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416자)

문진표

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· 지백솔

월요일 아침⁠, 케일런은 굿모닝 대신 서류를 보냈다⁠.

「⁠미 국방부 재무처 퇴직금 해외 이송 확인서⁠」라는 제목의 사진이었다⁠. 위에 독수리 그림이 있고⁠, 아래에 도장 둘과 서명이 있었다⁠. 순애는 돋보기를 찾다가 다초점 안경을 코끝으로 내렸다⁠. 영어 문장 둘째 줄에 철자가 틀린 낱말이 있었다⁠. 금액 칸에는 이백만 달러가 적혀 있었고⁠, 금액 밑에 한국어로 이렇게 붙어 있었다⁠.

「⁠한국 도착 전 통관 세금 및 수수료 선납 필요⁠. 1차 3⁠,000⁠,000원⁠. 군 계좌는 보안상 사용 불가하여 재무 대행인 개인 계좌로 입금 바람⁠.⁠」

예금주는 처음 듣는 남자 이름 석 자였다⁠. 은행은 시흥에 지점이 있는 작은 저축은행이었다⁠.

순애는 확인서를 휴대전화 화면 가득 키웠다⁠. 서른 해 동안 이런 종이를 수백 장 봤다⁠. 검찰청 공문⁠, 금융감독원 확인서⁠, 법원 등기 안내문⁠. 진짜 기관은 돈을 개인 계좌로 받지 않는다⁠. 진짜 군대는 퇴직금을 보내면서 받는 사람에게 세금을 먼저 내라고 하지 않는다⁠. 손님들에게 두 줄을 몇백 번 말했다⁠.

케일런의 메시지가 이어서 왔다⁠.

「⁠순애 씨⁠, 처음엔 작게 해요⁠. 삼백만 원만⁠. 그다음은 남은 거 한 번에⁠. 당신 무릎 아프니까 은행 한 번만 가게 하고 싶어요⁠. 그리고 이건 우리 둘만 알아요⁠. 딸한테도 말하지 마요⁠. 딸은 이해 못 해요⁠. (⁠하트⁠)⁠」

일요일 밤에 재빈이 미리 알려 준 그대로였다⁠. 「⁠처음에는 작은 돈으로 계좌가 살아 있는지⁠, 어머님이 정말 보내시는지 봐요⁠. 그게 되면 큰돈을 불러요⁠.⁠」

순애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카디건을 걸쳤다⁠. 은행에 갈 때 입는 옷이었다⁠.

*

가람은행 안산 고잔지점은 순애가 나간 지 세 해 만에 의자 색이 바뀌어 있었다⁠. 주황색이던 대기 의자가 연두색이 되었다⁠. 번호표 기계 옆에는 「⁠잠깐⁠! 송금 전 확인하세요⁠」라는 입간판이 놓여 있었다⁠. 입간판 속 경찰 캐릭터가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⁠. 순애가 퇴임 전 해에 직원들과 같이 고른 그림이었다⁠.

번호표를 뽑기도 전에 안쪽 지점장실 문이 열렸다⁠.

“⁠지점장님⁠! 오셨으면 연락을 주시지요⁠.⁠”

정 지점장이 뛰어나왔다⁠. 순애가 고잔지점에 처음 부임했을 때 정 지점장은 입행 두 해째 막내 행원이었다⁠. 출납 시재가 천 원 비어서 밤 열한 시까지 금고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이제는 정수리가 훤했다⁠.

“⁠머리는 어디다 두고 왔어요⁠?⁠”

“⁠지점장님이 금고 시재 맞추라고 하셔서 그때 다 빠졌습니다⁠.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⁠?⁠”

“⁠송금 좀 하려고요⁠. 삼백만 원⁠.⁠”

정 지점장의 얼굴이 직원의 얼굴로 바뀌었다⁠. 지점장실 소파에 순애를 앉히고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⁠. 「⁠고액 송금 고객 확인서⁠」였다⁠. 2019년에 순애가 본점 회의에서 문항을 직접 고쳐 넣은 종이였다⁠.

“⁠지점장님이 만드신 거니까 지점장님한테도 똑같이 여쭙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여쭤요⁠.⁠”

“⁠돈을 보내 달라고 한 사람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있으십니까⁠?⁠”

“⁠없어요⁠.⁠”

“⁠영상 통화는 해 보셨습니까⁠?⁠”

“⁠보안 때문에 안 된대요⁠.⁠”

정 지점장이 펜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군인⁠, 해외 근무자⁠, 수사 기관⁠, 금융 기관이라며 돈을 요구했습니까⁠?⁠”

“⁠미 육군 소령이에요⁠.⁠”

“⁠받는 계좌가 돈을 요구한 사람 본인 이름입니까⁠?⁠”

“⁠재무 대행인이래요⁠. 시흥에 사는⁠.⁠”

“⁠누가 이 송금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까⁠?⁠”

“⁠딸한테 말하지 말래요⁠.⁠”

“⁠따님은 아십니까⁠?⁠”

“⁠몰라요⁠.⁠”

정 지점장이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⁠. 다섯 문항 가운데 다섯이 다 빨간 칸이었다⁠. 정 지점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⁠.

“⁠지점장님⁠. 지점장님이 저한테 가르치신 대로 하면⁠, 이건 못 보내 드립니다⁠. 이런 손님은 112에 같이 전화를 걸어 드리고⁠, 가족분 번호를 받아서 직접 연락드리라고 하셨습니다⁠. 그래도 안 들으시면 제가 창구를 닫고 손님 옆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⁠.⁠”

“⁠잘 배웠네⁠.⁠”

“⁠지점장님⁠.⁠”

순애는 휴대전화를 열어 확인서 사진을 정 지점장 앞에 놓았다⁠. 철자가 틀린 낱말에 손톱을 댔다⁠.

“⁠알고 보내는 거예요⁠. 정 지점장⁠, 내가 이 확인서를 못 알아볼 것 같아요⁠? 미끼예요⁠. 삼백만 원이 들어가는 순간 이 계좌가 살아 있다는 게 드러나요⁠. 그러면 나는 곧바로 피해자로 지급 정지를 걸어요⁠. 계좌가 묶이면 이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겠지요⁠.⁠”

“⁠그러다 지점장님이 미끼를 물고 딸려 가십니다⁠. 이 사람들 지급 정지 걸리기 전에 빼 가요⁠. 몇 분이면 끝납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삼백만 원은 버린 돈이라고 치고 하는 거예요⁠.⁠”

정 지점장은 한참 종이만 보았다⁠. 그러다 일어나 창구로 나가 직원 한 사람을 불렀다⁠.

“⁠이 고객님 송금은 내가 직접 할게⁠. 그리고 112 상담 번호 띄워 놔⁠.⁠”

*

삼백만 원은 열 시 사십이 분에 나갔다⁠. 열 시 사십사 분⁠, 순애는 지점장실 전화로 112에 걸었다⁠. 상담원이 사건 개요를 물었다⁠. 순애는 열세 달을 두 문장으로 줄였다⁠. 군인을 사칭한 사람에게 속아 방금 돈을 보냈고⁠, 받은 계좌의 지급 정지를 요청한다⁠. 정 지점장이 옆에서 받는 은행과 계좌 번호를 불러 주었다⁠. 상담원이 받는 은행에 연락하겠다고 했다⁠.

열 시 오십일 분⁠, 받는 은행에서 정 지점장에게 전화가 왔다⁠. 정 지점장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⁠.

“⁠삼백만 원 들어간 지 사 분 만에 백팔십만 원이 빠져나갔답니다⁠. 남은 백이십만 원은 묶였고요⁠. 계좌 전체가 지급 정지됐습니다⁠. 이 계좌로 오늘 아침에만 다른 데서 네 건이 더 들어왔대요⁠.⁠”

“⁠네 건⁠.⁠”

“⁠네⁠, 다른 사람들 돈이요⁠.⁠”

순애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짚었다⁠. 같은 아침⁠, 같은 계좌로⁠, 다른 사람 넷이 「⁠처음엔 작게⁠」 보냈다⁠. 넷 모두 「⁠딸한테도 말하지 마요⁠」를 읽었을 것이다⁠.

“⁠지점장님⁠, 그 네 분 연락처는 저희가 못 드립니다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피해자 확인서나 받아 둬요⁠. 경찰서에 낼 거니까⁠.⁠”

정 지점장이 서류를 뽑아 왔다⁠. 지점장실을 나서는 순애에게 정 지점장이 사탕 바구니를 내밀었다⁠. 순애가 지점장 시절 창구마다 놓게 한 바구니였다⁠.

“⁠하나 드세요⁠. 지점장님이 손님 떨리실 때 드리라고 하셨잖아요⁠.⁠”

순애는 박하사탕을 하나 집었다⁠. 손이 떨리는 것을 정 지점장이 보았고⁠, 순애도 정 지점장이 본 것을 알았다⁠. 둘 다 말하지 않았다⁠.

*

케일런은 오후 내내 조용했다⁠. 굿모닝도 굿나잇도 없는 날은 열세 달 동안 처음이었다⁠.

다섯 시쯤 재빈에게서 문자가 왔다⁠. 저장된 이름은 「⁠홍삼⁠」이었다⁠. 순애가 일요일 새벽에 바꿔 둔 이름이었다⁠.

「⁠홍삼⁠: 계좌 묶인 거 위에서 바로 알았어요⁠. 묶이면 어느 은행에서 누가 신고했는지 금방 들어와요⁠. 실장님이 어머님 이름을 두 번 불렀어요⁠. 오늘 밤 누가 찾아가도 문 열지 마세요⁠.⁠」

「⁠순애⁠: 재빈 씨는⁠?⁠」

「⁠홍삼⁠: 저는 오늘 녹음 없대요⁠. 전화기 내놓으라고 해서 내놨어요⁠. 이건 소롬 씨 아버님이 쓰시던 폰이에요⁠. 소롬 씨가 서랍에서 꺼내 줬어요⁠.⁠」

순애는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⁠. 남편이 쓰던 휴대전화는 세 해째 소롬의 서랍에 있었다⁠. 순애는 문자를 지우고 현관 걸쇠를 걸었다⁠. 걸쇠는 세 시간 뒤 딸 앞에서 도로 풀렸다⁠.

저녁 여덟 시⁠, 순애의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⁠. 가족 단톡방이었다⁠.

「⁠소롬⁠: 엄마⁠」 「⁠소롬⁠: 미군 누구야⁠」 「⁠소롬⁠: (⁠사진⁠)⁠」 「⁠소롬⁠: (⁠사진⁠)⁠」 「⁠소롬⁠: (⁠사진⁠)⁠」

사진은 순애와 케일런의 대화를 찍은 화면이었다⁠. 「⁠당신 생각해요⁠」⁠, 「⁠내일 열 시 우리 시작⁠」⁠, 「⁠딸한테도 말하지 마요⁠」 순애의 답도 있었다⁠. 「⁠나도 보고 싶어요⁠」 남편 기일에 보낸 긴 글도 있었다⁠.

「⁠청주 이모⁠: 미군⁠?⁠?⁠?⁠?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어느 부대⁠?⁠?⁠?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(⁠놀란 곰 이모티콘⁠)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(⁠놀란 곰 이모티콘⁠)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순애야 니 영어 하나⁠?⁠?⁠」

현관 벨이 울렸다⁠. 소롬이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벨을 눌렀다⁠. 문을 열자 소롬 뒤에 탁갑룡이 서 있었다⁠. 오늘은 수박 대신 박카스 한 상자였다⁠.

“⁠엄마⁠.⁠”

소롬이 휴대전화 화면을 순애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⁠. 낯선 계정이 소롬에게 보낸 메시지였다⁠. 프로필은 케일런의 사진⁠, 소방관의 웃는 얼굴이었다⁠.

「⁠안녕하세요⁠, 저는 당신 어머니와 결혼할 케일런 로웰입니다⁠. 어머니가 오늘 은행에서 실수를 해서 우리 돈이 묶였습니다⁠. 어머니가 아프고 판단이 어렵습니다⁠. 딸이 도와주세요⁠. 우리 대화를 보내 드립니다⁠.⁠」

“⁠엄마⁠, 이거 사기잖아⁠. 엄마가 맨날 손님들한테 하던 그거잖아⁠. 엄마 돈 보냈어⁠? 얼마나 보냈어⁠?⁠”

“⁠들어와서 얘기하자⁠.⁠”

“⁠얼마나 보냈냐고⁠.⁠”

탁갑룡이 소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⁠. 목소리가 부드러웠다⁠.

“⁠소롬아⁠, 어머님 놀라셨을 거다⁠. 어머님⁠, 제가 오늘 소롬이랑 예식장 상담 갔다가 이걸 같이 봤습니다⁠. 제가 아는 경찰 동생이 있어서 물어보니 백발백중 연애 사기랍니다⁠. 어머님 같은 분도 당하시는구나⁠, 세상이 참 각골난망합니다⁠.⁠”

“⁠각골난망은 은혜를 못 잊는다는 말이에요⁠.⁠”

“⁠아⁠, 그렇습니까⁠. 아무튼 못 잊을 일이지요⁠.⁠”

순애는 탁갑룡을 보았다⁠. 오늘 아침 계좌가 묶였고⁠, 저녁에 케일런은 딸에게 갔다⁠. 케일런의 계정으로 딸을 찾아온 손과 박카스 상자를 든 손이 같은 손이었다⁠. 순애가 탁갑룡의 정체를 입 밖에 내면 딸은 다음 물음을 할 것이다⁠. 그럼 재빈은 어떻게 아느냐고⁠.

“⁠소롬아⁠, 이 사람은⁠…⁠.⁠”

“⁠엄마⁠, 그 얘기 하지 마⁠.⁠” 소롬이 말을 끊었다⁠. “⁠재빈 씨한테 들었어⁠. 엄마가 새벽에 재빈 씨 불러내서 이상한 거 물어봤다며⁠. 목소리가 어쩌고⁠, 외삼촌이 어쩌고⁠. 재빈 씨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⁠, 어머님이 요즘 많이 외로우신 것 같다고 그러더라⁠. 이제 알겠네⁠. 엄마가 사기당한 거 숨기려고 재빈 씨를 의심한 거야⁠?⁠”

순애는 숨을 골랐다⁠. 재빈이 소롬에게 그렇게 말한 까닭은 하나였다⁠. 순애에게 들은 대로 털어놓았다면⁠, 소롬의 입을 거쳐 탁갑룡의 귀에 들어갈 길이 하나 생긴다⁠. 재빈은 소롬을 지키려고 순애를 외로운 노인으로 만들었다⁠. 알면서도 가슴 한가운데가 쓸렸다⁠.

“⁠엄마가 보낸 돈은 엄마가 알아서 해⁠.⁠”

“⁠알아서 한 게 이거야⁠?⁠” 소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⁠. “⁠아빠 기일에 저 사람한테 쓴 거 봤어⁠. 나한테는 그런 말 한 번도 안 했잖아⁠.⁠”

소롬은 신발을 벗지 않고 몸을 돌렸다⁠. 엘리베이터 버튼을 세게 눌렀다⁠. 탁갑룡이 박카스 상자를 신발장 위에 내려놓았다⁠.

“⁠소롬이는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⁠. 어머님⁠, 오늘은 푹 주무십쇼⁠.⁠”

소롬이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랐다⁠. 문이 닫히기 전⁠, 탁갑룡이 현관 문턱에서 한 발을 멈췄다⁠. 소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⁠.

“⁠어머님⁠, 자승자박이라고 하지요⁠. 제 손으로 묶은 줄에 제가 묶인다는 말입니다⁠. 지급 정지 같은 건 한 번이면 됩니다⁠. 두 번 하시면 따님 버스 노선이 바뀝니다⁠. 차고지에서 첫차 몰고 나가는 시간이 새벽 다섯 시 십 분이지요⁠?⁠”

이번에는 사자성어가 정확했다⁠. 탁갑룡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들어갔다⁠.

순애는 문을 닫고 신발장 위의 박카스 상자를 내려다보았다⁠. 상자 귀퉁이에 편의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⁠. 가족 단톡방이 또 울렸다⁠.

「⁠청주 이모⁠: 순애야 답 좀 해라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(⁠우는 곰 이모티콘⁠)⁠」

3화는 어땠나요?

댓글 0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
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