8화(5,344자)

단식

국민 판사 추첨제 · 은해록

천막 입구에 붙은 종이의 숫자는 날마다 하나씩 늘었다⁠. 「⁠단식 1일⁠」 위에 「⁠2일⁠」이 덧붙었고⁠, 금요일 아침에는 「⁠5일⁠」이 되었다⁠. 매직 글씨가 날마다 조금씩 가늘어졌다⁠. 미경이 직접 쓰는 글씨였다⁠.

금분은 아침마다 정문을 지나며 천막을 보았다⁠. 미경은 금분을 보지 않았다⁠. 천막 앞에 놓인 생수 상자에서 병이 하나씩 줄었다⁠. 물만 마셨다⁠. 유족 둘이 미경 곁에서 하루씩 번갈아 굶었다⁠. 18번 할아버지의 딸이 첫날을 굶었고⁠, 군복 입은 사진 속 젊은 남자의 어머니가 이튿날을 굶었다⁠. 미경은 날마다 굶었다⁠.

떡집 사장이 사흘째 아침 보온병을 들고 천막에 갔다가 돌아왔다⁠. 생강차를 끓여 갔는데 미경이 받지 않았다고 했다⁠. 물 말고는 안 받는다고⁠. 떡집 사장은 보온병을 금분이네 통닭 계산대에 내려놓고⁠, 판사님은 마시라고 했다⁠. 금분은 마시지 않았다⁠. 보온병은 카드 단말기 옆⁠, 노란 공 곁에 놓였다⁠.

*

4월 25일 수요일 오후⁠, 법원 누리집에 재단 변호사의 사임서가 올라왔다⁠. 한 줄이었다⁠. 「⁠피고인과 변호 방향에 관한 견해 차이로 사임함⁠」⁠. 같은 날 저녁 뉴스에서 도상철이 기자들 앞에 섰다⁠. 재단 본관 로비였고⁠, 뒤 벽에 재단 로고가 크게 붙어 있었다⁠. 금분은 가게 텔레비전으로 보았다⁠. 튀김옷을 입히던 손이 반죽 그릇 위에서 멈췄다⁠.

「⁠“⁠두 시 십사 분의 통화는 정전 소식을 듣고 이사장 어머님의 안부를 여쭌 전화였습니다⁠. 병상 배치는 전적으로 조정목 교수의 의학적 판단이었고⁠, 재단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⁠. 재단은 조 교수를 직위에서 해제하고⁠,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⁠”⁠」

상철은 원고를 보지 않고 말했다⁠. 끝나고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판사석에 하던 목례와 똑같았다⁠. 찬별이 반죽 그릇 옆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중얼거렸다⁠.

“⁠사장님⁠, 이거 손절이죠⁠?⁠”

“⁠손절이 뭔데⁠.⁠”

“⁠손해 보고 판다는 건데요⁠, 요즘은 사람 버릴 때 써요⁠.⁠”

금분은 반죽 그릇에 닭을 담갔다가 꺼냈다⁠. 튀김옷이 너무 두껍게 묻었다⁠. 털어 내지 않고 그대로 기름에 넣었다⁠. 기름이 거칠게 끓어올랐다⁠.

*

이튿날 열린 짧은 기일에 정목 곁에는 새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⁠. 법원이 붙여 준 국선 변호인이었다⁠. 서른 갓 넘은 남자였고⁠, 정장 소매가 손목보다 조금 길었다⁠. 변호인석에 서류철을 내려놓다가 한 권을 떨어뜨렸고⁠, 줍다가 의자에 이마를 부딪쳤다⁠. 방청석에서 웃음이 났다⁠.

“⁠변호인⁠, 괜찮으세요⁠?⁠”

“⁠네⁠, 사장님⁠. 아⁠, 아닙니다⁠, 판사님⁠. 죄송합니다⁠. 제가 어제 저녁에 사건 기록을 받아서요⁠. 아직 이백 쪽밖에 못 읽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기록이 몇 쪽인데요⁠?⁠”

“⁠삼천 쪽입니다⁠.⁠”

국선 변호인은 정직하게 말하고 얼굴이 빨개졌다⁠. 금분은 웃음을 참으며 다음 기일까지 두 주를 주겠다고 했다⁠. 병찬이 고개를 끄덕였다⁠. 정목은 새 변호인이 서류를 줍는 것을 도와주었다⁠. 허리를 굽혀 종이를 모으는 정목의 손이 느렸다⁠. 재단 배지를 단 사람은 방청석에 아무도 없었다⁠. 오른편 의자들이 텅 비어 있었다⁠.

기일이 끝나고 정목이 피고인석에서 나가다 멈췄다⁠. 판사석을 올려다보고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⁠. 대신 방청석 왼편의 빈자리를 보았다⁠. 미경이 늘 앉던 맨 앞자리였다⁠. 미경은 오늘 천막에서 나오지 않았다⁠.

판사실로 돌아오자 병찬이 넥타이를 반쯤 풀고 창가에 서 있었다⁠. 창 아래로 천막 지붕이 보였다⁠. 병찬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⁠.

“⁠재단이 피고인을 버린 것은 피고인에게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⁠. 이제 피고인은 재단 눈치를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⁠. 말을 할지는 피고인이 정합니다⁠.⁠”

“⁠상임이사가 텔레비전에서 안부 전화라고 했잖아요⁠.⁠”

“⁠텔레비전에서 한 말은 증거가 아닙니다⁠. 증인석에서 선서하고 해야 증거가 됩니다⁠. 부르실 겁니까⁠?⁠”

“⁠부를 거예요⁠.⁠”

“⁠그럼 그때 들으시면 됩니다⁠.⁠”

병찬은 그제야 돌아섰다⁠. 넥타이를 다시 조이며⁠, 아주 사소한 일을 말하듯 덧붙였다⁠.

“⁠새 국선 변호인은 연수원 십오 년 후배입니다⁠. 기록 이백 쪽을 하룻밤에 읽는 변호사는 드뭅니다⁠. 저는 첫 사건 때 백 쪽을 읽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판사님도 이마 부딪쳤어요⁠?⁠”

“⁠의자가 아니라 책상이었습니다⁠.⁠”

금분은 웃었다⁠. 병찬은 웃지 않았지만⁠, 넥타이 매듭을 한 번 더 고쳤다⁠. 고칠 필요가 없는 매듭이었다⁠.

목요일 밤 금분은 집에 가는 길을 일부러 법원 쪽으로 돌았다⁠. 밤 열두 시가 넘은 정문 앞은 가로등 두 개만 켜져 있었다⁠. 천막 입구가 손바닥만큼 열려 있었고⁠, 안에서 휴대전화 불빛이 새어 나왔다⁠. 미경이 돗자리에 모로 누워 낮 기일의 중계 영상을 다시 보고 있었다⁠. 화면 속에서 국선 변호인이 의자에 이마를 부딪치고 있었다⁠. 미경이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⁠. 불빛 아래 얼굴이 나흘 사이 한 뼘 작아져 있었다⁠.

“⁠재판 얘기 안 해요⁠. 지나가는 길이에요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미경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⁠, 머리맡의 생수병을 들어 보였다⁠. 반쯤 비어 있었다⁠.

“⁠물 마셨어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가⁠.⁠”

금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⁠. 몇 걸음 가다 돌아보았을 때 천막 입구는 닫혀 있었고⁠, 휴대전화 불빛만 천막 천을 뚫고 희미하게 번졌다⁠.

*

금요일 오후⁠, 영통중앙상가 단톡방은 아침부터 쉬지 않았다⁠. 「⁠미용실⁠: 저희 가게 문에 유족과 함께합니다 붙였어요⁠. 재단 엄마 먼저 꽂은 거 너무하잖아요⁠」 「⁠철물점⁠: 붙이는 건 자유인데 계약 갱신 앞두고 다들 조심합시다⁠」 「⁠떡집⁠: 미경 언니 오늘 5일째래요ㅠ 생강차 안 받으심⁠」 「⁠정육점⁠: 우리 아들 말로는 원무과도 난리래⁠. 재단이 의사 하나 버렸다고⁠. 다음은 자기들 차례냐고⁠」 「⁠약국⁠: 조 교수님 선처 탄원서 저희 약국에 있어요⁠. 서명하실 분들 오세요⁠」⁠.

미용실과 약국은 2층과 1층에서 서로 마주 보는 가게였다⁠. 미용실 유리문에는 「⁠유족과 함께합니다⁠」가 붙었고⁠, 약국 유리문에는 「⁠조정목 교수님 선처 탄원 서명받습니다⁠」가 붙었다⁠. 두 종이가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았다⁠. 금분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두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⁠. 어느 종이도 틀리지 않았다⁠.

*

오후 네 시⁠, 생닭이 들어오는 시각에 가게 문 방울이 울렸다⁠.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었다⁠. 금분은 도마 앞에서 칼을 든 채 고개를 들었다⁠. 감색 양복이 문간에 서 있었다⁠.

“⁠아직 안 열었어요⁠.⁠”

“⁠압니다⁠. 판사님 가게 여는 시각을 다들 압니다⁠. 다섯 시죠⁠.⁠”

도상철은 문간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⁠. 대신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⁠. 금분은 메뉴판 어디에서 상철의 눈이 멈추는지 보았다⁠. 눈은 어디에서도 멈추지 않았다⁠. 메뉴를 읽는 눈이 아니었다⁠.

“⁠후라이드 한 마리 주십시오⁠. 먹고 가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포장이요⁠, 먹고 가요⁠, 아니면 나가요⁠?⁠”

상철이 웃었다⁠. 웃음이 얼굴 전체에 고르게 퍼졌다⁠.

“⁠판사님은 저를 증인으로 부르실 겁니다⁠. 증인이 될 사람이 재판 중인 판사를 만나면 안 된다는 것⁠, 저도 압니다⁠. 그래서 손님으로 왔습니다⁠. 닭 시키고 계산하고 가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손님은 닭 먹으러 와요⁠. 상임이사님은 뭐 하러 왔어요⁠?⁠”

상철은 대답 대신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⁠. 하얀 봉투였고⁠, 겉에 재단 로고가 찍혀 있었다⁠. 상철은 봉투를 계산대 끝에 올려놓았다⁠. 노란 공과 떡집 사장의 보온병 옆이었다⁠.

「⁠임대차 계약 갱신 거절 통지 · 금분이네 통닭 · 계약 만료일 2040년 5월 31일⁠」

금분은 봉투를 열지 않고도 겉면의 글자를 읽었다⁠. 투명한 창이 달린 봉투였다⁠.

“⁠상가 열여섯 집 가운데 우리 집만이에요⁠?⁠”

“⁠재단 방침이 바뀌었습니다⁠. 재단과 법적 분쟁 중인 분과는 계약을 새로 맺지 않습니다⁠. 판사님은 지금 재단에 정비 기록 제출을 명령하셨고⁠, 재단은 판사님 재판의 사실상 당사자가 되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협박이에요⁠?⁠”

“⁠판사님도 아시겠지만⁠, 협박은 조건이 붙어야 협박입니다⁠. 이렇게 하면 계약을 해 주겠다는 조건이요⁠. 저는 조건을 하나도 붙이지 않았습니다⁠.⁠”

금분은 칼을 도마에 내려놓았다⁠. 칼날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⁠. 상철은 칼 소리에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⁠.

“⁠그럼 조건 붙이세요⁠. 그래야 제가 거절하죠⁠.⁠”

“⁠거절하실 줄 알아서 안 붙였습니다⁠.⁠”

상철은 문간에서 한 걸음 들어와⁠, 처음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⁠. 튀김기 두 대⁠, 벽의 콘센트 여섯 개⁠, 냉장고에 붙은 「⁠이웃이다⁠」와 「⁠숨기지 않은 것이 공정의 증거다⁠」⁠. 상철의 눈이 냉장고 종이에서 잠깐 멈췄다⁠.

“⁠재단에는 병원이 셋 있습니다⁠. 직원이 이천 명입니다⁠. 지방 병원 두 곳은 해마다 적자입니다⁠. 저는 해마다 무엇을 먼저 할지 고릅니다⁠. 간호사 월급을 먼저 줄지⁠, 기계를 먼저 고칠지⁠. 판사님이 닭을 먼저 사실지 기름을 먼저 사실지 고르시는 것처럼요⁠.⁠”

“⁠기름 안 갈고 닭 튀기면 손님이 배탈 난다고요⁠.⁠”

“⁠간호사 월급 안 주면 병원이 문 닫습니다⁠. 그럼 손님이 다 탈 납니다⁠.⁠”

금분은 대꾸할 말을 찾았다⁠. 맞는 말이었다⁠. 맞는 말이라 더 미웠다⁠. 상철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과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봉투 위에 얹었다⁠. 후라이드 한 마리 값이었다⁠.

“⁠닭은 안 주셔도 됩니다⁠. 법정에서 뵙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돈 가져가요⁠.⁠”

“⁠시킨 건 시킨 겁니다⁠. 판사님이 그러셨죠⁠. 몰라도 먹은 건 먹은 거라고⁠. 저는 알고 시켰습니다⁠.⁠”

방울이 울렸다⁠. 감색 양복이 상가 복도로 사라졌다⁠. 금분은 계산대 끝의 지폐와 봉투를 보았다⁠. 지폐 위에 생닭 상자에서 튄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번졌다⁠. 금분은 지폐를 집어 들어 금고에 넣지 않고 떡집 보온병 아래 눌러 두었다⁠. 봉투는 열어서 끝까지 읽었다⁠. 상철이 말한 그대로였다⁠. 조건은 한 줄도 없었다⁠.

*

밤 열 시⁠, 마지막 배달을 나갔던 찬별이 오토바이 대신 걸어서 돌아왔다⁠. 경호가 오늘은 일찍 들어가 누웠고⁠, 찬별이 동네 배달을 걸어서 돌았다⁠. 찬별은 가게 문을 닫고 휴대전화를 금분 앞에 내밀었다⁠. 얼굴이 굳어 있었다⁠.

“⁠사장님⁠. 약국 앞에 탄원서 있잖아요⁠. 지나가다 사진 찍었어요⁠.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⁠.⁠”

화면 속 종이 맨 위에 「⁠조정목 교수 선처를 바라는 영통 주민 탄원서⁠」라고 쓰여 있었다⁠. 아래로 이름과 주소와 서명이 줄지어 있었다⁠. 서명은 이미 두 장을 넘었다⁠. 금분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벌려 맨 윗줄을 키웠다⁠.

맨 윗줄의 글씨를 금분은 알았다⁠. 배달 주문서 귀퉁이에 「⁠무 많이⁠」를 적을 때마다 보던 글씨였다⁠. 받침이 아래로 처지고⁠, 이응을 늘 두 번 돌려 그리는 글씨⁠. 이름 칸에는 오경호라고 있었고⁠, 서명 칸에는 이응 둘이 겹친 동그라미가 있었다⁠. 날짜는 4월 23일이었다⁠. 미경이 단식을 시작한 날이었다⁠.

금분은 휴대전화를 찬별에게 돌려주었다⁠. 찬별이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⁠. 금분은 앞치마를 벗지 않고 가게 뒷문으로 나갔다⁠. 상가 뒷골목 끝⁠, 집으로 가는 계단 아래에 경호의 배달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⁠. 오토바이 손잡이에 미경이 지퍼를 고쳐 준 배달 조끼가 걸쳐져 있었다⁠. 조끼 깃의 시침핀은 아직 빠지지 않았다⁠.

금분은 계단을 올려다보았다⁠. 이층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⁠. 경호는 자지 않고 있었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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