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4화(5,304자)

열네 해 전 불합격의 이유

무공 일타 강사 · 여무겸

팔월 열여드레 밤⁠, 육화탑 문 앞에서 어머니가 무량을 막아섰다⁠. 노를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⁠. 낮에 조수를 타 넘은 배에서 내려온 그대로⁠, 치마 끝이 젖어 있었다⁠.

“⁠당신이 화산 장로였다는 사람이오⁠?⁠”

“⁠이제 장로는 아니오⁠.⁠”

“⁠우리 집안이 백 년 감춘 걸⁠, 당신 집안도 백 년 감췄다더군⁠.⁠”

“⁠그렇소⁠.⁠”

“⁠그럼 피장파장이오⁠.⁠” 어머니가 노를 한 번 바닥에 찍었다⁠. “⁠내 아들 데리고 올라가서 혼자 내려오면⁠, 이 노로 탑을 한 층씩 두드리면서 올라갈 거요⁠.⁠”

무량이 노를 보았다⁠. 노 끝에 갯벌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⁠.

“⁠노 젓는 분이 그러면⁠, 나는 칼 쥐는 사람이니 계단에서 막겠소⁠.⁠”

“⁠막아 보시오⁠. 노가 칼보다 기오⁠.⁠”

탑 문간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⁠. 무량도 수염 끝이 움직였다⁠. 어머니는 웃지 않고 나를 보았다⁠. 위로 올라가라는 눈이었다⁠. 노래를 다시 넣으라고 하던 날과 같은 눈이었다⁠.

탑 아래에서 대석이 나를 업고 올라가겠다고 했다⁠. 무량이 막았다⁠. 둘이라고 했소⁠. 대석은 탑 문간에 쪼그려 앉아 계단 위로 사라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⁠. 쌤⁠, 큰일 나면 소리 지르세요⁠. 큰일이 나기도 전에 대석이 큰일 얘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⁠.

육화탑 안쪽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⁠. 층마다 계단이 꺾였고⁠, 꺾이는 자리마다 작은 창이 강을 향해 나 있었다⁠. 나는 한 계단에 한 번씩 콧노래를 불렀다⁠. 볼기가 당길 때마다 숨이 멎으려 했고⁠, 멎으려 할 때마다 코로 내보냈다⁠. 열세 층을 오르는 동안 셋에 밀고 둘에 쉬고를 몇백 번 불렀다⁠.

꼭대기 층에 닿았다⁠. 사방으로 난간이 둘린 좁은 방이었다⁠. 처마 끝 방울이 밤바람에 울었다⁠. 난간 너머로 전당강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⁠. 낮에 둑을 넘은 조수가 물러가며 남긴 젖은 자국이 둑을 따라 검게 이어져 있었다⁠. 강 건너편은 어두웠고⁠, 이쪽 항주 성안에는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⁠. 멀리 무림문 근처⁠, 학관 거리 불빛이 한데 모여 있었다⁠. 저 불빛 가운데 하나는 갈필수 학관 둘째 관이었다⁠. 내가 판 건물이었다⁠.

무량은 난간에 기대어 강을 보고 있었다⁠. 발치에 목검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⁠.

“⁠앉으시오⁠.⁠”

“⁠못 앉는 거 아시잖아요⁠.⁠”

“⁠알면서 권하는 거요⁠. 장로가 아니면 이런 재미도 있소⁠.⁠”

무량이 처음으로 웃었다⁠. 소리는 나지 않았다⁠. 수염 끝만 움직였다⁠.

*

“⁠열네 해 전 구월 아흐레요⁠.⁠” 내가 먼저 말했다⁠. “⁠무림문 밖 입문 대시험⁠. 화산 시연장 시험관 자리에 장로님이 앉아 계셨어요⁠.⁠”

무량이 강을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⁠.

“⁠열일곱 살 뱃사공 아들이 전진 베기를 했어요⁠. 다른 애들보다 칼이 빨랐어요⁠. 시연이 끝나자 장로님이 붓으로 제 이름 위에 줄을 그으셨어요⁠. 이유는 안 쓰셨고요⁠. 저는 그날부터 열네 해 동안 그 줄을 생각했어요⁠. 발이 틀렸나⁠, 칼끝이 낮았나⁠, 뱃사공 아들이라서인가⁠.⁠”

“⁠발은 맞았소⁠.⁠” 무량이 말했다⁠. “⁠칼끝도 맞았소⁠. 뱃사공 아들인 것도 상관없었소⁠.⁠”

“⁠그럼 왜요⁠?⁠”

“⁠마지막 걸음 직전에 숨이 멈췄소⁠.⁠”

방울이 울었다⁠. 강바람이 난간 사이로 들어와 무량의 수염을 흔들었다⁠.

“⁠열일곱 살 아이 몸에서 연병보 숨을 보았소⁠. 화산 장경각 사본 말고 그 숨을 본 것은 처음이었소⁠. 시험관 자리에서 나는 둘 중 하나를 해야 했소⁠. 붙이고 모른 척하든지⁠, 떨어뜨리고 이유를 묻든지⁠. 이유를 물으면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야 했소⁠. 어디서 배웠는지 들으면 관아에 넘겨야 했소⁠. 열일곱 살 아이를 볼기 서른 대에 넘기고⁠, 아이 집안을 혈교 집안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소⁠.⁠”

“⁠그래서 줄만 그으셨어요⁠?⁠”

“⁠떨어뜨리는 게 제일 조용했소⁠.⁠”

나는 난간을 짚었다⁠. 손바닥 밑 나무가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⁠.

“⁠조용해서⁠, 저는 열네 해를 혼자 익혔어요⁠.⁠”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⁠. “⁠이유를 한 줄만 써 주셨으면⁠, 숨이 멈췄다고 한 줄만⁠, 저는 아버지 노래를 다시 불렀을 거예요⁠. 노래를 다시 부르고⁠, 교재에도 넣었을 거예요⁠. 상목이도 안 쓰러졌을 거고요⁠.⁠”

무량이 강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⁠. 달빛이 무량의 얼굴 절반을 비췄다⁠.

“⁠위패를 돌렸소⁠. 서문을 태웠소⁠. 그대 이름 위에 줄을 그었소⁠.⁠” 무량이 하나씩 짚었다⁠. “⁠나는 감추는 걸로 세 번 막았소⁠. 세 번 다⁠, 막은 것은 나였고 대가는 다른 사람이 치렀소⁠. 대윤 할아버지가⁠, 아람이가⁠, 그대가⁠.⁠”

무량이 발치의 목검 하나를 집어 내게 내밀었다⁠.

“⁠네 번째는 감추지 않겠소⁠. 그대 세 수를 보겠소⁠. 내 열두 수로⁠.⁠”

*

꼭대기 방은 두 사람이 겨우 설 만했다⁠. 무량이 기초 자세를 잡았다⁠. 예순여덟 살 노인의 칼끝이 내 목 높이에서 멈췄다⁠. 나도 잡았다⁠. 볼기가 당겼다⁠. 코로 숨을 내보냈다⁠.

무량이 먼저 왔다⁠. 목검이 소리 없이 들어왔고⁠, 처마 방울 소리만 났다⁠. 화산 기초 첫 수⁠. 내가 모르는 각도에서 목검이 들어왔다⁠. 세 수밖에 모르는 사람은 네 번째 수를 막을 수 없다⁠. 나는 물러섰다⁠. 난간이 등에 닿았다⁠. 전진 베기로 받았다⁠. 하나에 두 걸음⁠, 둘에 한 걸음⁠. 꼭대기 방이 좁아서 두 걸음이 한 걸음 반이 되었다⁠. 쉬고오 자리에서 콧소리가 나가며 목검이 내려왔다⁠. 무량이 막았다⁠.

무량의 두 번째 수⁠, 세 번째 수⁠, 네 번째 수⁠. 화산 열두 수가 차례로 들어왔다⁠. 나는 세 수로만 받았다⁠. 기초 자세로 버티고⁠, 전진 베기로 밀고⁠, 횡베기로 흘렸다⁠. 일곱 번째 수에서 목검이 내 어깨를 쳤다⁠. 열 번째 수에서 옆구리를 쳤다⁠. 열두 번째 수에서 목검 끝이 내 목에 닿았다⁠.

졌다⁠. 세 수로는 열두 수를 이길 수 없었다⁠.

무량이 목검을 거두었다⁠. 내 가슴을 보았다⁠. 숨이 거칠게 오르내렸다⁠. 멈추지 않았다⁠. 열두 수를 받는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⁠.

“⁠세 수로는 화산 열두 수를 못 이기오⁠.⁠”

“⁠이기려고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⁠.⁠” 나는 목에 닿았던 자리를 문질렀다⁠. “⁠붙으려고 가르치는 거예요⁠. 붙고 나서 나머지 아홉 수는 문파에서 가르치시면 되죠⁠. 저는 문 앞까지⁠, 장로님은 문 안에서⁠.⁠”

무량이 목검을 난간에 기대 세웠다⁠. 오래 강을 보았다⁠.

“⁠조건이 있소⁠.⁠”

*

일타 강사는 흥정을 안다⁠. 수강료를 정하는 날마다 어머니회와 흥정을 했다⁠. 오늘 상대는 어머니회보다 무서웠다⁠.

“⁠한 달은 안 되오⁠.⁠” 무량이 말했다⁠. “⁠일 년이오⁠.⁠”

“⁠한 달이요⁠. 시험이 일 년에 한 번인데 일 년이면 한 번 떨어지면 끝이에요⁠.⁠”

“⁠열 달⁠.⁠”

“⁠두 달⁠.⁠”

“⁠여섯 달⁠.⁠”

“⁠석 달⁠.⁠” 나는 손가락 셋을 폈다⁠. “⁠제 수강료가 원래 석 달 치예요⁠. 은자 두 냥⁠. 석 달이면 수강료 한 번 받고 끝나요⁠. 어머니회도 좋아해요⁠.⁠”

무량이 수염을 쓸었다⁠. “⁠석 달⁠. 다음⁠, 칠판에 별표 그리는 것도 빼시오⁠. 별표 다섯 개짜리 칼은 없소⁠.⁠”

“⁠별표는 무료예요⁠. 수강생들은 별표 보고 깨어나요⁠. 별표 빼면 장로님이 뒤에서 조는 애들을 직접 깨우셔야 해요⁠.⁠”

무량이 잠깐 말이 없었다⁠. 뒷줄에서 조는 수험생의 어깨를 두드리는 자기 손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⁠.

“⁠별표는 두시오⁠. 다음⁠, 한 반에 몇 명이오⁠?⁠”

“⁠백 명⁠.⁠”

“⁠열 명⁠.⁠”

“⁠그럼 학관 거리에서 수강료가 열 배가 돼요⁠. 뱃사공 아들은 다시 못 와요⁠.⁠”

“⁠스무 명⁠.⁠”

“⁠서른 명⁠. 노래는 서른 명까지 서로 들려요⁠. 소금 창고에서 해 봤어요⁠. 마흔 명이 넘으면 뒷줄 박자가 늦어요⁠.⁠”

“⁠서른⁠.⁠” 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⁠. “⁠다음⁠, 곁에서 보는 사람⁠. 숨을 가르치는 학관에는 문파 사람이 하나씩 뒤에 서야 하오⁠.⁠”

“⁠품삯은요⁠? 학관 마흔 곳에 문파 사람 마흔 명을 앉히면 학관 거리 반이 문 닫아요⁠. 갈필수 조합장이 맹 앞에서 할 말이 그거예요⁠.⁠”

“⁠강호에는 장로 자리를 내놓은 노인이 학관보다 많소⁠.⁠” 무량이 말했다⁠. “⁠다들 할 일이 없소⁠. 품삯 대신 밥 한 끼면 되오⁠. 나부터 그렇게 하겠소⁠.⁠”

“⁠장로님이 저희 반 뒤에 서신다고요⁠?⁠”

“⁠그대가 맹 앞에서 말하지 않았소⁠. 장로 아닌 사람이 시간이 제일 많다고⁠.⁠”

나는 웃음을 참았다⁠. 볼기가 당겨서 참기 쉬웠다⁠.

“⁠교재 이름⁠.⁠” 무량이 말했다⁠. “⁠「⁠완성⁠」은 빼시오⁠. 석 달에 완성되는 칼은 없소⁠.⁠”

“⁠그건 안 돼요⁠. 「⁠완성⁠」 빼면 안 팔려요⁠.⁠”

“⁠팔려고 노래를 뺀 사람이 할 말이오⁠?⁠”

“⁠팔려고 노래를 넣는 사람이 할 말이에요⁠. 노래가 들어간 책이 잘 팔려야 다른 학관도 노래를 넣어요⁠. 안 팔리면 다들 다시 빼요⁠.⁠”

무량이 나를 오래 보았다⁠. 그러고는 수염 끝이 또 움직였다⁠.

“⁠석 달이면 두시오⁠. 「⁠석 달 완성⁠」⁠. 「⁠한 달⁠」은 버리시오⁠.⁠”

“⁠한 달 버리고 석 달 받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마지막⁠.⁠” 무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⁠. “⁠노래로 세 수를 익힌 사람은 혈교의 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오⁠. 원서를 받소⁠. 다만 시험관이 어디서 배웠는지 물으면 끝까지 다 대야 하오⁠. 화산 진대윤부터⁠, 봉씨 뱃노래까지⁠. 하나라도 감추면 그 자리에서 떨어뜨리오⁠.⁠”

“⁠이유를 대고요⁠?⁠”

무량이 나를 보았다⁠.

“⁠이유를 대고⁠.⁠”

*

열아흐레 새벽⁠, 강 건너에서 하늘이 먼저 밝았다⁠. 무량이 계단을 내려갔다⁠. 나는 꼭대기 방에 남아 난간을 짚고 섰다⁠. 앉을 수 없어서였고⁠, 내려가는 데 한 시간은 걸릴 것이어서였다⁠.

탑 아래 마당에 맹주와 문파 대표들이 나와 있었다⁠. 밤새 자지 않은 얼굴들이었다⁠. 학관 조합 자리에 갈필수가 있었고⁠, 구경꾼 자리에 대석과 일곱⁠, 아람⁠, 상목 어머니⁠, 내 어머니가 있었다⁠. 어머니는 노를 지팡이 삼아 서 있었다⁠.

무량이 맹 앞에 섰다⁠. 꼭대기까지는 목소리가 다 올라오지 않았다⁠. 바람이 실어 오는 말만 들렸다⁠. 석 달⁠. 서른 명⁠. 곁에서⁠. 원서를 받는다⁠. 끝까지 대야 한다⁠. 위패는 내가 돌리겠다⁠.

구경꾼 자리에서 아람이 고개를 들었다⁠. 탑 꼭대기까지 올라오지 않는 말이었는데⁠, 아람이 무엇을 들었는지는 꼭대기에서도 보였다⁠. 아람은 할아버지 등을 보다가 소매를 풀었다⁠. 두 번 접어 올렸던 소매가 손목까지 내려왔다⁠. 상목 어머니가 아람의 어깨를 두드렸고⁠, 내 어머니가 노 끝으로 아람의 신발 끈을 가리켰다⁠. 터진 끈이었다⁠. 아람이 쪼그려 앉아 끈을 고쳐 맸다⁠. 할아버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⁠.

맹주가 일어나 무량에게 고개를 숙였다⁠. 맹주의 빈손이 처음으로 움직였다⁠. 따르겠다는 손짓이었다⁠.

학관 조합 자리에서 갈필수가 벌떡 일어났다⁠. 놋관을 손으로 누르고 마당을 가로질러 성안 길로 뛰었다⁠. 새벽길을 달리는 놋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⁠. 학관 거리 전단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각이었다⁠. 갈필수는 오늘도 남보다 먼저 팔 것이었다⁠. 이번에는 내가 낸 것이 아니었다⁠. 맹이 낸 것이었다⁠.

탑 아래에서 대석이 두 팔을 크게 흔들었다⁠. 큰일이 났다는 손짓인지 다 끝났다는 손짓인지 꼭대기에서는 알 수 없었다⁠. 대석은 두 경우에 같은 손짓을 했다⁠. 나는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 펴서 흔들어 주었다⁠. 아버지가 노 젓다 쉬는 사이에 펴던 부채였다⁠.

나는 난간 위에서 콧노래를 불렀다⁠. 강바람이 소리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⁠.

14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  • 하리온2026.11.06· 14화

    열일곱 살에 떨어뜨린 이유를 탑 꼭대기에서 듣는 장면 정말 좋았어요. 그런데 그 뒤에 바로 흥정을 시작한다니 천우답네요. 대석이 두 경우에 같은 손짓을 한다는 줄에서 웃다가 울었습니다.

    • 여무겸작가2026.11.06

      무량이 본 건 열일곱 살 천우의 숨이었어요. 탑에서 내려온 두 사람이 학관 거리에 무엇을 내놓는지는 마지막 화에서 이어집니다.

열네 해 전 불합격의 이유 · 무공 일타 강사 · 나오늘 책방