크를 턱에 걸친 채 엄지를 들고 웃었다⁠. 이백원의기적은 쌀 포대를 어깨에 메고 웃었고⁠, 라희는 밥주걱을 들고 웃었다⁠. 셋 다 볼이 통통했다⁠.

사진을 보던 내 배가 울었다⁠. 배는 언제나 나보다 솔직했다⁠.

휴대전화가 한 번 더 떨렸다⁠. 방장이 보낸 일대일 메시지였다⁠.

「⁠절약왕⁠: 하린 님⁠, 궁금하면 직접 봐요⁠. 오늘 저녁 아홉 시⁠, 노량진역 육교⁠.⁠」

나는 단톡방에서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다⁠. 닉네임은 참을인이었고⁠, 사진에는 은행 앱 화면과 공짜 밥만 찍었다⁠. 하린 님⁠. 화면 속 세 글자가 내 방 문고리를 밖에서 잡아 돌리는 소리로 들렸다⁠.

*

저녁 아홉 시⁠, 노량진역 육교 위로 강바람이 올라왔다⁠. 4월인데 바람 끝이 겨울이었다⁠. 나는 후드티 모자를 눌러쓰고⁠, 높이 묶은 머리끈을 한 번 더 조였다⁠. 육교 아래로 전철이 지날 때마다 발밑 철판이 떨었다⁠.

남자는 역 출구 앞 정수기에서 텀블러에 물을 받고 있었다⁠. 키가 크고 말랐고⁠, 남색 바람막이 소매가 손목 위로 짧게 올라가 있었다⁠. 스테인리스 텀블러에는 스티커를 떼어 낸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⁠. 물을 가득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채운 뒤에야⁠, 남자는 계단을 올라와 내 앞에서 멈췄다⁠.

“⁠참을인 님⁠. 육태언이에요⁠.⁠” 남자가 웃었다⁠. 눈이 먼저 웃는 얼굴이었다⁠. “⁠물 드실래요⁠? 괜찮아요⁠, 공짜예요⁠.⁠”

“⁠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⁠?⁠”

“⁠은행나무고시원 총무님이 좋은 분이에요⁠.⁠”

태언은 대답 대신 텀블러를 내밀었다⁠. 나는 받지 않았다⁠.

“⁠짠물요정 님 어디 있어요⁠?⁠”

“⁠졸업했어요⁠. 사진 보셨잖아요⁠.⁠”

“⁠사진 말고 사람이요⁠. 주소요⁠.⁠”

“⁠졸업생도 사생활이 있어요⁠.⁠” 태언이 텀블러 뚜껑을 닫았다⁠. “⁠하린 님⁠, 그 사람들 지금 밥 먹어요⁠. 따뜻한 데서 자고요⁠. 그게 그렇게 이상해요⁠?⁠”

“⁠공짜는 없어요⁠.⁠”

“⁠있어요⁠.⁠” 태언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히지 않았다⁠. “⁠제가 그 공짜로 살았어요⁠. 삼 년 전에 빚이 천팔백이었고⁠, 고시원 방세가 넉 달 밀려 있었어요⁠. 이사장님이 방을 주고 밥을 줬어요⁠. 저는 졸업했고⁠, 이제는 제가 방을 줘요⁠.⁠”

“⁠빚은요⁠? 그 사람들 빚은 없어졌어요⁠?⁠”

“⁠줄어요⁠. 달마다 확인서가 나와요⁠. 남은 빚이 얼마인지 종이로 찍어서요⁠.⁠” 태언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네모를 그렸다⁠. “⁠졸업생들은 그 종이를 방 벽에 붙여 놔요⁠. 숫자가 내려가는 걸 보면서 자요⁠.⁠”

“⁠누가 갚는데요⁠?⁠”

“⁠다 같이요⁠.⁠” 태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⁠. “⁠밥 지으면서요⁠. 다들 아침에 몇 시간씩 부엌 일을 거들어요⁠. 그게 갚는 거예요⁠. 돈 대신 손으로⁠.⁠”

나는 밥 짓는 손으로 빚을 갚는다는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굴렸다⁠. 노동법 기본서의 어느 장이 머릿속에서 넘어가다가 멈췄다⁠. 어느 장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⁠.

“⁠집 이름이 뭐예요⁠?⁠”

“⁠영원하우스요⁠. 영 원으로 끝까지 산 사람이 들어가는 집이라서요⁠.⁠”

육교 아래 전광판에 정부 광고가 돌았다⁠. 「⁠빚 때문에 잠 못 드는 청년⁠, 채무조정 상담을 받으세요⁠」 태언은 광고를 보지 않았다⁠.

“⁠그럼 저는 왜 일등이 안 돼요⁠? 구십삼 일이에요⁠. 참은 돈도 제가 제일 많았어요⁠.⁠”

태언이 난간에 팔을 올렸다⁠. 발밑으로 전철이 길게 지나갔다⁠. 철판이 다 떨고 나서야 태언이 입을 열었다⁠.

“⁠하린 님은 아직 참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⁠. 말이요⁠.⁠” 태언의 눈이 내 후드티 가슴께에 머물렀다가 올라왔다⁠. “⁠일등 하세요⁠. 그럼 들어와서 직접 봐요⁠. 그게 제일 빠르잖아요⁠.⁠”

육교를 내려오자 계단 밑에 붕어빵 노점이 있었다⁠. 팥 익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덮쳐 왔다⁠. 우리는 둘 다 노점 앞에서 걸음을 늦췄고⁠, 둘 다 지갑에 손을 대지 않았다⁠. 노점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「⁠국제 쌀값이 넉 달째 오르면서⁠」라고 말하다가 기름 튀는 소리에 묻혔다⁠.

“⁠둘이 서서 냄새만 맡을 거면 비켜요⁠.⁠” 노점 주인이 집게로 틀을 탁 쳤다⁠. “⁠냄새도 장사예요⁠.⁠”

“⁠냄새는 공짜 아니에요⁠?⁠” 태언이 물었다⁠.

“⁠공짜면 내가 이 골목에서 이십 년을 버텼겠어⁠?⁠”

태언이 소리 내어 웃고 한 걸음 물러났다⁠. 웃음 끝에 내 배가 울었다⁠. 육교 철판 떨리는 소리보다 컸다⁠. 태언이 내 배를 내려다보고⁠, 나를 보았다⁠.

“⁠그 집에 가면 배 안 고파요⁠.⁠”

태언은 텀블러를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⁠. 바람막이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이 바람에 빨갰다⁠.

*

이튿날 새벽 다섯 시⁠, 물을 마시러 공용 부엌에 내려갔다⁠. 총무 창길이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⁠. 창길은 고시원 관리를 맡는 대신 방세를 안 내는 공무원 시험 삼 수생이었고⁠, 김치 통을 들여놓을 때마다 개수를 손가락으로 셌다⁠.

“⁠하린 씨⁠, 김치는 한 사람에 세 조각이야⁠. 네 조각 집으면 내가 봐⁠.⁠”

“⁠물 마시러 왔어요⁠.⁠”

“⁠물은 무제한⁠.⁠”

창길이 새 김치 통 두 개를 냉장고에 밀어 넣었다⁠. 밥솥 옆에는 쌀 포대가 새로 놓여 있었다⁠. 나는 컵에 물을 받다가 김치 통 뚜껑에 붙은 상표를 봤다⁠. 흰 바탕에 초록 글씨였다⁠.

「⁠한솥살림 · 영원하우스 손김치⁠」

쌀 포대에도 같은 상표가 찍혀 있었다⁠. 나는 물컵을 든 채 냉장고 문을 열고⁠, 안쪽 김치 통을 하나씩 돌려 보았다⁠. 반쯤 먹은 통에도⁠, 바닥이 보이는 통에도 같은 초록 글씨가 있었다⁠.

“⁠이거 어디서 와요⁠?⁠”

“⁠배달 오는 거 받는 거지⁠. 고시원 공짜 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⁠?⁠” 창길이 냉장고 문을 닫고 일어났다⁠. “⁠골목 고시원 다 그 데서 받아⁠. 싸고 맛있고⁠, 새벽마다 갖다주고⁠.⁠”

창길은 하품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⁠. 나는 컵의 물을 다 마시지 못하고 개수대에 내려놓았다⁠.

석 달 동안 아침 일곱 시와 저녁 다섯 시에 이 부엌에서 공짜 밥과 김치를 먹었다⁠. 공짜 밥 덕분에 구십삼 일을 영 원으로 버텼다⁠. 빈속인데도 배가 무거웠다⁠. 나는 구십삼 일 동안 영원하우스의 김치를 먹고 있었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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