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화(5,376자)

감정사 번호 0417

중고 명품 감정사 · 채이안

3월 22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⁠, 감정실 유리문으로 은색 가방 상자 셋이 굴러 들어왔다⁠. 바퀴 소리가 바닥 타일 줄눈마다 덜컥거렸다⁠. 뒤에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셋이 따라왔고⁠, 맨 앞의 남자가 수련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⁠.

“⁠바른감정 방우경입니다⁠. 오늘부터 5번⁠, 6번 감정대를 쓰겠습니다⁠.⁠”

방우경은 마흔 초반으로 보였다⁠. 반백이 섞인 짧은 머리에 손이 컸고⁠, 손톱이 아주 짧게 깎여 있었다⁠. 상자를 열자 확대경⁠, 자외선 램프⁠, 디지털 저울이 칸칸이 누워 있었다⁠. 저울을 꺼내며 우경이 덧붙였다⁠.

“⁠저희 저울은 0⁠.1그램까지 봅니다⁠. 회사 저울은 1그램 단위더라고요⁠.⁠”

소람이 수련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입술만 움직였다⁠.

“⁠선배⁠, 저 사람 저울 자랑해요⁠.⁠”

“⁠들려⁠.⁠”

우경이 웃었다⁠. 웃음에 거리낌이 없었다⁠.

“⁠들으라고 한 말입니다⁠. 저울 좋은 감정소가 흔하지 않아서요⁠.⁠”

열 시가 되자 도원상사 상자가 5번 감정대 앞에 쌓였다⁠. 우경은 장갑을 끼고 루나 하나를 꺼내 들었다⁠. 냄새를 맡고⁠, 확대경으로 옆선을 따라가고⁠, 각인을 보고⁠, 칩을 읽고⁠, 저울에 올렸다⁠. 손이 빨랐고 순서가 정확했다⁠. 수련이 하는 순서와 같았다⁠. 소람이 볼펜을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⁠.

“⁠잘하네⁠.⁠”

“⁠잘해⁠.⁠”

수련이 인정하자 소람이 놀라서 볼펜을 떨어뜨렸다⁠. 우경은 칠 분 만에 루나 하나를 끝냈고⁠, 감정표에 「⁠진품⁠」 도장을 찍었다⁠. 대표 비서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우경의 서랍에 넣었다⁠. 홀로그램이 반짝이는 「⁠리셀원 정품 인증⁠」 카드 묶음이었다⁠. 카드마다 감정사 번호 칸에 「⁠BR-01⁠」이 미리 인쇄되어 있었다⁠.

수련은 5번 감정대로 걸어가 우경이 방금 진품 도장을 찍은 루나 앞으로 갔다⁠.

“⁠냄새 맡아 보셨어요⁠? 안감 바닥 모서리요⁠.⁠”

“⁠맡았습니다⁠.⁠”

“⁠풀 냄새가 올라와요⁠.⁠”

우경이 가방 입구를 벌려 수련에게 내밀었다⁠. 말없이 맡아 보라는 손짓이었다⁠. 수련이 코를 대자 매니큐어 냄새가 아주 옅게 올라왔다⁠. 우경은 가방을 도로 받아 제 코에 대고⁠, 한참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⁠.

“⁠보관 상자 냄새입니다⁠. 도원상사 창고가 새 건물이라 벽지 풀 냄새가 가죽에 뱁니다⁠. 저도 처음엔 놀랐어요⁠. 그래서 창고에 직접 가서 맡아 봤고요⁠.⁠”

“⁠가죽에 배면 겉에서 냄새가 올라와요⁠. 이건 안감 접은 자리 안쪽이에요⁠.⁠”

“⁠지 선임님 코를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⁠. 다만 코는 감정표에 숫자로 안 남습니다⁠. 땀 수⁠, 각인 깊이⁠, 칩⁠, 무게⁠. 저는 남는 것으로 판정합니다⁠.⁠”

우경이 장갑 낀 손으로 루나의 손잡이 밑동을 짚었다⁠. 손잡이와 몸통이 만나는 자리의 땀을 엄지로 쓸었다⁠.

“⁠저 아르벨 수선실 출신입니다⁠. 서울 수선실에서 일곱 해 동안 루나 손잡이를 이백 개 넘게 갈았어요⁠. 손잡이 밑동은 공방마다 마무리 버릇이 다른데⁠, 이건 제3공방 버릇이 맞습니다⁠.⁠”

말에 자랑이 없었다⁠. 손이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⁠. 수련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제 감정대로 돌아왔다⁠. 소람이 의자 바퀴를 굴려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⁠.

“⁠선배⁠, 저 사람 진짜 잘해요⁠. 홈쇼핑으로 치면 게스트 아니고 본방 쇼호스트예요⁠.⁠”

“⁠알아⁠.⁠”

“⁠그럼 선배가 틀린 거예요⁠?⁠”

“⁠둘 다 맞으면 가방이 틀린 거야⁠.⁠”

*

열한 시⁠, 13층 대표실 창으로 한강이 보였다⁠. 엄도식은 서서 일하는 책상 앞에 있었고⁠, 화면에는 실사 일정표가 떠 있었다⁠. 수련은 휴대전화 사진 여덟 장을 책상 위에 나란히 띄웠다⁠. 모란 가게의 루나 여덟 개와 칩 화면이었다⁠.

“⁠같은 번호가 세 장이에요⁠. 도원상사 물건이에요⁠. 바른감정이 지금 아래층에서 같은 물건에 진품 카드를 붙이고 있어요⁠.⁠”

화면 귀퉁이에 일정표의 마지막 줄이 보였다⁠. 「⁠5월 둘째 주 — 상장 예비심사 청구⁠」⁠. 도식은 일정표를 끄지 않았다⁠. 일부러 보이게 둔 것인지 끄는 것을 잊은 것인지 수련은 알 수 없었다⁠. 도식이 사진을 넘겨 보았다⁠. 서두르지 않았다⁠.

“⁠칩 번호 겹치는 사례⁠, 해외 리셀 커뮤니티에 몇 건 있어요⁠. 본사가 칩을 처음 넣은 해라 오류가 있었대요⁠. 아르벨이 공식으로 부인했지만⁠.⁠”

“⁠냄새도 같아요⁠. 안감에 풀을 썼어요⁠.⁠”

“⁠냄새는 수치가 안 나와요⁠, 수련 씨⁠.⁠”

도식이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키웠다⁠. 진열장 유리에 거꾸로 비친 살구색 간판이 사진 귀퉁이에 들어 있었다⁠. 도식은 간판을 오래 보지 않았다⁠.

“⁠미순빈티지⁠. 곽미순 대표⁠.⁠”

수련의 등이 굳었다⁠.

“⁠어머님이시죠⁠? 인사팀 가족 사항에 있더라고요⁠. 지난주에 출처 서류 보다가 알았어요⁠.⁠”

“⁠알고 계셨어요⁠?⁠”

“⁠알았으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⁠. 수련 씨가 이걸 문제 삼으면 처음 다치는 사람이 누군지⁠.⁠”

도식이 화면을 끄고 수련에게 몸을 돌렸다⁠. 목소리는 차분했고⁠, 협박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⁠.

“⁠도원상사가 가품이면⁠, 출처 가게는 가품을 판 가게예요⁠. 스물 몇 개 팔았다면서요⁠. 상표법 7년⁠, 수련 씨가 매일 보는 액자에 있잖아요⁠. 저는 어머님을 거기 세우고 싶지 않아요⁠. 수련 씨가 도원 건에서 손을 떼면⁠, 출처 서류에서 어머님 가게 이름을 빼 달라고 도원에 얘기할게요⁠.⁠”

“⁠가품은 그대로 팔리고요⁠?⁠”

“⁠교차 감정으로 걸러요⁠. 바른감정이 1차⁠, 우리가 2차⁠. 그게 시스템이에요⁠.⁠”

“⁠2차는 누가 봐요⁠?⁠”

“⁠이번 달은 소람 씨요⁠. 수련 씨는 일반 접수를 맡아 주세요⁠. 거기 밀린 게 삼백 개가 넘어요⁠.⁠”

일반 접수⁠. 수련은 3층 보관함의 회색 철문들을 떠올렸다⁠. 고객들이 집에서 가져와 순서를 기다리는 가방들이 철문마다 들어 있었다⁠.

“⁠숫자로 얘기하죠⁠.⁠”

도식이 말했다⁠.

“⁠직원 백이십 명이 스톡옵션을 갖고 있어요⁠. 상장이 되면 소람 씨 같은 계약직도 정규직이 되고요⁠. 의심 1퍼센트 때문에 나머지 99를 다 세울 수는 없어요⁠.⁠”

수련은 대답하지 않고 사진을 휴대전화로 거두어들였다⁠. 대표실 문을 닫을 때 도식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한 번 더 따라왔다⁠.

“⁠수련 씨⁠, 저 악당 아니에요⁠. 회사를 살리는 중이에요⁠.⁠”

*

오후 두 시⁠, 상담팀 과장이 감정실로 내려왔다⁠. 손에 비닐로 싼 갈색 루나 하나를 들고 있었다⁠.

“⁠지 선임님⁠, 가품 신고 들어왔어요⁠. 2월에 저희가 판 루나예요⁠.⁠”

구매자는 청담동 아르벨 매장에 손잡이 수선을 맡기러 갔다가 돌려받았다고 했다⁠. 매장 직원이 칩을 읽고 본사 조회를 했고⁠, 조회 결과지가 비닐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⁠. 「⁠해당 번호는 다른 제품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⁠. 본 제품은 아르벨 정품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⁠.⁠」 구매자는 구매가의 두 배⁠, 이천사백만 원을 요구했다⁠.

“⁠고객님이 전화로 한 시간을 우셨어요⁠.⁠”

과장이 비닐을 감정대 위에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⁠.

“⁠결혼기념일 선물로 남편 몰래 산 거래요⁠. 남편한테는 칠백에 샀다고 했대요⁠. 그러니까 지금 가품이라서 우시는 건지⁠, 남편이 원래 값을 알게 될까 봐 우시는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⁠.⁠”

“⁠둘 다겠죠⁠.⁠”

“⁠둘 다면 두 배로 우셔야 하는데⁠, 한 시간밖에 안 우셨어요⁠.⁠”

소람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⁠. 과장은 웃지 않았다⁠. 매장 직원이 구매자에게 해 준 말까지 그대로 옮겼다⁠. 요즘 아르벨 본사가 중고 플랫폼에서 산 가방은 들어오는 대로 칩을 조회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이었다⁠. 파리에서 서울 매장까지 내려온 지시였다⁠.

과장이 가방 손잡이에 매달린 정품 인증 카드를 뒤집었다⁠. 홀로그램 아래 감정사 번호 칸에 네 자리 숫자가 찍혀 있었다⁠. 「⁠0417⁠」⁠.

소람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⁠. 감정실의 누구도 번호의 주인을 묻지 않았다⁠. 다들 알았다⁠.

수련은 장갑을 끼고 비닐을 벗겼다⁠. 가방 입구에 코를 대자 매니큐어 냄새가 올라왔다⁠. 모란에서⁠, 암실에서 맡은 냄새와 같았다⁠. 칩을 읽었다⁠. 「⁠LN30-2503-71946⁠」⁠. 모란 진열장의 쌍둥이 셋과 같은 번호였다⁠.

감정 기록을 열었다⁠. 2월 8일 월요일 오후 네 시 십이 분⁠, 감정사 지수련⁠, 판정 진품⁠. 기록 아래에 감정대 카메라가 찍은 영상이 붙어 있었다⁠. 재생하자 화면 속의 수련이 확대경으로 옆선을 따라가고⁠, 각인을 보고⁠, 칩을 읽고⁠, 저울에 올렸다⁠. 냄새를 맡는 자리에서 화면 속 수련은 고개를 숙이다 말고 재채기를 했다⁠. 두 번 했다⁠. 휴지로 코를 풀었다⁠.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⁠.

“⁠아⁠.⁠”

소람이 화면을 보다가 작게 소리를 냈다⁠.

“⁠선배 2월에 코감기 걸렸었잖아요⁠. 저한테 생강차 타 달라고 하고⁠.⁠”

수련은 영상을 멈췄다⁠. 정지 화면 속에서 장갑 낀 손이 휴지를 쥐고 있었다⁠. 이백 개를 보던 날이었다⁠. 코가 막힌 날에도 수련은 코 대신 눈으로 다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⁠. 2월 8일에 눈으로 본 것은 다 맞았다⁠. 맞지 않은 것은 코로만 알 수 있었다⁠.

“⁠2월에 루나가 몇 개 통과했어⁠?⁠”

소람이 기록을 뒤졌다⁠.

“⁠도원상사 루나⁠, 2월에만 열네 개요⁠. 선배 번호가 셋⁠, 나머지는 다른 선임님들이요⁠.⁠”

열네 개⁠. 두 배씩이면 삼억이 넘었다⁠. 수련은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⁠.

“⁠내 번호 셋⁠, 다 어디로 갔어⁠?⁠”

“⁠하나는 이 고객님⁠, 하나는 부산⁠, 하나는 제주요⁠. 제주 고객님은 후기도 쓰셨네요⁠. 「⁠감정사님 덕분에 안심하고 샀어요⁠. 별 다섯 개⁠.⁠」⁠”

소람이 읽다가 목소리를 줄였다⁠. 수련은 별 다섯 개가 박힌 화면을 한동안 보았다⁠. 안심하고 산 사람의 가방 안감에서도 매니큐어 냄새가 날 것이었다⁠. 제주까지 코를 들고 갈 수는 없었다⁠.

*

다섯 시⁠, 도식이 감정실로 직접 내려왔다⁠. 수련의 감정대 위에 신고된 루나가 놓여 있었다⁠. 도식은 가방을 내려다보고⁠, 정품 카드를 손가락으로 뒤집어 번호를 보았다⁠.

“⁠들었어요⁠.⁠”

“⁠제가 통과시켰어요⁠.⁠”

“⁠알아요⁠. 그래서 내려왔어요⁠.⁠”

도식이 감정대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⁠. 지난주와 같은 자리였다⁠.

“⁠이 건은 조용히 보상할게요⁠. 이천사백⁠, 회사 돈으로⁠. 실사 자료에는 안 올라가요⁠. 수련 씨 이름도 안 나가고요⁠.⁠”

“⁠나머지 열세 개는요⁠?⁠”

“⁠신고가 들어오면 그때마다 보상하죠⁠. 들어오지 않으면⁠, 구매자는 진품을 산 거예요⁠. 본인이 그렇게 믿으면⁠.⁠”

소람이 숨을 들이켰다⁠. 도식은 소람을 보지 않았다⁠.

“⁠수련 씨가 도원 건을 계속 들고 가면 이 카드도 같이 올라가요⁠. 0417이 가품을 통과시킨 감정사의 번호로 실사 보고서에 들어가는 거예요⁠. 어머님 가게는 출처로⁠, 수련 씨는 감정사로⁠. 한 집에서 두 사람⁠.⁠”

수련은 장갑 낀 손을 감정대 위에 펴서 올렸다⁠. 손끝이 조금 떨렸다⁠. 떨리는 손을 도식이 보았고⁠, 보았다는 것을 수련도 알았다⁠.

“⁠생각할 시간 주세요⁠.⁠”

“⁠실사가 31일이에요⁠. 그 전까지만⁠.⁠”

도식이 유리문을 열고 나가다 멈췄다⁠.

“⁠그리고 수련 씨⁠, 코감기 걸리면 쉬어요⁠. 제가 연차 쓰라고 했잖아요⁠, 2월에⁠.⁠”

유리문이 닫혔다⁠. 소람이 생강차 티백 하나를 수련의 감정대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⁠. 수련은 티백을 보다가⁠,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뒤집었다⁠. 엄마였다⁠.

「⁠진구 사장이 가방 열 개 더 갖고 왔다⁠. 안 받는다 했는디 놓고 갔어⁠. 수련아 이거 어쩌냐⁠」

사진이 한 장 따라왔다⁠. 계산대 위⁠, 깻잎 통 옆에 갈색 루나 열 개가 키를 맞춰 줄지어 있었다⁠.

3화는 어땠나요?

댓글 2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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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연필깎이2026.11.06· 3화

    가품 카드에 찍힌 번호가 0417, 수련이 번호라니 소름 돋았어요. 대표가 엄마 가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데서 숨이 턱 막혔고요. 조용히 보상하자는 거래를 수련이 어떻게 받을지 궁금합니다.

    • 채이안작가2026.11.06

      감정사 번호는 감정사 이름이나 다름없어요. 수련이 대표실 문을 어떻게 나서는지 다음 화에서 보여 드릴게요.

감정사 번호 0417 · 중고 명품 감정사 · 나오늘 책방