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365자)

번호표 뽑으세요

무림맹 민원실 · 하로운

만력 22년 3월 1일 아침⁠, 숭산 기슭 무림맹 본산 정문이 열리기도 전에 줄은 돌계단 아래 버드나무까지 내려가 있었다⁠. 칼 찬 사람 뒤에 닭을 안은 할머니가 서 있고⁠, 창 멘 사람이 할머니 뒤를 받쳤고⁠, 목에 염주를 건 승려는 줄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⁠. 정문 동쪽 민원실 대청 안에서 남다름은 창구 탁자 옆 나무통을 행주로 닦았다⁠. 통 안에는 번호를 새긴 나무패가 이백 개 들어 있었고⁠, 흔들면 콩 볶는 소리가 났다⁠.

“⁠새로 왔으면 얼굴부터 닦아⁠.⁠”

고참 주사 왕춘삼이 놋대야를 밀어 주었다⁠. 물에 비친 얼굴은 마르고 눈이 동그랬으며⁠, 눈 밑에는 밤새 맹규를 외운 자국이 거뭇하게 내려앉아 있었다⁠. 흐트러진 갈색 머리를 상투로 틀어 검은 사모 아래 밀어 넣었는데⁠, 앞머리 몇 가닥이 기어이 빠져나와 이마를 덮었다⁠. 푸른 관복 가슴에는 흰 학 두 마리가 구름 사이를 날았다⁠.

“⁠학은 일품 문관이 다는 거 아닙니까⁠?⁠”

“⁠맹에서 관복을 한꺼번에 싸게 들였거든⁠. 남은 게 학뿐이었대⁠.⁠” 왕춘삼이 제 가슴의 학을 두드렸다⁠. “⁠학 달고 구품 일 하는 거야⁠. 익숙해져⁠.⁠”

다름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붓을 귀에 꽂았다⁠. 오른손에 쥔 접수 도장은 대추나무를 깎은 것으로⁠, 바닥에 「⁠무림맹 민원실 접수⁠」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⁠. 개봉에서 두부를 파는 어머니는 아들이 향시에 붙어 관복을 입은 줄 알고 동네에 떡을 돌렸다⁠. 세 번 떨어졌다는 말은 아직 편지에 쓰지 못했다⁠.

해가 숭산 어깨 위로 올라온 진시 정각⁠, 정문 북이 울렸다⁠. 문이 열리자 줄이 대청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⁠, 다름은 창구 앞에 나무패를 세웠다⁠. 「⁠번호표를 뽑고 기다리십시오⁠」⁠.

맨 앞 사내는 통을 지나쳐 탁자 위로 몸을 숙였다⁠. 어깨 밑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뒤로 대충 묶었고⁠, 검은 도포 소매에 붉은 띠를 감았다⁠.

“⁠점창파 하남 분타 대사형 주태곤이오⁠. 사파가 이사 왔소⁠.⁠”

“⁠번호표 뽑으세요⁠.⁠”

“⁠급하단 말이오⁠!⁠”

“⁠여기 계신 분들이 다 급하십니다⁠. 뽑으세요⁠.⁠”

칼집에서 쇳소리가 났다⁠. 주태곤이 칼을 뽑아 탁자에 내리꽂았고⁠, 칼날은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박혀 부르르 떨었다⁠. 대기 의자에서 할머니 품의 닭이 꼬꼬댁 울었다⁠. 다름은 박힌 칼을 내려다보다가 도장을 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⁠.

“⁠탁자는 맹의 재산입니다⁠.⁠”

“⁠그래서⁠?⁠”

“⁠그래서⁠, 칼은 뽑아 가셔야 하고⁠, 번호표도 뽑아 가셔야 합니다⁠. 둘 다 뽑으시면 됩니다⁠.⁠”

대기 의자 어딘가에서 누가 풉 웃었다⁠. 주태곤의 얼굴이 붉어졌다가⁠, 뒤를 돌아보고는 하얗게 질렸다⁠.

*

주태곤 뒤에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⁠. 검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꽃 모양 비녀를 꽂았으며⁠, 연보라 바탕에 흰 꽃이 핀 옷을 입었다⁠. 팔짱 낀 손에는 매화를 그린 흰 부채가 쥐여 있었다⁠. 여자는 주태곤을 보지 않고 다름을 보았다⁠. 주태곤이 여자를 노려보았고⁠, 여자는 부채 끝으로 탁자에 박힌 칼을 톡 건드렸다⁠.

“⁠칼을 꽂으면 먼저 해 주는 거야⁠? 그럼 나도 하나 꽂을까⁠?⁠”

“⁠줄 안 서는 사파는 빠져⁠!⁠”

“⁠줄 서 있었는데⁠? 네가 새치기한 거지⁠.⁠”

다름의 머리가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⁠. 사파라는 말이 대청에 퍼지자 대기 의자에 앉은 정파 사람들이 슬금슬금 손을 칼자루로 가져갔다⁠. 다름은 도장을 높이 들었다⁠.

“⁠민원실 안에서는 칼을 뽑지 않습니다⁠. 맹규 첫 장 첫 줄입니다⁠. 지금 한 분이 이미 뽑으셨으니⁠, 더는 안 됩니다⁠.⁠”

안쪽 방문이 열렸다⁠. 키가 작고 회색 수염을 짧게 다듬은 사내가 찻잔을 들고 나왔다⁠. 민원실장 천무량은 탁자에 박힌 칼을 한 번⁠, 주태곤의 붉은 띠를 한 번 보고는 소매에서 금칠한 나무패를 꺼냈다⁠.

“⁠점창이면 아홉 대문파요⁠. 이 패를 드리지⁠. 줄 앞으로 오시오⁠.⁠”

다름은 실장을 쳐다보았다⁠. 금칠 패는 아홉 대문파와 다섯 세가에만 준다고⁠, 첫날 아침 천무량이 설명도 없이 통 옆에 상자째 놓고 간 물건이었다⁠. 천무량은 칼을 뽑아 주태곤에게 돌려주고⁠, 칼이 빠진 자리의 나뭇조각을 손가락으로 털었다⁠. 그러고는 주태곤이 내민 두루마리를 펼쳐 읽지도 않고 다시 말았다⁠.

“⁠사파는 맹 밖이오⁠. 맹 밖의 일은 민원이 되지 않소⁠. 반려하오⁠.⁠”

“⁠그럼 저것들을 어떻게 내보내란 말이오⁠?⁠”

“⁠맹이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오⁠.⁠”

주태곤이 칼을 칼집에 꽂으며 대청을 나갔다⁠. 여자가 부채를 탁 접었다⁠.

“⁠들었지⁠? 우리는 줄 밖이래⁠. 줄 밖이라 여기서 칼 맞아도 민원 하나 못 내⁠.⁠”

“⁠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⁠?⁠”

“⁠연매향⁠. 흑풍채 채주⁠. 지금은 흑석곡에서 감자 심어⁠.⁠” 매향이 두루마리를 탁자에 올렸다⁠. “⁠점창 분타가 우리 우물 물길을 막았어⁠. 받아 줘⁠. 정파랑 같은 줄에 서게 해 줘⁠.⁠”

다름은 맹규를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으로 넘겼다⁠. 민원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맹에 속한 문파와 맹 둘레 고을의 양민⁠. 흑풍채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⁠.

“⁠죄송합니다⁠. 받을 수가 없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여기 있을게⁠.⁠”

매향은 대기 의자 맨 끝에 앉아 부채를 폈다⁠. 오시 정각⁠, 왕춘삼이 창구에 「⁠점심시간⁠」 패를 세웠을 때도 매향은 일어나지 않았다⁠. 품에서 만두를 꺼내 먹다가⁠, 다름과 눈이 마주치자 하나를 탁자 위로 굴려 보냈다⁠.

“⁠뇌물 아니야⁠. 식었어⁠.⁠”

다름은 만두를 집는 대신 소매에서 찐 감자를 꺼내 반으로 쪼갰다⁠. 하숙집 주인이 점심으로 싸 준 것이었다⁠. 반쪽을 탁자 너머로 밀자 매향이 눈썹을 올렸다⁠.

“⁠감자 심는 사람한테 감자를 줘⁠?⁠”

“⁠만두를 받았으니 뭐라도 드려야 뇌물이 안 됩니다⁠. 주고받으면 장사입니다⁠.⁠”

매향이 웃음을 참느라 부채로 입을 가렸다⁠. 감자를 받아 한입 베어 물고는 대기 의자에 등을 기댔다⁠.

“⁠흑풍채는 2년 전에 산에서 내려왔어⁠. 아버지 돌아가시고⁠. 서른 가구가 칼 대신 괭이를 들었는데⁠, 작년에 점창이 바로 위 산자락에 분타를 지었어⁠.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잖아⁠.⁠”

“⁠관아에는 가 보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등봉현 지현 나리는 강호 일은 맹에 가래⁠. 맹은 사파 일은 관아에 가래⁠. 둘이 공을 주고받아⁠. 우리가 공이야⁠.⁠”

다름은 붓을 귀에서 뽑았다가 도로 꽂았다⁠. 막히면 입에서 사서 구절이 먼저 나오는 버릇이 이번에도 나왔다⁠.

“⁠사해 안이 다 형제다⁠.⁠”

“⁠그 말 누가 했는데⁠?⁠”

“⁠공자의 제자 자하입니다⁠.⁠”

“⁠자하는 사파였어⁠?⁠”

왕춘삼이 점심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⁠. 다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감자를 마저 먹었다⁠.

*

미시가 되자 줄은 다시 정문까지 늘어났다⁠. 객잔이 비무에 부서졌다는 민원이 셋⁠, 남의 문파가 우리 무공 이름을 베꼈다는 민원이 둘⁠, 이웃 문파 제자가 우리 닭을 훔쳤다는 민원이 하나 들어왔다⁠. 다름은 두루마리를 받을 때마다 붉은 도장을 찍었다⁠. 도장이 찍힌 날부터 이레 동안 다툼의 당사자는 칼을 뽑지 못하고⁠, 이레째 자정까지 실장이 처분 도장을 찍지 못하면 이후의 칼부림은 맹이 묻지 않았다⁠. 도장을 찍을 때마다 다름은 손목에 무게가 하나씩 얹히는 것을 느꼈다⁠.

스물한 번 패를 쥔 사람은 아까 닭을 안고 있던 할머니였다⁠. 패에는 「⁠021⁠」이 새겨져 있었다⁠. 할머니는 닭을 대기 의자에 묶어 두고 와서 탁자를 두 손으로 짚었다⁠.

“⁠하촌에서 왔어요⁠. 영하 강가 버들객잔 하는 곽씨요⁠. 동네에선 버들 할멈이라 그래요⁠.⁠”

“⁠말씀하세요⁠.⁠”

“⁠철우방이랑 청하검문이 나루 뱃삯을 서로 걷겠다고 날마다 붙어요⁠. 지난달엔 우리 객잔 기둥을 둘이나 부러뜨렸고⁠, 요새는 둑 위에서 붙어요⁠. 둑 돌이 벌써 들떴어요⁠. 장마 오기 전에 저 사람들 좀 둑에서 내려오게 해 주세요⁠.⁠”

“⁠객잔 수리비도 같이 청구하시겠습니까⁠?⁠”

할멈이 눈을 끔뻑였다⁠. “⁠그런 것도 돼요⁠?⁠”

“⁠됩니다⁠.⁠”

“⁠둑은 우리 아들 수길이가 날마다 돌을 지어 날라서 괴어요⁠. 뱃사공이라 물을 알거든요⁠. 고쳐 놓으면 칼잡이들이 와서 또 밟고⁠, 밟으면 또 들떠요⁠.⁠” 할멈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쓸었다⁠. “⁠아들 놈이 그래요⁠. 엄마⁠, 맹에 가면 높은 사람들이 다 해 준대⁠. 그래서 닭 한 마리 들고 왔어요⁠. 빈손으로 오기가 뭣해서⁠.⁠”

“⁠닭은 안 받습니다⁠.⁠”

“⁠그럼 도로 가져가요⁠?⁠”

“⁠가져가셔야 합니다⁠. 맹규에 닭 받으라는 말은 없습니다⁠.⁠”

할멈은 서운한 얼굴로 대기 의자의 닭을 돌아보았다⁠. 다름은 두루마리 끝에 「⁠객잔 기둥 둘⁠」을 덧붙이고 도장을 눌렀다⁠. 붉은 글자가 종이에 번지며 「⁠3월 1일 접수⁠」가 찍혔다⁠. 이레째는 3월 7일이었다⁠.

정문에서 북 대신 징이 울렸다⁠. 남궁세가 집사가 금칠 패를 들고 대기 줄 옆을 지나 곧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⁠. 비단 신이 대청 바닥을 스치는 동안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⁠, 집사가 문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대기 의자 여기저기서 말이 새어 나왔다⁠. 아침부터 기다린 표국 호위 하나가 제 번호패를 손바닥에 탁탁 쳤다⁠.

“⁠금칠 패는 어디서 파오⁠? 나도 하나 사게⁠.⁠”

“⁠못 사⁠. 세가로 태어나야 줘⁠.⁠”

“⁠그럼 다음 생에 받지 뭐⁠.⁠”

웃음이 한 바퀴 돌았지만 아무도 오래 웃지 않았다⁠. 왕춘삼이 다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⁠.

“⁠남궁이랑 제갈이 같은 무공 이름을 쓴대⁠. 둘 다 세가라 먼저 들어가⁠. 석 달 뒤면 맹주 선거거든⁠.⁠”

정문 기둥에는 아침에 붙은 방이 있었다⁠. 「⁠맹주 선거 6월 15일 진시⁠」 바로 밑에 남궁세가 가주의 이름과 함께 「⁠강호를 깨끗이⁠」 다섯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⁠.

*

신시에 창구를 닫자 천무량이 다름의 탁자로 왔다⁠. 오늘 받은 두루마리 더미를 손가락으로 넘기다가 버들 할멈의 두루마리에서 멈췄다⁠.

“⁠이건 왜 찍었나⁠?⁠”

“⁠스물한 번이었습니다⁠. 순서대로 찍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철우방과 청하검문은 작은 문파다⁠. 저희끼리 한 판 붙으면 끝나⁠.⁠” 천무량이 두루마리를 들고 안쪽 방 궤짝으로 갔다⁠. 검게 옻칠한 궤짝 안에는 이미 두루마리가 수북했다⁠. “⁠오늘 남궁과 제갈 일이 들어왔다⁠. 그게 먼저다⁠.⁠”

“⁠할머니 일은 이레 안에 처분이 나야 합니다⁠. 안 나면 둑 위에서 칼부림이 납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“⁠아시면서 넣으십니까⁠?⁠”

천무량은 대답 대신 궤짝 뚜껑을 덮었다⁠. 왕춘삼이 다름의 소매를 끌며 작게 말했다⁠. 황상께서 올라온 상소를 받아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시는 일을 조정에서는 유중이라 부르는데⁠, 주사들은 저 궤짝을 유중함이라 부른다고 했다⁠.

“⁠조정도 그러는데 우리라고 별수 있나⁠.⁠”

“⁠실장님⁠.⁠” 다름이 한 걸음 다가갔다⁠. “⁠큰 문파 먼저라는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⁠?⁠”

“⁠큰 문파 먼저다⁠. 이유는 묻지 마라⁠.⁠” 천무량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⁠. “⁠네가 그 도장을 찍었다⁠. 이레 뒤 일은 네가 진다⁠.⁠”

다름은 대답하지 못했다⁠. 창구를 정리하려고 탁자로 돌아오니⁠, 칼이 박혔던 구멍 옆에 아까 반려당한 매향의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⁠. 매화 부채 그림이 끝에 작게 찍혀 있었고⁠, 아래에 한 줄이 더 쓰여 있었다⁠. 「⁠받든 말든 내일 또 옴⁠」⁠.

다름은 탁자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깊이를 쟀다⁠. 두 마디가 다 들어갔다⁠. 대기 의자에 묶여 있던 할멈의 닭이 아직 거기 있었다⁠. 닭은 다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⁠, 정문 밖에서는 할멈이 닭을 찾으며 돌계단을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⁠.

1화는 어땠나요?

댓글 0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
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