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345자)

여드레째 아침

무림맹 민원실 · 하로운

3월 8일 인시⁠, 하숙집 마당에서 나귀는 비를 맞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⁠. 다름은 고삐를 두 번 당기다가 놓고 걸었다⁠. 품에는 유중함에서 꺼낸 할멈의 두루마리가 기름종이에 싸여 있었다⁠. 삼십 리 길은 진창이었고⁠, 짚신 한 짝은 십 리를 못 가 진흙에 빼앗겼다⁠. 남은 한 짝마저 벗어 들고 뛰자 사모가 자꾸 눈 위로 미끄러졌다⁠.

영하가 보이는 언덕에 닿았을 때는 사시였다⁠. 어제 맑던 강물이 흙빛으로 불어 둑 허리까지 차올라 있었다⁠. 둑 위에서 쇳소리가 났다⁠. 칼집 소리와는 달랐다⁠. 날과 날이 맞부딪쳐 귀가 저릿한 소리였다⁠.

둑 아래 마을 사람들이 처마 밑에 모여 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⁠. 철우방 제자 스물과 청하검문 제자 열둘이 좁은 둑길 양 끝에서 밀고 밀리는 중이었다⁠. 쇠뿔 투구를 쓴 방주가 맨 앞에서 칼을 휘둘렀고⁠, 청하검문 문주라는 흰 수염 노인이 맞받았다⁠. 둑 가운데 들뜬 자리에서는 수길이 맨손으로 돌을 붙들고 소리치고 있었다⁠.

“⁠밟지 마⁠! 거기 밟지 말라고⁠!⁠”

다름은 비탈을 기어올랐다⁠. 젖은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⁠. 둑길에 올라서자마자 두루마리를 머리 위로 들었다⁠.

“⁠무림맹 민원실입니다⁠! 처분이 곧 납니다⁠! 칼을 거두십시오⁠!⁠”

방주가 칼을 멈추지 않은 채 소리쳤다⁠. “⁠곧이 언제요⁠?⁠”

“⁠오늘 안에 납니다⁠!⁠”

“⁠맹규에 곧은 없소⁠! 이레는 어젯밤 자정에 끝났소⁠!⁠”

칼끝이 다름의 사모 끈을 스치고 지나갔다⁠. 다름은 엎드렸다가 일어났다⁠. 무공을 모르는 몸은 칼바람 속에서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⁠. 다름은 두 문파 사이로 두 걸음 더 들어가 두 팔을 벌렸다⁠. 젖은 관복 소매가 펄럭였고⁠, 학 두 마리가 흙탕물을 뒤집어썼다⁠.

“⁠나루 뱃삯은 한 사람에 동전 둘입니다⁠! 동전 둘 때문에 둑을 부수실 겁니까⁠?⁠”

청하검문 문주가 잠깐 멈칫했다⁠. 방주는 멈추지 않았다⁠. 방주의 칼이 다름의 어깨 너머로 문주를 향했을 때⁠, 강 건너에서 연보라 옷자락이 나룻줄 위를 타고 날아왔다⁠. 매향이 줄 위를 세 번 디뎌 강을 건넜고⁠, 둑에 내려앉으며 부채를 휘둘렀다⁠. 쇠살 부채가 방주의 칼등을 때려 칼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⁠.

튕겨 나간 칼이 둑 돌에 박혔다⁠. 들뜬 돌 하나가 쑥 빠졌다⁠.

수길이 얼굴을 들었다⁠. 빠진 돌 자리에서 흙탕물이 실처럼 뿜어 나오고 있었다⁠.

“⁠내려가요⁠! 다 내려가⁠!⁠”

*

둑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았다⁠. 실 같던 물줄기가 팔뚝만 해졌고⁠, 팔뚝이 허리만 해졌다⁠. 그다음에 둑 가운데가 통째로 주저앉았다⁠. 칼 든 사람들이 양 끝으로 뛰어내렸고⁠, 다름은 매향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바람에 비탈로 굴렀다⁠. 흙탕물이 둑 아래 마을로 쏟아져 들어갔다⁠. 버들객잔 장대 기둥이 먼저 넘어갔다⁠.

할멈이 객잔 문간에서 물에 쓸려 가다가 문틀을 붙들었다⁠. 수길은 나루에 매어 둔 배로 뛰어가 줄을 끊었다⁠. 배는 물살을 타고 객잔 앞으로 미끄러졌고⁠, 수길은 한 손으로 노를 박고 한 손으로 어머니를 끌어 올렸다⁠. 다음은 옆집 노인이었다⁠. 그다음은 지붕 위로 올라간 아낙 둘이었다⁠. 배가 사람으로 가득 차자 수길은 배를 언덕 아래 대고 사람들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철우방 애 하나가 물에 빠졌어요⁠!⁠”

누군가 외쳤다⁠. 둑에서 뛰어내리다 물에 휩쓸린 철우방 제자였다⁠. 열여덟쯤 된 앳된 얼굴이 흙탕물 위로 떴다 가라앉았다 했다⁠. 방주가 언덕 위에서 이름을 불렀지만 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⁠.

수길은 빈 배를 다시 물살로 밀었다⁠. 다름이 배 꽁무니를 붙잡았다⁠.

“⁠같이 가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나리는 헤엄도 못 치잖아요⁠.⁠” 수길이 다름의 손을 떼어 냈다⁠. 손바닥이 거칠고 뜨거웠다⁠. “⁠엄니 좀 봐 줘요⁠.⁠”

배는 물살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갔다⁠. 수길이 노를 내밀자 철우방 제자가 붙잡았고⁠, 수길은 노를 당겨 제자를 배 안으로 끌어 올렸다⁠. 언덕 위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⁠. 바로 다음 순간⁠, 무너진 둑에서 떨어져 나온 큰 돌덩이가 물살에 굴러와 뱃전을 때렸다⁠. 배가 뒤집혔다⁠.

철우방 제자는 뒤집힌 배 밑동을 붙든 채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멈췄다⁠. 수길은 보이지 않았다⁠.

*

수길을 찾은 것은 미시가 다 되어서였다⁠. 오 리 아래 버드나무 뿌리 사이에 엎드려 있었다⁠. 마을 사내들이 문짝을 떼어 와 수길을 눕혔다⁠. 할멈은 문짝 옆에 무릎을 꿇고 아들의 젖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⁠.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다⁠. 할멈은 아들의 손을 펴서 손바닥의 진흙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⁠.

다름은 할멈 뒤에 서 있었다⁠.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가 기름종이째 젖어 있었다⁠. 붉은 접수 도장이 번져 「⁠3월 1일⁠」의 1 자가 알아볼 수 없게 됐다⁠.

방주와 청하검문 문주가 멀찍이 서서 문짝을 보았다⁠. 살아난 철우방 제자는 방주 뒤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⁠. 방주가 투구를 벗었다⁠. 쇠뿔에서 빗물이 떨어졌다⁠.

“⁠이레가 지났소⁠.⁠” 방주가 낮게 말했다⁠. “⁠맹이 정한 대로 했소⁠.⁠”

다름은 대답할 말을 찾았다⁠. 맹규를 처음부터 끝까지 넘겨도 대답이 없었다⁠. 방주의 말이 맞았다⁠. 맹이 정한 대로였다⁠.

매향이 방주 앞으로 갔다⁠. 부채는 접혀 있었다⁠.

“⁠네 제자 건진 사람이야⁠. 고개 숙여⁠.⁠”

방주는 한참 서 있다가 문짝 앞에 무릎을 꿇었다⁠. 청하검문 문주도 뒤따라 꿇었다⁠. 할멈은 두 사람을 보지 않았다⁠. 아들 손바닥의 마지막 진흙을 떼어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다름을 보았다⁠.

“⁠맹에 가면 높은 사람들이 다 해 준다고⁠, 우리 수길이가 그랬는데⁠.⁠”

다름은 무릎을 꿇었다⁠. 젖은 땅이 무릎으로 차갑게 스며들었다⁠.

밤에 마을 사람들은 언덕 위 서낭당에 수길을 눕히고 불을 피웠다⁠. 할멈은 불가에 앉아 아들의 짚신을 말렸다⁠. 어제 아궁이 앞에서 말리던 짚신이었다⁠. 다름은 불 건너편에 앉아 있었고⁠, 매향이 흑석곡에서 건너온 사람들 편에 마른 장작과 보리떡을 들려 보냈다⁠. 매향 자신은 다름 옆에 와서 앉았다⁠. 부채는 허리띠에 꽂혀 있었다⁠.

“⁠너희 맹 규칙 말이야⁠.⁠” 매향이 장작 하나를 불에 던졌다⁠. “⁠이레 동안 칼 뽑지 말라는 거⁠. 칼 있는 사람한테는 쉬는 날이고⁠, 칼 없는 사람한테는 기다리는 날이야⁠. 이레째 자정이 지나면 칼 있는 사람이 이기게 돼 있어⁠.⁠”

“⁠처분이 나면 다릅니다⁠.⁠”

“⁠처분이 났어⁠?⁠”

다름은 불을 보았다⁠. 젖은 관복에서 김이 올랐다⁠. 매향이 보리떡 하나를 반으로 쪼개 다름의 무릎에 올렸다⁠.

“⁠먹어⁠. 내일 저 관 메고 맹까지 간대⁠. 너 맨발로 삼십 리 걸으려면 먹어야 돼⁠.⁠”

“⁠신을 하나 잃었습니다⁠.⁠”

“⁠둘 다 잃었잖아⁠.⁠” 매향이 다름의 발을 내려다보았다⁠. 진흙이 무릎까지 말라붙어 있었다⁠. “⁠관복 입은 사람이 맨발인 건 처음 봐⁠.⁠”

다름은 떡을 먹었다⁠. 목이 메어 반쯤 먹고 멈췄고⁠, 매향은 아무 말 없이 물바가지를 건넸다⁠.

*

3월 9일 사시⁠, 무림맹 정문 돌계단 아래에 하촌 사람 마흔이 관 하나를 메고 올라왔다⁠. 삼십 리를 밤새 걸어온 사람들의 짚신이 다 터져 있었다⁠. 관 뒤쪽 멜대는 철우방 방주와 청하검문 문주가 하나씩 메고 있었다⁠. 둘 다 투구도 칼도 없이 왔고⁠, 오는 내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⁠. 할멈이 맨 앞에서 관 머리를 짚었고⁠, 다름은 맨발로 관 옆에 있었다⁠. 맹 정문 앞 줄에 서 있던 민원인들이 하나둘 번호패를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⁠.

정문 안에서 총관이 나왔다⁠. 뒤따라 천무량이 나왔다⁠. 천무량은 관을 보고⁠, 다름의 맨발을 보았다⁠. 총관이 손짓을 하자 문지기들이 창을 비껴 들었다⁠. 창구에서 나온 왕춘삼은 손에 들고 있던 「⁠점심시간⁠」 패를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⁠. 아직 사시였다⁠.

“⁠관을 맹 안으로 들일 수는 없소⁠. 무슨 일인지 민원실에 접수를 하시오⁠.⁠”

할멈이 웃었다⁠. 소리 없이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보다 무서웠다⁠.

“⁠접수는 여드레 전에 했어요⁠.⁠”

정문 옆 원로당 쪽문이 열리고 흰 도포를 입은 노도사가 걸어 나왔다⁠. 학처럼 마른 몸에 흰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왔다⁠. 무당파 장문 청송 진인이었다⁠. 맹주 선거에 나선 두 후보 가운데 하나였다⁠. 청송은 관 앞에 이르러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⁠, 돌아서서 줄 선 사람들과 하촌 사람들을 한꺼번에 둘러보았다⁠.

“⁠허허⁠, 큰 문파 일은 하루에 끝나고 작은 마을 일은 열흘을 묵는구려⁠. 빈도가 맹주가 되면 모든 민원은 줄 선 차례대로 하겠소⁠. 금칠 패 따위는 아궁이에 넣겠소⁠.⁠”

줄 선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일었다⁠.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⁠. 줄 중간의 표국 호위 하나가 옆 사람에게 금칠 패를 아궁이에 넣으면 금이 녹아 나오느냐고 물었고⁠, 옆 사람은 녹으면 자기가 줍겠다고 했다⁠. 정문 기둥의 「⁠강호를 깨끗이⁠」 방 아래에서 남궁세가 집사가 입술을 깨물었다⁠. 총관이 천무량을 돌아보았고⁠, 천무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⁠. 총관이 헛기침을 했다⁠.

“⁠오늘부터 한 달⁠, 민원실 남 주사 창구는 번호표 순서대로만 받으시오⁠. 금칠 패는 그 창구에 쓰지 않소⁠. 해 보고 다시 정하겠소⁠.⁠”

청송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름의 어깨를 두드렸다⁠. 손이 가벼웠다⁠. 다름은 어깨에 얹힌 손보다 할멈의 손을 보았다⁠. 할멈은 관 머리를 짚은 채 다름이 받은 순번제 이야기를 한 마디도 듣지 않는 얼굴이었다⁠.

*

3월 9일 밤 민원실 안쪽 방에서 천무량은 처분서 한 장을 썼다⁠. 「⁠하촌 둑 위 비무를 금한다⁠. 철우방과 청하검문은 둑을 다시 쌓고 버들객잔 기둥 둘을 물어 준다⁠」⁠. 소매에서 처분 도장을 꺼내 찍었다⁠. 찍는 소리가 대청까지 울렸다⁠.

다름은 문지방에서 도장 소리를 들었다⁠. 발은 하숙집 주인이 준 헌 짚신에 들어가 있었다⁠.

“⁠이제 찍으십니까⁠?⁠”

“⁠이제라도 찍어야 둑을 다시 쌓는다⁠.⁠”

“⁠하나가 죽었습니다⁠. 개봉 성 밖 삼백보다 하나가 적어서 됩니까⁠?⁠”

천무량이 붓을 내려놓았다⁠. 등잔 불빛이 수염 끝에서 떨렸다⁠.

“⁠삼백이면 안 되고 하나면 된다고 한 적 없다⁠.⁠” 목소리가 낮았다⁠. “⁠둘 다 막을 손이 없었을 뿐이다⁠. 손이 하나면 하나를 고른다⁠. 나는 30년을 그렇게 골랐다⁠.⁠”

“⁠30년 전에는 무엇을 고르셨습니까⁠?⁠”

천무량의 손이 소매 속 도장 위에서 멈췄다⁠. 대답은 한참 뒤에 왔다⁠.

“⁠그건 묻지 마라⁠. 이유를 묻지 말라고 첫날 말했다⁠.⁠”

“⁠첫날은 큰 문파 먼저인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셨습니다⁠. 30년 전 일은 오늘 처음 여쭙습니다⁠.⁠”

“⁠말꼬리 잡는 건 향시 공부에서 배웠냐⁠?⁠”

“⁠세 번 떨어지면서 배웠습니다⁠.⁠”

천무량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⁠.

“⁠오늘부터 제 창구는 번호표 순서입니다⁠.⁠”

“⁠안다⁠. 총관 말을 나도 들었다⁠.⁠” 천무량이 일어나 대청으로 나왔다⁠. 번호패 통 옆 상자에서 금칠 패를 한 움큼 쥐어 다름의 창구에서 빼냈다⁠. 금빛이 등잔 아래서 반짝였다⁠. “⁠하나만 알아 둬라⁠. 번호표가 네 것이면 칼부림도 네 것이다⁠. 네 순서 때문에 금칠 패가 밀려나서 큰 문파가 칼을 뽑으면⁠, 그날은 하나가 아니다⁠.⁠”

천무량은 금칠 패를 소매에 넣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⁠. 다름은 창구 탁자에 할멈의 젖은 두루마리를 펴 놓았다⁠. 번진 도장 위에 천무량의 처분서를 겹쳐 올리고⁠, 칼자국 구멍 난 탁자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⁠. 번호패 통을 흔들자 이백 개 나무패가 한꺼번에 덜컥였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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