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0화(5,366자)

합의실

국민 판사 추첨제 · 은해록

5월 11일 금요일 오후⁠, 합의실 탁자 위에 병찬이 얇은 종이 묶음 하나를 올려놓았다⁠. 판결문이었다⁠. 표지 귀퉁이가 닳아서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⁠. 여러 번 꺼내 읽은 종이였다⁠.

“⁠두 해 전 그분의 판결문입니다⁠.⁠”

금분은 표지를 읽었다⁠. 교통사고 사건이었다⁠. 새벽에 신호를 못 본 택시가 횡단보도의 예순 넘은 청소 노동자를 친 사건이었다⁠. 국민 판사란에 이름이 하나 있었고⁠, 이름 옆에 「⁠세탁소 운영⁠」이라고 적혀 있었다⁠.

“⁠그분은 쉰여섯 살이었고 동네에서 세탁소를 이십 년 하셨습니다⁠. 돌아가신 분이 그 세탁소 단골이었습니다⁠. 새벽 다섯 시에 청소복을 맡기고 퇴근길에 찾아가던 분이었습니다⁠.⁠”

병찬은 판결문을 넘기지 않았다⁠. 넘기지 않아도 다 아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법이 정한 형의 위쪽 끝을 넘겨서 쓰셨습니다⁠. 판결 이유 세 번째 문단부터는 돌아가신 분의 청소복 이야기였습니다⁠. 단추 하나가 늘 떨어져 있어서 맡길 때마다 달아 드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⁠. 그분은 그 대목을 쓰면서 우셨고⁠, 중계 카메라가 우는 얼굴을 그대로 비췄습니다⁠.⁠”

“⁠판사님은요⁠?⁠”

“⁠제 자리에서 볼펜을 쥐고 있었습니다⁠. 형이 법정형을 넘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⁠. 그분이 저를 보면서 그러면 판사님은 이분 단추를 달아 보셨느냐고 물으셨습니다⁠.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⁠. 그 판결문 뒤에 제 법리 의견을 한 장 붙이고⁠, 서명했습니다⁠.⁠”

병찬이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⁠. 금분은 정수기 소리를 들었다⁠. 공기 방울이 올라갔다⁠.

“⁠항소심이 석 달 만에 파기했습니다⁠. 국회는 판결 이유 세 번째 문단을 오려서 본회의장 화면에 띄웠습니다⁠. 그분 세탁소 유리문에 사진이 붙었습니다⁠. 우는 얼굴 캡처였습니다⁠. 그분은 다음 달에 가게를 닫았습니다⁠.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⁠.⁠”

“⁠판사님 탓이에요⁠?⁠”

“⁠저는 말릴 수 있었습니다⁠. 법리 의견 한 장 말고⁠, 서명을 안 하는 것으로요⁠. 안 했습니다⁠.⁠”

병찬은 그제야 판결문을 넘겼다⁠. 세 번째 문단에 연필로 가는 줄이 그어져 있었다⁠. 병찬이 그은 줄이었다⁠.

“⁠판사님⁠. 이 사건에서 치사를 유죄로 쓰시면⁠, 항소심이 반드시 뒤집습니다⁠. 피고인은 같은 무게의 목숨 가운데 하나를 골랐고⁠, 전화가 손을 움직였는지 피고인 자신도 모릅니다⁠.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에게 이롭게⁠, 그게 형사 재판입니다⁠. 뒤집히면 국회는 다음 달 이 판결문을 오려 갑니다⁠. 제도가 끝납니다⁠. 다음 국민 판사는 영영 없습니다⁠.⁠”

“⁠치사는 유죄 안 써요⁠.⁠”

병찬이 금분을 보았다⁠.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선생님은 모른다고 했고⁠, 저도 믿어요⁠. 모르는 걸로 사람을 감옥에 못 보내요⁠. 그건 저도 알아요⁠. 우리 가게에서도 누가 닭 빼먹었는지 모르면 알바 월급 안 깎아요⁠.⁠”

“⁠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⁠?⁠”

“⁠기록 고친 거요⁠. 그리고 재단이 발전기 정비 두 번 미룬 거요⁠. 그건 써야 돼요⁠.⁠”

“⁠기록을 고친 죄는 공소장에 없습니다⁠. 재단은 피고인이 아닙니다⁠. 판결문으로 피고인 아닌 사람을 때리는 것⁠, 그것이 바로 감정입니다⁠. 그분 세 번째 문단과 같은 일입니다⁠.⁠”

“⁠같은 일이 아니에요⁠. 그분은 단추 얘기를 썼고⁠, 저는 기름 얘기를 써요⁠. 단추는 마음이고 기름은 사실이에요⁠. 발전기 기름 색⁠, 점검 스티커⁠, 연기 도장⁠. 다 법정에서 봤어요⁠.⁠”

“⁠법정에서 본 사실도 판결로 말할 수 있는 범위가 있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미경 언니는 뭘 받아요⁠? 무죄 판결 한 장⁠? 굶은 지 열아흐레예요⁠.⁠”

“⁠진실은 이미 법정에서 나왔습니다⁠. 중계로 전국이 봤습니다⁠.⁠”

“⁠사람들이 본 거랑 판사가 말한 거랑 달라요⁠. 손님이 닭이 탄 걸 봐도⁠, 사장이 탔다고 말해야 환불이 돼요⁠.⁠”

병찬은 판결문을 덮었다⁠. 덮은 판결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⁠. 금분은 병찬의 손을 보았다⁠. 볼펜을 길이 순서로 맞추던 손이었고⁠, 두 해 전 서명한 손이었다⁠.

“⁠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⁠.⁠”

병찬은 판결문을 들고 합의실을 나갔다⁠. 문이 닫히고 정수기 공기 방울이 한 번 더 올라갔다⁠. 금분은 혼자 남아 탁자를 보았다⁠. 판결문이 놓였던 자리에 먼지가 사각형으로 비켜 있었다⁠.

*

토요일 아침⁠, 약국 앞 탄원서는 석 장이 되어 있었다⁠. 금분은 생닭 상자를 받다가 약국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는 경호를 보았다⁠. 경호는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⁠, 한참 뒤에 나왔다⁠. 손에 볼펜을 쥐고 있었다⁠. 약사가 문간까지 따라 나와 경호 등에 대고 무언가 말했다⁠. 목소리가 날카로웠다⁠. 경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상가 계단을 내려왔다⁠.

“⁠뭐 했어⁠?⁠”

“⁠내 이름 뺐어⁠. 두 줄 그었어⁠. 약사님이 화났어⁠. 은혜도 모르냐고⁠.⁠”

경호는 볼펜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⁠. 손이 떨렸다⁠. 흉터가 있는 가슴께를 문질렀다⁠.

“⁠여보가 지우라고 안 했잖아⁠. 그래서 내가 지웠어⁠. 내 이름은 내 거라며⁠.⁠”

“⁠왜⁠?⁠”

“⁠선생님이 모른다고 했잖아⁠. 모르는 걸 석 달 동안 생각했다고⁠.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이름 썼어⁠. 선처해 달라고 쓰기 전에 엄마 잃은 사람 얼굴을 한 번은 봤어야 했어⁠.⁠”

경호는 배달 조끼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⁠. 앞치마를 두르지도 않았다⁠. 빈손으로 가게 문을 나서면서 돌아보았다⁠.

“⁠나 오늘 배달 못 해⁠. 찬별이한테 시켜⁠.⁠”

“⁠어디 가는데⁠.⁠”

“⁠법원 앞⁠. 미경 씨 옆에 하루 앉아 있을래⁠. 하루만 굶을게⁠. 나는 법적으로 판사 아니잖아⁠.⁠”

오후 세 시⁠, 금분은 공판 준비 서류를 가지러 판사실에 들렀다가 창가에서 걸음을 멈췄다⁠. 정문 앞 천막 곁에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⁠. 의자에 경호가 앉아 있었다⁠. 무릎에 손을 얹고⁠, 등을 꼿꼿이 세우고⁠, 영정 열두 장을 보고 있었다⁠. 미경은 천막 입구에 기대앉아 경호를 보지 않았다⁠. 둘 사이에 생수 상자가 있었다⁠. 미경이 상자에서 병 하나를 꺼내 경호 쪽으로 밀었다⁠. 경호가 병을 받아 뚜껑을 땄다⁠. 한 모금 마시고 병을 도로 미경 앞으로 밀었다⁠. 미경이 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⁠. 생수 한 병이 둘 사이를 두 번 오갔다⁠.

금분은 창에서 오래 떨어지지 못했다⁠. 서류를 들고 내려갈 때 정문 앞을 지나지 않고 후문으로 나갔다⁠.

토요일 밤 가게는 찬별 혼자 배달을 돌았다⁠. 오토바이 면허가 없어서 전동 킥보드에 닭 상자를 싣고 다녔다⁠. 세 번째 배달에서 돌아온 찬별이 헬멧을 벗으며 보고했다⁠.

“⁠사장님⁠, 112동 손님이 판사님 남편분 어디 갔냐고 물어서요⁠, 단식하러 가셨다고 했더니 닭을 도로 주셨어요⁠. 미안해서 못 먹겠다고⁠.⁠”

“⁠그래서 닭은⁠?⁠”

“⁠제가 먹었어요⁠. 법적으로 반품된 닭은 알바 거예요⁠.⁠”

“⁠그 법 누가 만들었어⁠.⁠”

“⁠사장님 남편분이요⁠. 아까 문자로 알려 주셨어요⁠.⁠”

금분은 웃다가 계산대 텔레비전을 보았다⁠. 밤 뉴스가 국회를 비췄다⁠. 「⁠국민 판사제 폐지 법안⁠, 오는 24일 법사위 공청회 … 현직 판사 진술인으로 출석 예정⁠」⁠. 진술인 명단이 화면에 짧게 떴다⁠. 맨 아래 줄에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라는 직함이 있었다⁠.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⁠. 금분은 이름을 몰라도 누구인지 알았다⁠.

금분은 영수증 용지를 한 뼘 뜯어 뒷면에 볼펜으로 썼다⁠. 월요일 법정에서 검사에게 할 말이었다⁠. 법원은 요구합니다⁠. 썼다가 줄을 그었다⁠. 법원은 요구할게요⁠. 다시 그었다⁠. 열한 번째 쓴 문장을 찬별에게 내밀자⁠, 찬별이 휴대전화로 받아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⁠.

“⁠사장님⁠, 아까 거보다 이게 덜 장사 같아요⁠.⁠”

“⁠장사 같으면 안 돼⁠?⁠”

“⁠아뇨⁠. 조금은 돼요⁠. 사장님 말이니까⁠.⁠”

자정 무렵 경호가 들어왔다⁠. 하루를 굶은 얼굴이 하얗게 떠 있었다⁠. 미경이 내일 아침 미음을 끓여 주겠다고 했다며⁠,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⁠. 금분은 남편 손에 꿀물 한 컵을 쥐여 주었다⁠. 경호는 컵을 두 손으로 받아 천천히 마셨다⁠.

*

5월 14일 월요일 아침 아홉 시 반⁠, 판사실 문을 열자 병찬이 먼저 와 있었다⁠. 탁자 위에 두꺼운 법전이 펼쳐져 있었다⁠. 한 쪽 귀퉁이가 삼각형으로 접혀 있었다⁠.

“⁠판사님⁠. 금요일 말씀을 주말 동안 생각했습니다⁠.⁠”

병찬은 법전을 금분 앞으로 돌려놓았다⁠.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⁠.

“⁠형사소송법 제298조 제2항입니다⁠. 법원은 심리의 경과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공소사실의 추가 또는 변경을 요구하여야 한다⁠.⁠”

금분은 병찬이 짚은 줄을 따라 읽었다⁠. 한 번에 안 들어와서 두 번 읽었다⁠.

“⁠이게 뭐예요⁠? 쉬운 말로요⁠.⁠”

“⁠재판하다 보니 공소장에 빠진 죄가 보이면⁠, 법원이 검사에게 넣으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⁠. 요구하여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⁠.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⁠. 피고인이 공개 법정에서 기록을 고쳤다고 말했고⁠, 사진이 그 말을 받칩니다⁠.⁠”

“⁠판사님이 이걸 알려 줘요⁠?⁠”

“⁠판사님이 세 번째 문단을 쓰시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⁠. 기록을 고친 일은 판결 이유의 마음이 아니라 공소장의 죄로 다루십시오⁠. 감정 말고 법으로 하십시오⁠.⁠”

금분은 법전의 접힌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폈다가 다시 접었다⁠.

“⁠재단은요⁠?⁠”

“⁠재단은 여전히 피고인이 아닙니다⁠. 그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⁠. 오늘은 이것까지입니다⁠.⁠”

“⁠판사님⁠. 이번엔 말리는 거예요⁠, 미는 거예요⁠?⁠”

병찬은 넥타이 매듭을 만지지 않았다⁠.

“⁠둘 다입니다⁠.⁠”

*

열 시⁠, 대법정⁠. 미경의 천막 종이는 「⁠22일⁠」이었다⁠. 방청석 왼편 맨 앞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⁠. 빈자리 바로 옆에 경호가 앉아 있었다⁠. 토요일 하루를 굶고⁠, 일요일 아침에 미경이 끓여 준 미음을 먹었다고 했다⁠. 미경은 저는 안 먹으면서 남의 미음은 끓였다⁠. 경호는 금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⁠. 판사석에 하는 인사인지 아내에게 하는 인사인지 알 수 없었다⁠.

금분은 마이크를 당겼다⁠. 병찬이 법전을 탁자 위에 펼쳐 금분 쪽으로 밀어 두었다⁠. 접힌 귀퉁이가 보였다⁠.

“⁠검사님⁠.⁠”

공판 검사가 일어섰다⁠. 골무 낀 손이 서류를 쥐었다⁠.

“⁠법원은 형사소송법 제298조 제2항에 따라 공소장 변경을 요구합니다⁠.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진료 기록을 거짓으로 고쳤다고 진술했고⁠, 증인 서희윤의 사진이 그 진술을 받칩니다⁠. 의료법 위반⁠, 진료 기록 거짓 작성을 공소 사실에 추가해 주세요⁠.⁠”

법정이 조용했다⁠. 금분은 쪽지 없이 말했다⁠. 주말 동안 영수증 뒷면에 열한 번 고쳐 쓴 문장이었다⁠. 마지막으로 고친 글은 찬별이 받아 쳐 주었다⁠.

검사가 금분을 보다가 피고인석을 보았다⁠. 국선 변호인이 일어나려다 정목의 손짓에 앉았다⁠.

“⁠검토하겠⁠…⁠…⁠”

검사가 말을 멈췄다⁠. 골무를 손가락에서 뺐다⁠. 처음 보는 동작이었다⁠.

“⁠아닙니다⁠. 법원의 요구에 따르겠습니다⁠. 다음 기일까지 공소장 변경 신청서를 내겠습니다⁠.⁠”

피고인석에서 정목이 고개를 들었다⁠. 판사석을 보았다⁠. 금분은 정목의 눈을 보았다⁠. 석 달 동안 본 눈 가운데 가장 가벼운 눈이었다⁠. 벌을 받을 죄가 생긴 사람의 눈이 그렇게 가벼울 줄은 몰랐다⁠. 정목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⁠.

방청석 맨 앞 빈자리 옆에서 경호가 휴대전화를 무릎 아래로 내려 무언가를 쳤다⁠. 천막에 있는 미경에게 보내는 문자였다⁠. 경위가 경호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⁠. 경호는 휴대전화를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⁠. 다 보낸 뒤였다⁠.

10화는 어땠나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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