7화(5,361자)

감정 불가를 누른 손

중고 명품 감정사 · 채이안

5월 3일 월요일 오전 열 시⁠, 표소람은 13층 대표실 소파 끝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아 있었다⁠. 홈쇼핑에서 생방송 직전에 앉던 자세였다⁠. 언제든 일어나 카메라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게 등을 등받이에 대지 않았다⁠.

엄도식은 오늘도 서서 일하는 책상 앞에 있었다⁠. 압수수색 뒤로 대표실 서랍 두 개가 비어 있었고⁠, 책상 위 화면에는 실사 일정표 대신 변호사 사무실 이름이 떠 있었다⁠. 도식은 서류 두 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⁠. 소람 쪽으로 돌려서⁠.

“⁠하나는 정규직 전환 계약서예요⁠. 연봉은 지금보다 이십 퍼센트 올렸어요⁠. 스톡옵션 이천 주⁠.⁠”

소람은 첫 장의 숫자를 보았다⁠. 이천⁠. 동그라미 세 개가 또렷했다⁠.

“⁠하나는 진술서고요⁠. 경찰이 다음 주에 소람 씨를 부를 거예요⁠. 3월 31일 3차 판정 때문에⁠.⁠”

두 번째 장에는 문장이 이미 쳐져 있었다⁠. 「⁠본인은 3월 31일 교차 감정에서 판단 근거가 모자라 본인의 판단으로 감정 불가를 선택하였음⁠. 대표이사로부터 판정에 관한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음⁠. 지수련 선임은 출처 가게가 모친의 가게임을 3월 15일부터 알고도 회사에 알리지 않았음⁠.⁠」

소람은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⁠. 두 번째 읽을 때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⁠.

“⁠이건 사실이잖아요⁠.⁠”

도식이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⁠.

“⁠수련 씨는 보름 동안 말 안 했어요⁠. 그건 사실이에요⁠. 소람 씨한테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⁠.⁠”

“⁠위에 두 줄은요⁠?⁠”

“⁠위에 두 줄도 소람 씨가 그렇게 기억하면 사실이죠⁠.⁠”

도식이 책상에서 떨어져 소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⁠. 처음으로 눈높이가 같아졌다⁠.

“⁠소람 씨⁠, 이 회사는 지금 무너지는 중이에요⁠. 상장 예비심사 청구는 미뤄졌고⁠, 투자사는 계약서를 다시 읽고 있어요⁠. 제가 가방을 잘못 본 게 아니에요⁠. 저는 가방을 볼 줄 몰라요⁠. 계약서 하나를 잘못 본 거예요⁠. 그 한 장 때문에 백이십 명이 일자리를 잃게 생겼어요⁠. 소람 씨도 백이십 명 안에 있고요⁠.⁠”

도식의 말은 하나하나 맞았다⁠. 맞는 말이 소람에게는 제일 무서웠다⁠.

“⁠수련 씨는 자기 엄마를 지키는 중이에요⁠. 나쁘다는 게 아니라⁠. 저라도 그래요⁠. 소람 씨는 누굴 지켜요⁠?⁠”

소람은 대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냈다⁠. 3월 31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의 문자를 열어 도식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⁠. 보낸 사람은 도식이었다⁠. 「⁠3차 감정 불가로⁠. 실사 끝나고 얘기해요⁠.⁠」

도식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⁠. 다음 순간 다시 풀렸다⁠.

“⁠그 문자는 지우셨어야죠⁠.⁠”

“⁠대표님⁠, 홈쇼핑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게 뭔지 아세요⁠?⁠”

소람이 휴대전화를 무릎 위에 엎었다⁠.

“⁠생방송은 못 지운다는 거예요⁠. 한 번 나간 말은 녹화돼요⁠. 감정대 카메라도요⁠. 위에서 찍는 카메라요⁠. 제 손가락이 「⁠가품⁠」 버튼 위에서 멈춰 있다가 오른쪽으로 간 게 다 찍혀 있어요⁠. 저 그 영상 열한 번 봤어요⁠.⁠”

“⁠그래서요⁠?⁠”

“⁠제 속눈썹이 위에서 찍으니까 진짜 잘 나왔더라고요⁠. 그래서 더 못 지우겠어요⁠.⁠”

도식이 웃지 않았다⁠. 소람도 웃지 않았다⁠. 소람은 정규직 계약서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⁠. 진술서는 건드리지 않았다⁠. 접은 계약서를 탁자 위 도식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⁠.

“⁠오후에 경찰서 갈게요⁠. 영상이랑 문자 들고요⁠. 제 발로요⁠.⁠”

*

오후 두 시⁠, 소람의 사원증이 4층 유리문에서 빨간불을 냈다⁠. 삐⁠. 인사팀 메일이 먼저 와 있었다⁠. 「⁠계약 해지 통보 — 업무상 기밀 외부 반출 우려에 따라 오늘부로 계약을 종료합니다⁠. 남은 급여는 정산하여 지급합니다⁠.⁠」 스톡옵션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다⁠.

수련은 1층 로비에서 소람의 상자를 받아 들었다⁠. 감정실 동료가 내려 준 상자였다⁠. 머그잔⁠, 손거울⁠, 속눈썹 접착제⁠, 생강차 티백 한 줌⁠, 그리고 맨 위에 수련의 확대경이 있었다⁠. 소람이 서랍 열쇠를 동료에게 맡기면서 꼭 같이 내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⁠.

“⁠선배 거 챙겼어요⁠. 렌즈 입김 안 불고 닦았어요⁠.⁠”

소람이 로비 소파에 털썩 앉았다⁠. 목소리가 밝았다⁠. 너무 밝아서 수련이 소람 옆에 앉을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⁠.

“⁠왜 그랬어⁠.⁠”

“⁠선배가 그랬잖아요⁠. 가방은 틀렸다고⁠.⁠”

“⁠너 계약 5월에 끝난다며⁠.⁠”

“⁠오늘 끝났어요⁠. 이십팔 일 당겨서요⁠.⁠”

소람이 상자에서 생강차 티백 하나를 꺼내 수련의 손에 쥐여 주었다⁠.

“⁠그리고 선배⁠, 저 3월 31일에 ‘⁠아무도 틀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⁠’고 했잖아요⁠. 그 말이 틀렸어요⁠. 감정 불가를 누르면 아무도 안 틀리는 게 아니라⁠, 가방이 다시 나가요⁠. 미용실 원장님 같은 분한테요⁠. 저 그날 밤에 그거 알았어요⁠.⁠”

수련은 티백을 쥐고 있었다⁠. 종이 포장이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⁠.

“⁠경찰서 같이 가 줄까⁠?⁠”

“⁠아니요⁠. 혼자 갈래요⁠. 쇼호스트는 원래 혼자 서요⁠.⁠”

소람이 상자를 안고 일어났다⁠. 회전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⁠.

“⁠자⁠, 고객님들⁠. 이 구성⁠, 진짜 마지막입니다⁠.⁠”

회전문이 돌았다⁠. 소람의 상자 위에서 머그잔이 덜그럭거렸다⁠.

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도식이 변호사 둘과 함께 로비로 나왔다⁠. 도식은 회전문 밖으로 멀어지는 소람의 등을 보았고⁠, 소파에 앉은 수련을 보았다⁠.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⁠. 수련 앞을 지나며 한마디만 했다⁠.

“⁠두 사람이 회사 하나를 이기면⁠, 백이십 명이 집니다⁠. 기억해 두세요⁠.⁠”

수련은 대답하지 않았다⁠. 도식이 나간 회전문이 한참 혼자 돌았다⁠.

*

네 시⁠, 모란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모르는 번호가 울렸다⁠. 방우경이었다⁠.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⁠.

“⁠지 선임님⁠, 바른감정 방우경입니다⁠. 경찰서에서 막 나왔습니다⁠.⁠”

“⁠괜찮으세요⁠?⁠”

“⁠괜찮지 않습니다⁠. 저는 카드를 서랍에 넣고 퇴근했습니다⁠. 매형 회사 직원이 저녁마다 감정실에 와서⁠, 다음 날 붙일 거라며 카드를 가져갔다고 합니다⁠. 저는 몰랐습니다⁠. 아니⁠, 몰랐다고 말하면 안 되겠죠⁠. 묻지 않았습니다⁠.⁠”

지하철이 한강을 건넜다⁠. 창밖이 잠깐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⁠.

“⁠제가 진품이라고 찍은 루나가 몇 개인지 세 봤습니다⁠. 서른한 개입니다⁠. 저는 제 눈이 맞다고 믿었어요⁠. 지금도 땀 수⁠, 각인⁠, 무게는 다 맞습니다⁠. 그래서 더 모르겠습니다⁠. 맞는 가방이 왜 가짜인지⁠.⁠”

“⁠소장님이 숫자로 만들어 오라고 하셨잖아요⁠.⁠”

“⁠예⁠.⁠”

“⁠같이 만들어 주세요⁠. 칩 번호가 어디서 왔는지요⁠. 본사가 말을 안 해요⁠.⁠”

전화기 너머에서 우경이 한참 숨만 쉬었다⁠.

“⁠수선실 시절 동료가 아직 본사에 있습니다⁠. 물어보겠습니다⁠. 이번에는 묻겠습니다⁠.⁠”

*

다섯 시⁠, 수련은 모란 상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⁠. 압수수색 뒤로 엿새 동안 엄마와 통화는 두 번이었고⁠, 둘 다 일 분이 안 됐다⁠. 2층에 거의 다 올랐을 때 가게 문틈으로 남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⁠. 느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⁠.

“⁠사장님⁠,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라는 겁니다⁠.⁠”

도진구였다⁠. 수련은 계단참에 멈췄다⁠.

“⁠경찰이 물으면 이렇게만 말씀하시면 됩니다⁠. 딸이 진품이라고 했다⁠. 압구정 리셀원 선임 감정사가 엄마 가게 물건을 보고 진품이라고 했으니⁠, 엄마는 믿고 팔았다⁠. 그러면 사장님은 몰랐던 사람이 되는 겁니다⁠. 고의가 없으면 상표법으로 처벌을 못 해요⁠.⁠”

“⁠우리 딸이 그런 말을 안 했는디⁠.⁠”

“⁠따님은 지금 업무 정지 중이에요⁠. 회사도 따님 편이 아니고요⁠. 따님한테 큰 문제는 안 됩니다⁠. 감정사가 실수했다⁠, 그 정도예요⁠. 이미 2월에 한 번 실수한 기록도 있고요⁠.⁠”

엄마가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⁠. 반찬통이었다⁠.

“⁠그라믄 진구 사장은 뭘 얻는디⁠.⁠”

“⁠제 물건이 진짜였을 가능성이 생기죠⁠. 감정사가 진품이라고 했으니까요⁠. 그 대신 사장님 빚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⁠. 칠천⁠, 전부요⁠. 차용증 지금 여기서 찢어 드리죠⁠.⁠”

종이를 펴는 소리가 났다⁠. 수련은 문손잡이를 잡았다⁠. 문을 여는 대신 손잡이를 쥔 채로 기다렸다⁠. 엄마가 무엇을 고를지 듣고 싶었다⁠. 듣기가 무서웠다⁠.

엄마의 목소리가 났다⁠. 크지 않았다⁠.

“⁠진구 사장⁠. 우리 딸이 열여섯 살 때 이 계산대 앞에서 손님한테 가짜를 진짜라고 한 적이 있어⁠.⁠”

진구가 대꾸하지 않았다⁠.

“⁠그날 밤에 지가 울도 못 하고 반찬통 뚜껑만 만지더라⁠. 나 닮아서⁠. 그 뒤로 이탈리아까지 가서 가방 공부를 했어⁠. 그 애가 지금 가방한테는 거짓말을 안 혀⁠. 엄마한테는 해도⁠. 그런 애를 나가 경찰 앞에서 거짓말쟁이로 만들라고⁠?⁠”

“⁠사장님⁠, 칠천입니다⁠.⁠”

“⁠칠억을 줘도⁠.⁠”

“⁠빚은 그대로 남습니다⁠. 이자도요⁠. 보증금 가압류는 이번 주에 신청하겠습니다⁠.⁠”

“⁠신청혀⁠. 법대로 하라며⁠. 나도 법대로 할라니께⁠.⁠”

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⁠. 수련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계단참 구석으로 물러났다⁠. 문이 열리고 진구가 나왔다⁠. 코트 깃을 세우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수련을 보았다⁠. 웃음은 바뀌지 않았다⁠.

“⁠따님⁠, 계셨구나⁠. 어머님이 고집이 세시네요⁠.⁠”

“⁠엄마 닮았어요⁠.⁠”

진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내려갔다⁠. 구두 소리가 순댓국집 김 속으로 사라졌다⁠.

*

가게 안은 반쯤 비어 있었다⁠. 압수된 자리마다 진열장 유리에 먼지 없는 네모가 남아 있었다⁠. 엄마는 계산대 의자에 앉아 찢기지 않은 차용증이 놓였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다⁠.

“⁠다 들었제⁠.⁠”

“⁠응⁠.⁠”

“⁠니 편 들었다고 착각하지 마라⁠. 나는 내 편이여⁠. 가짜를 진짜라고 하는 가게는 이십 년 장사가 아니여⁠.⁠”

엄마가 깻잎 통을 밀어 주었다⁠. 수련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깻잎 한 장을 집었다⁠. 오늘은 덜 짰다⁠. 엄마가 간을 바꾼 것인지 제 입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었다⁠.

“⁠엄마⁠, 칠천은 어떻게 해⁠.⁠”

“⁠몰라⁠. 그건 나중에 생각혀⁠.⁠”

엄마가 처음으로 ‘⁠나중에⁠’라는 말을 했다⁠. 수련이 엄마에게 서른네 해 동안 해 온 말이었다⁠.

*

밤 아홉 시 반⁠, 집에 돌아온 수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⁠. 탁경춘 경위였다⁠.

“⁠감정사님⁠, 늦게 미안해유⁠. 두 가지만 말씀드릴라고유⁠.⁠”

“⁠네⁠.⁠”

“⁠표소람 씨가 오늘 영상이랑 문자 갖고 왔슈⁠. 아주 똑 부러지데유⁠. 진술 끝나고 저한테 ‘⁠오늘 방송 어땠어요⁠?⁠’ 하던디⁠,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겄슈⁠.⁠”

수련은 웃음이 나오려다 멈췄다⁠. 경춘의 목소리가 한 칸 낮아졌다⁠.

“⁠다른 하나는⁠, 어머님을 상표법 위반 피의자로 입건했슈⁠. 압수 물건만으로는 몰랐다고 볼 여지가 있는디⁠, 3월 31일 미용실 원장님한테 판 건 달라서유⁠. 3월 16일에 따님이 가짜라고 말해 줬다고 어머님이 직접 그러셨거든유⁠. 알고 판 게 되유⁠.⁠”

수련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⁠. 3월 16일 밤⁠, 계산대 위에 나란히 놓인 루나 둘⁠. 쌍둥이 아니여⁠, 하던 엄마의 얼굴⁠.

“⁠그라고 감정사님도 오셔야 해유⁠. 참고인으로⁠. 5월 12일 수요일 오후 두 시⁠. 어머님이 언제부터 의심하셨는지⁠, 그걸 여쭤볼 거유⁠.⁠”

전화가 끊겼다⁠. 수련은 식탁 위에 확대경을 내려놓았다⁠. 소람이 입김 없이 닦았다는 렌즈에 거실 형광등이 동그랗게 비쳤다⁠. 수련은 렌즈 속의 작은 불빛을 오래 보다가⁠, 3월 15일 오후 세 시 사십 분의 유리문을 떠올렸다⁠. 쇼핑백 손잡이를 쥔 엄마의 하얀 손가락 마디⁠.

7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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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소금빵2026.11.06· 7화

    소람이 정규직 계약서 앞에서 펜 대신 휴대전화 꺼낼 때 박수 쳤어요. 빚 없애 준다는 말을 엄마가 거절하는 장면은 마음이 아팠고요. 엄마가 피의자가 되고 수련이 참고인으로 불려 가다니 마지막 줄에서 멈췄습니다.

    • 채이안작가2026.11.06

      소람이 계약서 대신 고른 것을 꼭 봐 주셨으면 했어요. 경찰서 복도에서 누구와 마주치는지는 다음 화에 나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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