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487자)

창궁검은 하나뿐이다

무림맹 민원실 · 하로운

3월 3일 아침⁠, 민원실 대청 가운데 탁자 둘을 붙여 놓고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사람들이 마주 앉았다⁠. 양쪽 다 장로 하나에 집사 하나⁠, 칼 든 호위가 넷씩이었다⁠. 다름은 천무량 뒤에 서서 찻주전자와 접수 도장을 같이 들었다⁠. 손이 둘뿐이라 찻물이 자꾸 도장 위로 흘렀다⁠.

“⁠창궁검은 우리 남궁 고조부께서 이백 년 전에 지으신 이름이오⁠.⁠”

남궁 장로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제갈 장로가 수염을 쓸었다⁠.

“⁠우리 창궁검은 3년 전에 가주께서 새로 지으셨소⁠. 하늘 창 자에 활 궁 자⁠. 남궁의 궁은 집 궁 자 아니오⁠?⁠”

“⁠집 궁 자로 쓴 적 없소⁠!⁠”

“⁠그럼 보여 주시오⁠.⁠”

남궁 장로가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았다⁠. 천무량이 손을 들어 막기도 전에 첫 초식이 허공을 그었고⁠, 칼끝 바람에 대청 기둥에 매단 등잔이 반 바퀴를 돌았다⁠. 제갈 장로도 질세라 일어나 자기 창궁검의 첫 초식을 펼쳤는데⁠, 칼끝이 번호패 통을 건드려 이백 개 나무패가 와르르 바닥에 쏟아졌다⁠. 다름은 찻주전자를 든 채 쭈그려 앉아 패를 주웠다⁠. 백십삼 번이 제갈 장로의 신발 밑에 깔려 있었다⁠.

“⁠장로님⁠, 발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⁠?⁠”

“⁠지금 무공 시연 중이오⁠.⁠”

“⁠백십삼 번 손님이 오후에 오십니다⁠.⁠”

장로가 발을 들었다⁠. 대기 의자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⁠.

다름은 패를 통에 담고 일어서며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⁠.

“⁠앞에 성을 붙이면 어떻겠습니까⁠? 남궁 창궁검⁠, 제갈 창궁검⁠. 그러면 둘이 다른 무공이 됩니다⁠.⁠”

두 장로가 동시에 다름을 보았다⁠.

“⁠촌스럽소⁠.⁠”

“⁠촌스럽다는 데는 나도 같은 생각이오⁠.⁠”

처음으로 두 세가가 한뜻이 됐다⁠. 천무량이 찻잔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남궁의 창궁검은 이백 년을 썼으니 그대로 두고⁠, 제갈세가는 신 자 하나를 넣어 「⁠창궁신검⁠」으로 하시오⁠. 글자가 하나 늘었으니 이름도 한 뼘 높아 보이오⁠. 신 자 들어간 무공은 강호에 흔치 않소⁠.⁠”

제갈 장로가 입속으로 창궁신검을 두 번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⁠. 남궁 장로는 원래 이름을 지켰으니 할 말이 없었다⁠. 천무량은 소매에서 처분 도장을 꺼내 처분서 두 장에 차례로 찍었다⁠. 도장 소리가 대청에 두 번 울렸고⁠, 오시가 되기도 전에 호위 여덟 명이 칼집을 철컥이며 나갔다⁠.

*

점심때 다름은 천무량에게 차를 따르며 물었다⁠.

“⁠한나절에 끝날 일을 왜 금칠 패까지 주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개봉 성 밖에 남궁 제자 백오십⁠, 제갈 제자 백오십이 와 있었다⁠.⁠” 천무량이 찻잔을 받았다⁠. “⁠오늘 처분이 안 났으면 오늘 밤 성 밖에서 삼백이 붙었다⁠. 이레를 기다릴 놈들이 아니다⁠.⁠”

다름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⁠. 대청 바닥에 아까 남궁 장로의 칼바람에 떨어진 등잔 기름이 동그랗게 번져 있었다⁠.

“⁠하촌 할머니 일도 이레가 안 남았습니다⁠.⁠”

“⁠철우방은 제자가 스물이고 청하검문은 열둘이다⁠. 저희끼리 한 판 붙으면 둘 셋 다치고 끝나⁠.⁠”

“⁠둑 위에서 붙습니다⁠.⁠”

천무량은 식은 차를 마셨다⁠. “⁠쉬는 날이 언제냐⁠?⁠”

“⁠사흘 뒤입니다⁠.⁠”

“⁠가서 보고 와⁠. 보고 와서도 같은 말을 하면 그때 다시 듣지⁠.⁠”

*

3월 5일 아침⁠, 다름은 이레가 풀리는 날이 어떤 모습인지 처음 보았다⁠. 지난달 접수된 표국 호위 둘의 다툼이었다⁠. 빌려 간 은 열 냥을 갚았느냐 안 갚았느냐로 싸운 일인데⁠, 처분이 나지 않은 채 어젯밤 자정이 지났다⁠. 두 사람은 진시가 되자마자 정문 앞마당에 마주 섰고⁠, 구경꾼이 둥글게 둘러쌌다⁠.

왕춘삼이 의자 하나를 들고 나가 마당 귀퉁이에 앉았다⁠. 손에는 향 한 대와 부싯돌이 들려 있었다⁠.

“⁠뭐 하시는 겁니까⁠?⁠”

“⁠맹이 묻지 않는다는 건 맹이 안 본다는 말이 아니야⁠. 누가 먼저 뽑았는지⁠, 몇 합에 끝났는지 봐 둬야 나중에 딴소리를 안 하지⁠.⁠” 왕춘삼이 향에 불을 붙였다⁠. “⁠향 한 대 타기 전에 끝나면 둘 다 살아⁠. 넘어가면 하나는 들것에 실려⁠.⁠”

두 호위가 칼을 뽑았다⁠. 첫 합에 한 사람의 소매가 찢어졌고⁠, 둘째 합에 다른 사람의 갓끈이 끊어졌다⁠. 셋째 합에서 소매 찢어진 사내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는데⁠, 일어나면서 품에서 은 열 냥이 쏟아졌다⁠. 마당이 조용해졌다⁠. 갓끈 끊어진 사내가 칼을 내리고 바닥의 은을 내려다보았다⁠.

“⁠갚았다며⁠.⁠”

“⁠…갚으려고 들고 다녔지⁠.⁠”

구경꾼들이 와르르 웃었고⁠, 왕춘삼은 향을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⁠. 반도 타지 않은 향이었다⁠. 다름은 웃지 못했다⁠. 은 열 냥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향은 끝까지 탔을 것이다⁠.

*

3월 6일⁠, 다름은 하숙집 주인에게 나귀를 빌려 하촌으로 갔다⁠. 삼십 리 길에서 나귀는 세 번 멈췄고⁠, 멈출 때마다 길가 풀을 뜯었다⁠. 다름이 고삐를 당기며 「⁠군자는 길을 가다 멈추지 않는다⁠」를 읊자 나귀가 귀를 젖히고 한 번 더 멈췄다⁠.

영하 강가에 닿았을 때는 미시였다⁠. 버들객잔은 강둑 바로 아래 있었는데⁠, 기둥 두 개가 부러진 자리에 굵은 장대가 비스듬히 받쳐져 있었다⁠. 할멈이 문간에서 다름을 알아보고 손뼉을 쳤다⁠.

“⁠아이고⁠, 높은 양반이 직접 왔네⁠.⁠”

“⁠높지 않습니다⁠. 구품입니다⁠.⁠”

“⁠구품이 뭐요⁠?⁠”

“⁠제일 아래입니다⁠.⁠”

할멈은 상관없다는 얼굴로 국수를 말아 내왔다⁠. 국수를 먹는 사이 강가에서 쇠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⁠. 다름은 젓가락을 놓고 둑으로 올라갔다⁠.

둑은 강돌을 쌓고 흙을 덮어 만든 것으로⁠, 높이가 사람 키 둘쯤 됐다⁠. 둑 위 좁은 길에서 철우방 제자 셋과 청하검문 제자 셋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⁠. 칼집을 씌운 그대로였다⁠. 칼집이 칼집을 칠 때마다 둑길의 흙이 부스러져 강으로 굴러떨어졌다⁠. 둑 비탈에는 손바닥만 한 돌들이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⁠.

어깨가 넓은 사내 하나가 지게에 돌을 지고 비탈을 올라와 빠진 자리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⁠. 서른 후반쯤 돼 보였고⁠, 정강이까지 걷은 바지에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⁠.

“⁠곽수길입니다⁠. 우리 엄니가 맹에 갔다 왔다더니⁠, 그쪽이시구나⁠.⁠”

“⁠남다름입니다⁠. 둑이 얼마나 버팁니까⁠?⁠”

수길은 강물을 보았다⁠. 물은 아직 맑았고 낮았다⁠.

“⁠비만 안 오면 장마까지는 버텨요⁠. 봄비가 한 번 세게 오면 여기 이 들뜬 데부터 빠집니다⁠.⁠” 수길이 발끝으로 비탈을 툭 찼다⁠. 흙이 한 줌 흘렀다⁠. “⁠제가 메우는 것보다 저 사람들이 밟는 게 빨라요⁠.⁠”

다름은 비무하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⁠. 철우방 방주라는 사내가 쇠뿔을 붙인 투구를 쓰고 팔짱을 낀 채 제자들을 보고 있었다⁠. 다름은 소매에서 접수증 사본을 꺼내 펼쳤다⁠.

“⁠무림맹 민원실입니다⁠. 이 다툼은 3월 1일에 접수됐습니다⁠. 이레 동안 칼을 뽑으시면 안 됩니다⁠.⁠”

“⁠안 뽑았소⁠.⁠” 방주가 턱으로 제자들을 가리켰다⁠. “⁠보시오⁠. 다 칼집째요⁠.⁠”

“⁠칼집째도 칼입니다⁠.⁠”

“⁠맹규에 칼집 이야기가 있소⁠?⁠”

다름은 맹규를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⁠. 칼집 이야기는 없었다⁠. 방주가 껄껄 웃었다⁠.

“⁠모레 자정 넘으면 칼집 벗기오⁠. 청하검문 놈들도 그날만 기다리고 있소⁠. 처분이 오면 처분대로 하고⁠, 안 오면 칼로 하고⁠. 맹이 정한 대로 하는 거요⁠.⁠”

강 건너에서 나룻배 한 척이 다가왔다⁠. 뱃머리에 연보라 옷이 보였다⁠. 매향이 소금 자루를 어깨에 메고 배에서 뛰어내려⁠, 둑 위의 다름을 올려다보았다⁠.

“⁠주사 나리가 왜 여기 있어⁠?⁠”

“⁠현장 확인입니다⁠.⁠”

“⁠확인했으면 알겠네⁠.⁠” 매향이 부채로 둑 비탈을 가리켰다⁠. “⁠우리 흑석곡에서 내려다보면 다 보여⁠. 저 둑 밑동이 벌써 물을 먹었어⁠. 비 한 번이면 끝이야⁠.⁠”

수길이 지게를 내려놓고 매향에게 고개를 숙였다⁠.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사파든 뭐든 소금 배 얻어 타는 사이였다⁠. 다름은 둑 위에서 강 건너 산골을 보았다⁠. 흑석곡 골짜기 위쪽 산자락에 새로 올린 기와지붕 몇 채가 햇빛을 받았다⁠. 점창 분타였다⁠.

저녁에 수길은 객잔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젖은 짚신을 말렸다⁠. 할멈이 아들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리며 맹에서 온 손님한테 발 냄새 풍기지 말라고 했고⁠, 수길은 발을 아궁이에 더 들이밀었다⁠.

“⁠나루가 원래 누구 겁니까⁠?⁠”

“⁠우리 아버지가 놓은 배요⁠. 뱃삯이라 봐야 한 사람에 동전 둘인데⁠, 저 칼잡이들이 그걸 서로 걷겠다고⁠.⁠” 수길이 부지깽이로 불을 쑤셨다⁠. “⁠저는 누가 걷든 상관없어요⁠. 배만 젓게 해 주면⁠. 둑만 안 무너지면⁠.⁠”

“⁠처분이 나면 둑 위 비무부터 막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 말 믿고 잘게요⁠.⁠” 수길이 웃었다⁠. 이가 하나 빠져 있었다⁠. “⁠엄니가 그러는데⁠, 맹 주사 나리가 닭도 안 받았다면서요⁠. 그런 사람은 처음 봤대요⁠.⁠”

할멈이 부엌문 너머에서 소리쳤다⁠. “⁠닭은 내가 도로 잡아먹었다⁠!⁠”

다름은 객잔 다락에서 하룻밤을 잤다⁠. 새벽에 눈을 뜨자 수길은 벌써 지게를 지고 둑으로 나가고 없었다⁠.

*

3월 7일 오후에 맹으로 돌아오자 왕춘삼이 창구에서 조정 소식지인 저보를 읽고 있었다⁠. 조선에 나갔던 관군이 대부분 돌아왔고⁠, 왜와 화친을 맺는 이야기가 오간다는 소식이 맨 앞에 있었다⁠. 왕춘삼은 소식 아래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⁠. 각 성에서 올린 상소가 이번 달에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⁠. 「⁠유중⁠」 두 글자가 작게 박혀 있었다⁠.

“⁠나라도 묵히고 맹도 묵히고⁠. 오늘 하루 안 묵힌 건 우리 점심밥뿐이야⁠.⁠”

3월 7일 밤⁠, 민원실 안쪽 방에는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⁠. 천무량은 남궁과 제갈의 처분서 뒷일을 정리하고 있었고⁠, 다름은 문지방에 서서 젖은 사모를 벗었다⁠. 해 질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⁠.

“⁠보고 왔습니다⁠. 같은 말을 하러 왔습니다⁠.⁠”

“⁠말해⁠.⁠”

“⁠하촌 둑은 비 한 번이면 무너집니다⁠. 오늘 밤 자정이 이레째 끝입니다⁠. 처분 도장을 찍어 주십시오⁠. 철우방과 청하검문에 둑 위 비무를 금한다고 한 줄만 쓰시면 됩니다⁠.⁠”

천무량은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⁠.

“⁠처분은 양쪽 말을 다 들어야 낸다⁠. 철우방 말도 안 들었고 청하검문 말도 안 들었다⁠. 사람 불러서 듣는 데만 사흘이다⁠.⁠”

“⁠그럼 제가 지금 가서 다 불러 오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삼십 리를 밤에⁠? 비 오는데⁠? 나귀 타고⁠?⁠”

다름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나귀는 하숙집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잘 것이었다⁠. 천무량이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⁠. 처분 도장이 거기 있다는 것을 다름은 알았다⁠.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⁠.

“⁠실장님 소매에 있는 걸 압니다⁠.⁠”

“⁠알면 어쩔 테냐⁠?⁠”

“⁠한 번만 찍어 주십시오⁠. 양쪽 말은 제가 나중에 들어 오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나중에 듣고 먼저 찍는 처분이 맹에서 나가면⁠, 다음 날부터 강호 사람들은 맹 처분을 종이로 안다⁠.⁠” 천무량이 고개를 들었다⁠. 등잔 불빛에 회색 수염이 누렇게 보였다⁠. “⁠남궁 일도 제갈 일도 그 종이 한 장으로 막았다⁠. 종이가 가벼워지면 다음엔 아무것도 못 막아⁠.⁠”

빗소리가 처마를 때렸다⁠. 왕춘삼은 진작 퇴근했고⁠, 대청의 번호패 통은 어둠 속에서 조용했다⁠. 다름은 문지방에서 한 발도 안으로 들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⁠.

“⁠실장님은 둑을 못 보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30년 동안 둑은 많이 봤다⁠.⁠” 천무량이 다시 붓을 들었다⁠. “⁠가서 자⁠. 내일 아침 일찍 와⁠.⁠”

다름은 대청으로 나왔다⁠. 유중함 뚜껑을 열자 맨 위에 할멈의 두루마리가 있었다⁠. 붉은 접수 도장이 등잔 빛을 받아 거무스름하게 보였다⁠. 다름은 두루마리를 꺼내 품에 넣고⁠, 사모를 다시 썼다⁠. 정문 밖 돌계단에는 빗물이 냇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⁠. 하숙집 마당에서 나귀가 한 번 길게 울었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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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하리온2026.11.06· 2화

    창궁검 이름 다툼을 한나절에 푸는 천무량 보고 민원실 고수는 따로 있구나 싶었어요. 하촌 금 간 둑 장면은 웃음기가 싹 빠지고요. 도장이 소매에서 안 나오는 마지막이 궁금해서 바로 다음 화 눌렀습니다.

    • 하로운작가2026.11.06

      큰 문파 다툼은 빨리 풀리고 작은 마을 민원은 오래 남아요. 다름이 둑 하나를 어떻게 붙드는지 지켜봐 주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