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화(5,538자)

굿모닝, 순애 씨

로맨스 스캠에 걸린 엄마 · 지백솔

서쪽 창으로 든 햇빛이 식탁 끝까지 와 있었다⁠. 저녁 여섯 시 사십 분⁠, 안산 호수마을 7단지 1204호 식탁에는 은행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⁠. 봉투 안에는 다음 날 깨기로 한 정기예금 통장과 도장이 들었다⁠. 감순애는 단정하게 짧게 자른 흰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⁠, 흰 블라우스 위에 걸친 회색 카디건 소매를 걷었다⁠. 손에는 휴대전화가 있었다⁠.

화면에는 아침에 온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⁠.

「⁠굿모닝⁠, 순애 씨⁠. 오늘 사막 해 뜨는 거 봤어요⁠. 당신 생각해요⁠. 내일 열 시⁠, 우리 시작이에요⁠.⁠」

글자 끝에 빨간 하트 하나가 깜빡였다⁠. 미 육군 소령 케일런 로웰은 열세 달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아침 인사를 보냈다⁠. 처음 만난 것은 작년 6월⁠, 순애가 사진 올리는 SNS에 호수공원 연꽃 사진을 올린 날이었다⁠. 남편이 좋아하던 연못이었다⁠. 「⁠아름다운 꽃⁠, 아름다운 사진⁠, 당신도 아름다워요⁠.⁠」 번역기를 돌린 티가 나는 댓글이었다⁠. 순애는 처음에 웃었고⁠, 두 번째 날에도 웃었고⁠, 세 번째 날에는 답을 했다⁠.

영상 통화는 한 번도 못 했다⁠. 케일런은 중동의 미군 기지에 있었고⁠, 기지에서는 카메라를 켜면 안 된다고 했다⁠. 「⁠보안 때문에 미안해요⁠. 부대 규칙이에요⁠. 제대하면 매일 얼굴 볼게요⁠.⁠」 순애가 세 번 조르자 케일런은 대신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⁠. 서툰 한국말이었다⁠.

은행 창구에 서른 해를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⁠. 영상 통화를 끝까지 피하는 남자 이야기를 손님에게서 들었다면⁠, 순애는 번호표를 다시 뽑게 하고 지점장실로 모셨을 것이다⁠. 그러니까 순애도 알았다⁠. 알면서 여름을 한 번 넘겼고⁠, 겨울을 한 번 넘겼다⁠. 남편 없는 집에서 아침에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⁠.

순애는 음성 메시지를 하나 눌렀다⁠.

“⁠굿모닝⁠, 순애 씨⁠. 흐음⁠. 오늘도⁠, 그러니까요⁠, 그러니까요⁠, 나는 당신 생각해요⁠.⁠”

목소리 밑에서 낮은 웅웅거림이 깔렸다⁠. 기지 발전기라고 했다⁠. 끝에서 무언가 「⁠깨깟⁠, 깨깟⁠」 하고 울었다⁠. 사막의 새라고 했다⁠.

순애는 이 녹음을 백 번쯤 들었다⁠. 말 앞에서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켜는 자리⁠, 「⁠흐음⁠」 하고 목을 고르는 자리⁠, 「⁠그러니까요⁠」를 꼭 두 번 하는 버릇까지 외웠다⁠. 창구에서 보이스피싱 전화를 대신 받아 끊어 주던 귀가 이번에는 반대로 일했다⁠. 끊을 이유 대신 남을 이유를 찾았다⁠.

대화방 맨 위로 손가락을 밀어 올리면 열세 달이 끝없이 딸려 올라왔다⁠. 아침 인사 사백 개 남짓⁠, 사막 일출 사진⁠, 부대 식당 밥 사진⁠. 군복 입은 남자는 사진마다 이를 다 드러내고 웃었다⁠. 순애는 사진보다 음성 메시지를 더 자주 열었다⁠. 사진은 남의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어도 숨은 남이 대신 쉬어 줄 수 없다고 믿었다⁠.

가족 단톡방이 울렸다⁠. 방 이름은 「⁠감씨 자매와 딸⁠」이었다⁠.

「⁠청주 이모⁠: 사윗감 오늘 온다며⁠? 사진 찍어 보내라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(⁠엄지 든 곰 이모티콘⁠)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(⁠엄지 든 곰 이모티콘⁠)⁠」 「⁠소롬⁠: 이모 곰 두 번 보냈어⁠」 「⁠청주 이모⁠: 반가워서 두 번이다⁠」

순애는 돋보기를 찾느라 식탁을 두 바퀴 돌았다⁠. 다초점 안경을 맞춘 지 두 해가 됐는데⁠, 아직도 작은 글씨 앞에서는 손이 돋보기를 찾았다⁠. 안경을 코끝으로 내려 쓰자 글씨가 맞았다⁠. 「⁠알았어⁠」 세 글자를 치고 나서⁠, 케일런의 대화방으로 돌아가 하트를 한 번 더 눌러 보았다⁠.

내일 열 시⁠. 케일런은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⁠. 부대에 묶인 퇴직금을 한국으로 옮기려면 통관 세금을 먼저 내야 하고⁠, 군인 신분으로는 개인 송금을 못 하니 순애가 대신 내 주면 한국에 와서 두 배로 갚겠다고 했다⁠. 일억이었다⁠.

두 번은 이미 보냈다⁠. 작년 겨울 「⁠휴가 신청 수수료⁠」 이백만 원⁠, 올봄 「⁠제대 서류 비용⁠」 사백만 원⁠. 딸도 모르고⁠, 은행 후배들도 몰랐다⁠. 순애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⁠.

*

“⁠이번 정류장은 엄마 집⁠, 엄마 집입니다⁠.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⁠.⁠”

현관문이 열리면서 추소롬의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⁠. 시내버스를 몬 지 아홉 해째인 딸은 문을 열 때마다 안내 방송을 했다⁠. 순애가 하지 말라고 할수록 소리가 커졌다⁠.

뒤에서 키 큰 남자가 홍삼 세트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를 숙였다⁠. 윤재빈이었다⁠. 녹음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다듬는 일을 한다고 했다⁠. 소롬의 버스를 날마다 같은 정류장에서 타다가 말을 건 남자였다⁠.

“⁠처음 뵙겠습니다⁠, 어머님⁠. 윤재빈입니다⁠.⁠”

부드러운 목소리였다⁠. 말 앞에서 숨을 짧게 들이켰다⁠. 순애는 현관 센서등 아래에서 잠깐 서 있었다⁠.

재빈 뒤로 쉰 후반쯤 된 남자가 들어왔다⁠. 금테 안경에 반소매 셔츠를 입고⁠, 손에는 수박을 들었다⁠.

“⁠재빈이 외삼촌 되는 탁갑룡입니다⁠. 얘가 부모가 일찍 가서 제가 키우다시피 했습니다⁠. 오늘 이렇게 뵈니 금상첨가올시다⁠.⁠”

“⁠금상첨화요⁠.⁠”

소롬이 말했다⁠. 탁갑룡은 껄껄 웃으며 수박을 식탁 끝에 놓았다⁠. 은행 봉투 바로 옆이었다⁠. 순애는 웃으면서 봉투를 집어 찬장 서랍에 넣었다⁠.

밥상에는 갈비찜과 잡채⁠, 오이소박이가 올랐다⁠. 소롬은 갈비를 집어 재빈의 밥 위에 얹었고⁠, 재빈은 갈비를 반으로 갈라 절반을 소롬에게 돌려주었다⁠. 순애는 둘의 젓가락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국을 떴다⁠. 텔레비전은 소리를 줄인 채 저녁 뉴스를 틀어 놓았다⁠.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⁠. 「⁠동남아 감금 범죄 단지서 한국인 구출⁠… 피해자 “⁠여권 뺏기고 하루 열여섯 시간 전화⁠”⁠」

탁갑룡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⁠.

“⁠어머님⁠, 제가 성격이 급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⁠. 날짜는 시월이 좋겠습니다⁠. 날씨 좋고⁠, 식장도 지금 잡으면 됩니다⁠. 일사천리로요⁠.⁠”

“⁠아이들이 정할 일이지요⁠.⁠”

“⁠암요⁠, 암요⁠.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⁠.⁠” 탁갑룡이 목소리를 낮췄다⁠. “⁠재빈이가 모아 둔 게 없습니다⁠. 제가 못나서요⁠. 안산에 전세 하나 얻으려면 삼억은 있어야 하는데⁠, 어머님께서 노후 자금을 넉넉히 준비해 두셨다고 들어서요⁠.⁠”

순애는 국그릇을 내려놓았다⁠. 소롬에게 노후 자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⁠. 정기예금 만기가 이달이라는 것은 더더욱 없었다⁠.

“⁠누구한테 들으셨을까요⁠?⁠”

“⁠아⁠, 그거야 뭐⁠, 은행 지점장까지 하셨으니까요⁠. 다들 그렇게 짐작하지요⁠.⁠”

“⁠짐작으로 삼억을 말씀하시니 계산이 빠르십니다⁠. 전세라면 좋습니다⁠. 계약은 두 아이 이름을 같이 올리고⁠, 확정일자는 제가 직접 받으러 가고⁠, 집주인도 제가 만나지요⁠. 등기부도 제가 떼 보고요⁠. 서른 해 하던 일입니다⁠.⁠”

탁갑룡의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나왔다⁠.

“⁠역시 지점장님이시네⁠. 철두철미하십니다⁠.⁠”

“⁠외삼촌⁠, 엄마 말 길어지면 종점까지 가⁠.⁠”

소롬이 갈비뼈를 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⁠. 재빈이 웃었다⁠. 웃음 끝에 「⁠흐음⁠」 하고 목을 골랐다⁠.

“⁠그러니까요⁠, 그러니까요⁠. 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⁠. 계약은 꼼꼼해야 하니까요⁠.⁠”

순애의 숟가락이 국 위에서 멈췄다⁠.

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켜는 자리⁠. 「⁠흐음⁠」 「⁠그러니까요⁠」 두 번⁠. 한국말이 서툴지 않을 뿐⁠, 소리가 놓이는 자리가 같았다⁠.

탁자 위에서 순애의 휴대전화가 떨었다⁠. 엎어 놓은 화면을 뒤집었다⁠.

「⁠케일런⁠: 순애 씨 저녁 맛있게 먹어요⁠? 나는 지금 근무 중이에요⁠. (⁠하트⁠)⁠」

재빈의 두 손은 젓가락과 밥그릇을 쥐고 있었다⁠. 휴대전화는 식탁 어디에도 없었다⁠.

*

“⁠김치 좀 더 꺼내 올게요⁠.⁠”

순애는 베란다로 나가 김치냉장고 뚜껑을 열었다⁠. 찬 기운이 얼굴에 올라왔다⁠.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대고⁠, 소리를 가장 작게 줄여 음성 메시지를 다시 눌렀다⁠.

“⁠굿모닝⁠, 순애 씨⁠. 흐음⁠.⁠”

거실에서 재빈이 무어라 말했고 소롬이 웃었다⁠. 순애는 두 소리를 한 귀씩 나눠 들었다⁠. 왼쪽 귀에는 휴대전화⁠, 오른쪽 귀에는 거실⁠. 서툰 발음을 걷어 내자 남는 것은 숨이었다⁠. 사람은 목소리를 바꿀 수 있어도 숨을 들이켜는 자리는 쉽게 못 바꾼다⁠. 창구에서 같은 남자가 목소리를 바꿔 가며 세 번 전화했을 때⁠, 순애는 그렇게 잡았다⁠.

김치통을 든 손이 차가웠다⁠. 순애는 김치를 썰지 않은 채로 접시에 담았다⁠.

거실에 돌아오자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⁠. 이번에는 안전 문자였다⁠.

「⁠[경찰청] 해외 파병 군인·의사를 사칭한 연애 빙자 사기 주의⁠. 영상 통화를 피하고 돈을 요구하면 사기입니다⁠.⁠」

탁갑룡이 자기 휴대전화에도 온 문자를 소리 내어 읽고 혀를 찼다⁠.

“⁠세상 참 말세올시다⁠. 이런 데 속는 사람들은 뭘 믿고 속는지 몰라⁠. 어머님 같은 분은 일도 없으시겠지만요⁠.⁠”

“⁠물론이지요⁠.⁠”

순애는 김치 접시를 탁갑룡 앞에 놓았다⁠.

“⁠속는 사람들은 대개 외로워서 속습니다⁠.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고요⁠. 그런 손님들 은행에서 많이 봤어요⁠. 속이는 사람들은 그걸 압니다⁠. 그래서 날마다 아침 인사부터 합니다⁠.⁠”

탁갑룡이 김치를 집다 말았다⁠. 재빈은 밥그릇만 내려다보았다⁠.

*

설거지는 소롬이 하겠다며 팔을 걷었다⁠. 개수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며 딸이 턱으로 거실을 가리켰다⁠. 탁갑룡은 소파에서 재빈에게 수박을 썰라고 시키는 중이었다⁠.

“⁠엄마⁠, 아까 왜 그래⁠? 외삼촌한테 등기부 얘기는 왜 해⁠. 면접 보러 온 거 아니잖아⁠.⁠”

“⁠전세 얘기는 저 양반이 먼저 꺼냈어⁠.⁠”

“⁠말이 그렇다는 거지⁠. 재빈 씨가 얼마나 떨었는 줄 알아⁠? 오는 내내 차에서 인사말 연습했어⁠. 「⁠처음 뵙겠습니다⁠」를 열 번은 했을걸⁠.⁠”

순애는 행주로 식탁을 훔치다가 멈췄다⁠. 녹음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남자가 인사말을 열 번 연습했다⁠. 소리를 다듬는 사람이었다⁠.

“⁠너⁠, 재빈이 일하는 스튜디오 가 봤니⁠?⁠”

“⁠가 봤지⁠. 지하에 있어⁠. 방음 스펀지 붙어 있고⁠. 왜⁠?⁠”

“⁠그냥⁠.⁠”

“⁠엄마 「⁠그냥⁠」은 그냥이 아니잖아⁠.⁠” 소롬이 접시를 헹구며 순애를 흘겨보았다⁠. “⁠그리고 엄마⁠, 요새 휴대폰은 왜 맨날 엎어 놔⁠? 아까도 밥 먹다 뒤집어 보고⁠. 누구랑 연애해⁠?⁠”

“⁠연애는 무슨⁠. 은행 동기들 단톡방이야⁠. 하도 울려서⁠.⁠”

“⁠은행 동기들이 밥때마다 하트를 보내⁠?⁠”

순애는 대답 대신 행주를 빨았다⁠. 딸은 엄마를 닮아 눈이 빨랐다⁠. 닮은 줄은 둘 다 몰랐다⁠. 소롬이 마지막 접시를 건조대에 꽂고 고무장갑을 벗었다⁠.

“⁠다음 정류장은 잔소리 없는 정류장입니다⁠. 엄마⁠, 재빈 씨한테 잘해 줘⁠. 나 이 사람이랑 살 거야⁠.⁠”

*

아홉 시가 넘어 손님들이 일어났다⁠. 탁갑룡은 수박을 두고 가겠다며 현관에서 세 번 인사했고⁠, 「⁠오늘 화기애매했습니다⁠」라고 말했다⁠. 소롬이 「⁠애애⁠」라고 고쳐 주며 주차장으로 먼저 내려갔다⁠. 탁갑룡이 소롬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⁠.

재빈은 신발 끈을 다시 맸다⁠.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복도에는 순애와 재빈 둘만 남았다⁠. 복도 창으로 호수공원의 가로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⁠.

“⁠어머님⁠, 오늘 감사했습니다⁠. 갈비찜이 정말⁠…⁠.⁠”

“⁠홍삼 고마워요⁠.⁠”

“⁠아닙니다⁠. 그러니까요⁠, 그러니까요⁠, 제가 더 자주⁠…⁠.⁠”

엘리베이터 숫자가 9⁠, 10⁠, 11로 올라왔다⁠. 순애는 재빈에게 반걸음 다가갔다⁠. 낮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⁠, 열세 달 동안 아침마다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⁠.

“⁠굿모닝⁠, 순애 씨⁠.⁠”

재빈의 손이 신발장 모서리를 짚었다⁠. 웃으려다 웃음이 입가에서 굳었다⁠.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⁠, 안의 거울에 둘이 비쳤다⁠. 재빈은 타지 않았다⁠. 문이 혼자 닫혔다⁠.

복도에서 재빈이 숨을 짧게 두 번 들이켰다⁠. 순애가 백 번 들은 자리였다⁠.

순애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

「⁠케일런⁠: 굿나잇 내 사랑⁠. 내일 열 시 잊지 마요⁠. (⁠하트⁠)⁠」

재빈의 두 손은 신발장을 짚고 있었다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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