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화(5,494자)

목 따로

국민 판사 추첨제 · 은해록

토요일 새벽 여섯 시⁠, 금분이 이층 계단을 내려가자 경호가 가게 뒷문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⁠. 배달 조끼를 입은 채였다⁠. 밤새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⁠. 금분은 경호 옆에 앉았다⁠. 콘크리트 계단이 엉덩이 밑으로 차갑게 올라왔다⁠.

“⁠탄원서 봤어⁠.⁠”

“⁠찬별이가 보여 줬지⁠.⁠”

“⁠응⁠.⁠”

경호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⁠. 같은 자리를 여러 번 문질러서 작업복 바지 무릎이 반들거렸다⁠.

“⁠여보⁠. 나 선생님 감옥 가는 거 못 봐⁠. 나 살린 사람이야⁠. 가슴 열고 열한 시간 서 있었던 사람이야⁠. 내가 이름 안 쓰면 누가 써⁠.⁠”

“⁠지우라고 안 해⁠.⁠”

경호가 고개를 돌렸다⁠. 금분은 골목 끝을 보았다⁠. 생닭 실은 정육점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⁠.

“⁠당신 이름은 당신 거야⁠. 나는 판사고⁠, 당신은 살아난 사람이야⁠. 살아난 사람이 고맙다고 하는 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어⁠.⁠”

“⁠그거 여보가 지금 지어낸 법이지⁠.⁠”

“⁠응⁠. 오늘부터 내가 판사야⁠.⁠”

경호가 웃었다⁠. 웃다가 기침을 했다⁠. 기침이 가라앉자 조끼 지퍼를 내리고 조끼를 벗었다⁠. 금분은 벗은 조끼를 받아 무릎에 올렸다⁠. 깃에 꽂힌 시침핀을 뽑아서⁠, 조끼 안쪽 주머니 천에 다시 꽂았다⁠. 잃어버리지 않게⁠.

*

재단의 정비 기록 원본은 4월 30일 밤 열한 시 오십 분에 들어왔다⁠. 기한 십 분 전이었다⁠. 금분과 병찬은 이튿날 판사실 문을 잠그고 원본을 넘겼다⁠. 먹이 걷힌 자리에 업체 이름과 단가와 날짜가 있었다⁠. 2039년 4월의 정밀 점검 견적서 마지막 장에 「⁠연기⁠」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고⁠, 도장 옆에 결재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⁠. 같은 도장이 2039년 10월에도 한 번 더 찍혀 있었다⁠.

금분은 이름을 입속으로 읽고 원본을 덮었다⁠. 법정에서 증인에게 직접 들을 이름이었다⁠. 병찬도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⁠.

*

5월 10일 목요일⁠, 미경의 천막 종이는 「⁠18일⁠」이었다⁠. 대법정 방청석 왼편 맨 앞자리는 비어 있었고⁠, 유족들은 빈자리를 남겨 둔 채 옆으로 앉았다⁠. 미경은 천막에서 휴대전화로 중계를 본다고 했다⁠. 떡집 사장이 천막 안에 충전기를 넣어 주었다⁠.

금분은 아홉 시 반에 정문을 지나면서 천막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⁠. 떡집 사장이 천막 입구에 쪼그려 앉아 멀티탭에 충전기를 꽂고 있었다⁠. 천막 안쪽에서 미경이 돗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⁠. 볼이 패었고⁠, 손목에 시계가 헐렁하게 돌았다⁠. 미경이 시침핀 대신 빨대를 입에 물고 생수를 한 모금 빨았다⁠. 금분과 눈이 마주쳤다⁠. 미경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⁠. 들어가라는 끄덕임이었다⁠. 떡집 사장이 멀티탭 스위치를 켜자 빨간 불이 들어왔다⁠. 금분은 빨간 불에서 눈을 떼고 계단을 올랐다⁠.

법정 경위가 개정 전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판사석 앞까지 왔다⁠. 바구니 안에 휴대전화들이 들어 있었다⁠.

“⁠판사님 것도요⁠. 지난번에 공판 중에 띵동 소리 났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거 순살 두 마리였어요⁠.⁠”

“⁠법정에서는 순살도 안 됩니다⁠.⁠”

금분은 법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바구니에 넣었다⁠. 병찬이 제 휴대전화도 말없이 넣었다⁠. 경위가 바구니를 들고 돌아서자 방청석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⁠.

국선 변호인이 먼저 일어났다⁠. 이번에는 서류철을 떨어뜨리지 않았다⁠. 대신 첫 질문을 하기 전에 물을 반 컵 마셨다⁠.

“⁠피고인⁠. 변호인은 피고인께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⁠. 그런데도 오늘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⁠. 왜입니까⁠?⁠”

정목은 피고인석에서 일어섰다⁠. 직위 해제 뒤로 양복 대신 회색 점퍼를 입고 왔다⁠. 점퍼 소매 끝이 닳아 있었다⁠.

“⁠재단이 저를 대신해 말해 주지 않으니⁠, 제가 말해야 합니다⁠.⁠”

국선 변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앉았다⁠. 질문을 준비한 종이가 손에 남아 있었는데⁠, 더 묻지 않았다⁠. 금분에게 넘기겠다는 눈짓이었다⁠. 병찬이 곁에서 볼펜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선생님⁠. 두 시 십사 분에 상임이사님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⁠?⁠”

“⁠상임이사님이 정전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⁠. 3번 병상에 이사장님 어머님이 계시다고 했습니다⁠. 교수님⁠, 잘 부탁드립니다⁠. 그 말을 세 번 했습니다⁠. 저는 비상 전원이 열두 개뿐이라고⁠, 점수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⁠. 상임이사님이 다시 잘 부탁드린다고 하고 끊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부탁한다는 게 3번을 빨간 데 꽂아 달라는 거였어요⁠?⁠”

“⁠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⁠. 3번이라는 말과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했습니다⁠.⁠”

금분은 고개를 끄덕였다⁠. 가게에서도 손님은 깎아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⁠.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⁠.

“⁠전화 끊고 뭐 했어요⁠?⁠”

“⁠서희윤 선생에게 불렀습니다⁠. 3번 빨강⁠, 4번 흰색⁠. 희윤 선생이 4번 플러그를 뽑아 3번 플러그를 꽂았습니다⁠. 4번 어르신은 배터리로 돌렸고⁠, 사십 분 뒤부터는 손으로 짰습니다⁠.⁠”

“⁠선생님⁠.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⁠. 전화 받고 꽂았어요⁠? 아니면 꽂으려던 참에 전화가 온 거예요⁠?⁠”

정목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⁠. 난간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⁠. 엄지와 검지 사이 굳은살 위로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⁠. 앰부백을 쥐듯 오므렸다 폈다⁠.

“⁠두 시 십 분쯤부터 점수표를 보고 있었습니다⁠. 3번과 4번이 나란히 붙은 자리였고⁠, 빨간 콘센트는 둘 사이에 하나였습니다⁠. 처음에는 가까운 4번에 꽂혀 있었습니다⁠. 점수를 다시 매겨 보니 3번이 아주 조금 높았습니다⁠. 두 사람 다 살 수 있는 점수였습니다⁠. 점수표를 보면서 둘 중 누구로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⁠.⁠”

정목이 고개를 들었다⁠. 판사석을 보았고⁠, 금분의 눈을 보았다⁠.

“⁠전화가 오기 전에 제 마음속에서 이미 3번이었는지⁠, 전화 때문에 3번이 됐는지⁠, 저는 모릅니다⁠. 석 달 동안 매일 밤 생각했습니다⁠. 모릅니다⁠.⁠”

법정이 조용했다⁠. 천장 중계 카메라의 작은 모터 소리가 들렸다⁠. 금분은 정목의 눈을 오래 보았다⁠. 열두 해 손님 눈을 읽어 온 눈이었다⁠. 눈 안에 숨긴 것이 보이지 않았다⁠. 숨긴 것이 없는 눈이 아니었다⁠. 본인도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눈이었다⁠.

“⁠간호 기록 두 시 오 분은요⁠?⁠”

“⁠제가 고쳤습니다⁠.⁠”

방청석 왼편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⁠. 병찬이 금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⁠. 공판 검사가 골무 낀 손으로 펜을 집었다⁠.

“⁠아침 여덟 시⁠, 교대가 끝나고 상임이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⁠. 기록을 정리해 달라고 했습니다⁠. 3번 이사장님 어머님 시각이 전화 시각 뒤로 남아 있으면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⁠. 제가 전자 기록에 들어가 두 시 십육 분을 두 시 오 분으로 고쳤습니다⁠.⁠”

“⁠왜 고쳤어요⁠?⁠”

“⁠고치지 않으면⁠, 플러그를 뽑고 꽂은 사람이 간호사들이니 간호사들이 마음대로 바꾼 것으로 정리하겠다고 했습니다⁠. 희윤 선생은 아이가 둘입니다⁠.⁠”

정목은 마지막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⁠. 할 말을 다 한 사람의 입이 아니었다⁠. 더 하면 무너질 사람의 입이었다⁠.

*

휴정 시간⁠, 합의실 정수기 앞에서 병찬이 종이컵을 두 개 꺼냈다⁠. 하나에 물을 받아 금분 앞에 놓았다⁠. 병찬이 금분에게 물을 떠 준 것은 처음이었다⁠.

“⁠피고인이 방금 기록을 고쳤다고 말했습니다⁠. 진료 기록을 거짓으로 고친 것은 의료법 위반입니다⁠. 공소장에는 없는 죄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넣어야죠⁠.⁠”

“⁠넣는 사람은 검사입니다⁠. 판사는 공소장에 없는 죄로 벌하지 못합니다⁠.⁠”

“⁠검사님이 안 넣으면요⁠?⁠”

병찬은 대답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⁠. 대답을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⁠. 아직 꺼낼 때가 아니라고 정한 얼굴이었다⁠. 금분은 종이컵을 들었다⁠. 물이 차가웠다⁠. 이번에는 이가 시리지 않았다⁠.

“⁠판사님⁠. 아까 선생님이 모른다고 했을 때⁠, 저는 처음으로 선생님 말을 믿었어요⁠.⁠”

“⁠믿음은 판결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그래서 판사님한테만 말하는 거예요⁠.⁠”

*

오후에는 서희윤이 다시 증인석에 앉았다⁠. 희윤이 사흘 전에 직접 검사실에 전화를 걸어 다시 증언하겠다고 했다⁠. 희윤은 어제 세온대학병원에 사표를 냈다⁠. 회색 니트 대신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고⁠,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무릎 위에 덮지 않았다⁠. 처음부터 손에 쥐고 있었다⁠.

“⁠선생님⁠, 밥 드셨어요⁠?⁠”

“⁠먹었어요⁠. 김밥이요⁠. 경위님이 알려 주신 데요⁠.⁠”

방청석에서 웃음이 났다⁠. 문 옆의 경위가 헛기침을 했다⁠. 금분은 웃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⁠. 희윤이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⁠.

“⁠두 시 이십 분에 이걸 찍었어요⁠. 병상 배치판이에요⁠. 정전 나고 정신이 없어서⁠, 나중에 누가 뭘 했는지 헷갈릴까 봐 찍었어요⁠.⁠”

검사가 휴대전화를 받아 법정 화면에 띄웠다⁠. 하얀 칠판에 병상 번호 스물넷이 두 줄로 쓰여 있었다⁠. 번호 옆에 빨간 자석과 흰 자석이 붙어 있었다⁠. 3번 옆에 빨간 자석이 있었고⁠, 화살표 하나가 4번에서 3번으로 그어져 있었다⁠. 화살표 옆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⁠.

「⁠3 → 빨강 02⁠:16⁠」

사진 귀퉁이에 휴대전화가 남긴 시각이 찍혀 있었다⁠. 02⁠:20⁠. 금분은 화면의 숫자를 보았고⁠, 사건 기록의 간호 기록 사본을 보았다⁠. 02⁠:05와 02⁠:16 사이는 십일 분이었다⁠. 전화는 둘 사이⁠, 두 시 십사 분에 왔다⁠.

“⁠이거 왜 지금 내요⁠?⁠”

금분이 물었다⁠. 희윤은 대답하기 전에 피고인석을 보았다⁠. 정목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⁠.

“⁠선생님이 고친 건 저희 때문이에요⁠. 저희가 덮어쓸까 봐요⁠. 근데 선생님 혼자 다 덮어쓰는 것도 아니잖아요⁠. 그날 밤 3번 할머니 꽂은 손은 제 손이에요⁠.⁠”

희윤은 휴대전화를 쥔 손을 들어 보였다⁠.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⁠.

*

폐정하고 판사실로 돌아온 금분은 법복을 벗지 않고 창가로 갔다⁠. 병찬도 따라와 곁에 섰다⁠. 창 아래 정문 앞 천막이 보였다⁠. 천막 입구가 열려 있었다⁠.

회색 점퍼 하나가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⁠. 정목이었다⁠. 국선 변호인이 뒤에서 팔을 잡으려다 놓쳤다⁠. 정목은 영정 탁자 앞에서 멈췄다⁠. 열두 장의 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⁠. 오래 숙였다⁠. 천막 안에서 미경이 나왔다⁠. 열여드레 굶은 몸이 천막 기둥을 짚었다⁠.

창이 닫혀 있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⁠. 금분은 미경 입 모양을 보았다⁠. 열두 해 동안 시끄러운 가게 안에서 손님 입 모양으로 주문을 받은 눈이었다⁠.

모르겠다는 말 들으려고 굶었어요⁠?

미경이 생수병을 던졌다⁠. 반쯤 남은 병이었다⁠. 병이 정목의 가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⁠. 물이 정목의 점퍼 앞자락을 적셨다⁠. 정목은 피하지 않았다⁠.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⁠. 바닥에 떨어진 병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 영정 탁자 다리 쪽으로 번졌다⁠.

병찬이 창유리에 손을 대려다 거두었다⁠.

“⁠판사님은 저 자리에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⁠”

금분은 법복 주머니 속 노란 공을 쥐었다⁠. 정목이 허리를 굽혀 생수병을 주웠다⁠. 뚜껑을 닫아⁠, 미경 앞 생수 상자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⁠. 미경은 병을 보지 않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⁠.

정목은 젖은 점퍼를 입은 채 사진 열두 장 앞에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⁠. 맨 끝 콩나물시루 앞에서 웃는 노순자의 사진 앞에서 가장 오래 숙였다⁠. 국선 변호인이 서류 가방을 가슴에 안고 몇 걸음 떨어져 기다렸다⁠. 정목이 정문 밖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자 국선 변호인이 뒤를 따랐다⁠. 정류장 의자에 앉은 정목이 점퍼 앞자락을 손바닥으로 털었다⁠. 물은 털리지 않았다⁠.

“⁠판사님⁠.⁠”

병찬이 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불렀다⁠.

“⁠오늘 피고인 말을 믿으셨다고 하셨습니다⁠. 저 사람이 기록을 고친 것도 믿으십니까⁠?⁠”

“⁠네⁠. 두 개 다 믿어요⁠. 그래서 어려워요⁠.⁠”

9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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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창가자리2026.11.01· 9화

    탄원서에 이름 쓰는 경호 마음도 알겠고, 미경 씨 천막도 알겠고… 금분 사장님 어떡해요?

    • 은해록작가2026.11.01

      두 사람 다 틀리지 않아서 금분이 제일 어렵습니다. 「두 개 다 믿어요」라는 말이 이번 화의 한가운데예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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