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화(5,360자)

번역기

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· 지백솔

새벽 다섯 시 사십 분⁠, 호수공원 맨발 산책로에는 벌써 신발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⁠. 흙길 입구 신발장 위에 운동화와 등산화와 슬리퍼가 가지런했다⁠. 순애는 운동화를 벗지 않고 흙길 옆 벤치에 앉았다⁠. 흰 블라우스 위에 회색 카디건을 여미자 호수에서 올라온 물비린내가 소매 안으로 들어왔다⁠.

재빈은 약속한 시각보다 십 분 일찍 와 있었다⁠. 어젯밤 옷 그대로였다⁠. 잠을 못 잔 얼굴로 벤치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⁠.

“⁠어머님⁠.⁠”

“⁠어머님은 아직이에요⁠. 순애 씨도 아니고요⁠.⁠”

재빈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⁠.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켜고⁠, 목을 골랐다⁠.

“⁠제 목소리 맞습니다⁠.⁠”

흙길에서 맨발의 아주머니 셋이 손뼉을 치며 지나갔다⁠.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안경을 고쳐 썼다⁠.

“⁠어머⁠, 지점장님⁠! 고잔지점 지점장님 맞으시죠⁠? 저 적금 들 때 사탕 주셨잖아요⁠. 남자 친구분이세요⁠?⁠”

“⁠사위 될 사람이에요⁠.⁠”

“⁠어머⁠, 잘생겼다⁠. 지점장님⁠, 맨발로 걸으셔야 돼요⁠. 땅 기운이 발바닥으로 올라와요⁠. 혈압이 쑥 내려가요⁠.⁠”

“⁠지금은 혈압을 좀 올려야 해서요⁠.⁠”

아주머니들이 깔깔 웃으며 멀어졌다⁠. 순애는 휴대전화를 꺼내 케일런의 대화방을 열고 재빈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⁠.

“⁠처음부터 말해 봐요⁠. 은행에서는 손님한테 처음부터 말하게 했어요⁠. 중간부터 말하는 사람은 중간을 숨기거든요⁠.⁠”

*

재빈은 서른셋 되던 가을에 포이산에 갔다⁠. 녹음 스튜디오가 문을 닫고 넉 달째 놀던 때였다⁠. 구인 사이트에 「⁠해외 리조트 고객 상담⁠, 한국어 가능자⁠, 월 칠백⁠, 숙식 제공⁠, 항공권 지원⁠」이라는 광고가 있었다⁠. 메콩강 하류의 국경 도시였다⁠. 공항에 내리자 승합차가 마중을 나왔고⁠, 차는 세 시간을 달려 담장 높은 건물들 앞에서 멈췄다⁠.

“⁠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권을 걷어 갔어요⁠. 비자 처리해 준다고요⁠. 그 뒤로 못 돌려받았습니다⁠.⁠”

건물은 여섯 동이었고⁠, 리조트처럼 꾸민 정문에 「⁠하이리버⁠」라는 간판이 있었다⁠.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⁠. 방마다 이층 침대가 넷이었고⁠, 한 층에 책상 백 개가 있었다⁠. 책상마다 휴대전화가 여러 대 놓였다⁠. 책상 위에는 대본이 있었다⁠. 식당 벽에 매단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한국 드라마가 나왔다⁠. 한국 사람 말투를 배우라는 것이었다⁠. 밥은 하루 두 끼였고⁠, 쌀이 반쯤 생쌀이었다⁠.

“⁠대본이요⁠?⁠”

“⁠미군 장교⁠, 해외 의사⁠, 석유 회사 기술자⁠, 그런 사람이 되는 대본이요⁠. 첫날 무슨 말을 하고⁠, 몇째 주에 가족 얘기를 꺼내고⁠, 언제 돈 얘기를 하는지 다 적혀 있어요⁠. 벽에는 실적표가 붙어 있었어요⁠. 하루에 새 사람 몇 명한테 말을 걸었는지⁠, 누가 돈을 보냈는지⁠. 실적이 안 나오면 밥이 없었고요⁠. 더 안 나오면 다른 방으로 데려갔어요⁠.⁠”

재빈은 다른 방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⁠. 대신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쌌다⁠. 손목에 흐릿한 줄 자국이 있었다⁠. 순애는 묻지 않았다⁠.

“⁠녹음 일을 했다니까 저를 따로 불렀어요⁠. 케일런 목소리가 필요하다고⁠. 영어 섞인 서툰 한국말로⁠, 숨 쉬는 것까지 진짜처럼⁠. 하루에 수십 개를 녹음했어요⁠. 굿모닝⁠, 굿나잇⁠, 보고 싶어요⁠, 미안해요⁠, 오늘 부대 일이 힘들었어요⁠. 그걸 여러 사람한테 돌려 썼습니다⁠.⁠”

“⁠여러 사람⁠.⁠”

“⁠케일런은 한 사람이 아니에요⁠. 어머님만 케일런이랑 연애한 게 아니고요⁠.⁠”

순애는 휴대전화를 도로 가져왔다⁠. 대화방을 거슬러 올라갔다⁠. 아침 일곱 시의 케일런은 이렇게 썼다⁠. 「⁠오늘 당신의 하루가 행복하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⁠.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⁠.⁠」 밤 열한 시의 케일런은 이렇게 썼다⁠. 「⁠순애 씨 자요⁠? ㅎㅎ 오늘 드라마 봤어요⁠? 나도 그 배우 좋아해요⁠.⁠」

순애는 두 말투가 다른 것을 열세 달 동안 봤다⁠. 아침에는 먼 데서 번역기를 돌리느라 그렇고⁠, 밤에는 한국말이 늘어서 그런 줄 알았다⁠. 늘었다가 다음 날 아침이면 도로 줄었다⁠.

“⁠시간마다 사람이 바뀌었구나⁠.⁠”

“⁠낮에는 현지 직원들이 번역기로 대본을 돌리고⁠, 밤에는 한국 사람 조가 받아요⁠. 한국 사람이 들어가면 말이 매끄러워져요⁠. 「⁠ㅎㅎ⁠」도 치고 드라마 얘기도 하고요⁠.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배우⁠, 밤 조 막내가 밤새 그 드라마 요약을 찾아 읽었어요⁠.⁠”

순애는 웃었다⁠. 웃음이 짧게 나왔다가 목에서 멈췄다⁠.

*

“⁠사진은요⁠?⁠”

“⁠남의 사진이에요⁠.⁠”

“⁠누구 사진인데요⁠?⁠”

재빈이 순애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⁠. 케일런의 사진 하나를 길게 눌러 저장하고⁠, 검색 앱을 열어 사진으로 찾는 단추를 눌렀다⁠. 화면에 같은 얼굴이 줄줄이 떴다⁠. 군복이 아니라 노란 방화복을 입은 얼굴이었다⁠. 캐나다의 한 소방서 누리집⁠, 지역 신문 기사⁠, 그리고 본인의 SNS⁠. 소방관은 아내와 아이 셋을 데리고 호숫가에서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⁠. 이를 다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 같았다⁠.

“⁠이 사람은 자기가 미 육군 소령인 줄 모르겠네⁠.⁠”

“⁠모를 거예요⁠. 한국에서만 소령이에요⁠. 독일에서는 의사고요⁠.⁠”

순애는 사진을 손가락 두 개로 벌려 소방관의 아이들을 보았다⁠. 막내가 핫도그를 떨어뜨리고 울고 있었다⁠. 열세 달 동안 저 얼굴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⁠. 남편 기일에도⁠, 무릎 수술한 날에도⁠.

“⁠이런 걸 재빈 씨가 나한테 가르쳐 주네요⁠.⁠”

“⁠죄송합니다⁠.⁠”

“⁠사과는 나중에 하고⁠. 하나 묻겠어요⁠. 내가 일억을 보내기로 한 날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에요⁠. 사월에 한 번⁠, 유월에 한 번 날이 잡혔다가 밀렸어요⁠. 한 번은 케일런이 몸살이 났고⁠, 한 번은 서류가 반려됐다고 했어요⁠. 그때 나는 케일런이 나를 귀하게 여겨서 서두르지 않는구나 했어요⁠.⁠”

재빈이 고개를 숙였다⁠.

“⁠세 번째도 제가 밀려고 했어요⁠. 어제 현관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분을 뵈었을 때 다리가 떨렸어요⁠. 소롬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어머님 대화방 녹음 주문이 오면 손이 떨렸고요⁠. 올봄부터는 녹음할 때마다 일부러 숨을 틀리게 쉬었어요⁠. 몸살 났다는 메시지도 제가 녹음했고요⁠. 위에서는 목소리가 아파 보여야 한다고 해서 좋아했어요⁠.⁠”

“⁠숨을 틀리게 쉬었다고요⁠?⁠”

“⁠어머님이 알아들으시라고요⁠. 아무도 못 알아듣는데⁠, 어머님은 은행에 계셨다니까⁠.⁠”

순애는 대답하지 않았다⁠. 알아듣지 못했다⁠. 백 번을 듣고도 숨이 틀린 녹음을 오히려 더 아끼며 들었다⁠.

*

호수 위로 해가 올라왔다⁠. 흙길에 맨발이 늘었다⁠. 순애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재빈을 보았다⁠.

“⁠지금 내가 112에 전화하면 어떻게 되죠⁠?⁠”

“⁠저는 잡혀가요⁠. 그건 괜찮습니다⁠. 그런데 소롬 씨가⁠…⁠.⁠” 재빈이 숨을 들이켰다⁠. “⁠저는 빚이 있어요⁠. 단지에서 나올 때 빚을 갚을 때까지 한국에서 일하기로 하고 나왔어요⁠. 제가 신고되면 위에서는 소롬 씨부터 찾아요⁠. 소롬 씨가 모는 버스 번호도⁠, 차고지도⁠, 퇴근 시간도 다 알아요⁠.⁠”

“⁠누가 알아요⁠?⁠”

재빈의 입술이 몇 번 움직였다⁠. 소리가 안 나왔다⁠.

“⁠어제 수박 들고 온 분이요⁠.⁠”

순애는 수박을 생각했다⁠. 식탁 끝⁠, 은행 봉투 바로 옆에 내려놓던 손⁠.

“⁠외삼촌이 아니군요⁠.⁠”

“⁠저한테 외삼촌은 없습니다⁠. 탁 실장님이에요⁠. 한국에 들어온 돈을 맡는 사람이에요⁠. 오늘 오전 열 시에 어머님 돈을 받을 계좌도 탁 실장님이 정했어요⁠. 어제 어머님이 등기부 얘기를 하실 때 실장님 왼손이 식탁 밑에서 주먹을 쥐었어요⁠. 저는 그걸 봤고요⁠.⁠”

“⁠노후 자금 얘기는 소롬이한테 들었대요⁠?⁠”

“⁠제가 했어요⁠. 소롬 씨가 엄마 정기예금 만기가 칠월이라고 지나가듯 말했고⁠, 저는 그 말을 위에 올렸어요⁠. 처음에는 그게 제 일이었으니까요⁠. 그때는 소롬 씨를⁠…⁠.⁠”

재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⁠. 순애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⁠. 무릎이 소리를 냈다⁠.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

「⁠소롬⁠: 엄마 재빈 씨한테 뭐라 했어⁠? 새벽에 나가서 안 들어와 (⁠화난 고양이 이모티콘⁠)⁠」

「⁠케일런⁠: 굿모닝 순애 씨⁠. 오늘 우리 새로운 시작이에요⁠. 열 시⁠. 은행⁠. (⁠하트⁠)⁠」

두 메시지가 나란히 떠 있었다⁠. 순애는 소롬에게 「⁠아침 산책⁠. 재빈이 엄마랑 걸었어⁠. 걱정 마⁠」를 보냈다⁠. 케일런에게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보냈다⁠.

「⁠무릎이 아파서 오늘 은행 못 가요⁠. 며칠만 기다려 줘요⁠.⁠」

답은 일 분도 안 되어 왔다⁠. 번역기 말투였다⁠. 아침 조였다⁠.

「⁠나는 걱정입니다⁠. 당신의 무릎을 위해 기도합니다⁠.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⁠. 세관은 기다리지 않습니다⁠.⁠」

순애가 재빈에게 화면을 보여 주려는데 재빈의 주머니가 떨었다⁠. 재빈이 꺼낸 휴대전화 화면에 「⁠실장님⁠」 세 글자가 떠 있었다⁠. 순애는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눌렀다⁠. 받되⁠, 스피커로⁠.

“⁠어⁠, 재빈아⁠. 일찍 일어났네⁠. 근면성실이다⁠, 근면성실⁠.⁠” 어젯밤 수박을 들고 온 목소리였다⁠. 아침이라 쉰 기운이 섞였다⁠. “⁠장모님이 무릎이 아프시단다⁠. 방금 위에서 연락 왔다⁠. 은행을 며칠 미루신대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네가 케일런으로 하나 넣어⁠. 걱정된다⁠, 보고 싶다⁠, 병원 꼭 가라⁠, 그런데 세관 날짜는 못 미룬다⁠. 숨 좀 섞고⁠, 아픈 사람 챙기는 목소리로⁠. 삼십 분 안에 올려⁠. 이번에는 노파심으로 말하는데⁠, 또 미뤄지면 이번엔 네 책임이다⁠. 알지⁠?⁠”

전화가 끊겼다⁠. 재빈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⁠. 순애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⁠.

“⁠녹음해요⁠. 여기서⁠.⁠”

“⁠어머님⁠.⁠”

“⁠해요⁠. 안 하면 저 사람이 의심해요⁠. 대신 내 앞에서 해요⁠.⁠”

재빈이 녹음 앱을 켜고 입에 휴대전화를 댔다⁠. 숨을 두 번 들이켰다⁠. 「⁠흐음⁠」 하고 목을 골랐다⁠. 서툰 발음이 입에서 나왔다⁠.

“⁠순애 씨⁠, 무릎 괜찮아요⁠? 나는 너무 걱정해요⁠. 병원 꼭 가요⁠. 그러니까요⁠, 그러니까요⁠…⁠.⁠”

“⁠거기서 숨 쉬지 마요⁠.⁠”

재빈이 멈췄다⁠.

“⁠「⁠그러니까요⁠」 두 번 다음에 숨을 쉬니까 사람 같잖아요⁠. 나는 그 숨이 좋아서 백 번을 들었어요⁠. 다른 사람한테는 그 숨 넣지 마요⁠. 아픈 사람 챙기는 목소리는 숨을 참는 거예요⁠. 우리 남편이 그랬어요⁠.⁠”

재빈은 녹음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했다⁠. 이번에는 숨을 참았다⁠. 목소리가 낮아졌고⁠, 끝이 조금 떨렸다⁠. 맨발로 지나가던 아저씨가 「⁠아이고⁠, 연애하네⁠」 하며 지나갔다⁠. 녹음이 끝나자 재빈이 파일을 보냈다⁠. 받는 사람은 「⁠위⁠」라고만 저장되어 있었다⁠. 오 분 뒤 순애의 휴대전화에 케일런의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⁠. 방금 벤치에서 들은 목소리가 바다를 한 번 건너갔다 와서 순애의 손에 떨어졌다⁠.

순애는 재빈에게 도착 알림을 보여 주었다⁠.

“⁠세관이 기다리지 않는대요⁠. 재빈 씨⁠, 신고는 안 해요⁠. 아직은⁠. 대신 지금부터 케일런이 나한테 보내는 건 재빈 씨가 먼저 알려 줘요⁠. 무엇을 보내고 어디로 돈을 받으려 하는지⁠. 나는 돈이 가는 길을 끝까지 볼 거예요⁠. 서른 해 동안 그 길을 막았는데⁠, 막기만 했지 끝까지 따라가 본 적은 없어요⁠.⁠”

재빈이 벤치에서 일어났다⁠. 키가 순애보다 머리 하나 컸다⁠.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켰다⁠.

“⁠그러니까요⁠, 그러니까요⁠. 실장님이 그걸 알면요⁠.⁠”

“⁠알게 되겠지요⁠.⁠”

흙길 끝에서 적금 사탕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었다⁠.

“⁠지점장님⁠, 사위분이랑 같이 맨발로 걸어요⁠! 땅이 다 받아 줘요⁠!⁠”

순애는 손을 흔들어 주고⁠, 운동화 끈을 단단히 다시 맸다⁠.

2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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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류세온2026.11.01· 2화

    약속 시간에 안 나타나는 재빈 씨 보면서 엄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어요. 이것도 수법이에요?

    • 지백솔작가2026.11.01

      네, 만남을 미루면서 마음만 붙잡아 두는 게 흔한 수예요. 순애 씨도 벤치에서 그걸 처음 느낍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